미발표 원본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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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안내
이 글은 프랑스어로 쓰인 미발표 원고의 편집 품질 완역본입니다. 프랑스어 원작은 아직 출판되지 않았으며 출판사를 찾고 있습니다. 이 열람판은 전문 독자가 한국어로 작품의 목소리와 리듬, 서사의 흐름을 평가할 수 있도록 마련했습니다. 향후 출판사의 제작 방침에 따른 조정이 더해질 수 있으나, 이 판본은 한국어로 완결된 하나의 문학 작품이 되도록 다듬었습니다.
제1장
주철 추
14번 작업대
주철 추가 테이블에서 떠올랐을 때, 리즈 바렌은 우선 센서 결함이라고 생각했다.
발견도, 기적도, 무언가 다른 것의 시작도 떠올리지 않았다. 덜 조인 전선, 헛소리를 뱉는 센서, APAVE 검사와 이상 보고서감이 된 시험대를 생각했다. 비 내리는 월요일의 14번 작업동에서 심각한 일은 언제나 치사한 고장으로 시작됐다.
추는 87.3킬로그램이었다. 사다리꼴 주철 덩어리에 옆 손잡이를 용접하고 벗겨진 노란 페인트를 칠한 것으로, 로드셀을 교정할 때 쓰였다. 생김새도 고약했고 손가락을 부러뜨리기로 악명 높았다. 두 주 전에는 임시직 한 명이 그 밑에 엄지손톱을 끼인 뒤 설비 배수로에 토했다. 그 뒤로는 모두가 고양이처럼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것을 다뤘다.
리즈는 추가 3센티미터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튀지도, 뛰어오르지도 않았다. 그냥 올라갔다.
주철 덩어리 아래로 너무나 선명한 그림자 선이 생겨, 리즈는 그것을 바라볼 시간까지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그림자. 주철과 테이블 사이에 난 공기의 틈. 그러더니 추가 왼쪽으로 1센티미터 미끄러졌다. 마치 다른 작업장에 있는 누군가가, 이곳에서는 누구도 볼 수 없어야 할 실을 살며시 잡아당긴 듯했다.
리즈는 손바닥으로 비상 정지 버튼을 내리쳤다.
기계가 단숨에 입을 다물었다. 추가 떨어졌다. 충격이 철판과 프레임과 콘크리트를 타고 정강이까지 올라왔다. 어금니 안쪽까지 울렸다.
작업동 저편에서 오버헤드 도어가 삐걱거렸다. 지게차가 후진 경고음을 냈다. 더 멀리서는 그라인더가 다시 돌아갔다. 나머지 세계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리즈도 3초 동안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은 채 빨간 버튼에 손을 얹고 제어 화면을 응시했다. 하중 그래프는 말도 안 되는 값을 보여 주고 있었다. 거의 0까지 수직으로 추락했다가 지저분하게 치솟았고, 끝에는 잡음이 톱니처럼 박혀 있었다. 평소라면 ‘측정 오염’이라고 적어 쓰레기통에 던졌을 종류의 곡선이었다.
그녀는 작업동을 내려다보는 유리 통로를 올려다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14번 작업대는 4년째 그녀의 영역이었다. 공식적으로 그녀는 항만과 건설 현장용 중장비, 그러니까 수 톤짜리 질량이 하필 잘못된 순간에 엉뚱한 음으로 울어서는 안 되는 모든 장비의 진동·기계적 튜닝을 담당했다. 비공식적으로는 남들이 얼굴을 찡그리는 것으로 요약하는 일을 했다. 구조물의 소리를 들었다. 골조, 받침대, 플랜지, 댐퍼에 손을 대고는 말했다. 여기서는 거짓말을 해. 여기는 비뚤어지게 힘을 받아. 여기는 충격을 제대로 못 버텨.
그녀는 명문 공대 출신 엔지니어도, 저명한 연구자도, 잡지 표지를 장식한 신동도 아니었다. 마흔한 살에 파란 출입증을 달고, 누구에게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월급을 받았으며, 작업장 사람들을 웃기는 버릇 하나가 있었다. 혼자 있을 때면 부품들에게 말을 걸었다.
이번에는 말하지 않았다.
시험 절차를 다시 가동했다.
시험대 위, 바로 추 아래에는 원래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될 조립물이 놓여 있었다. 그날 점심에 폐품으로 만든 작은 받침대였다. 어긋나게 겹친 고리 세 개, 세라믹 링 두 개, 경합금 케이지, 그리고 중심부에 남겨 둔 빈자리. 메마르고 흉측하고 터무니없는 조립물. 불량품 상자에서 주워 온 고철이었다. 하산이 만드는 모습을 봤다면 또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곤충이라도 만드는 거야, 리즈?”
그보다 심한 말도 들어 봤다.
조립물은 아침에 그린 그림 중 하나에서 나왔다.
그것 역시 숨기고 있었다.
2년 전부터 그녀는 머릿속에 형태를 품고 잠에서 깼다. 기억도 악몽도 아니었다. 받침대, 케이지, 비워 두어야 할 빈자리, 이유는 설명할 수 없어도 손안에는 정밀한 지시처럼 잡히는 방향들. 영수증, 정비 기록지, 의료보험 우편 봉투에 닥치는 대로 그렸다. 그러고는 거의 늘 버렸다. 세라믹 링을 꿈꾸는 마흔한 살 여자가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제 삶을 진열장에 올려놓을 수는 없었다.
그 형태들은 머릿속에만 남지 않았다. 눈을 뜨고 나서도 손목과 무릎 뒤, 아랫배 깊숙한 곳에 남아 있었다. 마치 그녀의 일부가 아직 누구도 이름을 발명하지 못한 물건을 밤새 붙들고 있었던 것처럼. 누군가 허락도 구하지 않고 잠든 모습을 지켜본 듯한 어리석은 불쾌감을 안고 일어나곤 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면 그녀 없이 무언가가 일어났거나. 그쪽이 더 끔찍했다.
시험대가 다시 돌아갔다.
진동 모터가 들리기보다는 몸으로 느껴지는 낮은 박동을 타기 시작했다. 고정 나사들이 미세하게 떨렸다. 화면에서 하중은 87.1킬로그램에 안정됐다. 그러고는 미끄러져 내렸다.
주철 추가 두 번째로 테이블을 떠났다.
리즈는 곧바로 비상 정지를 누르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면 더 정확히 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덩어리는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떠 있었다. 3센티미터,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래도 분명히 떠 있었다. 그녀는 테이블과 주철 사이의 공간에 손을 넣었다.
공기뿐이었다.
덩어리는 계속 떠 있었다. 우스꽝스럽고, 약이 오를 만큼 태연하게, 잘못 정리해 둔 장비처럼 허공에 걸려 있었다.
그때 작업동 출입 장치가 철컥 울렸다.
리즈는 전원을 끊었다.
추가 판결처럼 무거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하산 베날리가 통로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내 심 세트 못 봤어?”
리즈는 여전히 비상 정지 버튼에 손을 얹고 있었다.
“아니.”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얼굴이 시체 같은데.”
“잠을 설쳤어.”
“넌 언제나 안 자잖아.”
그는 두 걸음 들어와 테이블과 추, 중립 상태로 돌아온 화면을 살피더니 폐품 조립물을 보았다.
“이건 뭐야?”
“내가 만드는 거.”
“아.”
하산은 그녀와 충분히 오래 일했다. ‘내가 만드는 거’가 ‘눈치껏 내버려 둬’라는 뜻임을 알았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오른쪽 통에서 심을 찾아 들었다. 돌아서며 말했다.
“또 센서 날려 먹으면 이번엔 내가 안 덮어 준다.”
그가 사라진 뒤 리즈는 기다렸다. 30초. 1분. 2분.
그런 다음 작업대의 연질 커튼을 치고 공정 감시용 로컬 카메라의 선을 뽑은 뒤 다시 시작했다.
무게를 거부한 것
오후가 저물 무렵, 그녀는 두 가지를 알게 됐다.
첫째, 센서 문제가 아니었다. 둘째, 그게 무엇인지는 조금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강박적일 만큼 꼼꼼하게, 손에 잡히는 수단을 총동원해 모든 것을 점검했다. 로드셀. 인버터. 전원. 교정용 추. 차폐. 플랜지. 누설 전류. 크레인에서 흘러든 진동. 회선을 분리했다. 테이블을 바꿨다. 콘센트를 바꿨다. 탐침을 바꿨다. 조립물을 빼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놓자 하중이 떨어졌다. 세라믹 링 하나를 빼자 또 아무 일도 없었다. 링을 돌려놓자 떨어졌다.
여섯 번째 시험에서는 휴대전화로 촬영했다.
일곱 번째에는 작동하기 전에 추 밑에 심 세트를 끼워 놓았다. 하중이 떨어지자 심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한꺼번에 풀려나 철판 위를 미끄러졌다.
여덟 번째에는 철자를 가져다 댔다. 틈으로 들어갔다.
아홉 번째에는 작동 중인 덩어리의 옆 손잡이에 감히 두 손가락을 올렸다.
질량이 느껴졌다.
무게는 사라져 있었다.
그 차이가 차가운 따귀처럼 온몸을 관통했다. 덩어리는 이제 거의 아래로 끌리지 않았지만, 운동 상태를 바꾸려 하면 여전히 버텼다. 풍선도 아니고, 가벼워진 물체도 아니었다. 다른 무엇이었다. 바닥에 대한 복종만 거둔 채 주철 특유의 고집은 그대로 간직한 것.
전원을 너무 늦게 끊었다.
옆으로 계속 미끄러지던 덩어리가 손가락 두 개를 잡아채듯 비틀었다. 부러지거나 으깨지지는 않았지만 눈앞이 하얘질 만큼 세게 꺾였다. 그녀는 욕을 내뱉으며 물러나다 공구 카트에 부딪혔다. 와셔 한 상자가 바닥으로 쏟아져 우박 소리를 냈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작업동은 벌써 비어 가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비가 계속 유리창을 사선으로 긁었다. 기둥 사이로 갠트리 크레인의 높은 마스트가 보였다. 빨래 삶은 물 같은 하늘을 배경으로 새까맸다. 하루가 저물 무렵의 몽투아르는 언제나 기중기와 소금기와 불평으로 스스로를 지어 올린 나라 같았다.
리즈는 운전석에 앉아, 집에 들인 적 없는 짐승을 바라보듯 추를 바라봤다.
그녀를 붙잡은 것은 더 이상 이상 현상만이 아니었다.
우스꽝스러움이었다.
이 상태로 가서 보여 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너무나 잘 알았다. 세 사람 앞에서 다시 해 보라고 할 것이다. 그다음에는 여섯 사람 앞에서. 그러고 나면 웃고 싶지만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을 작업반장 앞에서. 품질 담당자는 편향을 들먹일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자기 오염을, 또 다른 누군가는 무의식적인 조작을 말할 것이다. 뜻도 모르면서 심인성이라는 말을 꺼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외부 감정을 제안하는 사람도 나올 것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현상이 재현되기라도 하면, 그 모든 사람이 그녀에게서 그것을 빼앗는 하나의 기계로 돌변할 터였다.
방금 본 일을 떠벌리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짓은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기록했다.
모눈 노트 세 쪽을 채웠다. 시간. 주파수. 고리의 방향. 추정 조임 토크. 온도. 들린 진동음. 당기는 힘이 줄어든 감각. 횡방향 이동. 조립물의 형상을 독기 어린 정밀함으로 그렸다.
그런 다음 페이지들을 찢었다.
네 번 접어 양말 속에 밀어 넣었다.
공식 작업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었다. ‘C3 셀 판독 불안정. 내일 재작업.’
그것이 첫 번째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아직 몰랐다. 뒤이어 벌어질 모든 일이 그 안에 들어 있으리라는 것을. 반중력도, 금융도, 군대도 아닌, 한 작업장 여자가 벌거벗은 진실은 보호해 줄 거짓말 없이는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 순간 안에.
다리
그녀는 저녁 교대가 끝난 뒤 현장을 떠났다.
주차장에서 왕복 4차선 도로에 이를 때까지 와이퍼가 줄곧 신음했다. 동생 마리안의 전화를 한 번, 이어 두 번째까지 놓쳤다. 관리사무소의 메시지와 의료보험 조합의 메시지, 트윙고 정기검사 자동 알림도 와 있었다. 그녀의 삶은 여전히, 바뀌기 전에 절대로 예고하지 않는 삶들의 초라한 수줍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생나제르 다리 요금소에서 마리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야.”
“일하고 있었어.”
“엄마가 널 찾았어.”
“왜?”
“일흔 살이니까. 그게 엄마 소일거리잖아.”
리즈는 한숨을 쉬었다.
세 살 아래인 마리안은 포르니셰에서 역사와 지리를 가르쳤고, 세상은 결국 언제나 이치에 맞는 형태를 취해야 한다는 듯 말하곤 했다. 자매는 서로를 꽤 사랑했다. 서로를 판단하는 데도 아무 힘이 들지 않았다.
“일요일에 올 거야?” 마리안이 물었다.
“모르겠어.”
“넌 늘 모르지.”
“비상 대기일 수도 있어.”
생각할 새도 없이 거짓말했다. 말은 저절로 흘러나왔다. 공기보다 아주 조금 무거울 뿐이었다.
“있잖아.” 마리안이 말을 이었다. “엄마가 아빠 아파트를 팔자고 또 그러셔.”
리즈는 핸들을 너무 세게 움켜쥐었다.
아버지의 아파트는 그가 죽은 뒤 8개월 동안 비어 있었다. 멋들어진 비극 같은 것은 없었다. 11월 어느 아침, 양말 차림으로 부엌과 욕실 사이 복도에서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 앙드레 바렌은 15년 동안 부두 노동자로 일했고, 그다음에는 지게차 운전사로 일했다. 이름을 잃고 주주를 얻어 가는 부두에서 무릎을 다 닳게 했다. 말수가 적었다. 무슨 말이든 하기 전에 무게부터 달았다. 질량과 침묵에 집착하는 리즈의 성정은 아마 그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일요일에 얘기하자.” 그녀가 말했다.
마리안은 거짓말을 지적하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말했다.
“또 잠 못 잘 여자애 목소리네.”
리즈는 2분 뒤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강어귀의 발코니’라는 이름을 고집하는 아파트 단지 15층 집에 들어섰을 때, 집이 너무 높은 곳에 있다는 터무니없는 느낌이 들었다. 통유리창 너머로 항구의 불빛과 멀리 정유소, 마스트의 붉은 등, 검게 패인 물이 보였다. 평소에는 그 풍경이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날 밤에는 적대적으로 보였다.
큰 등을 켜지 않은 채 가방을 내려놓았다. 물 한 잔을 따라 조리대 위에 둔 채 잊고, 양말 속에서 종이를 꺼낸 다음 휴대전화를 들었다.
영상은 그대로 있었다.
열세 번 돌려 보았다.
열세 번, 추가 테이블을 떠났다.
여섯 번째로 볼 때 실시간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던 세부가 눈에 들어왔다. 떠오르기 직전, 작은 폐품 조립물이 중앙의 빈자리 쪽으로 조여 드는 듯했다. 물리적으로 움직인 것도, 흔한 계측기가 측정할 만큼 변형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부품들 사이 어딘가에서 조율이 이루어진다는 느낌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그녀는 부엌에서 오래된 스프링 노트를 꺼냈다. 꿈속의 형태들을 그려 두던 노트였다. 그림과 대조했다.
14번 작업동의 조립물은 정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까웠다. 그게 더 나빴다.
완전한 우연으로 효과를 얻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으니까. 그녀가 그 근처까지 다가갔다는 뜻이었다.
리즈는 밤의 상당 부분을 그림을 고치는 데 썼다. 자정이 지나서는 바싹 마른 콩테 치즈 한 조각을 서서 먹었다. 그 뒤에는 식은 커피를 노트에 쏟았다. 더 늦게는 혼자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이 다른 모든 것보다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한참 뒤, 펼친 노트를 배 위에 얹은 채 소파에 누웠다.
잠이 곤봉처럼 그녀를 내리쳤다.
그날 밤 꿈은 꿈이 쓰는 평소의 언어로 말하지 않았다.
얼굴도, 장소도, 이야기도 없었다.
처음에는 어둠이 있었다. 그러다 속이 빈 부피 같은 것이 나타났다. 방도 격납고도 아닌, 벽 없는 내부. 그 안에서 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희고 가늘며 지저분할 만큼 선명한 선들. 선들이 그리는 것은 물체가 아니라 허락이었다. 이것은 닿아도 된다. 이것은 안 된다. 이것은 더 아래로 지나야 한다. 이것은 비어 있어야 한다. 고리 두 개가 살짝 벌어졌다. 링 하나가 돌아갔다. 중앙의 코어가 손톱 너비만큼 어긋났다. 그리고 그 모든 것 뒤에서 무언가가 아주 조금 버텼다. 리즈가 땀에 젖은 목덜미로 벌떡 앉아 깨어나, 입 안에 터무니없는 단어 하나를 물고 있을 만큼만.
다시.
아직 밤이었다.
새벽
동이 트기 전, 그녀는 출입증을 찍었다.
초소에서 스칸디나비아 추리소설을 읽고 있던 전직 선원이 고개를 들었다.
“뭘 두고 갔어?”
“존엄성요.” 리즈가 말했다.
그가 코웃음을 쳤다.
“찾으면 어디 있는지 나한테도 알려 줘.”
텅 빈 14번 작업동은 거의 아름다웠다.
사람도, 무전기도, 욕설도 없자 다른 소리들이 들렸다. 건물의 금속 외피를 때리는 빗소리, 온도 변화에 따라 보가 잘게 갈라지는 소리, 멀리 항만 설비가 내는 웅웅거림. 날이 밝기 전 숨 쉬는 거대하고 지친 짐승 같았다.
리즈는 조립물을 작업대 위에 다시 올렸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바로 그것이 가장 불안했다.
고리 하나를 풀었다. 8분의 1바퀴, 그 이상은 아니었다. 링의 자리를 바꾸고 세라믹 코어를 뒤집었다. 그런 다음 불필요한 와셔 하나를 뺐다. 중앙의 빈자리가 몇 밀리미터 어긋났다. 돌연 전체가 덜 즉흥적으로 보였다. 더 예뻐진 것은 아니었다. 더 정확해졌다.
그 정확함에 토할 것 같았다.
그녀는 추를 올렸다.
재가동.
곡선이 전날보다 빠르게 무너졌다.
0.8.
추는 테이블에서 3센티미터 뜨지 않았다.
20센티미터 솟아올랐다.
리즈는 배 높이에서 추와 마주했다. 87킬로그램짜리 덩어리가 더 이상 바닥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떨림도, 힘겨운 기색도 없이 떠 있었다. 평생 누군가가 제자리에 관해 거짓말하기를 그만두기만 기다려 온 것 같았다.
그녀는 손을 뻗었다.
주철이 음란할 만큼 부드럽게 따라왔다.
손끝으로 밀자 추가 허공을 미끄러졌다. 풍선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고분고분하면서도 앙심을 품은 질량처럼 움직였다. 너무 급히 멈추려 하자 관성이 어깨를 뚫고 들어와 그녀를 프레임에 처박았다.
비명을 삼키려고 소매를 깨물었다.
덩어리는 느린 속도로 테이블 가장자리를 향해 계속 나아갔다.
리즈는 시스템을 껐다.
너무 늦었다.
추가 20센티미터 높이에서 철판 위로 추락했다. 충격으로 플랜지 두 개가 튀었다. 10밀리 스패너가 바닥에서 튕겼다. 오른쪽 패널의 보호 피복이 갈라졌다.
그때 작업동 문이 쾅 닫혔다.
청소 담당자 나데주가 카트를 끌다 그대로 멈췄다.
“세상에.”
리즈는 홱 몸을 돌렸다.
조립물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추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괜찮아?” 나데주가 물었다.
리즈는 왼손을 들어 보였다. 손가락들이 벌써 부어오르고 있었다.
“이 추를 떨어뜨렸어.”
나데주는 추와 갈라진 피복, 바닥에 흩어진 와셔를 둘러봤다.
“혼자서?”
“다른 사람 보여?”
나데주가 숨을 내쉬었다.
“넌 언제나 아침 일곱 시도 되기 전에 몸을 망가뜨리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지.”
그녀는 카트를 세우고 리즈가 덩어리를 팔레트 위에 돌려놓도록 도운 뒤 작은 폐품 조립물을 가리켰다.
“그건?”
“참사 방지 장치.”
“그럼 작동이 안 되네.”
리즈는 웃고 싶었다.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응. 아직은.”
나데주가 떠났다. 리즈는 카트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고는 조립물을 바라봤다.
다시. 꿈이 말했다.
그녀는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14번 작업대를 닫고 커튼을 친 뒤 휴대전화를 비행기 모드로 바꾸고 똑같은 것을 하나 만들었다.
복제품
그녀에게는 오래전부터 그런 재능이 있었다. 손이 막 이해한 것을 빠르게 다시 만드는 재능.
아침 조가 작업동을 본격적으로 돌리기 전에 두 번째 받침대를 조립했다. 같은 케이지, 같은 고리, 같은 링, 중앙의 같은 빈자리. 부품의 무게를 재고 방향을 확인하고 펜 자국을 그대로 옮겼다. 플랜지 위의 흠집도 같았다. 조임 토크도 같았다.
쌍둥이처럼 닮은 두 조립물을 나란히 놓자, 둘이 그녀를 비웃는 듯했다.
각각 20킬로그램짜리, 좀 더 작은 교정용 추 두 개를 가져왔다.
첫 번째 조립물.
작동.
하중이 깨끗이 떨어졌다. 덩어리가 손가락 한 마디 높이로 떠올랐다.
두 번째 조립물.
작동.
아무 일도 없었다.
전원을 끊고 다시 시작했다. 다시 점검했다. 추를 맞바꾸고 전원을 맞바꾸고 케이블을 교체한 뒤 재시도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제작상의 차이를 찾는 데 40분을 썼다. 하나도 찾지 못했다. 두 물체는 똑같았다.
단 하나만이 세계를 거짓말하게 했다.
리즈는 프레임에 등을 기대고 섰다. 손은 새까맣고 입은 말라 있었다.
처음 떠오른 생각은 기술적인 것이었다. 빠뜨린 변수가 있었다.
두 번째 생각은 더 추했다.
그녀는 살아 있는 조립물과 죽은 조립물을 번갈아 보고는 간밤을 생각했다.
자신이 본 것을.
새벽에 부품들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때 자신을 이끌던 소리 없는 권위를.
문을 닫듯 눈을 꼭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도 죽은 조립물은 죽어 있었다.
아침 조 직원들이 외부 게이트에 출입증을 찍기 시작했다. 발소리와 목소리, 사물함 소리와 종이컵 커피가 날과 함께 돌아오고 있었다. 10분도 지나지 않아 작업동은 평소의 삶을 되찾을 터였다. 농담과 사고 보고서와 작업 속도와 쓸모 있는 때가 돌아올 것이다.
리즈는 복제품을 회색 통 하나에 넣었다.
살아 있는 것은 다른 통에.
두 통을 14번 작업대 아래 깊숙이, 아무도 열지 않는 평와셔 상자 뒤에 밀어 넣었다.
그런 다음 전날의 작업 보고서를 집어 두 동강 내고 새 보고서를 작성했다.
‘피복 결함. 교정용 추 충돌. 셀 점검 필요.’
하산의 출입증이 철컥 울렸다.
그는 방음 헤드셋을 목에 건 채 하품하며 다가왔다.
“도대체 몇 시부터 와 있었던 거야?”
“너무 일찍.”
그가 부은 손가락을 보았다.
“진짜로. 정말 추를 떨어뜨렸네.”
“응.”
“혼자서?”
리즈는 14번 작업대와 닫힌 커튼, 말끔한 작업대, 그 밑에 숨긴 두 개의 통, 이미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한 거대한 작업동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말했다.
“응. 혼자서.”
더 이상 자신을 지키기 위한 거짓말이 아니었다.
맹세였다.
제2장
빈 아파트
열쇠
그녀가 아버지의 아파트를 택한 것은 죽은 사람이 산 사람보다 질문을 덜 하기 때문이었다.
일요일, 잔 바렌은 접시 열두 장을 버리고, 삼대에 걸쳐 너무 무거웠던 찬장을 팔고, 커피도 마시기 전에 한평생 남은 것들의 운명을 결정하려 들었다. 파란 스카프를 두르고 아무도 보아 주지 않을 립스틱을 발랐다. 슬픔에 빠지지 않으려고 슬픔보다 빠르게 걸어가는 여자들의 신경질적인 피로가 얼굴에 묻어 있었다.
앙드레 바렌의 아파트는 펜우에에 있었다. 조선소가 여러 번 이름을 잃는 것을 지켜본 낮은 건물이었다. 방 세 개, 좁은 복도, 노란 타일이 깔린 부엌. 몇 달이 지났는데도 차가운 먼지와 묵은 담배 냄새가 버티고 있었다. 거실 덧문은 반쯤 내려간 채였다. 빛은 남은 것들을 분류하는 일요일의 색을 띠었다.
마리안은 그녀보다 먼저 와 있었다. 당연히. 벌써 세 무더기를 만들어 놓았다. 보관할 것, 나눠 줄 것, 버릴 것. 남들이 모호함을 남겨 두는 곳에 마리안은 깔끔한 동사를 붙였다.
“늦었네.” 마리안이 말했다.
“왔잖아.”
“그건 다른 얘기지.”
리즈는 왼손을 재킷 주머니 안에 넣어 두었다.
마침내 잔이 테이프로 감은 손가락을 보았다.
“또 뭘 한 거야?”
“추가 떨어졌어.”
“네 위로?”
“옆으로.”
마리안은 손을 보고 얼굴을 보았다.
“거짓말 참 못한다.”
“그럼 자꾸 시험 보려 하지 마.”
잔은 반응하지 않았다. 이미 식당 서랍을 열고 고무줄과 사용 설명서, 깡통따개, 의료보험 청구서 두 장을 꺼내고 있었다. 마치 그 잡동사니들이 죽음 뒤에 저절로 불어나기라도 한 듯이.
“중개인이 수요일에 와.” 잔이 말했다. “그때까지는 어느 정도 정리해야 해.”
리즈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중개인?”
“부동산 중개인이지, 리즈. 이 빈 아파트를 2년씩 둘 수는 없잖아.”
빈이라는 말이 그녀를 멈춰 세웠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텔레비전장. 라디에이터 위에 말아 놓은 식탁보. 액자가 걸렸던 자리만 밝게 남은 벽. 비좁은 부엌. 아버지가 공구를 보관하던 작은 방. 의자 위에 개어 둔 작업복과 끝내 버리지 못한 나사 상자. 부품 하나가 언젠가 망가진 것을 구할 수 있다고 평생 믿어 온 모든 남자처럼.
그 방 안쪽에는 작업대가 있었다.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널빤지 하나, 받침대 두 개, 낡은 바이스 하나. 하지만 문을 잠글 수 있었다. 아무도 그곳에서 자거나 드나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아파트가 몇 주만이라도 완전히 매물로 나오지 않는다면, 조만간 누군가 찾아올 이유도 없었다.
잔은 계속 말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야지.”
리즈가 말했다.
“수요일은 안 돼.”
마리안이 돌아봤다.
“뭐?”
“수요일은 안 돼. 시간을 조금만 줘. 공구도 남았고, 서류도 있고, 지하 창고도 있잖아.”
“지하 창고는 내가 봤어.” 마리안이 말했다. “굳어 버린 페인트 세 통하고 부러진 파라솔 하나가 전부야.”
“공구도 있어.”
잔이 한숨을 쉬었다.
“대체 뭘 갖고 싶은 건데?”
리즈는 생각했다. 세상이 당장 나를 들여다보러 오지 않을 장소를 갖고 싶어.
입으로는 말했다.
“아직 모르겠어.”
마리안은 평소보다 오래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다 한쪽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네가 열쇠 가져가. 대신 정말 네가 처리해.”
잔은 더 큰 피로 앞에 항복하듯 양손을 들었다.
“일주일이야. 그 이상은 안 돼.”
리즈는 찬장 위에 놓인 열쇠 꾸러미를 집었다. 아파트 열쇠 두 개, 지하 창고 열쇠 하나, 우편함 열쇠 하나, ‘A3’라고 적힌 작은 빨간 플라스틱 열쇠고리. 아버지는 물건에 자기 이름을 적는 일이 드물었다. 암호를 붙였다. 평범해 보이는 물건을 더 믿었다.
떠나기 전 작은 방으로 갔다.
회색 금속 공구함을 열었다.
안의 모든 것이 앙드레 바렌의 논리를 간직하고 있었다. 소켓은 크기순으로, 일자드라이버는 일자끼리, 십자드라이버는 빈 아이스크림 통 안에, 드릴 비트는 천에 싸서. 휘어진 것들도 버리지 않고 보관했다. 맨 아래에는 때가 타 누렇게 된 낡은 기계식 저울이 있었다. 50킬로그램까지 달 수 있는 물건이었다.
리즈는 그것도 챙겼다.
공구함을 닫자 마리안이 문틀에 기대어 섰다.
“대체 뭘 숨기고 있는 거야?”
리즈가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넌 거짓말할 때나 사고 칠 때만 그런 얼굴을 해.”
“편리하네. 진단 범위가 줄어드니까.”
마리안은 웃지 않았다.
“그냥 몸조심해.”
리즈는 솔직한 말을 해 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열쇠와 저울을 들고 떠나면서, 자기 가족에게서 장소 하나를 훔쳤다는 감각이 너무나 선명했다.
소박한 증거
비겁해서이기도 했고 현명해서이기도 했다. 그녀는 작은 것부터 시작했다.
큰 질량은 기다릴 수 있었다. 팔레트와 쇳덩이, 시연은 미래에 남겨 두면 됐다. 지금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영광 따위 없는 소박한 증거였다. 더는 스스로에게 거짓말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하면서도, 소방대나 회사 경영진이나 이웃들을 불러들이지 않을 만큼 은밀한 것.
월요일 저녁, 그녀는 회색 통 두 개를 트윙고에 실었다.
저녁 교대와 밖에서 마시는 커피, 탈의실의 잡담을 기다렸다가 구리를 훔치기라도 하듯 정비 계단으로 통을 하나씩 내려왔다. 첫 번째 통을 옮길 때 하산과 마주쳤다.
“이사해?”
“폐품 비우는 중이야.”
“언제부터 그걸 몰래 했어?”
“당신들이 더러운 일을 나한테 떠넘긴 뒤부터.”
그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 지나갔다.
빈 아파트에 도착해 두 조립물을 아버지의 작업대 위에 설치했다.
살아 있는 것은 왼쪽, 죽은 것은 오른쪽.
그런 말이 떠오르는 순간부터 싫었다.
나흘 저녁 동안 다른 이름을 붙이려 했다. ‘A’와 ‘B’. ‘1’과 ‘2’. ‘정상 시험’과 ‘무효 시험’. 어느 것도 살아남지 못했다. 물체들은 끝내 자신의 진짜 상태를 강요했다. 하나는 응답했다. 다른 하나는 그러지 않았다.
몽키스패너로 시험했다. 회색 공구함으로도 했다. 생수 묶음으로도 했다. 아버지가 다시 근력 운동을 시작하겠다고 맹세하던 시절부터 보관해 온 15킬로그램짜리 낡은 원판으로도 했다. 어느 날 밤에는 작은 방의 보조 난방기로 시험했다. 생각은 즉시 그녀를 벌했다. 난방기가 갑자기 가벼워지더니 걸레받이 쪽으로 미끄러져 벽 아래를 갈라 놓았다.
리즈는 욕을 내뱉으며 전원을 껐다. 공포로 목이 바싹 말랐다.
누런 저울은 14번 작업대의 화면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물체가 응답하면 바늘이 거의 한 번에 추락했다. 완전히 0까지 내려가지는 않았다.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공구가 가득 찬 상자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큼 낮아졌다. 그러다 너무 빨리 멈추려 하면 어깨를 뽑아 버릴 만큼의 힘으로 버텼다. 그 역설은 늘 되풀이됐다. 무게는 줄었지만 고집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화요일,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
‘추락은 운동보다 먼저 온다.’
수요일에는 이렇게 적었다.
‘물체는 가벼워지지 않는다. 바닥에 대한 충성을 버린다.’
목요일, 새로운 꿈을 꾼 뒤 살아 있는 조립물을 정확히 복제했다. 같은 금속, 같은 간격, 같은 빈자리. 그 아래 똑같은 하중 두 개를 놓았다. 회색 공구함 두 개였다. 하나는 아버지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날 저녁 브리코 데포에서 새로 산 것이었다.
낡은 것은 떠올랐다.
새것은 죽은 채 남았다.
리즈는 방 한가운데 서서 입이 바싹 마른 채, 서로 구별할 수 없는 두 상자가 같은 세계에 복종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노트를 펼치고 처음으로 그 말을 적었다.
‘꿈에서 본 조립물: 살아 있음.’
‘복제한 조립물: 죽어 있음.’
그런 다음 꿈에서 본을 지웠다.
그러고는 다시 썼다.
아직도 반중력이라는 단어는 감히 적지 못했다.
그 단어는 우스꽝스러웠다. 영화 냄새가 너무 짙었다. 역에서 파는 싸구려 공상과학소설이 너무 많이 들어 있었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현상에는 더 좋은 말, 아니면 더 나쁜 말이 필요했다. 더 벌거벗은 무언가가.
매일 저녁 아파트를 나서기 전에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닳은 리놀륨 바닥, 가지런한 의자, 상자로 가린 금 간 벽, 작은 방의 낮은 수납장 안에 넣은 조립물들.
그러는 동안 장소는 둘로 갈라졌다. 어머니와 동생에게는 죽은 사람의 아파트였다. 그녀에게는 누렇게 바랜 저울과 빛바랜 커튼, 더는 존재하지 않는 남자의 차가운 냄새 사이에 급조한 수치스러운 실험실이 됐다.
가끔 문을 잠그며 마음속으로 힘주어 말했다.
미안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빨간 서류철
금요일 아침, 최초의 외부 시선은 가장 소설답지 않은 모습으로 찾아왔다. 빨간 마분지 서류철이었다.
14번 작업대의 키보드 위에 놓여 있었다.
맨 위에는 검은 사인펜으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리즈—9시 전 코르넥에게 갈 것.’
베랑제르 코르넥은 말끔한 서류철과 짧은 말, 어설픔에 대한 개인적인 증오로 현장의 공정 품질 부서를 이끌었다. 아직 마흔도 되지 않았고, 유리벽 사무실과 지저분한 작업동을 똑같이 잘 걸을 수 있는 신발을 신었다. 누구나 그녀 앞에 서면 자신이 숨기려는 내용을 이미 읽힌 듯한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사무실은 작업장 일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리창 하나, 죽어 가는 화분 둘, 안전 깃발 하나, 화면 세 개, 흰 전기 주전자 하나. 리즈가 들어서자 코르넥은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지난 수요일과 목요일, 14번 작업대.” 코르넥이 말했다. “C3에 비정상적인 원시 하중값이 잡혔어요. 로컬 카메라가 끊겼고, 교정용 추가 규정에 어긋나는 충격을 받았고, 종결 보고서에는 별 내용이 없더군요.”
그녀가 서류철을 밀었다.
곡선들이 거기에 있었다.
영상도, 눈에 보이는 기적도 없었다.
하지만 숫자들은 센서와 함께 죽어 줄 만큼 예의 바르지 않았다.
“오신호예요.” 리즈가 말했다.
“그럴 수도 있죠.”
“테이블 밑에 폐품 조립물이 있었어요. 판독값을 오염시켰나 봐요.”
“무슨 조립물이죠?”
“급조한 댐퍼요. 기생 주파수를 시험하려고요.”
코르넥이 눈을 들었다.
“지금 어디 있죠?”
리즈는 목덜미가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충돌 뒤에 폐기물 통으로 갔어요.”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죽은 조립물의 일부가 실제로 폐기물 통에서 왔다. 나머지는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코르넥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문제는 이상 현상이 37분 동안 여섯 번 반복됐다는 거예요. 다음 날 오전 5시 17분에도 같은 계통에서 다시 발생했고요.”
리즈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후 5시 8분에는 공정 카메라도 뽑았더군요.”
“손가락을 끼이는 장면까지 찍히고 싶지는 않았어요.”
코르넥은 웃지 않았다.
“지금부터 사전 작업 허가 없이 14번에서 혼자 조작하는 일은 금지입니다.”
리즈의 심장이 너무 세게 한 번 뛰었다.
“좀 과한 조치 아닌가요?”
“인증받은 작업대에서 교정 셀의 하중이 비정상적으로 사라지는 쪽이 과하죠.”
그녀는 다음 장을 넘겼다.
“그리고 화요일에 HSE 감사가 있어요. 작업대를 청소하고, 폐품을 치우고, 보고서를 다시 작성하세요. 제가 보는 앞에서 대조 시험도 실시하고요.”
폐품이라는 말이 리즈를 정면으로 후려쳤다.
회색 통 두 개가 더 이상 작업대 아래에 없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14번 작업대에는 빠진 부품과 펜 자국, 급조의 흔적이 충분히 남아 있었다. 코르넥 같은 여자라면 진실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그 그림자는 볼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리즈가 말했다.
코르넥은 필요 이상으로 1초 더 그녀를 바라봤다.
“손가락은요?”
“추 때문에요.”
“혼자서?”
리즈는 하산을 생각했다. 나데주를. 마리안을. 이 거짓말이 유일하게 가능한 대답으로 변한 속도를.
“네.”
코르넥은 서류철을 덮었다.
“정오까지 상세 내용을 이메일로 보내세요.”
리즈가 나오자 하산이 커피 자판기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는 무슨. 코르넥이 위로 부를 때는 숨을 반듯하게 쉰다고 칭찬해 주려는 게 아니잖아.”
리즈는 종이컵을 하나 뽑았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하산은 지난 2년 동안 가끔 그랬듯 그녀를 바라봤다. 이미 한 번 너무 가까이 갔으며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다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는 남자의, 조금은 장난스럽고 조금은 조심스러운 시선이었다. 두 번의 밤이 있었다. 이야기는 아니었다. 너무 길어진 회식, 미지근한 맥주, 회전교차로 근처의 하산의 아파트, 현관에 벗어 던진 안전화. 기름때와 피로와 어리석은 말을 아직 몸에 묻힌 채, 불필요한 다정함 없이 서로를 찾던 방식. 리즈는 그에게 거창한 서사가 없다는 점이 좋았다. 하산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묻지 않았다. 그녀도 묻지 않았다.
그 뒤로 욕망은 작은 걸림처럼 둘 사이를 오갔다. 부품 위로 숙인 목덜미에 머무는 시선, 종이컵 위에 1초 더 남는 손, 작업동에 탄 커피와 젖은 금속 냄새만 가득할 때 불쑥 되살아나는, 제 배에 맞닿았던 그의 배에 대한 기억. 그것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이 기능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웠다.
두 번째 밤, 리즈는 하산보다 먼저 깼다. 하산은 등을 대고 누운 채 한쪽 팔을 이불 밖으로 던지고, 입을 살짝 벌린 채 태연하고 외설적으로 잠들어 있었다. 그때는 어떤 것도 그녀의 잠에 형태나 증거나 대답을 만들어 내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몇 초 동안 그녀는 거의 난폭한 해방감을 맛보았다. 이름조차 모르는 무언가의 통로가 아니라, 한 남자 곁에 놓인 몸일 뿐이라는 해방감.
“수요일 얘기했어?”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로그가 있잖아, 리즈. 작업대가 미쳐 돌아간다는 걸 보려고 내 말까지 들을 필요는 없어.”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조심해. 품질팀은 작업장을 수술실로 바꾸는 꿈이나 꾸는 사람들이니까.”
리즈는 생각했다. 내가 꾸는 꿈을 안다면 현장 전체를 폐쇄할 텐데.
오전 9시 26분, 사건은 이미 14번 작업동만의 것이 아니었다.
죽은 이들의 무게
그날 저녁, 그녀는 지나치다고 여겨야 마땅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논리적이라고 생각했다.
회색 통만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형태와 관련된 모든 물건을 사물함에서 비웠다. 주황색 노트, 낙서한 영수증들, 의료보험 우편 봉투 세 장, 여덟 번 접은 A4 용지 두 장, 각도와 치수로 뒤덮인 구내식당 냅킨 한 장. 전부 운동 가방에 쑤셔 넣고 트윙고까지 옮겼다. 아무 훈련도 받지 못한 첩자의 항구판이 된 듯한 기괴한 기분이 들었다.
저녁, 앙드레 바렌의 아파트에서 회색 상자 두 개를 다시 작업대 위에 놓았다.
그런 다음 낡은 공구함을 꺼냈다.
방 한가운데 받침대 두 개를 놓고 그 위에 공구함을 올렸다.
상자는 무거웠다. 주철 추보다는 가벼웠고 사람을 죽일 만큼 무겁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 허리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에는 충분했다. 회색 금속은 손잡이 근처가 녹슬어 있었다. 뚜껑에는 아버지가 붙인, 다 지워진 예인선 스티커가 남아 있었다.
리즈는 살아 있는 조립물에 전원을 연결했다.
저울 바늘이 곤두박질쳤다.
공구함이 받침대에서 2센티미터 떠올라 그대로 멈췄다.
그녀의 눈에 보일 만큼만.
아버지의 공구함이 작은 아파트의 허공에 떠 있었다. 그가 쓰던 스패너와 소켓과 펜치, 강철로 된 삶의 조각들을 가득 품은 채. 세계가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잊어버린 것처럼.
순식간에 목이 메어 리즈는 화가 났다.
양말을 신은 채 복도에서 죽은 앙드레를 생각했다.
상해 버린 무릎을.
거대한 두 손을.
말하기 전에 모든 것의 무게부터 달아 보던 버릇을.
그가 그 상자를 백 번, 천 번 옮겼으리라고 생각했다. 자동차 트렁크에서 부두로, 지하 창고에서 자동차로, 자동차에서 어느 방으로.
그런데 지금은 그녀가 그 상자로 하여금 거짓말하게 만들고 있었다.
전원을 껐다.
충격음이 방 전체에 울렸다.
아래층에서 누군가 천장을 한 번 두드렸다.
리즈는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손은 여전히 스위치 위에 있었다.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시작했다.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감정이 판독값을 오염시켰는지 알고 싶었다.
똑같은 하중 추락, 똑같은 무게 감소, 똑같이 자연을 거스르는 부유.
그런 다음 같은 상자 아래에 복제한 조립물을 연결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코로 숨을 들이마셨다.
노트를 펼쳤다.
적었다.
‘같은 하중.’
‘같은 장소.’
‘같은 물체.’
‘하나만 응답한다.’
아버지의 접이식 의자에 앉았다.
스프링이 신음했다.
복도에서는 자동 조명이 문 너머로 꺼졌다. 아파트가 돌연 그녀를 에워싸고 오그라들었다. 이웃집 텔레비전 소리, 수도꼭지 소리, 바깥의 스쿠터 소리가 들리다 이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더는 조금도 평범하지 않은 것을 둘러싸고 빽빽하게 들어찬, 작고 평범한 세계.
다음 주 화요일 아침 9시, 베랑제르 코르넥은 대조 시험을 요구할 것이다.
밤이 깊도록 아버지의 공구함은 리놀륨 바닥에서 여전히 2센티미터 떠 있었다.
제3장
대조 시험의 화요일
공구함이 떨어지다
그날 밤, 아버지의 공구함은 저절로 떨어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것도, 갑작스러운 고장처럼 추락한 것도 아니었다. 먼저 숨결만큼 낮아졌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밑을 받치던 손가락 하나를 뺀 것 같았다. 그러다 단번에 무게를 되찾았고 받침대가 신음했다.
리즈는 스위치를 바라봤다.
표시등도 살아 있는 조립물도 여전히 켜져 있었다. 차단된 것은 없었다.
처음에는 전원 약화라고 생각했다. 다음에는 과열. 그러고는 신경이 우스꽝스럽게 흔들린 탓이라고 생각했다. 전원을 끄고 기다렸다가 다시 켰다.
아무 일도 없었다.
콘센트를 바꾸고 조임 상태를 확인했다. 링을 다시 맞추고 같은 공구함을 올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
살아 있는 것이 죽은 것처럼 굴었다.
가장 끔찍한 것은 현상이 멈췄다는 사실이 아니라, 아무런 경고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무언가가 그것에게서 존재할 권리를 도로 빼앗은 듯했다.
자정까지 계속 시도했다.
누런 저울은 고철다운 정직함에 못 박힌 채였다. 공구함은 원래 무게 그대로였다. 세계는 메마른 폭력으로 사물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자정이 지나자 리즈는 작은 방의 접어 둔 야전침대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았다.
살아 있던 조립물은 눈앞에 놓여 있었다. 꼼짝하지 않고, 작고, 흉측하고, 사람을 약 올리며.
몇 초 동안 거의 행복한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일이 여기서 끝난다면?
발견도, 꼬리를 무는 거짓말도, 죽은 이에게서 훔친 아파트도, 피해 다녀야 할 작업장도, 구해야 할 목숨도 더는 없다면.
그러다 주철 추가 떠올랐다.
곡선들이.
주철 밑의 공기가.
조금 전까지 허공에 떠 있던 공구함이.
미친 것은 아니었다. 설령 미쳤더라도 측정 가능한 방식으로 미친 것이었다.
끝내 리놀륨 바닥에 몸을 뉘었다. 외투를 말아 목 밑에 받쳤고, 책상 램프는 끄지 않았다.
잠이 정전처럼 덮쳤다.
그녀가 품었던 것
그날 밤에는 새로운 형태를 꿈꾸지 않았다.
공구함을 꿈꿨다.
공구함의 기억이 아니라 바로 그 공구함을.
아버지의 낡은 회색 상자. 녹슨 손잡이와 예인선 스티커, 왼쪽보다 조금 뻑뻑한 오른쪽 경첩까지 그대로였다. 벽 없는 어둠 속에 떠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붙들려 있었다. 희미한 선들이 주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상자를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받아들이기 위해서였다. 침묵의 벽이 열리고, 닫히고, 다시 열렸다. 그때마다 공구함은 같은 것을 요구하는 듯했다. 계산도 힘도 아닌, 허락 하나.
리즈는 입이 바싹 마르고 뺨이 리놀륨 바닥에 붙은 채 잠에서 깼다. 입안에는 기술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단어가 맴돌았다.
품은 것.
아직 밤이었다.
너무 급히 몸을 일으키자 등이 항의했다. 살아 있는 조립물은 뒤집은 상자를 임시 작업대 삼아 그 위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할 새도 없이 손을 얹었다.
차가운 금속.
따뜻한 세라믹.
그뿐이었다.
망설이다 아버지의 공구함을 다시 받침대 위에 올렸다.
재가동.
저울 바늘이 단숨에 추락했다.
공구함은 전날처럼 선명하게 나무에서 2센티미터 떠올랐다.
리즈는 눈을 감았다.
안도감은 오지 않았다. 더 나쁜 무언가가 벌써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전원을 끄고는 지금까지 금지해 온 일을 했다. 다른 조건은 하나도 바꾸지 않은 채, 곧바로 같은 공구함 밑에 죽은 조립물을 연결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잠을 인내로 대신할 수 있기라도 한 듯 두 손을 허벅지 위에 편 채 기다렸다.
아무 일도 없었다.
아침에 이렇게 적었다.
‘살아 있는 조립물은 살아 있지 않다.’
그다음에는 이렇게.
‘밤이 지나면 살아 있다.’
두 번 지운 뒤 다시 적었다.
‘아무 밤이나 되는 것은 아니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평일 전체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르게 했다.
그녀는 다시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 잠을 줄이고, 다른 곳에서 자고, 텔레비전 앞에서 자고, 아예 자지 않으려 했다. 커피를 지나치게 마셨다. 조립물 생각을 하지 않고 잠자리에 들려 했다. 장 볼 것과 빨래, 트윙고 정기검사, 어머니, 매매 전에 비워야 할 것들의 터무니없는 목록을 억지로 생각했다. 아무 소용도 없었다.
쓸모 있는 밤들은 그녀의 의지에 복종하지 않았다.
토요일에는 세 시간 잤고, 물이 가득 찬 아파트 계단을 꿈꿨다. 다음 날 두 조립물 모두 응답하지 않았다.
일요일에는 아버지의 낡은 회색 공구함이 아니라 새것, 브리코 데포에서 산 상자를 머릿속에 품고 깨어났다. 지금까지 죽은 채였던 바로 그 상자였다.
꿈은 아주 작았다. 거대한 어둠도 선도 없었다. 그 상자만이 근원 없는 빛 속에 놓여 4분의 1바퀴 돌아가 있었다. 누군가 상자의 잘못된 면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리즈는 조립물을 바꾸지도 않았다.
새 상자를 제자리에 올렸다.
재가동.
하중이 무너졌다.
상자가 떠올랐다.
리즈는 꼼짝하지 않고 그것을 바라봤다. 공포는 곧바로 오지 않았다.
수치심은 왔다.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자부심이 아니라, 자신이 필요하다는 자만이 내부에서 차오르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전원을 껐다.
적었다.
‘물체만의 문제가 아니다.’
‘조립물만의 문제도 아니다.’
‘내가 그것을 품어야 한다.’
그러고는 노트를 너무 세게 덮어 바인더의 스프링 하나가 튀어나갔다.
화요일 아침에는 코르넥과 HSE 책임자 앞에서 대조 시험을 다시 해야 했다.
일요일 늦은 오후, 그녀는 그 시험을 하나의 실험으로 이용하리라 마음먹었다.
그쯤에서 멈췄어야 했다.
잘못된 실험
월요일 저녁, 교대가 끝난 뒤 리즈는 운동 가방을 들고 14번 작업대로 올라갔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위험한 존재가 됐다는 감각이 너무나 선명했다.
그 시간의 현장은 피로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지게차는 계속 움직였고 작업조들이 오갔다. 방화문 앞에서는 형광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웠다. 하지만 14번 작업동은 이미 목소리의 일부를 잃은 뒤였다. 기계들이 목소리를 낮추어 생각하는 듯했다.
리즈가 가져온 조립물은 단 하나였다. 새 공구함의 조립물, 일요일이 깨워 놓은 것.
그녀는 조립물을 시험대 아래, 첫눈에 띄지 않는 곳에 밀어 넣었다. 지난주와 같은 배열이었다. 너무 많은 거짓말을 해 돌아갈 수 없게 된 정직한 사람들만이 때때로 발휘하는, 도둑 같은 정밀함으로.
생각은 단순했다. 그래서 의심스러웠다.
밤에 품었던 것이 14번 작업대에서도 다시 응답하는지 알고 싶었다. 주철 추와 인증된 셀, 작업동의 진동과 교정된 테이블, 진짜 산업 설비 계통 속에서도. 중립적인 장소를 원했다. 죽은 이의 아파트를 벗어난 증거. 비밀스러운 무대를 현상에서 걷어 내도 살아남는 증거.
시험을 밀어붙이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했다. 판독 한 번. 딱 한 번만.
화요일 아침 9시가 조금 되기 전, 코르넥이 길고 마른 남자와 함께 도착했다. 바싹 깎은 대머리에 말끔히 면도를 한 남자로, 하얀 안전모를 팔에 끼고 있었다.
“그룹 HSE의 리갈 씨예요.” 코르넥이 말했다. “작업대를 다시 점검하고 사건을 종결하죠.”
하산은 벌써 와 있었다. 팔짱을 낀 모습이 누구의 삶도 나아지게 하지 못할 회의에 너무 일찍 끌려온 사람 같았다.
“잔칫날이네.” 그가 리즈에게 속삭였다.
리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리갈이 보고서를 요구했다.
코르넥은 작업 안전 조치를 확인했다.
14번 작업대는 굴욕적일 만큼 깨끗하게 빛났다. 불필요한 부품도, 펜 자국도 없었다. 주철 추와 테이블, 가지런히 정리된 공구, 그리고 붓기가 거의 빠진 손가락을 가진 리즈만 있었다.
“표준 절차를 다시 수행하세요.” 코르넥이 말했다. “교정용 추, 판독, 유지, 정지. 리갈 씨는 셀 문제와 규율 위반이 있었을 뿐이라는 걸 확인하고 싶어 해요.”
뿐이라는 말이 사포처럼 공기를 긁었다.
리즈는 추를 올렸다.
테이블 밑에 숨긴 작은 조립물의 존재가 거의 느껴졌다. 물리적으로는 아니었다. 다른 방식으로. 더는 이마 뒤에 가둬 둘 수 없는 생각처럼.
판독 장치를 연결했다.
영점.
예비 하중.
안정화.
등 뒤에서 코르넥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 천천히.”
리즈는 다시 했다.
하산이 고정 상태를 살피려고 왼쪽으로 다가왔다.
“구경은 해도 되죠?” 그가 말했다.
“아무것도 만지지만 않는다면요.” 코르넥이 대답했다.
리즈가 절차를 시작했다.
화면에서 하중 곡선은 정상적인 기울기를 그렸다.
그러다 사라졌다.
1초, 어쩌면 그보다 짧은 순간이었다. 숫자가 추락하고, 주철 추가 숨결만큼 하중을 잃고, 질량이 갑자기 맞지 않는 무게를 말할 때 저도 모르게 나오는 반사적인 손목 움직임을 하산이 보이기에는 충분했다.
“잠깐.” 그가 말했다.
덩어리는 즉시 하중을 되찾았다.
리갈이 화면을 봤다.
코르넥도 봤다.
2초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 리갈이 말했다.
“방금 보셨습니까?”
코르넥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이를 악문 채 멈춰 선 곡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가락은 이미 마우스 위에 올라가 있었다.
하산이 목덜미를 쓸었다.
“이상하게 움직였어요.” 그가 말했다.
리즈는 콘솔에 손가락을 댄 채 작업복에 문지르지 않으려고 버텼다.
“접촉 불량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자기 목소리가 아니었다.
코르넥이 고개를 들었다.
더 이상 품질 담당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방금 설명 하나를 빼앗긴 여자의 얼굴이었다.
“아니에요.” 그녀가 말했다.
테이블로 다가갔다.
쪼그려 앉았다.
아래를 들여다봤다.
리즈는 온몸의 피가 발끝으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조립물이 그곳에 있었다. 작고, 흉측하고, 부인할 수 없이 명백했다.
코르넥은 손을 뻗었지만 만지지는 않았다.
“이게 뭐죠?”
하산이 고개를 돌려 리즈를 봤다.
리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찰나 동안 작업동 전체가 그녀가 내놓을 대답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현장을 떠난 것
리즈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읽지 않는 추리소설에는 어쩌면 다른 순간보다 더 긴 순간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 자기편과 거짓말과 파국을 선택하는 순간. 지금 이 순간은 물렁한 반쪽짜리 진실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에 꼭 충분한 만큼 길었다.
“제가 만든 조립물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코르넥은 물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무엇에 쓰려고요?”
리즈는 생각했다. 세계를 둘로 가르려고. 무게를 풀어 버리려고. 내 삶과 당신의 삶과 항구와 나라와 아마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뒤집으려고.
입으로는 말했다.
“다른 걸 시험하려고요.”
코르넥이 몸을 일으켰다.
“어느 보고서에도 없는 물건을 인증 작업대 밑에 숨겨 놓고, 교정 셀을 끊고, 비정상적인 하중 추락을 일으켰군요. 그것도 그룹 감사를 하루 앞두고.”
리갈은 이미 휴대전화를 꺼낸 뒤였다.
“사진은 안 됩니다.” 코르넥이 잘라 말했다.
그가 코르넥을 바라봤다.
“공정 이상입니다.”
“저도 화면은 읽을 줄 압니다, 리갈 씨.”
코르넥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다. 그래서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하산을 향해 돌아섰다.
“추를 만졌나요?”
“아니요.”
“무엇을 느꼈죠?”
그는 망설였다. 리즈는 그가 자신을 알고 난 뒤 처음으로, 본능적으로 자기편에 서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게… 느껴졌어요.” 하산이 말을 꺼냈다.
그는 자기 어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무게가 달라진 것 같았습니다.”
리갈이 무언가를 기록했다.
코르넥은 리즈를 바라봤다.
“그걸 침착하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세요. 이제부터 내가 지시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만지지 마요.”
1초 뒤 그녀가 덧붙였다.
“그런 다음 핵심 작업대에서 미신고 장비를 갖고 혼자 놀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인지 설명하세요.”
‘물체들이 거짓말하기 시작한 뒤부터.’ 리즈는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그 거짓말의 성질이 변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거짓말은 그녀를 지켜 주었다.
이제부터는 그녀가 거짓말을 지켜야 했다.
몇 분 뒤, 리즈 바렌의 이름은 14번 작업동을 떠났다.
거의 그 즉시 베랑제르 코르넥은 사건 기록과 곡선, 여섯 줄짜리 메시지를 그룹 기술 경영진에게 전달했다. 현장 보안 책임자도 참조에 넣었다.
제4장
봉인
제6회의실
아직 출입증을 반납하라는 말은 듣지 않았다. 그저 탁자 위에 놓으라고 했을 뿐이다.
그 미묘한 차이만으로도 몸이 서늘해졌다.
제6회의실은 평소 화요일 안전 점검이나 하청업체 브리핑, 소화기 교육에 쓰였다. 나무 무늬를 흉내 낸 타원형 탁자. 검은 의자 여섯 개. 한 번도 제대로 조정된 적 없는 벽걸이 화면. 주차장 한 귀퉁이가 보이는 좁은 창. 미지근한 커피 냄새가 오래된 벌처럼 눌러앉은 곳이었다.
코르넥은 리즈를 거칠게 다루지 않고 그곳에 앉혔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오줌 마려우면요?”
“말씀하시면 됩니다.”
문은 필요 이상으로 이 초쯤 더 열려 있었다. 복도를 오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올 만큼만.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가는 하산. 장갑 상자를 든 운반원. 벌써 전화기에 대고 목소리를 높이는 리갈. 그리고 저편에는 리즈가 모르는 남자가 있었다. 넥타이 없는 짙은 양복, 짧게 깎은 머리, 군대에서 민간으로 재활용된 사람 같은 꼿꼿한 목.
하산을 보자 리즈는 어리석고도 지극히 심각한 한 가지가 두려워졌다. 둘이 잤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게 아니었다. 수치심과 순결을 혼동할 나이는 이미 지났다. 두려운 건 한 사람의 몸이 다른 사람을 붙잡을 손잡이로 변하는 정확한 방식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오래된 욕망은 아무리 보잘것없고 아무 약속도 없었어도 때때로 손잡이 하나를 그려 낸다. 사람을 위협할 때 언제나 그가 사랑하는 것을 이용하는 건 아니다. 그가 만졌고, 자신 때문에 짓뭉개지는 꼴만은 보고 싶지 않은 것으로도 그를 붙잡는다.
잠시 뒤 그 남자가 들어왔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도 복종받는 데 익숙한 사람의 예의로 문을 닫았다.
“프랑크 들로네입니다. 사업장 보안 담당이죠.”
손은 내밀지 않았다.
리즈의 맞은편이 아니라 탁자 모서리에 앉았다. 그편이 오히려 더 불쾌했다.
“간단한 질문 몇 가지를 드리겠습니다, 바렌 씨.”
리즈는 가짜 나무 무늬 위, 자기 앞에 놓인 파란 출입증을 바라보았다.
“해 보시든가요.”
들로네는 펜을 들었다. 키보드도 화면도 없이, 질 나쁜 문구점 모눈 수첩 하나뿐이었다. 그런 절제가 컴퓨터보다 더 불안했다.
“14번 작업대 아래에서 발견된 장치, 언제 만들었습니까?”
“지난주요.”
“뭘로 만들었죠?”
“폐자재요.”
“무슨 목적으로?”
리즈가 눈을 들었다.
“다른 걸 시험해 보려고요.”
“모호하군요.”
“솔직한 겁니다.”
들로네는 반응하지 않았다.
“누구에게 말한 적 있습니까?”
“아뇨.”
“누구에게 보여 준 적은요?”
“없어요.”
“사업장 밖으로 반출했습니까?”
겨드랑이에 다시 땀이 배었다.
아버지의 아파트에 있는 회색 상자 두 개가 떠올랐다.
주황색 공책.
영수증들.
어제 떠올랐던 브리코 데포의 새 상자.
리즈는 대답했다.
“아뇨.”
들로네가 무언가를 적었다.
“지금부터는 그 반대가 밝혀질 경우 단순한 절차 위반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십니까?”
리즈는 그의 시선을 버텼다.
“정확히 무슨 뜻이죠?”
“우리가 무엇을 발견했는지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그가 말한 우리는 이미 코르넥이나 14번 동, 심지어 이 사업장만을 가리키는 말도 아니었다.
노크 소리가 났다. 코르넥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룹 기술팀이 11시 20분에 도착해요. 그 전에 시험해 봅니다.”
들로네가 일어섰다.
“휴대전화.”
리즈의 망설임은 찰나만큼 길었다.
“탁자 위에.”
리즈는 따랐다.
그들이 나가고 제6회의실에는 파란 출입증과 화면을 나무 무늬에 엎어 놓은 휴대전화, 그리고 세상에 관료주의적인 인내를 부여하는 회의 끝물의 커피 냄새만 남았다.
제대로 된 시험
시험은 14번 작업대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코르넥이 거부했다.
“우리가 뭘 보고 있는지 알아내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 작업대에 손대지 않습니다.”
장치는 1층의 계측실로 옮겨졌다. 작업 동들에서 멀리 떨어진 곳, 병원을 닮아 고마울 지경인 방화문 뒤였다. 먼지 한 톨 없는 회색 바닥. 금속 작업대. 소형 하중 시험기.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는 백색 조명.
작업대 한가운데 놓인 장치는 14번 동에서보다 더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작고 흉하고, 하찮기까지 했다.
리갈은 적당한 크기로 부풀기를 거부하는 업무상 과실 주위를 돌듯 그 주변을 맴돌았다.
“이게 측정값을 튀게 했다는 겁니까?”
리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코르넥은 기어를 바꾼 듯했다. 더 메마르고, 더 느려졌다. 이제 그녀의 질문은 품질 책임자의 것이 아니었다. 벌써 다른 무언가를 겨누고 있었다.
“어제와 정확히 똑같이 조립하세요. 같은 추. 같은 순서. 같은 절차.”
“당신 감독하에요?”
“내 감독하에.”
들로네는 문 가까이에 자리를 잡았다. 도우려는 게 아니었다. 공간을 닫으려는 것이었다.
리즈는 작은 표준 추를 제자리에 놓았다. 20킬로그램. 사람에게는 인상적이지 않을 만큼 가벼운 하중이었다. 기계라면 모를까.
첫 번째 시험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곡선은 정상 하중을 찍었다.
그대로 유지됐다.
20.2.
20.1.
20.2.
현실은 완벽할 만큼 얌전했다.
리갈이 코로 숨을 내뿜었다.
“좋군.”
코르넥은 말이 없었다.
리즈는 거의 짐승 같은 굴욕감이 피부 밑으로 달리는 것을 느꼈다. 거짓말쟁이로 몰릴까 봐서가 아니었다. 제6회의실에 있던 불과 일 분 전만 해도 자신 역시 같은 결과를 거의 바랐기 때문이었다.
대답을 해 줘야 할 순간에 자신을 저버리는 기적보다 더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것은 없었다.
“다시 하세요.” 코르넥이 말했다.
리즈는 다시 했다.
결과는 같았다.
세 번째.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
리갈이 팔짱을 꼈다.
“그러니까 무허가 장치, 카메라 단절, 로드셀 편차, 인증된 작업대에서 혼자 실험한 작업자가 있는 겁니다. 지금으로선 내가 아는 게 그게 전부예요.”
리즈는 작은 받침틀을 바라보았다.
더는 옹호하고 싶지 않았다.
내리치고 싶었다.
코르넥이 다가왔다.
“지난번 시험과 오늘 사이에 뭘 바꿨죠?”
“아무것도요.”
“생각해 봐요.”
“쓸모 있는 건 아무것도.”
“그게 무슨 뜻이죠?”
“이걸 조립했고, 이게 반응했고, 지금은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리갈이 즐겁지 않은 웃음을 작게 흘렸다.
“그건 기술적인 답이 아니잖습니까.”
문이 열렸다.
들어온 여자는 통상적인 의미의 구원자나 상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회색 코트와 어두운 바지, 가느다란 안경, 꾸민 티 없이 묶은 머리, 빠른 걸음. 마흔다섯쯤 되었을까. 방에 들어올 때는 잊어버리기 쉽지만 누군가 헛소리를 시작하면 어느새 눈으로 찾게 되는 부류의 여자였다.
코르넥이 몸을 세웠다.
“클레르 타르디외. 그룹 기술본부입니다.”
타르디외는 누구에게도 먼저 인사하지 않았다.
작업대를 보았다.
장치를.
추를.
그리고 화면을.
“어디까지 됐죠?”
리갈이 선수를 쳤다.
“현재까지는 재현되지 않습니다.”
타르디외가 한 손을 들었다.
“결론을 물은 게 아닙니다. 어디까지 했는지 물었어요.”
뒤따른 침묵은 가지런히 놓인 공구처럼 명료했다.
코르넥이 대답했다.
“오늘 아침 인증 작업대에서 이상 현상 관측. 적어도 일부를 목격한 증인 있음. 탁자 아래에서 미신고 장치 발견. 이곳에서는 안정적으로 재현되지 않음.”
타르디외가 처음으로 리즈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조립했습니까?”
“네.”
“혼자서?”
“네.”
“무슨 의도로?”
리즈는 어깨 뒤, 아주 조금 오른쪽에 선 들로네를 느꼈다. 정중한 위협처럼.
“기생 주파수를 탐색하려고요.”
타르디외는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그 답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했겠죠. 이제 별 쓸모도 없고요.”
리갈이 시선을 내렸다.
코르넥은 내리지 않았다.
리즈는 움직이지 않았다.
타르디외가 장치로 다가갔다.
손은 대지 않았다.
“다시 하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위계에서 나오는 명령과는 달랐다. 더 나빴다. 정확성을 요구하는 목소리였다.
리즈는 추를 다시 놓았다.
시퀀스를 작동시켰다.
아무것도 없었다.
곡선은 그대로였다.
20.1.
20.2.
20.1.
타르디외는 끝까지 화면을 지켜보다가 물었다.
“돌아오지 않는 게 뭐죠?”
그 질문은 예고도 없이 방을 가로질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오류가 어디에 있는지, 누구의 잘못인지 묻지 않았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에 더 가까운 다른 무언가를 겨눴다.
리즈는 자신을 지킬 겨를도 없이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그러고는 일 초 뒤에 덧붙였다.
“버티지 못하는 뭔가요.”
타르디외는 그 말이 전혀 어리석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이야기 말고 장치부터 다시 시작하죠.”
리갈이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현 단계에선 우선 규율의 문제라고…”
“규율의 문제일 수도 있죠.” 타르디외가 잘랐다. “그리고 다른 문제도 있을 수 있고.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우지는 않아요.”
제대로 된 질문
정오가 조금 지나자 그들은 이 일을 더 작고 더 흉하지만 훨씬 위험한 방으로 옮겼다. 사람들이 A4 용지와 목록을 들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방이었다.
타르디외는 탁자 끝에 앉았다.
왼쪽에는 코르넥.
들로네는 문 가까이.
리갈은 더 멀리서 자기가 아직 존재한다는 걸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 벌써 자기 기록을 다시 읽고 있었다.
리즈 앞에는 물 한 잔과 파란 출입증이 놓여 있었다. 턱 안에 들어앉은 기분이었다.
타르디외가 서두 없이 시작했다.
“기술적인 질문을 하겠습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해요. 아무 말이나 지어내면 알아볼 테니까.”
리즈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알겠어요.”
“언제부터 이런 형태를 그렸습니까?”
리즈의 손이 유리잔 위에서 멈췄다.
코르넥이 눈을 들었다.
들로네도.
타르디외는 ‘언제부터 이 장치를 만지작거렸습니까?’라고 묻지 않았다.
그보다 조금 더 먼 곳을 정확히 찔렀다.
“모르겠어요.” 리즈가 말했다.
“나쁜 대답이군요.”
“이 년쯤 됐나.”
“무엇에 그렸죠?”
“종이요.”
“그 그림들은 어디 있습니까?”
리즈는 너무 빨리 대답했다.
“대부분 버렸어요.”
타르디외는 일 초를 흘려보냈다.
“대부분은 전부가 아니죠.”
이 여자는 자백을 받아내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무른 대답들을 하나씩 쓰러뜨렸다.
“남은 게 있어요.” 리즈가 말했다.
“어디에?”
아버지의 아파트가 떠올랐다.
작은 방.
주황색 공책.
네 번 접은 영수증들.
그런 다음 사업장 밖으로 반출했느냐던 들로네의 질문과, 탁자 위의 출입증과, 압수된 휴대전화가 떠올랐다.
리즈는 절반의 진실을 골랐다.
“집에요.”
타르디외가 적었다.
“좋습니다. 내일 아침 가져오세요. 전부.”
리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코르넥이 말했다.
“신고하지 않은 장치에 사용한 부품의 전체 목록도 필요해요.”
장치들. 리즈는 생각했다.
복수형이 아팠다.
타르디외는 계속했다.
“처음 반응했을 때 혼자였습니까?”
“네.”
“오늘 아침 증인들 앞에서 반응했을 때는요?”
“네.”
“그사이에 다른 장소에서 현상을 재현했습니까?”
물잔이 쓸데없이 무거워졌다.
리즈는 두 가지를 동시에 깨달았다. 타르디외는 자신이 환각을 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진실을 말하면 아버지의 아파트는 그 즉시 피난처로서 존재하기를 멈출 터였다.
“아뇨.” 리즈가 말했다.
코르넥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
남들이 알아챌 만큼은 아니었다.
거짓말을 기억해 두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을 만큼만.
타르디외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좋습니다.”
그 좋습니다에는 부드러움이라곤 없었다.
“지금부터 혼자 작업대로 돌아가지 마세요. 절차 밖에서 이 장치에 손대지도 말고요. 오늘은 사업장 내에서 대기하세요. 그리고 내일 7시 30분, C동 제4기술실.”
리갈이 물었다.
“확대 사고 보고서를 열까요?”
“네.”
“어느 등급으로요?”
타르디외는 투명한 정전기 방지 봉투에 갇힌 장치를 바라보았다.
“‘아직 모른다’ 등급으로요.”
리갈은 한마디가 더 나오기를 기다렸다.
나오지 않았다.
조금 뒤 들로네는 출입증은 돌려주지 않은 채 휴대전화만 돌려주었다.
“오늘 저녁까지는 동행자가 있어야 이동할 수 있습니다.”
“나 구금된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그는 침착함을 유지하도록 지나치게 훈련된 사람 특유의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아직 이렇게 정상적으로 대화하는 거죠.”
가져가지 않은 것
리즈는 늦은 오후, 주황색 방문객 출입증과 빈 가방을 들고 사업장을 나섰다. 이미 다른 주권 아래에서 살기 시작한 듯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있었다.
주차장의 공기에서는 경유와 다가오는 비, 달궈졌다가 너무 빨리 식은 철판 냄새가 났다. 멀리서 하산이 손을 들었다. 리즈는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만 답했다. 그를 보호해야 하는지, 경계해야 하는지, 사과해야 하는지 이제 알 수 없었다.
트윙고에 앉아서도 바로 시동을 걸지 않았다.
돌려받은 휴대전화에는 벌써 마리안의 메시지 두 통과 잔의 부재중 전화 한 통, 은행 알림, 01로 시작하는 모르는 번호가 떠 있었다.
평범한 세계가 감탄스러울 만큼 잔인하게 자신을 주장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아파트에 들어서자 조그만 비밀 실험실이 한순간에 하찮고도 거대해 보였다.
주황색 공책, 휘갈겨 쓴 영수증들, 장치 두 개, 낡은 회색 상자와 새 상자, 상자 뒤쪽의 금 간 벽. 자신이 말하지 않은 모든 것.
리즈는 코트도 벗지 않고 접이식 의자에 앉았다.
내일 아침 7시 30분, C동 제4기술실.
그림과 기록, 부품 목록을 가져가야 했다. 아직 아무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흡수할 수 있을 만큼 말끔하게 정리된 자기 자신도 함께.
리즈는 주황색 공책을 펼쳤다.
첫 페이지. 흉곽처럼 열린 받침틀.
두 번째. 중심이 어긋난 세 개의 고리.
세 번째. 아직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은, 길고 골이 진 형태.
네 번째. 기억나지 않는 구조.
리즈는 더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어떤 페이지에는 십팔 개월 전 날짜가 적혀 있었다.
어떤 것에는 날짜가 없었다.
꿈에서 본 뒤 잊어버린 게 분명한 것들도 있었다.
손으로 고치고, 다시 손보고, 무게를 재 본 것들도 있었다.
이건 더 이상 불면에 시달리는 아마추어의 공책이 아니었다.
감염의 정확한 연대기였다.
전부 태워 버리고 싶었다. 말 그대로. 큰 그릇과 연료용 알코올, 부엌 서랍의 라이터를 찾아 이 언어가 마침내 목격자 없이 검게 타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지 않았다.
철제 과자 상자에서 낱장들을 꺼내 세 무더기로 나눴다.
첫 번째. 보여 줄 수 있는 것.
두 번째. 위험한 것.
세 번째. 불가능한 것.
‘보여 줄 수 있는 것’에는 기술적인 강박으로 보일 만큼 모호한 그림들을 넣었다.
‘위험한 것’에는 실제로 반응했던 장치들과 지나치게 닮은 것들을.
‘불가능한 것’에는 더 이상 단순한 물체만은 아닌 페이지들을 넣었다. 거기서는 형태가 물질 이외의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 같았고, 바라보기만 해도 리즈가 너무나 잘 아는 더러운 확신이 밀려왔다.
세 번째 무더기는 여덟 장뿐이었다.
그것들이 가장 두려웠다.
리즈는 ‘보여 줄 수 있는 것’을 크라프트지 서류철에 넣었다.
‘위험한 것’은 라디에이터 근처 들뜬 리놀륨 바닥 밑에.
‘불가능한 것’은 몇 달째 부엌 높은 찬장에 남아 있던 어머니의 반짇고리에 넣었다.
그러고는 두 장치를 바라보았다.
살아 있는 것.
죽은 것.
그 말들이 의지와 상관없이 되돌아왔다.
리즈는 양손에 하나씩 들었다.
거의 같은 무게.
같은 거친 감촉.
같은 침묵.
그러나 해악을 끼칠 힘은 전혀 같지 않았다.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마리안이었다.
리즈가 받았다.
“뭐?”
“적어도 ‘안녕’부터 할 수는 있잖아.”
“안녕.”
침묵.
그러더니 마리안이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그러는데, 너 일요일에 이상했대. 평소보다 더.”
“다정하기도 해라.”
“리즈.”
말투가 바뀌었다.
“무슨 일 있어?”
리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아파트. 작업대 위의 장치들. 일부가 도려내진 공책. 이제는 보이지 않는 세 무더기. 은신처이자 작업실이자 증거로 변한 앙드레 바렌의 삶.
진짜로 대답하면 넌 믿지 않거나 내가 계속하지 못하게 하겠지, 리즈는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직장에서 문제가 생겼어.”
“해고 같은 거?”
“아직은 아닌 것 같은 거.”
마리안이 입을 다물었다.
“내가 갈까?”
리즈는 눈을 감았다.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저 그래. 와. 여기 앉아. 나랑 같이 봐. 이게 나를 집어삼키고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해 줘.
하지만 입에서 나온 대답은 달랐다.
“아니.”
그리고 언니가 더 묻기 전에 말했다.
“내일 엄마가 또 아파트 얘기를 꺼내면 네가 한눈 좀 팔게 해 줘.”
“왜?”
“아직 안 끝났으니까.”
마리안이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정확히 뭘 덮어 달라는 거야?”
리즈는 두 장치를 바라보았다.
살아 있는 것.
죽은 것.
거짓말은 이제 직업을 바꾸었다.
더 이상 발견을 지키는 데만 쓰이지 않았다.
리즈의 주위에 하나의 영토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리즈가 말했다. “아직은.”
그날 밤, 리즈는 쓸모 있는 꿈을 꾸려 하지 않았다.
그저 가져가지 않을 것들을 숨겼다.
제5장
클레르 타르디외
크라프트지 서류철
다음 날 아침, 리즈는 크라프트지 서류철을 옆구리에 끼고 C동에 들어섰다.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자기 무게가 측정되리라는 느낌이 너무도 선명했다.
C동은 작업 동들과 같은 세계에 속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온전한 사무실도, 아직 작업장도 아니었다. 깨끗하고 조용하며 냉방이 잘된 중간 지대. 신발 소리는 더 작게 나고, 말은 더 비싸지는 곳. 무거운 것을 직접 들지는 않지만 어떤 무게가 중요한지는 결정하는 사람들이 오갔다.
제4기술실은 창문 없는 복도 끝, 출입 통제문 뒤에 있었다. 문은 처음에 리즈의 주황색 방문객 출입증을 거부했다. 경비원 한 명이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들여보내 주었다. 명패에는 ‘ST4’라고만 적혀 있었다.
클레르 타르디외는 벌써 와 있었다.
코르넥도 펼친 수첩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리즈가 처음 보는 남자도 있었다. 쉰이 넘은 나이, 짧은 수염, 빳빳하지 않은 푸른 양복 차림. 이십 년째 잠을 설쳤지만 그걸 성격으로 삼지는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타르디외가 말했다.
“올리비에 마송. 산업 법무 담당입니다.”
마송은 고개를 기울였다.
“안녕하십니까, 바렌 씨.”
웃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을 모욕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탁자 위에는 이미 검은 녹음기와 물 세 잔, 빈 메모지, 전날 압수한 장치가 든 정전기 방지 봉투가 놓여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두 번째 빈 봉투도 있었다.
그 빈 봉투만으로도 그들이 물건 하나에서 멈출 생각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타르디외가 크라프트지 서류철을 가리켰다.
“당신이 그린 그림입니까?”
“일부예요.”
마송이 눈을 들었다.
“무엇의 일부죠?”
이 남자 앞에서는 부정확한 표현이 법률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오리라는 걸 리즈는 즉시 알아차렸다.
“제가 보관한 것 중 일부요.”
코르넥이 말했다.
“‘집에 있다’고 했지, ‘일부가 집에 있다’고 하지는 않았어요.”
“초고는 다른 데도 보관했어요.” 리즈가 대답했다.
아직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입안에 쇠 맛이 남을 만큼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타르디외는 코르넥이라면 반응했을 지점에서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서류철을 집어 한 장씩 꺼냈다. 상급자처럼이 아니라 어떤 재료를 읽는 여자처럼.
첫 페이지. 열린 받침틀.
두 번째. 중심이 어긋난 고리들.
세 번째. 급히 주석을 단 일련의 각도 편차.
네 번째. 시험해 보지 않은 변형.
타르디외는 삼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송은 리즈를 보았다.
코르넥은 타르디외를 보았다.
리즈는 종이들이 자기 서류철을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흉골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가슴을 열리는 듯한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마침내 타르디외가 종이 한 장을 따로 놓았다.
“이건 시험했습니까?”
리즈가 보았다.
낡은 회색 상자의 변형이었다.
가장 위험하지도, 가장 얌전하지도 않은 것.
“아뇨.”
“왜죠?”
“시간이 없었어요.”
타르디외가 한쪽 눈썹을 아주 조금 치켜올렸다.
뒤이은 침묵을 리즈는 견딜 수 없었다.
이를 악물었다.
“무서웠으니까요.”
처음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마송조차도.
타르디외가 그저 물었다.
“뭐가 무서웠죠?”
너무 잘 작동할까 봐. 다른 무언가 위에서 작동할까 봐. 더는 외면할 권리가 없는 사실을 확인시켜 줄까 봐.
리즈는 말했다.
“반응할까 봐요.”
타르디외가 종이를 내려놓았다.
“이제 좀 낫군요.”
되돌아오는 선들
그들은 과실부터 시작하지 않았다.
형태부터 시작했다.
타르디외는 탁자 위에 여덟 장을 펼쳐 놓고, 처음에는 아무 설명 없이 분류했다. 날짜가 있는 것. 없는 것. 치수로 뒤덮인 것. 거의 깨끗한 것. 리즈가 사후에 다시 옮겨 그려 다른 방식으로 숨 쉬게 해 보려 했던 것처럼 보이는 그림도 있었다.
“보세요.” 타르디외가 말했다.
리즈는 보았다.
“뭐가 보입니까?”
“제가 그린 것들이요.”
타르디외가 손 하나를 들었다. 대답을 막을 만큼만.
“더 자세히 봐요.”
마송은 거의 재미있어하는 듯한 표정을 감추려 눈을 내리깔았다.
코르넥은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타르디외가 두 장을 옮겨 놓고 세 번째 장을 가까이 붙인 다음, 네 번째 장을 사분의 일 바퀴 돌렸다.
순간 선들이 서로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아름다워진 게 아니었다. 집요해졌다.
중심이 어긋난 세 고리가 되풀이됐다. 중앙의 빈 공간도, 통제된 비대칭도, 언제나 같은 쪽에 난 미세한 틈도, 두 물질이 서로 닿기를 거부하는 방식도. 그 차이들은 너무 작아서 게으른 눈이라면 서툰 솜씨로 여겼을 것이다.
리즈는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되풀이되는 게 보여요.”
“그래요.” 타르디외가 말했다. “불면에 시달리다 아무렇게나 끼적인 것치고는 지나치게 많이 되풀이돼요.”
코르넥이 팔짱을 꼈다.
“이 년 동안 이런 걸 그렸다고 했죠. 프로그램도 없이? 체계적으로 정리한 시험 기록도 없이? 요청받은 것도 아닌데?”
“네.”
“왜요?”
리즈는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려야 했으니까. 저절로 찾아왔으니까. 눈을 뜨면 이미 거기 있었으니까. 지친 몸은 이해하기 전에 복종할 때가 있으니까.
그 어떤 대답도 제4기술실에는 제대로 들어맞지 않았다.
타르디외는 친절이 아니라 정확함을 담고 리즈를 오래 바라보았다.
“이런 형태가 시험 전에 떠오릅니까, 후에 떠오릅니까?”
코르넥이 고개를 드는 게 느껴졌다.
마침내 질문이 올바른 곳을 짚었다.
“전이요.” 리즈가 말했다.
“항상?”
“항상은 아니에요. 하지만 반응한 것들은 대개 그 전에 거길 거쳤어요.”
마송이 몇 분 만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거기라면 어디죠?”
리즈는 탁자를 보았다.
종이 여덟 장.
타르디외의 손.
정전기 방지 봉투.
두 번째 빈 봉투.
공기 중에 발음되는 것만으로도 서류의 성격을 바꿔 버리는 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다.
“밤이요.” 리즈가 말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냉방 장치 소리마저 작아진 듯했다.
정적을 가장 먼저 깨뜨린 사람은 코르넥이었다.
“지금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리즈는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
모서리를 둥글리고.
번역하고.
합리화하고 싶었다.
타르디외가 짧은 손짓으로 막았다.
“아뇨. 떠오르는 말을 그대로 두세요.”
리즈는 숨겨진 장치의 이름을 방금 불러 준 사람을 보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끔 형태를 꿈꿔요. 아니면 구체적인 물체를. 그걸 그리고, 조립해요. 그러면 때로는 응답해요.”
마송이 아주 차분하게 물었다.
“수면 장애로 진료받은 적 있습니까?”
잔인함은 단어가 아니라 말투에 있었다. 직업적이고, 열린 태도. 거의 다정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더 나빴다.
“아뇨.”
“환각은요?”
“없어요.”
“약물 복용은?”
“커피요.” 리즈가 말했다. “지나칠 정도로 많이.”
코르넥은 그 대답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타르디외는 달가워했다.
우스워서가 아니었다. 모두에게 필요했던 무언가를 다시 방 안에 들였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대답을.
타르디외가 다시 물었다.
“‘응답한다’는 건 뭘 말하는 겁니까?”
리즈는 천천히 숨을 쉬었다.
“하중 저하. 가벼워지는 것. 관성을 잃지 않은 채 겉보기 무게만 줄어드는 현상이요.”
코르넥이 수첩을 덮었다.
그 몸짓은 어떤 설명보다 의미가 컸다.
더 이상 절차 위반을 다루는 자리가 아니었다.
사실 진작부터 아니었다.
무거운 탁자
오전 중반, 타르디외는 더 무거운 것을 가져오라고 했다.
거대하거나 볼거리로 삼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장난감의 영역을 벗어날 정도면 충분했다.
유지 보수 기술자 두 명이 80킬로그램짜리 강철 블록을 낮은 운반차에 싣고 왔다. 그들은 정확히 무엇을 나르고 있는지 몰랐고, 그 사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빈 봉투에 들어갈 두 번째 장치를 내놓으라는 요구가 나왔다.
리즈는 목이 막혔다.
“없어요.”
타르디외가 눈을 들었다.
마송은 더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존재해요.”
“어디에?”
리즈는 그들이 아니라 탁자를 바라보았다.
“집에요.”
그 말은 지나치게 작게 울렸다.
코르넥이 순수한 분노의 숨을 내뱉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우리에게 거짓말한 겁니까?”
리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송이 무언가를 적었다.
타르디외는 그저 물었다.
“두 번째 장치는 첫 번째와 다릅니까?”
“네.”
“작동합니까?”
“아뇨.”
“확실해요?”
새 상자와 일요일, 짧은 부유, 수치심, 공책이 떠올랐다.
리즈는 대답했다.
“항상 그런 건 아니에요.”
코르넥이 타르디외를 향해 돌아섰다.
“이쯤 되면 이 사람이 우리를 놀리는 건지, 아니면…”
끝맺지 못했다.
다음에 올 단어를 아직 아무도 갖고 있지 않았다.
타르디외는 80킬로그램짜리 블록을 가까이 가져오게 했다.
“좋아요. 지금 있는 것으로 작업하죠.”
그사이 주황색 HSE 서류철을 들고 돌아온 리갈이 항의했다.
“더 무거운 하중에 대한 승인 절차도 없이 이걸 건드릴 수는 없습니다.”
타르디외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지금 절차를 만들려는 겁니다.”
그러고는 리즈에게 물었다.
“뭐가 필요하죠?”
뜻밖의 질문이었다.
“뭘 하려면요?”
“이게 반응할 공정한 가능성을 주려면.”
리즈는 압수된 장치를 보았다.
블록.
소형 시험기.
지나치게 하얀 형광등.
물잔.
코르넥의 손.
문가에 선 들로네의 꺼림칙한 침착함.
그리고 혼자 알아냈더라면 좋았을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장소가 중요했다. 물체와 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여기서는 안 돼요.” 리즈가 말했다.
리갈이 짜증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굉장하군.”
타르디외는 반응하지 않았다.
“왜 여기서는 안 되죠?”
“너무 깨끗하니까요.”
뒤이은 침묵은 거의 우스꽝스러웠다.
코르넥이 말했다.
“뭐라고요?”
수치심이 치밀었지만 한번 밖으로 나온 말은 되돌아가기를 거부했다.
“14번 작업대에서는 진동이 달랐어요. 작업 동이 있었고. 주위에 무거운 것들이 있었고. 구조물들, 소음도. 여기는 모든 게… 닫혀 있어요.”
리갈이 짧게 웃었다.
“이제는 정비에 시까지 끌어들이는 겁니까?”
클레르 타르디외가 두 손을 탁자 위에 올렸다.
“아뇨.” 그녀가 말했다. “시험 환경을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리즈에게 말했다.
“물리적 맥락이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군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떻게인지는 모르고.”
“네.”
타르디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논의를 끝낼 때가 아니라 내면의 문을 열 때처럼 좋아요라고 말했다.
“위로 올라가죠.”
금지된 말
잠시 뒤 그들은 필요 이상으로 많은 사람을 데리고 14번 동에 돌아왔다.
군중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공기를 바꿔 놓기에는 충분했다.
기술자 두 명.
리갈.
코르넥.
들로네.
타르디외.
그리고 저 뒤편에는 끝내 존재를 지우지 못한 게 분명한 하산.
14번 작업대는 다시 작업대다운 몰골을 되찾았다. 이전보다 덜 순진하고, 더 촘촘히 감시받고 있었다.
탁자는 여전히 지나치게 반짝였다.
80킬로그램짜리 블록은 운반차 위에서 기다렸다.
타르디외가 물었다.
“어디에 놓죠?”
리즈는 탁자 아래 공간을 가리켰다.
“저기요.”
“그다음에는?”
“그다음엔 보는 거죠.”
리갈이 눈을 굴렸다.
“뭘 봅니까?”
내가 깔끔한 절차를 써 줄 만큼 알았다면 우린 이미 이 방에 있지도 않았을 거예요, 리즈는 쏘아붙이고 싶었다.
대신 말했다.
“붙는지.”
의식적으로 고르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붙다. 작동하다도, 활성화되다도, 응답하다도 아닌.
코르넥이 즉시 짚었다.
“붙는다?”
리즈는 블록을 보았다.
그다음 장치를.
그러고는 자신의 두 손을.
“네.”
소리 없이 작업 동 한쪽에 도착해 뒤에 서 있던 마송이 그 말을 적었다.
타르디외도 적었다. 다만 머릿속에.
그게 보였다.
리즈는 장치를 연결했다.
작업 동은 그들 주위에서 나직이 진동했다. 멀리 움직이는 천장 크레인, 옮겨지는 고철, 외벽 패널을 때리는 바람, 후진 경고음, 칸막이 뒤에서 눌려 들려오는 말 한마디.
건물 너머로 항구 전체가 자신은 깨끗한 곳이 아님을 일깨웠다.
리즈는 일 초 동안 눈을 감았다.
꿈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 상자가 떠올랐던 내면의 장소를 다시 찾기 위해서였다.
80킬로그램짜리 블록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화면의 수치가 흐르기 시작했다.
79.8.
리갈이 한 걸음 내디뎠다.
코르넥이 말했다.
“아무도 손대지 마세요.”
하중이 변하자 운반차가 신음했다.
블록은 튀어 오르지 않았다.
그저 숨결만큼 바닥에서 떨어졌다. 아래로 빛이 지나갈 만큼. 작업 동 안의 누구도 더 이상 잘못 봤다고 시치미 뗄 수 없을 만큼.
하산이 낮게 욕설을 뱉었다.
리갈은 굳어 버렸다.
들로네는 일 밀리미터도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이 방금 다른 직무에 들어섰음을 아주 명백히 알리는 방식이었다.
클레르 타르디외는 블록을 보지 않았다.
리즈를 보았다.
그리고 리즈는 마침내 이 이야기 속에도 놀라기 전에 생각할 만큼 위험한 사람이 있음을 깨달았다.
블록이 단번에 무게를 되찾았다.
운반차가 바퀴 위로 쾅 내려앉았다.
소리가 작업 동을 가로질렀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삼 초 동안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뒤이어 리갈이 아주 낮게 말했다.
“맙소사.”
타르디외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계속 리즈를 응시했다.
“이게 존재한다는 걸 언제부터 알았죠?”
진실한 대답이 치밀어 올랐다가 여러 조각으로 부서지는 게 느껴졌다.
수요일부터. 이 년 전부터. 첫 번째 꿈부터. 물체들이 다른 방식으로 버텨도 되느냐고 허락을 구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리즈는 아직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덜 거짓된 대답을 골랐다.
“충분히 오래전부터는 아니에요.”
타르디외는 일 초를 흘려보냈다.
그러고는 말했다.
“여기서 중단하죠.”
코르넥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중단한다고요?”
“이 사안은 더 이상 HSE 감사나 단순한 품질 처리에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중단합니다.”
리갈이 항의했다.
“죄송하지만 중대한 산업 보안 문제인 건 분명하지 않습니까…”
“맞아요.” 타르디외가 말했다. “그리고 다른 문제이기도 하고.”
그런 다음 들로네에게 말했다.
“작업대를 봉쇄하세요.”
코르넥에게는 말했다.
“모든 로그, 모든 영상, 모든 출입 기록, 모든 보고서를 한곳에 모아요. 광범위하게 공유하지는 말고.”
마송에게.
“정오까지 강화된 기밀 유지 체계를 마련해 주세요.”
마지막으로 리즈에게 말했다.
“당장은 집에 돌아가지 마세요.”
운반차와 그 위의 블록을 둘러싼 14번 동은 다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 침묵에는 더 이상 작업장다운 구석이 없었다.
강철 덩어리 사건 이후 처음으로, 이 현상은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목격자를 얻었다.
너무 빨리 말하는 것.
제6장
파일
그들이 가져간 것
오전 내내 리즈는 휴대전화도 출입증도 없이 제6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주인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물건들만이 아니라는 감각이 갈수록 선명해졌다.
들로네는 아무 말 없이 둘 다 가져갔다.
먼저 출입증.
그다음 휴대전화.
투명한 봉투에 넣은 뒤, 리즈가 읽지도 않은 간단한 인수증을 앞에 놓았다. 문 가까이에 서 있던 코르넥은 이제 숨길 생각조차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이해하기 위해 그곳에 있는 게 아니었다. 어떤 것도 새어 나가지 못하게 막으려고 있었다.
마송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글을 썼다. 벌써 세 차례의 검토와 두 가지 소송 가능성, 행정기관의 그림자를 등에 업은 문장을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타르디외는 탁자와 문, 복도가 보이는 내부 유리창 사이를 오갔다.
“사업장 밖에 물건이 몇 개 있습니까?” 마송이 물었다.
리즈는 물잔을 바라보았다.
“두 개요.”
코르넥이 고개를 들었다.
“하나라고 했잖아요.”
“기억난 걸 말했어요.”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 마십시오.” 마송이 말했다.
그는 단어 하나를 긋고 다시 썼다.
“다시 묻겠습니다. 회사가 관심을 가질 만한 물건이 사업장 밖에 몇 개 있습니까?”
회사. 우리도, 이 부서도, 작업장도 아니었다. 회사.
리즈의 목덜미가 차가워졌다.
“장치 하나. 종이들.”
“어떤 종류의 종이죠?” 마송이 물었다.
“그림이요.”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습니까?”
“일부는요.”
“날짜가 적혀 있습니까?”
“일부는요.”
코르넥이 메마른 숨을 내뱉었다.
“보이죠, 클레르? 이건 벌써 작업대에서 벌인 장난 수준을 한참 벗어났어요.”
타르디외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내 눈에는 이걸 공정 편차라고 부르려다 사십팔 시간을 허비한 것만 보여요.”
마송이 두 번째 서류를 리즈 쪽으로 밀었다.
“사업장 밖의 자료를 회수하겠습니다. 동행해 주십시오. 열쇠가 필요합니다.”
리즈는 움직이지 않았다.
“거부하면요?”
“거부 사실을 기록하겠습니다.” 마송이 말했다. “그러면 다음 단계가 훨씬 거칠어집니다.”
타르디외가 멈춰 서서 의자 등받이에 두 손을 짚었다.
“이 일로 시간을 낭비하게 하지 마세요. 작업 동에서 보여 준 현상이 정오까지 그룹 담장 안에만 머물지는 않을 겁니다.”
그 말은 즉시 살을 물었다.
그룹 담장 안.
그렇다면 바깥으로.
그렇다면 위로.
리즈는 주머니에서 아버지 아파트의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황동 열쇠 두 개, 지하실용 작은 파란 열쇠 하나, 이제 그 이름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옛 조선소의 광고 열쇠고리.
마송이 받아 갔다.
그러고는 다시 무언가를 썼다.
리즈는 마침내 종이 맨 위를 바라보았다.
‘진동 자극하의 부양력 이상.’
한 번 더 읽었다.
그들에게는 아직 맞는 단어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손안에 넣고 있었다.
앙드레 바렌의 집
그들은 차가운 플라스틱과 쏟은 커피 냄새가 나는 회색 차를 탔다.
운전은 들로네가 했고 코르넥은 앞에 앉았다. 리즈는 뒤에 혼자였다. 휴대전화도 없이, 여전히 부은 손가락을 들여다보며, 화재 뒤에 남은 자기 삶을 구경하러 끌려가는 듯한 터무니없는 기분에 빠져 있었다.
다리 위에서 하늘이 조금 열렸다. 루아르강은 더러운 쇠의 빛깔을 그대로 간직했다. 크레인들은 자신들보다 더 거대한 무언가에 꽂힌 공구처럼 수평선을 갈랐다.
십 분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 코르넥이 물었다.
“다른 공책도 있습니까?”
“네.”
“많아요?”
“충분히요.”
“그건 언제 줄 생각이었죠?”
리즈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가 뭘 넘기는 건지 이해하고 나서요.”
코르넥은 얼굴을 보여 줄 만큼만 몸을 돌렸다.
“그걸 혼자 결정할 단계는 이미 지났어요.”
하지만 이 모든 게 나를 거쳐서 나온 건 맞잖아요, 리즈는 대꾸하고 싶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펜오에의 건물은 계단 먼지와 오래된 수프, 지나치게 뜨거운 물에 한 빨래 냄새로 그들을 맞았다. 이 층의 이웃 여자가 문을 살짝 열어 들로네를 보고, 코르넥을 보고, 그들 사이에 있는 리즈를 보더니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이런 곳 사람들은 자기와 상관없는 어떤 것이 점령한 층계를 알아보는 법을 알았다.
앙드레 바렌의 아파트는 사흘 전 리즈가 두고 간 그대로였다. 반쯤 내려온 덧문, 가구 같은 침묵, 비좁은 부엌, 임시 작업장으로 변한 안쪽 방.
코르넥은 사방을 살피는 일부터 시작했다. 경찰처럼이 아니라 너무 많이 속아 이제 어떤 서랍도 믿지 않는 여자처럼.
들로네는 현관 가까이에 머물렀다.
“빨리 하세요.”
리즈는 곧장 작은 방으로 갔다.
두 번째 장치는 낡은 작업복 천으로 싸여 회색 상자 안에 있었다. 그 옆에는 부엌에서 쓰던 스프링 공책, 낱장 두 뭉치, 그리고 나사 상자 아래에 검은 공책이 있었다.
검은 공책이야말로 이 문제의 진짜 더러운 심장이었다. 모든 것을 설명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말해 주기 때문이었다. 명료하지도 과학적이지도 않았지만, 파일의 무게중심을 플랜지와 링, 추적표에서 단숨에 멀리 옮기기에는 충분했다.
코르넥은 벌써 문간에 서 있었다.
“그겁니까?”
리즈는 회색 상자를 들었다.
“이건 그래요.”
첫 번째 종이 뭉치를 들었다. 두 번째도.
검은 공책은 나사 상자 아래에 일 초 동안 너무 오래 남아 있었다.
딱 일 초.
그보다 나은 방법을 꾸며 낼 시간이 없음을 깨닫기에는 충분했다.
리즈는 상자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며 일부러 와셔 봉지 하나를 떨어뜨렸다. 몸을 숙여 다른 것들과 함께 공책을 주운 뒤 재킷 아래, 등 뒤로 밀어 바지 허리 고무줄에 끼웠다.
서투른 동작이었다. 너무 컸고, 정말 감시하는 사람을 속이기에는 전혀 노련하지 못했다.
리즈가 몸을 일으키자 들로네가 바라보고 있었다.
코르넥이 아니라 들로네가.
일 초. 이 초.
그러더니 말했다.
“온종일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렸다.
그가 봤다는 것을 리즈는 알았다.
전부는 아니어도 충분히.
리즈는 상자를 코르넥에게 건넸다.
코르넥은 천을 펼쳐 죽은 장치를 살피고, 이어서 종이들을 보았다.
“전부예요?”
리즈는 너무 빨리 대답했다.
“아뇨.”
코르넥이 눈을 들었다.
“뭐라고요?”
“오늘 당신들에게 필요한 건 전부라는 뜻이에요. 나머지는 집안 서류와 장부, 상관없는 메모예요.”
코르넥이 다시 몰아붙이려는 순간, 거실의 유선전화로 마리안의 전화가 걸려 왔다.
낡은 회색 전화기가 죽은 아파트 안에서 완벽하게 천박한 소리를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네 번째 울림에 코르넥이 들로네를 보았다.
“받을 겁니까?”
“절대로 안 받습니다.”
마침내 벨소리가 그쳤다.
뒤이어 찾아온 침묵은 더 끔찍했다.
리즈는 상자와 허락된 종이들을 들고 말했다.
“가죠.”
파일
그들이 C동으로 돌아왔을 때 서비스 출입구 앞에는 도청 차량 한 대가 서 있었다.
경광등도 없고, 눈길을 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행정 번호판을 단 짙은색 세단 한 대뿐. 문 앞에서는 남색 코트를 입은 여자가 마송과 이야기를 나누며, 곧 자신에게 덮쳐 올 것을 담기에는 지나치게 얇은 마분지 파일을 살피고 있었다.
타르디외는 제4기술실에서 그들을 기다렸다.
살아 있는 장치는 이미 탁자 위에 있었다.
죽은 것이 그 옆에 놓였다.
리즈는 둘이 나란히 놓인 모습을 보고, 두 장치가 가까워질 때마다 되살아나는 오래된 혐오감을 느꼈다. 같은 물질, 같은 구조, 같은 닫힌 얼굴. 그러나 둘 가운데 하나만 때때로 세상을 가볍게 만들기를 받아들였다.
도청에서 온 여자가 들어왔다.
“소피 르세르프, 도지사 비서실입니다. 국방·안보 담당입니다.”
목소리는 전혀 공격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나빴다. 가장 심각한 문제들은 얇은 파일에 담겨 도착한다는 걸 이미 아는 사람처럼 말했다.
탁자에는 암호화된 검은 전화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스피커가 켜져 있었다.
이미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크지도 연극적이지도 않은 목소리. 복종받기 위해 힘줄 필요가 없는 파리의 목소리였다.
“들립니까?”
마송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타르디외도. 르세르프는 아무 말이 없었다.
목소리가 계속했다.
“무엇보다 먼저 가공되지 않은 사실을 듣고 싶습니다. 가설은 빼고.”
방 안의 분위기가 즉시 바뀌었다.
코르넥은 경과를 요약했고, 타르디외는 형태에 관해 설명했다. 마송은 지금까지 파악된 범위를 보고했다. 작업자 한 명, 반응하는 장치 하나, 대부분의 경우 비활성인 쌍둥이 장치 하나, 이전에 그린 그림 여러 장. 현 단계에서 광범위한 정보 공유는 없었음.
목소리가 물었다.
“지금 비교 시험이 가능합니까?”
타르디외가 리즈를 바라보았다.
“가능합니까?”
리즈가 대답했다.
“죽은 것부터요.”
죽은 것은 아무 일도 일으키지 않았다.
하중은 곧고 깔끔하게 유지됐다. 정상이라는 사실이 거의 모욕적이었다.
파리의 목소리는 논평하지 않았다.
타르디외가 말했다.
“살아 있는 것.”
리즈는 두 번째 장치를 놓고 자극 장치에 연결한 뒤, 누가 일러 줄 필요도 없이 시퀀스를 찾아냈다.
시험용 강철 블록은 거대하지 않았다. 40킬로그램. 비웃는 사람들을 입 다물게 하기에는 충분히 무겁고, 누구도 아직 시연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은 작은 질량.
화면의 수치가 흐르기 시작했다.
39.9. 31. 18. 6.
블록이 사 센티미터 떠올랐다.
높지는 않았다. 그러나 소피 르세르프가 기록을 멈추고, 코르넥이 일 초 동안 숨 쉬는 법을 잊고, 전화기 속 목소리가 온전한 침묵 하나를 흘려보낸 뒤 이미 유일하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기에는 충분했다.
“바렌 씨 말고 반응을 얻어 낸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더 이상 기술적인 질문이 아니었다. 물체보다 의존성에 관한 질문이었다.
마침내 타르디외가 말했다.
“현 단계에서는 없습니다.”
목소리가 물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달리 누가 이걸 붙게 할 수 있습니까?”
그 말이 몸을 관통하는 것을 리즈는 느꼈다.
붙다.
작업 동에서 썼던 것과 같은 말.
써서는 안 될 말.
“모르겠어요.” 리즈가 말했다.
목소리는 실망한 듯하지 않았다.
그저 더 주의 깊어졌다.
“좋습니다. 지금부터 이 사안은 일반 산업법 체계에서 벗어납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명령은 아무런 격앙도 없이 떨어졌다. 바로 그래서 고함으로 내린 지시보다 더 큰 피해를 입혔다.
목소리는 계속했다.
“르세르프 씨는 도청과의 연락망을 봉쇄하십시오. 타르디외 씨는 모든 흔적을 보존하고, 정보 공유를 최소화하며, 허가되지 않은 디지털 전송을 일절 금지하십시오. 마송 씨는 강화된 기밀 유지 체계와 모든 유효 자료를 즉시 압수할 권한을 마련하십시오. 바렌 씨는 추후 지시가 있을 때까지 상시 대기하며 계속 동행 감시를 받습니다.”
짧은 침묵이 있었다.
이어서 말했다.
“오후 이른 시간에 차량 한 대가 출발할 겁니다. 장소는 한 시간 뒤에 다시 논의하죠.”
통화가 끊겼다.
인사도 감사도 없었다. 텅 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잡음뿐이었다.
마송이 아침에 쓰던 것보다 두꺼운 회색 파일을 자기 앞으로 당겼다.
초기 보고서, 압수 인수증, 요약지 두 장, 로그의 첫 사본들, 두 장치를 나란히 찍어 인쇄한 사진을 그 안에 넣었다.
그런 다음 덮개에 검은 펜으로 적었다.
‘바렌 리즈’
‘비정상 부양력’
‘배포 제한’
리즈는 그 세 줄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사고가 아니었다.
하나의 파일이었다.
제7장
당분간, 브레스트
말끔한 이동
오후가 시작될 무렵, 리즈는 남들보다 조금 더 비밀스러운 사무실로 끌려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리즈가 한 번도 이용해 본 적 없는 출구로 현장을 빠져나가 철책을 따라가고, 물류 구역을 가로지른 뒤, 그녀에게 열 마디도 채 건네지 않은 채 낭트로 향했다.
마송과 코르넥은 함께였다.
들로네는 아무 표지도 없는 차를 몰았다. 권력이 갈수록 제 차체에서 흔적을 지우고 싶어 하는 세계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리는, 세련된 방식이었다.
뒷좌석에 앉은 리즈에게는 휴대전화도 출입증도 돌아오지 않았다. 받은 것은 소염제 한 알과 생수 한 병, 손도 대지 않은 비닐 포장의 삼각 샌드위치뿐이었다.
그들이 멈춘 작고 눈에 띄지 않는 터미널에서 누구도 신분증을 요구하지 않았다.
어두운 점퍼를 입은 남자가 리즈를 보고, 마송을 본 뒤, 문을 열었다.
계류장에는 회색 쌍발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프로펠러는 멈춰 있었고 동체는 낮았다. 말문을 틔울 만한 로고 하나 없었다.
리즈는 우뚝 멈췄다.
“지금 저 놀리는 거예요?”
마송은 화내지 않았다.
“아닙니다.”
“어디로 가는데요?”
그는 반 초쯤 망설였다. 대답할 권리는 있지만 잘못 대답하고 싶지는 않다는, 행정적인 망설임이었다.
“브레스트요.”
코르넥이 덧붙였다.
“당분간은.”
리즈는 비행기를 보고, 다시 그들을 봤다.
“당분간이 무슨 뜻이죠?”
들로네가 그녀를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보통은 너무 일찍 거짓말하는 걸 피한다는 뜻이죠.”
비행은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지만 밤샘 이동보다 더 깊은 피로를 남겼다.
쌍발기는 우아함이라고는 없이 거칠게 떨렸다. 창밖으로 해안선이 모양을 바꾸었다. 땅은 더 단단해지고 더 잘게 갈라졌으며, 강어귀보다는 탁 트인 대서양 쪽을 향하고 있었다. 리즈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코르넥은 잤다. 입을 다문 채 꼿꼿이 잠들어, 꿈조차 의심하는 여자 같은 인상을 단 한순간도 잃지 않았다.
비행기가 랑베오크 활주로에 닿았을 때 리즈는 또 하나를 깨달았다.
프랑스는 사실 즉흥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적어도 보통 의미에서의 즉흥은 아니었다.
오래된 행정 강국이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방식으로 움직였다. 이미 준비된 경로, 이미 지어진 장소, 돌발 사태를 맞이하도록 이미 훈련받았으면서도 그것을 결코 돌발 사태라 불러 주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비행기 아래에 차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더 멀리, 낮은 차단기 너머 바람에 두들겨 맞는 반도 도로 위에 또 한 대가 있었다.
두 번째 시설은 조금도 인상적이지 않았다.
창백한 건물 두 동. 두꺼운 유리창. 깃발 없는 깃대. 거의 텅 빈 주차장. 낮게 깎인 둔덕. 멀리 이중 철책 너머로 강철빛 회색 정박지 한 자락과 그보다 짙은 군항의 덩어리가 어렴풋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닌 척함으로써 특별해지는 것들을 더 잘 삼키는 부류의 장소였다.
진지한 사람들
그들은 리즈를 호텔 방도 병실도 아닌 방에 들였다. 양쪽에서 가장 좋은 것만 가져다 매끈한 우리로 바꿔 놓은 방이었다.
싱글 침대, 밝은색 책상, 흠잡을 데 없는 샤워실, 정박지를 향해 넓게 난 창문. 창문은 고작 15센티미터만 열렸다.
책상 위에는 누군가 새 모눈 수첩과 검은 펜 세 자루, ‘수면―자발적 관찰’이라는 제목의 양식, 그리고 ‘바렌’이라고만 적힌 흰 출입증을 놓아두었다.
여사, 방문객, 시설 같은 말은 없었다. 이름 하나뿐이었다.
그날 오후 늦게, 리즈는 4번 기술실보다 부드러운 분위기의 회의실로 안내되었다.
밝은 나무.
물병.
꺼진 화면.
창문은 없었다.
다섯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마송이 있었다.
그사이 어떻게 왔는지 알 수 없는 타르디외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실제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남색 코트를 회색 재킷으로 갈아입은 소피 르세르프.
지나치게 짧게 자른 백발에 마른 체격, 어두운 정장을 입은 남자. 말없이 방 전체를 장악하는 태도만 아니라면 거의 평범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마흔다섯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 맨손, 수수께끼보다 은유에 더 성가셔하는 물리학자의 지친 눈빛.
마송이 소개했다.
“피에르알랭 세귀르, 국방·국가안보 사무총국입니다.”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아리안 소렐, 구조와 복합 결합을 전문으로 하는 물리학자입니다.”
여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들리는 것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에요. 그래도 기적이라는 말보다는 덜 거짓말이죠.”
리즈가 앉았다.
세귀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바렌 씨, 간단한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여기 있는 누구에게도 당신을 범죄자처럼 다룰 이유는 없습니다. 둘째, 이제 누구도 당신을 평범한 직원처럼 다룰 권리는 없습니다.”
그는 친근한 척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요?” 리즈가 물었다.
“그러니 우리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가능한 한 어리석은 짓을 줄이면서 일할 겁니다.”
아리안 소렐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중요한 부탁을 하나 하죠. 지금부터 특정한 단어들은 피하세요.”
리즈가 눈을 깜박였다.
“어떤 단어요?”
“우선 반중력. 그리고 지친 기술자들의 종교처럼 들리는 말은 전부요.”
타르디외가 거의 미소를 지을 뻔했다.
소렐은 계속했다.
“현재 당신이 보여 준 것은 매우 특수한 조건에서 일어난 국소적인 겉보기 양력의 변화입니다. 관성은 감지 가능한 수준으로 보존되고 있고요. 그것만으로도 이미 엄청납니다. 민간전승까지 보탤 필요는 없어요.”
리즈가 말했다.
“민간전승 같은 말은 한 적 없는데요.”
“좋아요.” 소렐이 대답했다. “그럼 우리 모두 하지 맙시다.”
세귀르가 두 손을 맞잡았다.
“급한 일이 세 가지입니다. 이 현상이 재현 가능한지 알아내는 것. 당신에게 얼마나 의존하는지 알아내는 것. 그리고 오늘 밤 이 일이 이 범위를 벗어난다면 누가 무엇을 알게 될지 파악하는 것.”
리즈는 한 사람씩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녀를 현혹하러 온 것도, 공포에 떨게 하러 온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 더 위험했다. 그녀를 합리적인 사람으로 만들러 와 있었다.
국가가 보호라 부르는 것
회의는 심문 같은 어조를 띠지 않았다.
그보다 나빴다.
관리와 돌봄의 어조를 띠었다.
그들은 수면 시간, 복용 약, 편두통, 처음 도형을 그린 정확한 날짜, 그 형태를 보았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의 이름, 물체가 더 잘 먹히던 순간, 장소와 소음과 주변 질량의 영향, 술이 무언가를 바꾸는지까지 물었다.
리즈는 때로 정확하게, 때로는 그렇지 않게 대답했다.
부정확한 답이 나올 때마다 마송이 적었다. 신체적인 세부가 나올 때마다 소렐이 고개를 들었다. 안보와 관련된 결과가 나올 때마다 르세르프가 서류철의 무언가에 표시했다. 그리고 세귀르는, 제대로 일하는 진짜 국가 공복들이 하는 일을 했다. 언제부터 한 나라가 단 하나의 몸에 의존할 수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그가 물었다.
“오늘 전까지 꿈 이야기를 누구에게 한 적이 있습니까?”
리즈는 마리안을 생각했다. 에둘러 한 말들. 자신의 지친 농담들.
“아뇨.”
완전히 진실은 아니었다. 기계 속으로 들어가기에는 충분히 진실이었다.
세귀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 좋습니다는 칭찬이 아니었다. 처리해야 할 누출이 하나 줄었다는 뜻일 뿐이었다.
르세르프가 얇은 서류철을 열었다.
“지금부터 당신은 강화된 보호 및 기밀유지 체계의 적용을 받습니다.”
리즈가 눈을 들었다.
“누구에게서 보호하는데요?”
르세르프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정해진 문구를 내뱉는 것보다는 정직했다.
“외부로부터요. 그리고 당신의 존재가 너무 빨리 유통되는 것으로부터.”
리즈는 거의 웃을 뻔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세귀르가 대신 대답했다.
“우리가 앞으로 마흔여덟 시간 동안 상황을 저절로 굴러가게 내버려두면, 당신은 더 이상 고용주나 도청만 상대하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장관실, 산업체, 대사관, 우호국 정보기관, 덜 우호적인 정보기관, 당신을 설득하거나 사들이거나 보호하거나 진단하거나 고립시키거나 더 큰 조직 안에 녹여 버리려는 사람들을 상대하게 되겠죠. 그런 시작은 피하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 말들은 공기 속에 깨끗한 쇠 맛을 남겼다.
리즈는 세귀르를 다른 눈으로 보았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적어도 완전히는.
다만 이미 국가의 언어로 정리된 진실 하나를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 당신들은요?” 그녀가 물었다. “뭐가 다른데요?”
처음으로 세귀르에게 거의 인간적인 움직임이 스쳤다. 미소는 아니었다. 그보다 더 지친 무엇이었다.
“우리는 그 일을 프랑스어로 합니다.”
마송이 펜 뚜껑을 닫았다.
맞은편의 타르디외가 잠깐 눈을 내리깔았다.
우스운 광경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정박지를 벽 너머에 둔 이 깨끗한 회의실에서, 말 하나하나가 폭발물처럼 무게를 달고 있는 가운데, 그 말은 정확한 무언가를 뜻했기 때문이다.
절차, 비밀, 국가이성, 예의, 포획. 그리고 그녀가 쓸모 있고 그럭저럭 똑바로 서 있는 동안에는 당장 산산이 부수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약속.
아리안 소렐이 침묵을 깼다.
“오늘 밤은 여기서 자요.”
리즈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라고요?”
“여기서요. 수면제도 술도 화면도 안 됩니다. 무언가 떠오르면 전부 적으세요. 그림, 단어, 순서, 감각. 날짜를 쓰고 서명한 뒤 연락해요.”
소렐은 검지 끝으로 새 수첩을 가리켰다.
“방에 있는 수첩이요.”
리즈는 분노가 한 단계 온전히 치솟는 것을 느꼈다.
“내 꿈을 감시하겠다는 거군요.”
소렐은 매섭지 않게 대답했다.
“아뇨. 꿈이 남기는 것을 측정하려는 겁니다.”
조금도 안심되지 않았다.
18호실
그날 저녁, 리즈는 지나치게 깨끗한 18호실 침대에 양말을 신은 채 누워, 열림이 제한된 창문의 검은 선을 뜬눈으로 바라보았다.
옷은 돌려받았지만 휴대전화는 받지 못했다.
먹을 만한 수프와 갓 구운 빵, 나중에 수거해 갈 식판, 복도 두 곳과 세면실 하나까지만 다닐 수 있는 내부 출입증을 받았다. 그 이상은 없었다.
문 앞에 경비원은 없었다. 필요 없었다.
문손잡이는 열렸다.
건물은 열리지 않았다.
책상 위에서 모눈 수첩이 기다렸다.
쳐다보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 결국 앉아서 펼쳤다.
첫 장에는 이미 항목들이 인쇄되어 있었다.
‘추정 입면 시각’
‘기상 시각’
‘주관적 수면의 질’
‘구조화된 이미지의 출현 여부’
‘즉시 작성한 스케치’
리즈는 수첩을 탁 소리가 나게 덮었다.
가장 폭력적인 것은 이곳으로 옮겨졌다는 것도, 물건을 빼앗겼다는 것도, 자신의 삶이 벌써 국가의 단어들 아래 재분류되고 있다는 것조차 아니었다. 가장 폭력적인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은 불과 몇 시간 만에 그녀의 잠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리즈는 큰 천장등을 켜지 않은 채 세면실로 갔다. 세면대 위 거울 속에는 머리카락이 눌리고 손가락에는 아직 자국이 남아 있으며, 정오보다 늙어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셔츠를 풀었다. 남들이 보기 전에 의학적 자료처럼 자신을 들여다보려는 게 아니었다. 센서와 항목들에 둘러싸이기 전, 그저 쓸모만 있는 것은 아닌 몸을 다시 온전히 소유하기 위해서였다.
욕망은 부드러움보다 반항에 가까운 모습으로 서툴게 찾아왔다. 하산의 모습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입술 하나, 쇄골에 닿아 터지던 웃음, 작업용 티셔츠 밑으로 들어온 지나치게 뜨거운 손의 기억. 리즈는 눈을 감고 차가운 문에 기대 선 채, 거의 화를 내듯 스스로에게 쾌락을 주었다. 꿈을 불러내려 하지도, 현상에게 대답을 요구하지도, 아름답거나 깊어지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살아 있기 위해서였다.
끝난 뒤에도 그녀는 몇 초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웃지도 울지도 않으려고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국가가 그녀에게 기다리는 것은 어쩌면 밤을 타고 올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니다.
밖에서 바람보다 무거운 숨결 하나가 밤을 가로질렀다.
폭풍이 아니었다. 정박지의 함선이었다.
검은 물속에서 천천히 자리를 옮기는 질량.
리즈는 아버지와 14번 작업 구역, 무쇠 추, 재킷 안에 감추었다가 이제는 자신이 가질 수 없게 된 가방의 이중 바닥에 말아 넣은 검은 수첩을 생각했다.
들로네는 그것을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빚도 이제 존재했다.
한참 뒤, 누군가 짧게 두 번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세귀르가 문 너머에서 말했다.
“바렌 씨?”
“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죠.”
리즈는 문을 열지 않은 채 몸을 일으켰다.
“오늘 밤 무언가 떠오르면 아침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목소리는 차분했다. 거의 행정적이었다. 그러나 그 밑에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이제부터 아무것도 요구한 적 없는 한 여자의 잠을 통과할 것에 온 나라가 의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과장 없는 고백.
리즈는 수첩을 보았다.
문을 보았다.
자신의 두 손을 보았다.
그리고 무쇠 추 이후 처음으로, 아주 빠르게 새로운 능력을 익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국가가 예의를 갖추기 시작하는 순간, 자신이 아는 것을 전부 내주지 않는 능력.
제8장
관객 없는 증명
밤이 남긴 것
그녀는 거의 자지 못했다. 온전한 잠은 한 번도 없었다. 조각조각 끊어 잤다.
18호실은 그녀 주위에 새로운 피로를 만들어 놓았다. 14번 작업장보다 깨끗하고, 그만큼 더 굴욕적인 피로. 감시받는 피로였다. 침대 시트에서는 산업용 세제 냄새가 났다. 환기구는 의료진 같은 인내심으로 바람을 불어냈다. 때때로 멀리서 정박지나 이웃 건물의 금속음이 들려와, 국가에는 언제나 비축된 질량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두 시 십육 분, 그녀는 천장을 향해 눈을 뜬 채 깨어났다.
무쇠 추도, 아버지의 상자도, 강철 블록도 꿈꾸지 않았다.
밤이 남긴 것은 다른 것이었다. 작업대에 올리기에는 너무 큰 형상, 어두운 직육면체를 둘러싼 열린 요람 같은 구조였다. 비워 둬야 할 빈자리 세 곳과, 확신한다는 사실이 부끄럽다는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 없는 방향.
그녀는 누운 채 움직이지 않았다.
한 손을 이불 밑으로 넣어 손바닥을 배에 댔다. 다정한 마음에서가 아니라 말이 덮치기 전에 몸이 아직 그 자리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밤은 도구처럼 정밀하게 그녀를 관통했다. 이것을 꿈이라 해야 할지, 직관이라 해야 할지, 침입이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몸이 자신보다 먼저 알아들었다는 것, 그 앞섬이 벌써부터 박탈과 닮았다는 것만은 알았다.
책상 위에서 수첩이 기다리고 있었다.
리즈는 문밖의 세귀르와 말끔한 단어를 쓰는 소렐, 기적보다 기적이 침묵하는 지점을 바라보던 타르디외를 생각했다. 압수당한 가방의 이중 바닥에 말려 있는 검은 수첩과, 그것이 재킷 밑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던 들로네도 생각했다.
그 빚은 장치의 부품이 되어 있었다.
두 시 이십사 분, 그녀는 일어났다.
모눈 수첩을 펼쳐 인쇄된 항목 아래, 처음으로 쓸 만한 페이지를 찾았다. 검은 펜촉은 지나치게 가늘었다. 리즈는 형상을 그렸다. 전부는 아니었다. 세 개의 받침. 가운데 빈자리. 오른쪽으로 열린 두 선. 블록의 대략적인 위치.
네 번째 간격은 그리지 않았다. 사물 안에는 없으면서도 다른 지시들보다 더 지저분한 명령처럼 꿈을 관통한 것. 열린 쪽이 물을 바라봐야 한다는 사실.
문도 북쪽도 아니었다. 물이었다.
그녀는 펜을 내려놓았다.
터무니없는 지시였다. 그런데도 온몸이 그것을 적기 싫다고 버티는 게 느껴졌다.
세 시 십 분, 다시 침대에 누웠다. 네 시에는 아무런 이미지도 없이 갑작스럽게 다시 잠들었다. 여섯 시 십일 분, 누군가 문을 두드리기 전에 복도 불빛이 문 밑으로 스며들었다.
아침에 온 사람은 모르는 여자였다.
“아침 식사입니다, 바렌 씨.”
식판에는 커피, 토스트 두 장, 요구르트, 사과, 접은 종이가 놓여 있었다.
리즈는 커피보다 종이를 먼저 집었다.
‘가족에게 예정에 없던 출장 사실을 알렸습니다. 기술적 세부 사항은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서명도, 부서 이름조차 없었다.
그녀는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거짓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나빴다. 딱 필요한 시간만큼만 진실이도록 만들어진 문장이었다.
일곱 시 삼십 분, 아리안 소렐이 클레르 타르디외와 함께 들어왔다.
소렐은 계절에 비해 너무 얇은 재킷 안에 검은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눈이 붉었다. 잠 때문이 아니라 읽은 탓이었다. 타르디외는 꺼진 태블릿과 아무 표시 없는 종이 서류철을 들고 있었다.
“잤어요?” 소렐이 물었다.
리즈는 흐트러진 침대를 가리켰다.
“그런 모양이네요.”
소렐은 웃지 않았다.
“뭔가 적었습니까?”
리즈가 수첩을 가리켰다.
타르디외가 집어 들었지만 곧바로 펼치지는 않았다.
“그 전에요. 솔직하게 대답해요. 일부러 빼놓은 게 있습니까?”
질문은 에두르지 않고 들어왔다.
리즈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언제나 빠진 건 있죠.”
“내 질문은 그게 아니에요.”
소렐이 팔짱을 꼈다.
“오늘 아침 불완전한 기록을 믿고 질량을 위험에 빠뜨릴 거라면 지금 아는 편이 낫습니다.”
리즈가 고개를 들었다.
“뭘 위험에 빠뜨리는데요?”
타르디외가 마침내 수첩을 펼쳤다.
“파리가 원하는 것보다는 덜한 것.”
“그러니까요?”
“지나친 것.”
소렐은 그림에 손대지 않고 바라보았다.
“우선 600킬로그램짜리 고정용 밸러스트입니다. 계측 장비를 달고 낮게 매단 뒤 기계적으로 구속해서, 폐쇄된 격납고 안에서 시험해요. 아무 일도 없으면 쓸모 있는 실패입니다. 무언가 일어나면 쓸모 있는 증거고요. 어느 쪽이든 누군가 예언자가 천직이었다고 깨닫기 전에 멈춥니다.”
리즈는 숫자를 들었다.
600킬로그램.
군항 기준으로는 대단하지 않았다.
한 몸에는 충분히 대단했다.
그녀가 말했다.
“격납고가 어디 있죠?”
소렐은 더 주의 깊게 그녀를 보았다.
“왜요?”
리즈는 망설였다.
네 번째 간격이 눈 뒤 어딘가에서 움직였다.
“그게 중요할지도 몰라요.”
절차
격납고 외부에는 눈에 띄는 번호가 없었다.
그들은 낮게 깔린 하늘 아래, 비 같은 색의 건물 두 채 사이를 걸어갔다. 들로네는 리즈보다 3미터 뒤에서 걸었다. 밀어붙일 만큼 가깝지는 않았다. 그의 침묵이 이동의 일부가 될 만큼은 가까웠다.
리즈가 커피를 마시는 동안 가방은 18호실 입구의 플라스틱 상자에 놓여 있었다. 돌려받은 것은 손수건 하나, 머리끈 하나, 이제 아무 쓸모도 없는 자동차 열쇠뿐이었다.
검은 수첩은 사라졌다. 리즈는 묻지 않았다.
격납고 안은 추웠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냄새에 안도했다. 젖은 금속, 먼지, 기름, 소금. 4번 기술실의 하얀 냄새가 아니었다. 일해 온 사물들의 냄새였다. 노란 천장 크레인이 지붕 구조 아래 잠들어 있었다. 안쪽의 닫힌 커다란 문은 부두 구역으로 이어졌다. 그 너머로 물소리가 들렸다. 소리라기보다 몸 없는 거대한 짐승이 콘크리트에 기대 마음을 바꾸는 질량처럼.
밸러스트는 표지선으로 둘러친 구역 중앙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강철 띠를 두른 철근콘크리트 블록. 위쪽 고리, 긁힌 옆면, 스프레이로 칠한 숫자. 측정용 받침대에 붙은 기록표에 따르면 620킬로그램. 하중 센서 네 개. 안전띠 두 개. 이동식 지지대. 바퀴 달린 테이블 위의 데이터 수집 장치.
볼거리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무서웠다.
세귀르는 이미 와 있었다. 르세르프도 있었다. 마송은 수집 장치 옆에서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회색 작업복을 입은 기술자 두 명은 좀처럼 내려오지 않는 지시를 기다렸다. 타르디외는 수첩을 소렐에게 건네고 리즈 곁으로 왔다.
“요청받기 전에는 아무것도 만지지 마세요.”
“이제 익숙해질 것 같네요.”
“아뇨.” 타르디외가 대답했다. “당신의 몸짓 하나하나가 자료나 증거나 과실이 된다는 사실을 이제 겨우 이해하기 시작한 겁니다. 아직 사람이 충분히 적어서 이게 대화처럼 보일 때 말해 두는 편이 낫겠네요.”
소렐은 투명한 임시 케이스 안에 갇힌 작동 중인 조립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장치는 고정판에 붙어 있었고, 고리들과 표시된 링이 보였다. 조인 곳마다 빨간 선이 그어져 있었다. 고물 같은 추함은 사라졌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벌써부터 말끔해지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요.” 소렐이 말했다.
이 자리에 없는 리갈이 들었다면 기뻐했을 것이다.
타르디외가 물었다.
“뭐가요?”
“이해하지도 못하는 물건에 진열함부터 마련해 주는 속도가요.”
표지선 건너편에서 세귀르가 대답했다.
“표지선의 목적이 그겁니다.”
“아닙니다.” 소렐이 말했다. “표지선의 목적은 우리가 어리석게 죽지 않게 하는 거예요. 증거보다 높은 곳에서 생각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리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렐은 경멸 없이 말했다.
가진 수단이 이것뿐이니 신중하자는 식으로.
세귀르는 턱을 한 번 움직여 정정을 받아들였다.
“그럼 증거에서 출발해 생각합시다.”
첫 번째 절차는 리즈 없이 진행되었다.
소렐이 요구한 일이었다.
“이 물체가 당신 손 아래서만 작동한다면 알아야 합니다. 당신이 없어도 당신 그림만으로 작동한다면 그것 역시 알아야 하고요. 어느 조건에서도 작동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당신의 존재를 법칙으로 착각하는 일은 피할 수 있겠죠.”
리즈는 밸러스트에서 4미터 떨어진 노란 선 뒤에 세워졌다.
기술자가 수첩 그림대로 조립체의 방향을 맞췄다. 소렐은 두 번 다시 하게 했다. 타르디외가 표시를 확인했다. 마송은 정확한 시각을 물었다. 르세르프는 참석자들을 적었다. 세귀르는 행정적인 세부가 때로 신화에 빠지지 않게 해 주는 유일한 수단임을 아는 사람 특유의 집중력으로 그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가동.
센서가 하중을 받았다.
619.8.
아무 일도 없었다.
수집 장치에는 거의 직선인 선이 그어졌다.
30초를 기다렸다.
그다음 1분.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소렐은 실망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조금 안도한 듯했다.
“좋아요.”
리즈는 웃을 뻔했다.
“당신도요?”
“나도 뭐요?”
“안 될 때 그렇게 말하네요.”
소렐은 지친 얼굴을 그녀에게 돌렸다.
“제대로 안 될 때는 그래요. 흔히 그때부터 일이 시작되니까.”
타르디외가 두 번째 시험을 요청했다.
같은 결과였다.
세 번째에는 센서 수치가 1킬로그램만큼 움직였다가 무거운 정직함으로 되돌아왔다.
세귀르가 물었다.
“측정 잡음입니까?”
소렐이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고는 리즈를 한 번 보고 덧붙였다.
“아니면 부족한 걸 수도.”
그 단어가 그들 사이에 남았다.
부족하다. 거짓도 아니고 불가능도 아니다. 부족하다.
리즈는 자신이 적지 않은 부분 앞에 모두가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질량과 물
“뭐가 빠졌습니까?” 타르디외가 물었다.
그 질문은 더 이상 절차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리즈는 밸러스트와 조립체, 부두 문, 안전띠, 센서를 바라보았다. 바깥 벽 너머에서 물은 몸 없는 거대한 짐승의 느린 움직임으로 콘크리트를 밀고 있었다. 제대로 설명할 말을 찾았다.
그런 말은 없었다.
“열린 쪽 방향이 잘못됐어요.”
소렐이 수첩으로 눈을 내렸다.
“당신 그림에는 오른쪽으로 열려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렇게 썼죠.”
“무엇을 기준으로 한 오른쪽입니까?”
리즈는 충분히 빨리 대답하지 못했다.
타르디외가 남들보다 먼저 알아차렸다.
“기준점을 빼놓았군요.”
“확신이 없었어요.”
“어젯밤 내가 물은 건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말은 날카롭게 터지지 않았다.
조여 왔다.
리즈는 돌아보지 않고도 등 뒤에 들로네가 있음을 느꼈다.
세귀르가 두 걸음 다가왔다.
“바렌 씨.”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아주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르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것조차 받아들일 수 있어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불안정한 질량 주위에 여섯 사람이 서 있는 시험에서 유용한 정보가 감춰졌다는 사실을 사후에 발견하는 겁니다.”
불안정한 질량 주위의 여섯 사람. 그것이 이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정확한 정의라고 대꾸하고 싶었다.
그녀는 말했다.
“열린 쪽이 물을 바라봐야 해요.”
침묵.
경멸의 침묵이 아니라, 내부 변환의 침묵이었다. 모두가 자기 전문 분야 안에서 방금 들은 말을 넣어 둘 칸을 찾았다.
소렐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왜 물이죠?”
“몰라요.”
“꿈에서 봤습니까?”
“네.”
“그런데 적지 않았고요.”
“네.”
소렐은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떴을 때는 더 단단해져 있었다.
“그럼 간단하게 합시다. 조립체에 손대지 말고 기준을 직접 잡으세요. 당신이 방향을 지시하면 우리가 실행합니다. 아무 일도 없으면 실패를 기록해요. 무언가 일어나면, 이제 무엇이 사소한 세부인지 혼자 결정할 권리는 없습니다.”
“이미 제게 남은 권리는 별로 없는데요.” 리즈가 말했다.
세귀르가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책임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쓸데없는 비밀에 낭비하지 마세요.”
그 말은 리즈를 찔렀다.
국가가 한 말이어서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했을 법한 말이어서였다.
리즈는 노란 구역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그녀에게 손대지 않았다.
밸러스트 곁에 섰다. 바지를 뚫고 광물성 냉기가 느껴질 만큼 가까웠다. 블록은 무릎보다 조금 높았다. 추하고, 벗겨지고, 완벽히 무심했다. 620킬로그램에 이르는 오래된 복종.
리즈는 닫힌 부두 문을 바라보았다.
“저쪽.”
기술자가 판을 약 12도 돌렸다.
“아뇨.”
그가 멈췄다.
“덜요.”
소렐이 물었다.
“얼마나?”
리즈는 두 링 사이의 틈과 문 가장자리, 바닥의 녹슨 선 하나를 바라보았다.
“모르겠어요. 말끔하지 않게 될 때까지.”
기술자가 아주 조금 더 돌렸다.
조립체 속에서 형태가 아니라 존재감이 달라졌다.
“거기예요.” 리즈가 말했다.
그녀는 구역 밖으로 나왔다.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시각.
참석자.
초기 상태.
하중.
안전.
가동.
4초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수집 장치에는 620.1이 표시되었다.
그다음 617.
소렐이 한 손을 들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위쪽의 천장 크레인에서 짧은 삐걱임이 새어 나왔다.
“저 소리는 크레인 때문이 아닙니다.” 기술자 한 명이 너무 빨리 말했다.
소렐은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밸러스트는 곧장 바닥을 떠나지 않았다. 먼저 권위를 잃기 시작했다.
안전띠가 1밀리미터 느슨해졌다. 콘크리트에서 거의 은밀하고 내밀한 소리가 났다. 너무 오래 품은 생각에서 돌을 풀어 주는 듯한 소리였다. 긁힌 옆면에서 먼지가 조금 떨어졌다.
르세르프가 쓰기를 멈췄다.
세귀르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자신이 누구보다 먼저 알아들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블록이 떠올랐다.
높지는 않았다. 2센티미터, 어쩌면 3센티미터.
그러나 콘크리트와 강철과 습관으로 이루어진 620킬로그램 아래로 더러운 빛 한 줄기가 지나갔다. 해군의 폐쇄된 격납고에서, 우화를 믿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일곱 명의 목격자 앞에서.
아무도 욕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더 많은 것을 말했다.
밸러스트는 6초 동안 떠 있었다.
그러고는 무게를 되찾았다.
한꺼번에 내려오지는 않았다.
마치 자신이 배신하는 모습을 본 이들을 더는 모욕하지 않기 위해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 주겠다는 듯, 통제되고 거의 정중한 느림으로.
센서 수치가 올라갔다.
바닥은 둔탁한 충격과 함께 질량을 받아들였다.
국지 경보가 한 번 울렸다.
소렐이 직접 껐다.
그제야 그녀는 뒤로 물러났다.
경이에 찬 얼굴이 아니라 창백한 얼굴이었다.
“중단합니다.” 그녀가 말했다.
타르디외가 화면을 보았다.
“완전한 기록이 확보됐어요.”
“바로 그래서요.”
소렐은 안경을 벗어 스웨터 밑단으로 닦은 뒤 다시 썼다.
“지금부터 반복할 때마다 유혹이 됩니다. 깨끗한 증거 하나와 살아 있는 사람 하나를 남기는 편이 낫습니다.”
리즈는 한참 뒤에야 그 살아 있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원
그들은 창문 없는 회의실로 돌아갔다.
격납고는 리즈의 옷에 소금과 젖은 콘크리트 냄새를 남겼다. 그녀는 곡선보다 더 정직한 증거인 양 그 냄새에 매달렸다. 하지만 방 안은 다시 밝고 정돈되고 통제 가능한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물병은 새것으로 바뀌었다. 화면 하나가 켜져 있었다. 르세르프의 서류철은 더 이상 얇지 않았다.
화면에는 남자가 한 명 있었다.
아마 쉰 살쯤. 어두운 정장과 어두운 넥타이. 비행기에서 자고 두 엘리베이터 사이에서 결정을 내릴 것 같은 얼굴. 뒤쪽에는 흰 벽과 램프 하나. 창문은 없었다.
세귀르가 에두르지 않고 소개했다.
“아드리앵 보클레르, 엘리제궁 산업·국방 주권 고문입니다.”
그 단어는 격납고보다 더 큰 소리를 냈다.
엘리제궁.
리즈는 막연한 출장을 믿고 있을 어머니를 생각했다. 믿지 않을 마리안도. 이제 코르넥과 들로네의 발자국이 가로지르고 있을 펜오에의 아파트. 시설의 나머지 사람들이 아무것도 알기도 전에 이미 대통령궁까지 이어진 회로의 조그만 기원, 무쇠 추.
보클레르는 그녀가 괜찮은지 묻지 않았다.
리즈는 거의 고마울 뻔했다.
“기록을 봤습니다.” 그가 말했다.
세귀르보다 먼저 소렐이 대답했다.
“한 차례의 기록을 본 겁니다. 교리를 본 게 아닙니다.”
보클레르는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렐 씨, 아직 여기서 교리를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용도를 말해서도 안 됩니다.”
짧은 침묵.
세귀르는 개입하지 않았다.
마침내 보클레르가 고개를 기울였다.
“좋습니다. 의존성을 이야기하죠.”
그 단어가 방을 옥죄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가 계속했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서로 다른 질량을 대상으로 비정상적인 양력 효과가 여러 번 발생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조건에는 물질적 장치와 환경 구성, 그리고 바렌 씨의 직접적이거나 지연된 개입이 포함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그 개입이 기술적인지, 인지적인지, 심리적인지, 생리적인지, 아니면 그 밖의 무엇인지입니다. 우리가 막아야 할 것은 다른 누군가가 우리보다 먼저 질문을 정식화하는 일입니다.”
리즈가 물었다.
“우리가 누군데요?”
보클레르는 잠시 뜸을 들였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답이 너무 많아서였다.
“지금으로서는 제한된 소수입니다.”
“그다음은요?”
“그다음은 당신이 우리와 무엇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달렸습니다.”
소렐이 그를 향해 돌아섰다.
“방금 놓쳤어요.”
리즈는 자신도 모르게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보클레르도 마찬가지였다.
소렐은 낮은 목소리를 유지했다.
“이 여자는 자신에게 당장 불리한데도, 감춰 둔 정보 하나가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걸 입증했습니다. 협조를 권유받는 수단처럼 말하면, 다시 자신이 내놓을 것을 가려낼 겁니다. 그래도 할 말이 없어요.”
보클레르의 얼굴이 한 단계 굳었다.
방 안의 공기가 더 굳기 전에 세귀르가 말을 이었다.
“현 단계에서 바렌 씨는 용역업자도, 구금자도, 환자도 아닙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기존의 단어들이 피해를 내기 전에 틀부터 만들어야 합니다.”
격납고 이후 거의 말이 없었던 마송이 서류철을 열었다.
“현재 쓸 수 있는 기존 용어는 모두 부적절합니다. 지식재산권, 영업비밀, 국가기밀, 시설 보안, 신변 보호, 필요시 전문 역량 징발. 어느 하나도 전체를 제대로 포괄하지 못합니다.”
“노동법은요?” 리즈가 물었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마송이 대답했다.
“아직 존재합니다.”
“친절하시네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 대답은 벌거벗고 있었다.
타르디외가 격납고에서 나온 곡선의 인쇄본을 리즈 앞에 놓았다.
질량이 내려가 거의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단순한 선. 단순해 보이기에 괴물 같은 선.
“잘 봐요.” 타르디외가 말했다.
리즈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보았다.
“오늘부터 모두가 당신 없이 이 선을 원할 겁니다. 과학자들, 산업체, 군대, 국가들. 당신을 지키려는 사람들조차도. 특히 당신을 지키려는 사람들이요. 지금 알아둬야 합니다.”
“당신도요?”
타르디외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나도요.”
그 정직함은 협박보다 더 아팠다.
보클레르가 다시 말했다.
“대통령께 예외적인 체계를 제안할 겁니다.”
리즈는 한 박자 기다렸다.
“정확히 뭘 제안할 건데요? 내 밤을 기밀로 지정하자고요?”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세귀르는 그녀 앞에 놓인 새 수첩을 바라보았다.
“시간을 벌자고 제안할 겁니다.”
“나를 여기 붙잡아 두고요.”
“오늘 밤은 그렇습니다.”
“그다음은요?”
보클레르가 대답했다.
“그다음에는 공화국이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을 보호할 능력이 있는지 보게 되겠죠.”
리즈는 보호라는 단어를 들으며 엄청난 피로를 느꼈다.
이미 어디에나 있었다. 문 위에, 서류 안에, 세귀르의 언어에, 들로네의 침묵에, 그녀 대신 가족에게 연락한 방식에.
리즈는 인쇄된 곡선을 집었다.
손가락 사이에서 종이가 아주 조금 떨렸다.
“그런 식으로 보호받기 싫다고 하면요?”
당장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벽 너머 바깥에서 정박지는 여전히 일하고 있었다. 질량들이 움직였다. 선체들이 마찰했다. 어딘가에서 기계들이 돌았다. 오래된 세계와 무게와 명령과 사슬에 충실하게. 누구도 덜어 내는 법을 발견하지 못해서 여전히 버티고 있는 모든 것에 충실하게.
마침내 소렐이 말했다.
“그렇다면 다른 것을 발명해야겠죠.”
리즈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내가 발명하게 내버려둘 것 같아요?”
소렐은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않았다.
“당신이 시도하지 않으면 그들이 당신 없이 발명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라는 단어가 탁자를 가로질러 세귀르, 보클레르, 르세르프, 마송, 타르디외, 들로네와 리즈 사이에 내려앉았다.
아무도 주워 들지 않았다.
10시 56분, 아드리앵 보클레르는 아무도 이름을 알려 주지 않은 회의에 참석하러 화면에서 사라졌다.
11시 4분, 세귀르는 격납고 기록을 암호화된 저장장치 두 개에만 복사하고 어떤 네트워크에도 올리지 말라고 지시했다.
11시 10분, 소렐은 정신과 의사가 아닌 수면 전문의를 요청했다.
11시 12분, 리즈는 자신이 아주 작은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 아무도 그녀를 미쳤다고 결정하지 않았다.
11시 15분, 들로네가 노크도 없이 들어왔다.
그는 투명한 봉투 하나를 탁자 위에 놓았다.
안에는 검은 수첩이 있었다.
“가방에서 발견했습니다.” 그가 말했다.
리즈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녀를 보았다.
빚은 이제 주인이 바뀌었다.
세귀르가 물었다.
“그게 뭡니까?”
리즈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할 수도 있었다.
이미 충분히 거짓말해 봐서 그 말이 더는 소용없음을 알았다.
검은 수첩을 보고, 격납고의 곡선을 보고, 닫힌 문을 보았다.
“아직 내놓지 않은 것.”
제9장
도덕적 계약
펼쳐진 수첩
아무도 봉투에 손대지 않았다.
몇 초 동안 검은 수첩은 낡은 천 표지와 늘어난 고무줄, 마찰로 하얗게 닳은 모서리를 드러낸 채 탁자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거의 아무 무게도 없기에 620킬로그램짜리 밸러스트보다 더 불안한, 조그만 물건이었다.
리즈는 3년 전 신문 가판점에서 그 수첩을 샀다. 개스킷 번호와 정비 날짜, 늘 잊어버리던 부품 번호를 적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다른 것을 적게 되었다. 각도들. 아침에 떠오른 단어들. 정오에는 아무 뜻도 없다가 때로 이틀 뒤 물질을 움직이게 하는 문장들.
들로네는 문 곁에 남았다.
그는 발견된 무기처럼 수첩을 내려놓았지만, 얼굴은 그것이 무기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직은.
세귀르가 물었다.
“언제부터 쓴 겁니까?”
리즈는 봉투를 바라보았다.
“오래됐어요.”
마송이 펜을 들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해 주셔야 합니다.”
“2년 반쯤 됐을 거예요.”
“왜 숨겼습니까?”
리즈는 웃고 싶었다. 큰 소리가 아니라, 방 안의 예의를 조금 망가뜨릴 만큼만.
“내 거니까요.”
그 단어는 거의 무례할 만큼 단순하게 떨어졌다.
내 것. 격납고에서 그들이 본 것과 견주기에는 크기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학교 운동장과 주머니 속 열쇠, 손에서 빼앗기는 수첩 같은 냄새가 났다. 그런데도 그 말은 모두가 다시 숨을 쉬게 만들었다.
보클레르는 더 이상 화면에 없었다. 아쉬웠다. 전화도 출입증도 변호사도 없는 여자가 아직도 소유격을 감히 입에 올리는 순간 그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세귀르가 두 손을 맞잡았다.
“이해합니다.”
“아뇨.”
더 신중한 말을 고르기도 전에 입이 먼저 움직였다.
“당신은 수첩의 쓸모를 이해하는 거예요. 나머지는 아니고.”
소렐은 움직이지 않았다. 타르디외도 마찬가지였다. 르세르프는 아주 짧게 무언가를 적었다. 마송은 쓰기를 멈췄다.
“나머지가 뭡니까?” 세귀르가 물었다.
리즈는 투명 봉투를 가리켰다.
“안에는 형상만 있는 게 아니에요. 망친 밤들, 터무니없는 단어들, 날짜들, 통증들, 내가 읽을 줄 몰랐던 것들이 있어요. 아버지가 있을 이유도 없는 곳들에 나타나기도 해요. 성공한 적 없는 시험들도 있고요. 내가 저지른 실수를 당신들은 단서라고 생각할 겁니다. 압수품처럼 펼치면 손에 들어오는 건 종이뿐이에요. 안에 든 것을 이해하고 싶다면 내가 읽는 과정에 계속 있어야 해요.”
침묵의 밀도가 달라졌다.
이제 평가받는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포획이 취할 형태 자체였다.
소렐이 봉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봐도 됩니까?”
리즈는 망설였다.
“혼자는 안 돼요.”
“알겠습니다.”
모두가 그 대답을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다.
마송이 고개를 들었다.
“이 수첩은 이제 국가안보에 필요한 증거물입니다.”
“그럼 나는 뭔데요?”
그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리즈는 그 점이 거의 고마웠다. 너무 빠른 대답은 모욕이었을 것이다.
세귀르가 공격을 자신에게 돌렸다.
“지금으로서는 무엇을 너무 빨리 믿으면 안 되는지 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게 어디 적혀 있나요?”
“아직은 아닙니다.”
“그럼 그것부터 시작해요.”
마송이 종이 위에 펜을 내려놓았다.
“보장을 원합니까?”
“여러 가지를 원해요. 보장이라는 말은 너무 말끔해요.”
타르디외가 세귀르를 바라보았다. 웃지는 않았지만 얼굴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찬성이 아니라, 제자리에 놓인 저항을 알아보는 기색이었다.
소렐은 아주 느린 손길로 봉투를 열었다.
검은 수첩이 회의실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리즈는 얼굴로 낯선 수치심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물건을 빼앗고, 자신을 옮기고, 심문하고, 물리학에 속해야 할 곡선을 엘리제궁에 보여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앞에서 이 수첩을 펼치는 일에는 더 벌거벗은 폭력이 있었다. 자신의 정신이 쓸모를 갖기 시작한 바로 그 혼돈 속으로 들어오는 일이었다.
소렐이 첫 장을 넘겼다.
열린 우리를 그린 그림.
줄을 그어 지운 선 두 개.
날짜 하나.
그리고 비뚤게 적힌 문장.
‘빈자리는 중심에 있지 않다. 중심을 받아들이는 것이 빈자리다.’
마송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뜻이죠?”
“아무 뜻도 없어요.” 리즈가 말했다. “아니면 뜻이 있거나. 늘 그런 건 아니고요.”
소렐이 계속 넘겼다.
다음 장에는 스케치 세 개. 편두통에 관한 메모. 깨어난 시각. 뚜렷한 이유 없이 여백 한가운데 적힌 아버지의 이름.
타르디외가 다가왔다.
“실패한 날짜를 기록했네요.”
“늘 그런 건 아니에요.”
“성공보다 실패를 더 자주 기록했어요.”
리즈는 한 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마 사실일 것 같아서 그 지적이 짜증스러웠다.
소렐은 두 장을 더 넘기다가 어둡고 거의 알아보기 힘든 도식에서 멈췄다. 여러 선이 겹쳐 있었다. 아래쪽에 리즈가 적어 두었다.
‘누가 짊어질지 모른다면 내놓지 말 것.’
아무도 무슨 뜻인지 묻지 않았다.
그편이 나았다.
첫 번째 조항
첫 번째 조항은 마송이 쓰지 않았다.
전화 한 통이 첫 조항이었다.
그들이 수첩에 번호나 취급 등급, 분류 코드, 범주를 붙이기 전에 리즈가 요구했다. 개인적인 부탁처럼 말하지 않았다. 이 방에서 사적인 것은 허술하게 보호되는 약점임을 이미 이해했다.
그녀가 말했다.
“전부 읽기 전에 언니한테 전화할 거예요.”
르세르프가 서류철에서 눈을 들었다.
“가족에게는 이미 알렸습니다.”
“문장 하나로 재워 버렸겠죠.”
“제가 쓸 표현은 아니군요.”
“그래서 내가 쓰는 거예요.”
세귀르가 시간을 확인했다.
“5분 드리죠.”
“혼자서요.”
“안 됩니다.”
거칠지 않은 대답이었다. 그래서 더 단단했다.
리즈는 코로 숨을 들이마셨다.
“그럼 스피커폰은 안 되고, 아무도 말하지 않아요.”
세귀르가 물었다.
“르세르프 씨?”
르세르프는 거의 망설이지 않았다.
“통화 가능합니다. 배석자는 침묵할 것. 기술적 세부 사항과 정확한 위치는 말하지 않습니다.”
“대사는 이미 외웠네요.” 리즈가 말했다.
들로네가 리즈의 것이 아닌 휴대전화를 건넸다.
케이스도 없고 눈에 보이는 메모리도 없는 회색 기기였다. 마리안의 번호가 이미 입력되어 있었다. 리즈는 화면을 보았다. 이 몸짓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전화를 받았다.
마리안은 신호가 두 번 울리자 받았다.
“여보세요?”
한 음절만으로 펜오에의 아파트 전체가 돌아왔다. 분류해야 할 접시들, 애도하는 듯한 립스틱을 바른 잔, 가지런히 쌓인 물건들, 지나치게 무거운 찬장, 코르넥이 서랍을 살피는 동안 울렸던 낡은 회색 전화기.
“나야.”
“리즈?”
마리안의 목소리가 당장 달라졌다.
“어디야?”
리즈는 모든 시선이 무게를 싣지 않는 척하는 것을 느꼈다.
“출장 왔어.”
침묵.
“엄마한테 말하듯 하지 마.”
리즈는 눈을 감았다.
“설명할 수가 없어.”
“누구랑 있는데?”
리즈는 세귀르, 르세르프, 마송, 타르디외, 소렐, 들로네를 바라보았다. 이 약속 안에 넣기에는 이름들이 모두 너무 컸다.
“진지한 사람들이랑.”
“안심이 하나도 안 되는데.”
“나도 그래.”
방 안의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리안이 목소리를 낮췄다.
“붙잡혀 있는 거야?”
리즈는 그 질문 속에서 언니가 이미 자신에 관해 아는 모든 것을 들었다. 거짓말하는 방식, 말을 끊는 방식, 두려울 때 일 뒤로 사라지는 방식.
“그런 식은 아니야.”
“그럼 그렇다는 거네.”
“복잡하다는 뜻이야.”
“리즈.”
자기 이름 안에 분노가 꼿꼿이 서 있었다. 사랑과 습관으로 이루어진 분노였다.
“적어도 위험한지만 말해 줘.”
리즈는 소렐을 바라보았다.
소렐은 아무 몸짓도, 아무 지시도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것이 도움이 되었다.
“혼자는 아니야.”
“그건 같은 말이 아니잖아.”
“알아.”
마리안의 숨소리가 마이크 가까이 들렸다.
“엄마가 헌병대에 신고하겠대.”
리즈는 웃을 뻔했다.
“말려 줘.”
“지금 네가 무슨 부탁을 하는지는 알아?”
“응.”
“몰라. 넌 언제나 혼자 알아서 하는 것과 남을 겁먹게 하지 않는 걸 혼동했어. 그래서 안다고 믿는 거야.”
생각보다 아픈 말이었다.
리즈는 탁자에 등을 돌렸다.
창문은 없었다. 밝은 벽과 흠잡을 데 없는 걸레받이, 조금 다른 흰색으로 페인트를 덧칠한 모서리뿐이었다.
“오늘은 엄마 좀 챙겨 줘. 아파트도. 아무도 팔지 말고, 버리지 말고, 공구도 누구 주지 마.”
“왜?”
“내게 필요해.”
“뭘 하려고?”
리즈는 전화기를 꽉 쥐었다.
“나로 남으려고.”
마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에서 교사 특유의 또렷함이 사라져 있었다. 그저 언니였다.
“오늘 저녁에 전화해.”
리즈는 세귀르를 보았다.
그는 딱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볼게.”
“아니. 전화해.”
“알았어.”
“그리고 누가 듣고 있다면 한 가지 알아 둬야 해.”
리즈는 방 안의 긴장이 팽팽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리안.”
“아니. 네가 거짓말할 때 어떤 얼굴인지, 무서울 때 목소리가 어떤지, 혼자 다 짊어지는 게 남들보다 잘하는 일이라고 믿을 때 어떻게 침묵하는지 내가 안다는 걸 알아 둬. 그러니까 널 데리러 가야 한다면 엉망으로라도 갈 거야. 그래도 갈 거야.”
리즈의 눈이 뜨겁게 타올랐다.
“그 사람들이 무서워하겠다.”
“잘됐네.”
그러고는 마리안이 전화를 끊었다.
리즈는 2초 동안 전화기를 귀에 댄 채로 더 있었다.
몸을 돌렸을 때 웃는 얼굴은 하나도 없었다.
세귀르가 말했다.
“언니분이 성격이 강하시군요.”
“중학교 2학년을 가르쳐요.”
“방금 한 말은 취소하겠습니다. 훈련이 잘된 분이군요.”
거의 농담이었다.
거의.
리즈는 전화기를 돌려주었다.
“두 번째 조항.” 그녀가 말했다.
한계
마송은 결국 화이트보드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메모장 말고.
벽에 걸린 화이트보드에, 조금 끽끽거리는 파란 펜으로 썼다. 조항들을 모두가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리즈가 요구했다. 서류철 속으로 사라지는 메모도, 다른 곳에서 무게를 재는 단어도, 멀리서 더럽힌 뒤 말끔한 모습으로 도착하는 결정도 더는 원하지 않았다.
마송이 맨 위에 썼다.
‘바렌 씨가 제안한 잠정적 보전 사항.’
리즈가 말했다.
“아뇨.”
그가 멈췄다.
“왜죠?”
“내가 편의를 요구하는 것처럼 들리잖아요.”
소렐이 눈을 들었다.
세귀르는 말하지 않았다.
마송이 지웠다.
그리고 다시 썼다.
‘임시 협력 조건.’
“그것도 싫어요.” 리즈가 말했다.
“협력이라는 말이 마음에 안 듭니까?”
“임시라는 말이 싫어요.”
르세르프가 서류철을 덮었다.
“현 단계에서는 모든 게 임시입니다.”
“그러니까요. 어제부터 임시라는 말은 너무 일찍 거짓말하는 걸 피한다는 뜻이었어요.”
문 곁의 들로네가 거의 보이지 않게 움직였다. 브레스트에 오기 전 차 안에서 그 정의를 말한 사람은 그뿐이었다.
마송은 세귀르를 보았다.
세귀르가 말했다.
“‘즉각적 조건’이라고 쓰십시오.”
마송은 따랐다.
그것이 무엇도 보장해 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거부했다는 이유로 법률가가 단어를 지우는 모습을 보며 리즈는 처음으로 발 디딜 곳을 얻었다.
몸부터 시작했다.
“서면 동의 없이는 어떠한 침습적 의료 절차도 받지 않겠어요.”
마송이 적었다.
“침습적이라는 말의 범위를 정하시죠.”
리즈보다 먼저 소렐이 대답했다.
“진정제 투여, 계획적인 수면 박탈, 강제 영상 촬영, 통상 범위를 벗어난 검체 채취, 갱신된 동의 없는 야간 감시, 단순하고 정당한 측정을 넘어서는 신체 센서.”
리즈는 그녀를 보았다.
“목록을 미리 준비해 뒀어요?”
“쓸모 있는 몸 앞에서 아주 똑똑한 사람들이 멍청해지는 걸 본 적이 있어서요.”
세귀르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원칙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단, 의료적 응급상황은 예외입니다.”
“만들어 낸 응급상황은 안 돼요.” 리즈가 말했다.
“어떤 응급상황도 자기가 만들어졌다고 선언하지는 않습니다.”
“그럼 독립적인 의사가 판단하고, 소렐이 같은 방에 있어야 해요.”
소렐이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요?”
“독립적인 의사가 이 사람 앞에서 설명하면 들을게요. 파리가 조급해졌다는 이유로 다른 누군가가 말하면 거부하고요.”
자리에 없는 보클레르가 갑자기 아주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세귀르는 시간을 들여 대답했다.
“소렐은 과학적 소견을 냅니다. 의학적 소견은 의사가 내야 합니다.”
“좋아요. 그럼 이 사람이 그 소견에 서명해요.”
소렐은 리즈의 시선을 받았다.
“내가 생각하는 바에만 서명하겠습니다.”
“그게 내가 요구하는 전부예요.”
두 번째 한계는 용도에 관한 것이었다.
그 단어 자체를 꺼내는 데 힘이 들었다. 리즈는 군대, 전쟁, 죽음, 무언가가 무엇을 부수는지 이해하기도 전에 이점으로 바꾸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덜 아름답고 더 쓸모 있는 표현을 골랐다.
“내가 정확히 무엇을, 어디서, 왜, 누구와 함께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현장 시험도, 군사적 사용도, 민감한 화물의 운송도 하지 않겠어요.”
르세르프가 즉시 물었다.
“민감한 화물이라면?”
“잘 알잖아요.”
“당신 입으로 듣고 싶습니다.”
리즈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무기. 탄약. 장갑차. 해군 체계. 감시 장비. 그게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는 데 쓰이는 모든 것.”
세귀르가 팔짱을 꼈다.
“이런 성격의 돌파구가 국방 분야에 미칠 영향을 평가할 권리를 국가가 미리 포기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이해하실 겁니다.”
“국가가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는 묻지 않았어요. 내가 잠든 채 혼자서는 무엇을 하지 않을 건지 말하는 거예요.”
그 거부는 꿋꿋이 서 있었다.
리즈 자신도 놀랐다.
타르디외가 더 차분한 목소리로 거들었다.
“기술적으로는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현재로서는 이 사람이 없으면 효과도 없습니다. 적어도 이용 가능한 형태로는요.”
세귀르는 격납고의 곡선을 보았다.
“현재로서는.”
“네.” 타르디외가 말했다. “현재로서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큽니다.”
마송이 썼다.
‘바렌 씨에 대한 사전 통지와 제한된 과학 그룹의 검토 없이, 통제된 시험을 벗어난 국방 용도로 사용하지 않는다.’
리즈가 읽었다.
“아뇨.”
마송은 기다렸다.
“내 동의를 통지로 바꿨잖아요.”
그는 거의 웃을 뻔했다.
“빨리 배우시는군요.”
“적들이 훌륭해서요.”
“저는 적이 아닙니다.”
“그럼 더 잘 써요.”
파란 펜이 다시 움직였다.
‘군사적 화물 또는 국방 목적이 관련된 모든 시험에는 바렌 씨의 사전 동의가 필요하다.’
르세르프가 말했다.
“보클레르는 이 문구를 거부할 겁니다.”
세귀르가 대답했다.
“보클레르는 이 문구를 읽을 겁니다.”
승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화이트보드 위의 한 줄이었다.
리즈는 계속했다. 다만 검문 앞에서 주머니를 비우는 여자처럼 전부 나열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자신을 위한 변호사. 매일 저녁 마리안과 통화할 권리. 아버지의 아파트를 실험실 별관으로 만들지 말고 잠가 둘 것. 검은 수첩을 자신과 함께 읽을 것, 자신에게 불리한 방식으로 읽지 말 것. 세상 밖으로 나갈 이유를 찾기 전까지는 불가능한 도형들을 보류할 것.
요구 하나하나가 탁자 주위의 누군가를 움직였다.
마송은 더 천천히 썼다.
르세르프는 덜 성급하게 반대했다.
타르디외는 기술 용어들이 너무 말끔해질 때마다 고쳐 잡았다.
소렐은 단어 하나가 리즈를 사람으로 남겨 두지 않고 현상으로 바꿀 때마다 말을 끊었다.
들로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조금씩 위협만은 아니게 되었다. 분류할 수 없는 어두운 증인 같은 것이 되어 갔다.
마침내 화이트보드가 가득 찼다. 계약도, 합의조차도 아니었다. 파란 펜으로 막 그어 놓은, 앞으로 닥칠 모든 것에 벌써부터 위협받는 문장들의 둑이었다.
리즈는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몇 초 동안은 그것으로 충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회사
처음으로 구조를 말한 사람은 타르디외였다.
추한 단어였지만 제 기능에 대해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구조란 하중이 아무렇게나 떨어지지 않도록 주위에 세우는 것이었다. 집도 약속도 아니었다. 아직 감옥도 아니었다.
“이 사안을 현재 회사 안에 두면 그룹에 삼켜지고, 그다음 국가에, 그다음에는 양측의 불화에 삼켜질 겁니다.” 타르디외가 말했다. “너무 빨리 빼내면 현장 기술이 없는 행정기밀이 되고요. 어느 경우든 물질이나 사람 중 하나를 잃습니다.”
마송은 남들보다 먼저 그녀의 뜻을 알아들었다.
“전담 법인.”
리즈가 고개를 돌렸다.
“뭐라고요?”
“프랑스법에 따른 별도의 법인입니다. 지배구조를 잠그고, 국가와 현재 고용주, 바렌 씨 본인, 그리고 필요하다면 공공 기술기관이 참여하는 방식이죠. 목적은 제한하고, 접근을 통제하며, 발명과 기록, 시험, 후속 산업화에 관한 권리는 분리합니다.”
이제 그는 빠르게 말했다.
리즈를 말로 익사시키려는 게 아니었다.
모든 것이 떠다니던 방에서 마침내 법률로 된 가구 하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안 돼요.” 리즈가 말했다.
그가 멈췄다.
“뭐가 안 됩니까?”
“필요하다면이라는 말.”
“뭐라고요?”
“공공기관에는 필요하다면이라고 했잖아요. 국가가 들어온다면 팔거나 기밀로 묶거나 명령하려 들지 않는 곳도 들어와야 해요. 원자력·대체에너지청이든 국립과학연구원이든, 잘 모르겠어요. 사용하기 전에 이해하는 것이 본업인 누군가요.”
소렐은 탁자로 눈을 내렸다.
“공공기관에 지나친 믿음을 두지는 마세요.”
“나는 어디에든 불신을 두고 있어요. 그건 다른 얘기죠.”
세귀르가 희미하게 동의하는 몸짓을 보였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타르디외가 덧붙였다.
“그리고 특정 범주의 시험을 거부할 권리가 있어야 합니다.”
르세르프가 반응했다.
“그대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럼 그대로 가능한 방법을 찾아요.” 리즈가 말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저 신중함을 지킬 수 없을 만큼 지쳐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난 산업 현장의 직원이었어요. 오늘 아침에는 사람들이 내 선과 내 밤, 내 수첩과 내 실수, 어쩌면 내 몸까지 원할 거라고 설명하네요. 당신들한테는 로고 없는 비행기, 검은 전화기, 엘리제궁 고문, 닫힌 격납고, 온갖 상황에 붙일 단어들이 있어요. 나한테는 뭐가 있죠?”
화이트보드를 가리켰다.
“펜으로 쓴 말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리즈는 계속했다.
“그러니 뭔가를 만든다면 적어도 한 가지는 막을 수 있어야 해요. 내가 이해하지도 못한 것을 너무 빨리 다른 사람들을 겁주는 도구로 바꾸는 것.”
세귀르가 말했다.
“당신을 기다려 준 뒤 위험해질 만큼 세상은 친절하지 않습니다.”
“알아요. 당신들을 만났으니까.”
타르디외가 이번에는 정말 웃을 뻔했다.
세귀르는 아니었다.
그는 유용한 정보처럼 그 말을 받아냈다.
“전담 법인을 만든다고 해서 당신이 주권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바렌 씨.”
“주권자가 되고 싶다는 게 아니에요.”
“맞습니다. 완전히, 분명하게 요구하는 건 아니지만, 벌써 조금은 요구하고 있어요.”
그 단어는 이상하리만치 늦게 방을 돌았다.
주권자.
그녀에게는 너무 큰 단어였다. 거의 우스웠다. 그런데도 두려움보다 깊은 곳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통치하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다. 다른 이들이 와서 깃발을 꽂는 영토에 불과한 존재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압수당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세귀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편이 더 정확한 표현이군요.”
누구도 시키지 않았는데 마송은 그 말을 따로 적었다.
‘현상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압수하지 말 것.’
리즈는 문장을 읽었다.
너무 아름다운 문장이라 경계했다.
이 방에서 아름다운 문장은 삼색 리본을 단 목줄이 될 수도 있었다.
버틸 수 있는 것
늦은 오후, 탁자 위에는 네 쪽짜리 문서가 놓였다.
진짜 계약서는 아니라고 마송은 거듭 강조했다.
즉시 이행할 약속들의 기록. 향후 작업의 기초. 보전을 위한 문서. 명칭은 벌써부터 지나치게 중요해져 있었다. 리즈는 그들이 문손잡이를 놓고 싸우듯 명칭을 놓고 다투는 모습을 보았다.
문서는 몇 개의 둑으로 이루어졌다. 브레스트 체류는 48시간이며 서면 재검토 없이는 연장하지 않는다. 매일 저녁 마리안과 통화한다. 비밀에 편입하는 절차가 먼저 필요하더라도 리즈가 선임한 변호사를 둔다. 검은 수첩은 리즈가 지켜보는 가운데 복사한다. 수면을 강요하지 않는다. 기술적 호기심으로 위장한 국방 시험은 하지 않는다. 앙드레 바렌의 아파트는 폐쇄하며, 사안이 방 안의 물건을 하나씩 집어삼키게 두지 않는다.
리즈는 한 줄 한 줄 읽었다.
여러 번.
단어 세 개를 고쳤다.
마송은 그중 하나를 거부했다.
리즈는 그의 거부를 거부했다.
세귀르가 중재했다.
타르디외는 기술 문구 하나를 수정하게 했다. 소렐은 피험자라는 말을 지우고 사람으로 바꿨다. 르세르프는 도청 냄새가 나는 배포 제한 두 가지를 추가했지만, 너무 성급한 호기심에서 이 사안을 보호하는 효과도 있었다.
들로네는 수첩을 인도한 증인으로 서명했다.
짧은 서명이었다.
거의 메말라 보였다.
그가 문서를 리즈 쪽으로 밀었을 때, 리즈는 그의 오른손 엄지에 작은 상처가 난 것을 보았다. 봉투에 베였는지, 문에 베였는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베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사소한 상처가 그를 갑자기 인간 쪽으로 돌려놓았다. 리즈는 그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어제는 왜 수첩을 가져가지 않았어요?” 그녀가 물었다.
방 안의 시간이 느려졌다.
들로네는 당장 알아들었다.
수첩.
재킷 밑으로 숨긴 몸짓.
그가 보았던 순간.
그는 세귀르를 보지 않고 대답했다.
“누구에게 넘기게 될지 아직 몰랐으니까요.”
변명도 충성도 아니었다. 보안용 문구일 수도 있었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리즈는 그 말을 간직했다.
아직 어디에 둘지는 몰랐다.
마송이 펜을 건넸다.
“유보 문구를 덧붙여 서명하셔도 됩니다.”
“뭐라고 쓰죠?”
“읽을 수만 있다면 원하는 대로요.”
리즈는 짧게 웃었다.
“확실해요?”
“아뇨.”
그녀는 이름을 썼다.
그리고 서명 아래에 적었다.
‘온전한 신뢰 없이 읽음. 더 나쁜 일을 막기 위해 받아들임.’
마송은 덧붙인 문장을 바라보았다.
“통상적인 표현은 아니군요.”
“나도 통상적이지 않으니까요.”
세귀르는 문서를 받았다.
덧붙인 문구까지 끝까지 읽었다.
“좋습니다.” 그가 말했다.
리즈는 그 말이 짜증스러운지 안심되는지 알 수 없었다.
검은 수첩은 돌려받았지만 자유롭게도, 온전하게도 아니었다.
수첩은 밀봉 봉투에 담긴 뒤 다시 파우치에 들어갔다. 다음 날 입회 복사가 이루어질 때까지 리즈가 지니되 소렐과 들로네가 공동으로 책임지기로 했다. 행정적인 부조리. 조그만 둑.
그래도 리즈는 그것을 가슴에 꼭 안았다.
그들은 그녀를 18호실로 데려갔다.
복도는 전날과 같았지만 리즈의 걸음은 전날과 똑같지 않았다. 새로운 단어들이 생겼다 해도 그녀는 자유롭지도, 보호받지도, 심지어 동업자가 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우리가 더 닫히기 전에 그 우리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을 뿐이었다.
방 앞에서 소렐이 멈췄다.
“시간을 벌었어요.”
“어제 당신도 말했잖아요. 그 사람들이 원한 것도 그거였어요.”
“아니요. 그들은 당신에게서 시간을 벌려 했죠. 이번에는 당신 자신을 위한 시간을 조금 번 겁니다.”
리즈가 문을 열었다.
침대는 정돈되어 있었다.
책상도 정리되어 있었다.
공식 수첩은 똑같이 생겼지만 더 두꺼운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첫 장에는 누군가 이미 라벨을 붙여 놓았다.
‘야간 관찰―바렌―2’
리즈는 검은 수첩이 든 파우치를 그 옆에 놓았다.
수첩 두 권.
한 권은 그들을 위한 것.
다른 한 권도 완전히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
휴대전화는 여전히 없었다.
대신 책상 위에는 서명한 문서의 사본과 물병, 그리고 마송의 글씨로 단 세 단어만 적힌 빈 종이가 있었다.
‘전담 구조: 가설.’
리즈는 오래도록 서 있었다.
서명할 때 그녀는 무언가를 붙들어 둘 수 있다고 믿었다. 현상도, 국가도, 역사도 아니었다. 역사라는 말에 의미가 있다면 말이다. 어쩌면 속도만은.
보잘것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지나치게 야심 찼다.
열림이 제한된 창 너머에서 정박지는 저녁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물 위에 불빛들이 켜졌다. 어두운 질량 하나가 예인선들에 둘러싸여 두 부두 사이로 천천히 나아갔다. 모두 오래된 규칙에 충실했다.
리즈는 떠오른 밸러스트를 생각했다.
곡선을.
화이트보드를.
엉망으로라도 오겠다는 마리안을.
그러고는 종이 곁의 검은 펜을 집어 가설이라는 단어에 줄을 그었다.
그 위에 썼다.
‘한계.’
그 단어는 거의 아무것도 붙들지 못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에는 그것만이 아직 토대와 닮아 있었다.
제10장
첫 번째 위반
밤이 들이닥친 것
밤은 그녀가 준비되기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늦은 저녁까지 리즈는 18호실 책상 앞에 양말만 신은 채 앉아 있었다. 왼쪽에는 서명한 문서, 오른쪽에는 공식 수첩, 그 사이에는 실수로 제자리에 놓여버린 잘못처럼 검은 수첩이 있었다.
마리안에게 전화했다.
3분 20초. 그 이상은 안 됐다.
마리안은 리즈가 어디 있는지 묻지 않았다. 잔이 이 모든 일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며 헌병대 번호를 찾아 전화기 옆에 가정용 협박처럼 놓아두었다는 것, 그리고 추후 통보가 있을 때까지 부동산 중개인은 꺼져도 좋다는 말만 했다.
“아파트는 어디 안 가.”
마리안이 말했다.
리즈는 고맙다고 답했다.
그 말은 너무 작게 울렸다.
이제 방은 고요했다.
공식 수첩의 새 페이지에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
“한계를 정함.”
그리고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오늘 하루를 순서대로 기록하려 했다. 평형추. 검은 수첩. 마리안의 지적. 화이트보드. 전담 법인. 유보 조건을 단 서명. 하지만 문장 하나하나가 존재하기 전에 행정 허가부터 요구하는 듯했다.
그래서 검은 수첩을 펼쳤다.
방금 서명한 문서를 배신하려는 게 아니었다.
누구도 아직 표의 칸 속에 집어넣지 못한 자신의 일부가 남아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아침에 적은 문장을 다시 읽었다.
“누가 짊어질지 모른다면 내주지 말 것.”
그 아래, 두 장을 넘긴 곳에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은 오래된 그림이 있었다. 길고 누운 형체를 붉은 선 세 줄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언제 그렸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한 달 전일 수도 있었다. 시험용 주괴보다 전일 수도 있었다. 페이지 한쪽 귀퉁이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들어 올리는 게 아니다. 죽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한기가 들었다.
문장의 의미 때문이 아니라 날짜 때문이었다.
2월의 어느 화요일로 날짜가 적혀 있었다. 커피도, 14번 작업대도, 그 무엇도 있기 전의 평범한 아침. 편두통을 안고 출근하면서, 회색 공간 어딘가에 금속 부품 하나가 끼어 있는 꿈을 꾼 듯한 기분이 들었던 날이었다.
자정을 넘겨서야 수첩을 덮었다.
잠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추락처럼이 아니라, 누군가 스위치에 손을 얹은 것처럼.
그녀는 격납고에 있었다. 하지만 아침의 그곳은 아니었다. 바닥은 더 어두웠고, 부두 쪽 문은 열려 있었다. 차갑게 식은 탄내와 긁혀 벗겨진 페인트 냄새가 났다. 한가운데에는 평형추가 아니라 길쭉한 덩어리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하게 된 케이블들이 그것을 붙들고 있었다.
누군가 금속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게는 아니었다.
세 번.
그리고 침묵.
꿈속에서 그녀는 그것을 들어 올리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정말로 들어 올리면 안 됐다. 덩어리가 올라가면 모든 것을 휩쓸고 갈 터였다.
그대로 두면 그 밑의 누군가에게 곧 숨 쉴 공기가 모자랄 터였다.
무게가 일을 끝내고 싶어 하는 마음만 없애야 했다.
왼쪽 측면에 틈 하나가 열렸다.
물 쪽이 아니었다.
붉은 문 쪽이었다.
뜻을 깨닫기 전에 잠에서 깼다.
문을 짧게 두 번 두드리는 소리.
이어서 세 번째.
똑같은 박자였다.
리즈는 이미 일어서 있었다. 복도에서 소렐이 불렀다.
“바렌 씨?”
대답 없이 문을 열었다.
소렐은 어제와 같은 재킷을 비뚤게 여며 입고 있었다. 뒤에는 들로네가 짙은색 스웨터 차림으로 서 있었다. 손에는 이어피스를 들고 있었고, 얼굴은 평소보다 굳어 있었다.
“사고가 났어요.”
소렐이 말했다.
방이 오그라들었다.
“어디서요?”
“군항 기술 구역입니다.”
“다친 사람은요?”
소렐은 메모를 확인하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남자 두 명이 깔렸습니다. 한 명은 후송됐고요. 기존 수단으로 접근하면 압궤가 더 심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리즈는 책상 위 검은 수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공식 수첩의 페이지를 보았다.
한계.
그녀가 물었다.
“어떤 종류의 물체죠?”
들로네가 답했다.
“운반용 받침대입니다. 해군 장비예요. 민감한 물건이고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바로 그 말이 모든 것을 말했다.
리즈는 즉각적인 분노를 느꼈다. 거의 건강한 분노였다.
“안 돼요.”
소렐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직 아무도 승낙해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한밤중에 들로네 씨까지 데리고 제 방문 앞에 와서 ‘민감하다’는 말을 해놓고요. 예의 차리느라 시간 낭비하지 마세요.”
들로네가 찰나만큼 눈을 내리깔았다.
소렐은 천천히 숨을 쉬었다.
“그 장치가 도움이 될 수 있는지 물어왔습니다.”
“누가요?”
“현장 구조 지휘선에서요. 그다음 세귀르. 그다음 보클레르.”
“그 순서로요?”
“아닙니다.”
그 정직함도 사정을 낫게 하지는 못했다.
리즈는 책상에서 서명한 종이를 집었다.
“이건 국방 실험이에요.”
“국방 시설 안에서 벌이는 구조 작업입니다.”
들로네가 말했다.
말끔한 표현이었다. 지나칠 만큼.
누군가가 어디선가, 억지로 미는 티를 내지 않고 문을 열기 위해 이미 써먹은 문장이었다.
리즈는 그를 보았다.
“둘의 차이가 들려요?”
“네.”
“그 차이를 믿어요?”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무거운 물체 밑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 차이에 우리만큼 관심을 기울일 처지는 아닐 겁니다.”
차라리 더 거짓된 대답이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단번에 거절할 수 있었을 텐데.
소렐은 급히 출력한 자료 한 장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흐릿한 사진. 도면. 추정 하중. 중장비 진입 금지 구역. 측면 변형. 전도 위험. 본문 아래에는 손으로 덧붙인 문장이 있었다.
“바렌의 동의가 필요한가?”
물음표 하나가 나머지 모든 것보다 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리즈가 물었다.
“숨은 쉬고 있나요?”
“지금까지는요.”
“얼마나 됐죠?”
“26분입니다.”
“상태가 나빠지기까지 얼마나 남았어요?”
소렐이 눈을 내리깔았다.
“모릅니다.”
리즈는 기쁨 없이 웃었다.
“모를 때는 글을 참 잘 쓰네요.”
검은 수첩을 집어 2월의 페이지를 펼친 뒤 소렐 쪽으로 돌렸다.
소렐이 읽었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볼 만큼은.
하지만 리즈는 보았다.
“이걸 꿈에서 봤어요?”
“전에요.”
“무엇보다 전이죠?”
“당신들에게 이게 존재하기 전.”
들로네가 한 걸음 다가왔다.
“이 페이지도 대조 사본에 들어 있습니까?”
“아뇨.”
“왜죠?”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한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이윽고 소렐이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죠?”
리즈는 흐릿한 사진을 보았다.
금속 밑 두 남자와 그들의 숨을 생각했다. 자신이 거절하면 내일 사람들이 할 말과, 받아들이면 내일 사람들이 할 말을 생각했다.
자신이 서명한 문서를 생각했다.
“바렌 씨의 사전 동의를 요함.”
동의.
한밤중에 목숨들을 문법 밑에 깔아놓고 방까지 받으러 오는 동의란 이런 모습이었다.
“갈게요.”
리즈가 말했다.
뒤틀린 조항
그들은 리즈를 곧장 부두로 데려가지 않았다.
먼저 창문 없는 방으로 데려갔다.
세귀르는 이미 와 있었다. 르세르프도 있었다. 어제보다 머리를 한층 단단히 묶고 있었다. 마송은 재킷을 여미며 들어왔다. 팔에는 메모철을 끼고 있었고, 엉성하게 작성된 문서 때문에 너무 짧은 잠에서 끌려 나온 사람 같았다. 벽면 화면에 보클레르의 모습은 뜨지 않았다. 그는 전화로만 참석했다. 얼굴이 없으니 목소리는 더 단단했다.
“충분히 토론할 시간이 없습니다.”
리즈는 서 있었다.
“편리하네요.”
세귀르가 전화기 쪽으로 한 손을 들었다.
리즈를 조용히 시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보클레르가 너무 빨리 대답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조건부터 정리하겠습니다.”
마송이 메모철을 펼쳤다.
“00시 41분, 운반 사고 발생. 기지 요원 두 명이 22톤급 기술 받침대 밑에 갇힘. 하중 일부가 2차 구조물에 걸쳐 있음. 통상 인양 수단 사용 시 전단 위험. 즉각적인 구조만을 목적으로, 겉보기 지지력 변경을 통한 예외적 지원 요청.”
“작업 많이 하셨네요.”
리즈가 말했다.
마송이 멈췄다.
“네?”
“‘군사’라는 단어를 한 번도 안 쓰고 작성했잖아요.”
르세르프가 답했다.
“장소는 군사 시설입니다. 장비도 군사 장비고요. 당장의 목적은 구조입니다.”
“내일은요?”
“내일은 논의 대상이 아닙니다.”
“바로 그게 문제죠.”
소렐도 들어왔다. 받침대 사진과 검은 수첩을 부드러운 봉투에 넣어 들고 있었다. 그녀는 보클레르 쪽을 보지 않았다. 리즈에게 말했다.
“기술적으로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격납고의 장치는 22톤을 위해 설계된 게 아니에요. 수첩의 그 페이지가 이 받침대를 가리키는지도 모릅니다. 장소가 중요한지, 붉은 문이 중요한지, 꿈만으로 충분한지, 준비 없이 물체가 반응할지도 모르고요. 효과가 지나치게 강하게 나타나면 어떻게 될지도 모릅니다.”
“됐어요. 이게 정직한 요청이죠.”
전화기에서 보클레르의 목소리가 나왔다.
“바렌 씨, 존재하지도 않는 법적 순수성을 찾는 동안 두 사람이 죽을 수 있습니다.”
말이 겨냥한 곳에 정확히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논리가 아니라 배에.
그 역시 능숙했다.
위험할 만큼 능숙했다.
“그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지 마세요.”
리즈가 말했다.
“거기 있으니까 말하는 겁니다.”
“아뇨. 그 사람들의 긴급한 상황을 이용해서 첫 선례를 세우려는 거예요.”
날카로운 침묵.
세귀르가 잠시 눈을 감았다. 리즈가 정확한 말을 너무 일찍 해버렸다는 듯이.
보클레르가 답했다.
“둘 다 사실일 수 있습니다.”
리즈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게 최악이었다.
단순한 괴물들은 이 방에서 2분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진실이 자신의 권력에 이바지하는 순간, 정확히 진실을 말할 줄 알았다.
마송이 종이 한 장을 그녀 앞으로 밀었다.
“동의 문구가 필요합니다.”
“백지수표처럼 서명하지는 않겠어요.”
“그럼 불러주시죠.”
리즈는 그를 보았다.
그는 벌써 펜을 들고 있었다.
리즈는 천천히 말했다.
“‘본인은 1시 18분에 전달받은 정보를 근거로, 즉각적인 구조만을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예외적 개입에 동의한다. 이 동의는 군사적 사용의 승인도, 반복 사용에 대한 동의도, 전일 서명한 조건의 포기도 아니다.’”
마송이 받아 적었다.
그런 다음 덧붙였다.
“‘개입 후 흔적에 대한 상호 대조 검증을 조건으로 한다.’”
“네.”
소렐이 말했다.
“이것도 추가하세요. ‘현상이 인명 구조에 필요한 수준을 넘으면 즉시 중단한다.’”
마송이 적었다.
르세르프가 물었다.
“그 수준은 누가 결정하죠?”
소렐이 답했다.
“물리적 부분은 제가 판단합니다. 피해자 접근은 구조대가 판단하고, 현상에서 느껴지는 부분은 바렌 씨가 판단합니다.”
스피커에서 보클레르가 짧게 숨을 내뱉었다.
“그건 기준이 아니라 회의체군요.”
세귀르가 말했다.
“지금은 그게 우리가 가진 전부입니다.”
리즈는 펜을 들었다.
손은 생각보다 덜 떨렸다.
서명했다.
그리고 자기 이름 아래에 적었다.
“밑에 깔린 사람들을 위해 서명한다. 장비를 위해서가 아니다.”
마송이 읽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귀르는 종이를 집어 르세르프에게 건넸다.
“갑시다.”
그 말만큼은 다른 문장들과 달리 스스로를 보호하려 들지 않았다.
붉은 받침대
부두는 다른 밤보다 더 짙은 밤에서 잘라낸 듯했다.
흰 투광등. 젖은 바닥. 반사 조끼. 비스듬히 멈춰 선 차량들. 출입 통제선. 낮게 솟았다가 곧 가라앉는 목소리들. 저 너머 정박지는 불빛조차 거의 없이 검었다. 바람은 뜨거운 금속과 갯벌, 타버린 단열재 냄새를 실어왔다.
리즈는 물체보다 붉은 문을 먼저 보았다.
부두 쪽으로 열린 격납고 맨 안쪽의 커다란 방화문이었다. 소금기에 바랜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꿈에서도 이보다 더 선명하지 않았다. 붉고, 닫혀 있고, 명령처럼 존재했다.
그리고 받침대를 보았다.
22톤이라고 마송은 말했다.
숫자로는 부족했다.
덩어리는 찌그러진 운반차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이름 붙여 말하지 않는 어떤 해군 장비를 받치도록 만들어진 길고 보강된 구조물이었다. 한쪽은 여전히 지지대 위에 걸쳐 있었다. 다른 쪽은 기술 칸막이에 기울어져 바닥의 정비 통로를 짓누르고 있었다. 케이블들이 걸렸다가, 다시 걸리고, 포기된 채 늘어져 있었다. 이동식 크레인은 바깥에서 쓸모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높고, 너무 느리고, 너무 위험했다.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세 번.
그리고 아무 소리도 없었다.
어두운 작업복 차림의 장교가 그들 쪽으로 왔다.
리즈가 아니라 세귀르에게 경례했다.
세귀르는 그가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린 뒤 말했다.
“바렌 씨가 본인과 관련된 부분을 지휘합니다.”
장교가 리즈를 보았다.
아무도 그에게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줄 시간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만큼 충분히 오래.
“마레스코 대위입니다. 요원 두 명이 정비 통로 밑에 갇혔습니다. 한 명은 의식이 있고, 한 명은 의식이 들락날락합니다. 상태가 악화되기까지 30분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그보다 짧을 수도 있고요.”
리즈가 물었다.
“뭘 들어 올리려는 거죠?”
그가 받침대를 가리켰다.
“좌현 쪽 하중을 8에서 10센티미터만 받아주면 통로를 더 짓누르지 않고 절단할 수 있습니다.”
소렐이 바로잡았다.
“들어 올리는 게 아닙니다. 지지점 일부의 하중을 줄여보려는 겁니다.”
대위는 물체를 잠깐 보았다.
“마음대로 부르십시오. 제게 필요한 건 세상이 8센티미터 덜 눌리는 겁니다.”
리즈는 그들의 이름을 물을 뻔했다.
묻지 않았다.
이름을 알면 그들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름을 묻지 않으면 자신은 비겁한 사람이 된다. 또다시 둘 다 사실이었다.
타르디외는 이미 장치의 판 옆에 와 있었다. 투명 케이스에 담긴 장치는 더 무거운 지지대에 고정되어 있었다. 전원은 두 계통으로 나뉘었고, 소렐은 정지함을 손 닿는 곳에 두고 있었다. 이런 일을 위해 만들어진 장치가 아니었다. 설치된 모든 것이 실험실의 증거물을 구조 도구로 쓰고 있다고 외치고 있었다.
검은 수첩은 리즈의 옆구리에 맨 주머니 안에 있었다.
2월의 페이지를 펼쳤다.
누운 형체, 붉은 선 세 줄. “들어 올리는 게 아니다. 죽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받침대를 바라보았다.
세 줄이 있었다.
페인트가 아니라 구조 자체에. 금속 외피 아래로 뻗은 세 개의 세로 리브, 세 개의 보강재였다. 빛이 비스듬히 닿았기 때문에만 보였다.
리즈의 목이 조여들었다.
“움직일 수 있는 부분 밑에는 아무도 두지 마세요.”
마레스코가 답했다.
“구조하려는 사람들이 이미 그 밑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말하는 거예요.”
그는 고개를 돌렸다.
“노란 선 뒤로 철수. 전원.”
구조대원들이 물러났다. 소렐이 보기에는 충분히 빠르지 않았다. 그녀는 더 뒤로 물러나게 했다. 타르디외는 측면 지지부에 센서를 두 개 더 달라고 요구했다. 기술자 하나가 이의를 제기했다. 타르디외가 그를 잠시 바라보자 그는 따랐다.
리즈는 받침대와 마주 보고 섰다.
붉은 문 정면이 아니었다.
왼쪽으로 3미터 떨어진 곳이었다.
“장치는 여기요.”
소렐이 위치를 살폈다.
“여긴 전도 지점에 너무 가까워요.”
“봤어요.”
“그게 이유가 되지는 않아요.”
“네. 나쁜 이유죠. 하지만 제게 있는 건 이것뿐이에요.”
소렐은 이를 악물었다.
안 된다고 하지는 않았다.
판을 설치했다. 지지대를 받치고 케이블을 풀었다. 임시 탁자 위에 수집 장치를 펼쳤다. 숫자들이 열을 이루며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 지지부 하중.
2차 지지부 하중.
칸막이 변형.
각도.
진동.
세귀르는 르세르프와 함께 뒤로 물러나 있었다. 보클레르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딘가의 통신선 안에, 사무실 안에, 기다리는 문구 안에 그가 있다는 걸 리즈는 알았다.
들로네는 노란 선 옆에 서 있었다.
그는 물체보다 주변의 사람들을 더 유심히 보았다.
그게 그의 일이었다.
리즈는 그것이 고마웠다.
“바렌 씨?”
소렐이 물었다.
리즈는 손을 들었다.
“기다려요.”
눈을 감았다.
꿈은 영화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형체가 누르는 느낌과 거부감만 돌아왔다. 들어 올리지 말 것. 무게를 이기려 하지 말 것. 밑의 사람들이 다시 꺼내질 수 있는 몸으로 돌아올 시간만큼, 무게의 확신을 덜어낼 것.
눈을 떴다.
“제대로 힘이 걸리기 전에 끊어야 해요.”
타르디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무슨 뜻이죠?”
“올라가기 시작하면 멈춰요. 더 나은 결과를 노리지 말고.”
마레스코가 말했다.
“8센티미터가 필요합니다.”
“3센티미터밖에 못 얻을 수도 있어요.”
“3센티미터로는 부족합니다.”
“유지되는 3센티미터라면 될지도 모르죠.”
소렐이 마레스코를 보았다.
“낮은 틈새 구조를 준비하세요.”
“그건 계획에 없었습니다.”
“지금부터는 그게 계획입니다.”
그는 아주 낮게 욕설을 뱉었다.
그러고는 명령을 내렸다.
리즈는 정지함 위에 손을 올렸다.
명령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직 무언가를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작동.”
소렐이 말했다.
숫자는 버텼다.
22.4.
22.3.
아무 일도 없었다.
바람이 가는 빗줄기를 격납고 처마 밑까지 밀어 넣었다.
구조대원 하나가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22.1.
21.8.
리즈는 화면보다 먼저 변화를 느꼈다.
물체가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침묵이 더 팽팽해졌다. 어깨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부두를 둘러싼 밤이 자기 자신의 기계장치마저 멈춰 세운 듯했다.
20.6.
칸막이가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정지할까요?”
타르디외가 물었다.
“아뇨.”
리즈가 말했다.
18.9.
늘어진 케이블 하나가 바닥 위로 1센티미터 미끄러졌다.
“구조 준비됐습니까?”
소렐이 물었다.
“준비됐습니다.”
마레스코가 답했다.
17.2.
받침대는 올라가지 않았다.
누르는 방식이 달라졌다.
찌그러진 통로가 가느다란 소리를 냈다. 밑의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고통의 비명은 아니었다. 적어도 고통만은 아니었다. 공기가 다시 들어오는 비명이었다.
“지금.”
소렐이 말했다.
구조대원 두 명이 바닥에 바싹 붙어 들어갔다.
리즈는 다른 곳을 보고 싶었다.
그럴 수 없었다.
16.8.
16.7.
현상은 지나치게 팽팽한 실처럼 버텼다.
안정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충분했다.
40초 만에 첫 번째 남자가 나왔다. 갈라진 헬멧, 잿빛 얼굴, 뜬 눈. 구역 밖으로 끌려 나오자마자 기침을 했다. 그 소리가 터무니없는 폭력으로 리즈의 몸을 관통했다. 기침하는 몸. 조항과 잘못을 가르는 차이가 결국 그것이었다.
“두 번째.”
마레스코가 말했다.
물체가 떨렸다.
소렐이 정지함 쪽으로 손을 들었다.
“풀리기 시작해요.”
“아직.”
리즈가 말했다.
그 확신이 어디서 왔는지 몰랐다.
차라리 없었으면 했다.
15.9.
그러다 21.
단숨에.
“돌아옵니다.”
타르디외가 말했다.
“보여요.”
두 번째 남자는 나오지 않았다.
구조대원 하나가 외쳤다.
“부츠가 걸렸습니다!”
마레스코가 통제선을 넘어 한 걸음 내디뎠다.
들로네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거칠게는 아니었다.
충분할 만큼.
리즈는 모두가 말없이 자신에게 조금만 더 버티라고 요구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생각했다. 바로 이거야.
진짜 함정은 강요당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렇게 요구하는 것이 옳다는 데 있었다.
옆구리에 펼쳐진 검은 수첩으로 고개를 숙였다.
붉은 선 세 줄.
들어 올리지 말 것.
죽이지 못하게 할 것.
이 동작이 자신의 두려움 말고 다른 무언가도 바꿀 수 있다는 듯 손가락 하나로 정지함을 움직였다.
“입구를 붉은 문 쪽으로 돌려요.”
소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작동 중에요?”
“네.”
“안 돼요.”
“그럼 끊고, 어쩌면 저 사람은 죽겠죠.”
끔찍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사실이었다.
소렐은 꼬박 1초 동안 리즈를 증오했다.
이윽고 소리쳤다.
“미세 회전. 문 쪽으로 2도. 천천히.”
떨려서는 안 될 손으로 기술자가 명령을 따랐다. 그래도 손은 떨렸다.
받침대가 돌아오기를 멈췄다.
더 많이도, 더 잘도 아니었다. 그저 충분했다.
통로 밑의 구조대원이 잡아당겼다. 다른 한 명은 무언가를 잘랐다. 부츠는 남았다. 몸이 빠져나왔다.
두 번째 남자는 기침하지 않았다.
너무 빨리 실려 갔다.
소렐이 말하기도 전에 리즈는 정지 버튼을 눌렀다.
받침대에 다시 하중이 걸렸다.
그 충격은 무엇보다 무거웠다.
2차 구조물이 마지막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짓눌렸다.
밑에 사람이 남아 있었다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무전기 소리, 빗소리, 의료진의 명령, 그리고 마레스코가 되풀이하는 말만 들렸다.
“구역 철수 완료. 구역 철수 완료.”
리즈는 정지함에서 손을 뗐다.
플라스틱 모서리 자국이 손바닥에 찍혀 있었다.
소렐은 멈춘 숫자들을 바라보았다.
타르디외는 리즈를 보았다.
세귀르는 벌써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냉정해서가 아니었다.
그게 그의 역할이어서였다.
그는 선례가 태어나는 것을 보고 있었다.
성공
첫 번째 남자의 이름은 르 비앙이었다.
두 번째는 케르브라였다.
개입이 끝난 지 20분 뒤, 기지 의무실 복도에서 그들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더 짊어질 것을 주지 않는 편이 나았으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간호사가 알려주었다.
르 비앙은 스스로 숨을 쉬고 있었다.
케르브라는 삽관을 받았다.
살아 있었다.
그 말은 몇 차례 오간 뒤에야 제자리를 찾았다.
살아 있다. 다치지 않은 것도, 엄밀한 의미에서 완전히 구조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살아 있었다.
리즈는 복도의 의자에 앉았다.
다리가 무너진 건 아니었다. 그저 더 이상 그녀와 의논하기를 포기했을 뿐이었다. 신발에는 콘크리트 가루와 검은 물, 붉은 실오라기 하나가 묻어 있었다. 문에서 떨어진 것인지 케이블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소렐은 벽에 기대 선 채로 있었다.
타르디외는 기술자 두 명과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들로네는 티 나지 않게 복도 입구를 막고 있었다. 르세르프는 이미 개입 기록지를 회수했다. 마송은 태블릿에 기록하고 있었다. 몇몇 문장은 빠르게 떠났다가 말끔한 모습으로 돌아와야 했다.
세귀르는 리즈 옆에 앉았다. 바싹 붙지는 않았다. 적절한 거리를 두었다.
두 시간 전보다 늙어 보였다.
“두 사람을 구했습니다.”
리즈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뇨.”
“아니라고요?”
“빠져나오게 도왔어요. 구한 건 다른 사람들이에요.”
그는 정정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침묵.
그런 다음 말했다.
“더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도 막았습니다.”
리즈가 그를 돌아보았다.
“어떤 실수요?”
“들어 올리려 한 것.”
그녀는 받침대와 마지막 충격음, 두 번째 몸이 나온 뒤 닫혀버린 통로를 떠올렸다.
“그렇게 했을 건가요?”
세귀르는 대답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누군가는 제안했겠죠.”
“보클레르?”
“꼭 그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상냥한 대답이네요.”
“정확한 대답입니다.”
리즈는 눈을 감았다.
어느 문 뒤에서 누군가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너무 짧아서 거의 곧장 진지함에 삼켜진 웃음이었다. 세계는 방금 본 것으로부터 벌써 자신을 방어하기 시작했다.
소렐이 그들 앞에 섰다.
“여기서 멈춰야 해요.”
세귀르가 올려다보았다.
“오늘 밤 다시 하자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밤이 문제가 아니에요.”
“그 점이야말로 두렵군요.”
“아뇨, 그렇지 않을걸요. 한 시간 뒤면 예외적 개입으로 구조에 성공했다고 적힌 보고서가 나올 겁니다. 두 시간 뒤에는 같은 절차로 차량을 꺼낼 수 있느냐고 누군가 묻겠죠. 세 시간 뒤에는 해상에서 부품을 안정시킬 수 있는지 물을 테고요. 내일이면 더 강하게 할 수 있는지, 더 말끔하게 할 수 있는지, 바렌 씨에게서 더 멀리 떨어져서 할 수 있는지 묻겠죠. 그 사람들 모두에게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세귀르는 일어섰다.
“저를 지나치게 무책임한 사람으로 보는군요.”
“당신에게서 행정 조직을 보는 겁니다.”
정곡을 찌른 말이었다.
들로네조차 고개를 살짝 돌렸다.
세귀르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소렐은 이긴 것보다 그 말을 들은 사실을 더 불안해하는 듯했다.
마송이 문안을 들고 왔다.
“전달하기 전에 공동 문구가 필요합니다.”
리즈는 웃을 뻔했다.
“벌써요?”
“그래서 벌써 필요한 겁니다.”
그가 읽었다.
“‘이전 서명에 따른 즉각적 조건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바렌 씨의 명시적 동의하에 시행된, 구조 목적의 예외적 부분 하중 경감 개입.’”
“아뇨.”
리즈가 말했다.
마송은 놀란 기색이 없었다.
“어디가 문제죠?”
“‘부분 하중 경감’이라고 하면 말끔해 보이잖아요. 상부에는 원하는 대로 쓰세요. 하지만 제 사본에는 ‘첫 번째 위반’이라고 적어주세요.”
막 들어오던 르세르프가 멈춰 섰다.
“행정적 분류가 아닙니다.”
“그래서 쓸모가 있는 거예요.”
세귀르가 마송을 보았다.
“두 가지 버전으로 작성하세요.”
“공식 버전과 바렌 버전으로요?”
“전달용 버전과 완전한 버전으로.”
리즈는 완전한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세귀르가 그녀의 말에 기록 안의 작은 자리를 내주었다는 건 알았다.
작은 자리였다.
국가는 나중에 그런 작은 것으로 벽이나 함정을 만들 줄 알았다.
복도 끝에 마레스코가 나타났다.
헬멧은 벗은 채였다. 빗물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었다. 리즈 앞에서 멈춘 그는 악수를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손을 내밀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그가 말했다.
두 음절.
연설은 없었다.
리즈가 답했다.
“두 분은 살아 있나요?”
“네.”
“그럼 감사는 그분들을 위해 아껴두세요.”
마레스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망설인 끝에 덧붙였다.
“당신이 한 일 말입니다…… 과거 몇몇 작전 구역에서 이런 게 있었다면…….”
소렐이 눈을 감았다.
타르디외는 움직임을 멈췄다.
세귀르는 꼼짝하지 않았다.
리즈는 젖은 신발을 신은 교리가 복도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마레스코는 말을 멈췄다.
방금 입 밖에 낸 말을 다른 사람들은 훨씬 더 능숙하고, 훨씬 더 빨리, 훨씬 더 위험하게 말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그가 말했다.
그 사과는 리즈 한 사람에게만 한 것이 아니었다.
미래에 한 사과였다.
선례
동이 트기 전, 리즈는 18호실로 돌아왔다.
전화기를 돌려받았다. 자유롭게 받은 것은 아니었다. 10분 동안만이었다.
약속대로 말없는 감시 아래에서. 들로네는 반쯤 열린 문 밖 복도에 있었다. 리즈는 신경 쓰지 않았다. 완벽한 사생활을 지킬 기력은 없었고, 허락된 만큼이라도 취할 정신은 남아 있었다.
마리안은 핏기 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오늘 저녁에 전화하기로 했잖아.”
“일이 생겼어.”
“거의 새벽 네 시야.”
“응.”
침묵.
“울고 있어?”
리즈는 얼굴을 만졌다. 말라 있었다.
“아니.”
“그럼 너, 일이 끝난 뒤의 목소리야.”
“무슨 일이 끝난 뒤?”
“모르겠어. 그게 무서운 거야.”
리즈는 침대 끝에 앉았다.
공식 수첩은 책상 위에 펼쳐져 있었다. 저녁에 쓴 페이지에는 누군가 이미 표찰을 하나 덧붙여놓았다.
“예외적 개입 - 기술 부두.”
리즈는 글자가 보이지 않도록 수첩을 뒤집었다.
“두 사람이 살아 있어.”
마리안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했을 때 목소리는 더 낮았다.
“너 덕분에?”
리즈는 눈을 감았다.
“곧 나 때문이기도 해질 거야.”
“그게 무슨 뜻이야?”
“다시 하려고 들 거라는 뜻이야.”
“누가?”
리즈는 반쯤 열린 문을 보았다.
들로네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모든 사람.”
마리안이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언제 돌아와?”
“모르겠어.”
“그럼 이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남들이 결정하게 두지 마.”
그 말의 또렷함에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거의 진짜 웃음이었다.
“너 권위적으로 변해간다.”
“진작 그랬어야지.”
마리안이 말을 이었다.
“엄마는 우리 집에서 자. 아파트는 잠가뒀고 열쇠는 내가 가지고 있어. 부동산 중개인이 못되게 굴길래 나도 더 못되게 굴어줬어.”
“고마워.”
“고맙다는 말 말고 돌아와.”
리즈는 뒤집힌 종이를 보았다.
“노력하고 있어.”
“아니. 지금 넌 협상하는 중이야. 그건 다른 거야.”
들로네가 문틀을 가볍게 두드렸다.
시간이었다.
리즈가 말했다.
“끊어야 해.”
“리즈?”
“응.”
“그들의 긴급 상황이 되지 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리안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국가에 그들 대화의 마지막 소리를 내주지 않겠다는 듯이.
리즈는 들로네에게 전화기를 돌려주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동생분 말이 맞습니다.”
“엿들었어요?”
“제가 여기 있었으니까요.”
“대답이 아니잖아요.”
“네.”
그는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말끔한 대답이 나올 만한 밤은 아닙니다.”
리즈는 그를 보았다.
그의 엄지손가락에는 여전히 작은 상처가 있었다.
“오늘 일, 어떻게 생각해요?”
들로네는 한참 뒤에야 답했다.
“두 사람이 빠져나왔다고 생각합니다.”
“나머지는요?”
“나머지는 벌써 조직되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문을 닫았다.
완전히는 아니었다.
방은 지나치게 부드러운 조명과 새로 정돈된 침대, 정리된 책상을 되찾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행정 시설이 가장 좋아하는 거짓말이었다. 폭력이 지나갈 때마다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
리즈는 책상 위 종이를 다시 들었다.
“예외적 개입 - 기술 부두.”
검은 펜을 집었다.
예외적에 줄을 그었다.
그 위에 썼다.
“첫 번째.”
말은 홀로 버텼다.
얼마 뒤 누군가가 문 밑으로 봉투를 밀어 넣었다.
리즈가 주웠다.
전체 보고서 사본이었다. 세 장. 상단에는 배포 제한 표기가 있었고, 하단에는 세귀르, 마송, 소렐, 마레스코, 리즈의 서명이 있었다. 자신의 서명은 벌써 스캔되어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페이지에는 서명할 당시 보지 못한 문장이 하나 있었다.
“개입 조건은 핵심 이익 수호 상황에서의 예외적 운용 체계 수립을 위한 기초로 활용될 수 있다.”
다시 읽었다.
한 번.
두 번.
운용이 구조를 대신했다.
체계가 위반을 대신했다.
핵심이라는 말은 나라 전체가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넓은 문을 열었다.
리즈는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놀랍지 않았다.
그 사실이 가장 두려웠다.
보고서를 검은 수첩 옆에 놓은 뒤, 공식 수첩을 뒤집어놓았던 페이지에 펼쳤다.
“첫 번째” 아래에 덧붙였다.
“그들은 벌써 나에게서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나에게서에 줄을 그었다.
다시 썼다.
“나를 상대로.”
복도는 고요했다.
바깥 정박지에는 아직 아침이 오지 않았다.
기지 어딘가에서는 한계 하나가 무너진 덕분에 두 사람이 숨을 쉬고 있었다.
다른 어딘가에서는 그녀가 왜 또다시 물러서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문서가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제11장
죽은 복제품들
깨끗한 손
다음 날 아침, 그들은 리즈 없이 해보려 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 만큼의 배려는 있었다.
마송이 방에 두고 간 인쇄 일정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물질적 재현 비교 시험.”
리즈는 그 문장을 두 번 읽고 나서야 뜻을 이해했다. 우리는 당신이 하는 일을 복제할 것이며, 당신의 존재가 비용 많이 드는 미신에 불과하기를 바란다.
당장은 항의하지 않았다.
붉은 받침대의 밤이 남긴 피로가 몸에서 가라앉지 않았다. 아마 한 시간 반쯤 잤을 것이다. 나머지 시간에는 환기 장치와 복도의 발소리, 사고 뒤 다시 리듬을 찾아가는 기지의 소리를 들었다. 아침에는 커피와 파라세타몰 두 알을 가져다주었다. 간호사가 와서 눈과 혈압, 대답하는 상태를 확인했다. 소렐이 동행했다.
“전 의사가 아닙니다.”
소렐이 말했다.
“그럼 뭐죠?”
소렐은 야간 기록지를 보았다.
“오늘은 제동장치였으면 좋겠네요.”
리즈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안심할 만큼은 아니었다.
그들은 리즈를 아직 보지 못한 건물로 데려갔다. 다른 건물보다 낮았고, 정박지는 보이지 않았다. 회색 복도, 번호가 붙은 문들, 너무 일찍 닦은 바닥 냄새. 방의 명패에는 코드 하나만 있었다. B2-17.
안에서는 세상이 진짜 실험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영화 속 실험실이 아니라, 값비싸고 차갑고 사람을 압도할 생각 없이 기계들로 가득 찬 작업 공간이었다. 광학 테이블, 측정함, 낮은 항온기, 저울, 잠긴 캐비닛, 독립형 컴퓨터, 흰 조명. 중앙에는 투명한 덮개 아래 세 개의 장치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름을 듣기 전에 알아보았다.
살아 있는 것.
죽은 것.
그리고 세 번째.
세 번째 것은 새것이었다. 지나치게.
형태도, 고리도, 격자도, 가운데의 빈 공간도 같았다. 하지만 모서리의 날카로움은 14번 작업장의 폐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긁힌 자국도, 먼지도, 묵은 기름때도 없었다. 오래전부터 잘 만든 물건은 결국 복종한다고 믿는 법을 배워온 나라가, 깨끗한 기계로 깨끗한 손을 써서 만든 복제품이었다.
타르디외는 이미 와 있었다.
세귀르도 있었다.
마송, 르세르프, 소렐, 소개를 받았지만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기술자 두 명, 그리고 처음 보는 젊은 남자가 있었다. 짧은 수염에 흰 가운을 입고, 파리 근교 억양을 중립적으로 만들려고 애쓰고 있었다.
“사뮈엘 브레송입니다. 계측과 정밀 가공 담당이에요.”
타르디외가 말했다.
브레송이 리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렌 씨.”
그의 눈에는 불안한 예의가 담겨 있었다. 리즈보다는 자신이 만든 물건을 향한 예의에 가까웠다.
화면에는 세 가지 모델이 열려 있었다. 표면 곡선. 치수 측정치. 점군. 리즈의 형체들은 말끔하고 확대할 수 있는 기술 영상이 되어, 그것들을 꿈꾸지 않은 손가락에 따라 공간 속에서 회전했다.
거의 육체적인 짜증이 일었다.
질투가 아니었다. 더 깊은 곳의 감정이었다.
그들은 그녀의 밤에, 밤이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선명함을 부여했다.
타르디외가 설명을 시작했다.
“반응 장치와 비활성 장치를 스캔했습니다. C1 복제품은 이곳에서 쓸 수 있는 수단을 이용해 최대한 엄격한 공차로 반응 장치의 치수를 재현했습니다. 재료를 식별했고, 질량과 방향도 확인했습니다. 목표는 단순합니다. 물질적 재현만으로 충분한지 확인하는 것.”
“충분하지 않을 거예요.”
리즈가 말했다.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그렇게 빨리 대답할 생각은 아니었다.
신중함보다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브레송의 얼굴이 한 톤 창백해졌다.
“아직 시험하는 것도 못 보셨잖습니까.”
“보고 있어요.”
“그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아직은요.”
그는 그녀가 동의하는 것을 싫어했다.
소렐이 물었다.
“뭐가 보이죠?”
리즈는 복제품을 바라보았다.
중앙의 빈 곳과 고리들, 작은 비대칭까지 모두 정확했다.
바로 그 때문에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실수한 적이 없어요.”
브레송이 눈을 깜빡였다.
“네?”
“너무 정확해요. 살아 있는 건 실수 하나를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는데.”
기술자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타르디외가 그 말을 적었다.
소렐도 적었다.
세귀르가 물었다.
“시작하죠?”
리즈는 이미 어딘가에서 끝난 일이라고 말할 뻔했다. 복제품이 새 물건 특유의 은근한 자부심을 품고 기계에서 나온 순간, 실패는 이미 일어났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험이 시작됐다.
아무것도 붙지 않는다
첫 시험은 리즈가 방에 없는 상태에서 진행됐다.
그녀가 요구한 일이었다.
반항이 아니라 피로 때문이었다.
복제품이 죽은 채로 있으면 그녀의 시선을 탓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반응한다면, 모두 앞에서 일어나는 광경을 준비할 틈도 없이 보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는 소렐과 함께 유리벽 너머 옆방에 자리 잡았다.
세귀르도, 들로네도 없었다. 리즈의 요구대로 소렐만 있었다.
“저를 믿어요?”
물리학자가 물었다.
“아뇨.”
“그럼 왜 저죠?”
“좋은 소식을 두려워하니까.”
소렐은 받아들일 만한 칭찬으로 여겼다.
유리벽 너머에서 브레송은 C1 복제품 위에 50킬로그램짜리 표준 분동을 올렸다. 평형추도, 받침대도 아니었다. 깨끗한 방의 깨끗한 탁자 위에 놓인 깨끗하고 둥근 분동이었다.
리즈는 실패할 거라는 말을 참았다.
절차가 시작됐다.
초기 하중.
여기.
측정.
곡선은 그대로였다.
50.1.
50.1.
곧은 선.
멀쩡한 세계.
브레송이 두 번째 측정을 요구했다.
결과는 같았다.
세 번째에는 곡선이 조금 떨리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측정 잡음. 그뿐이었다.
리즈는 유리벽 너머로도 브레송의 실망을 느꼈다. 방금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만들려 했던 남자에게 이토록 빨리 연민을 느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타르디외가 죽은 장치를 가져오라고 했다.
오래된 것.
아파트에 있던 것.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다음 살아 있는 것.
진짜 장치.
리즈는 제대로 숨 쉬지 못했다.
분동이 42킬로그램으로, 이어 30, 17로 떨어졌다. 공중에 뜨지는 않았다. 이 방에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대비가 잔인할 만큼 선명해지기에는 충분했다.
살아 있는 것은 반응했다.
나머지 둘은 평범한 세계에 남아 있었다.
브레송은 안경을 벗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숫자보다 그 동작이 더 많은 것을 말했다.
그는 자존심이 상한 게 아니었다.
자기조차 이름 붙이지 못했을 믿음에 상처를 입었다.
“재료부터 다시 갑시다. 순도가 더 낮은 합금으로 재제작하고, 표면 상태도 다시 잡죠. 결함을 넣을 수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타르디외가 답했다.
“좋아요. 하지만 당신 마음에 드는 가설을 살리기 위해서는 안 됩니다.”
“제 마음에 드는 가설이 아닙니다. 시험할 수 있는 가설입니다.”
“그럼 시험하죠.”
하루는 이런 형태가 되었다. 죽은 복제품들의 연속.
C2, 열화된 표면.
무반응.
C3, 열처리로 노화시킨 고리.
무반응.
C4, 체결력 변경.
무반응. 그러다 세 사람이 고개를 들게 한 가짜 급등이 일었지만 이내 전기 잡음으로 가라앉았다.
C5, 다른 기술자가 다른 순서로 조립.
무반응.
실패할 때마다 사람들은 더 정밀해졌다.
안심할 일은 아니었다.
때로 정밀함이란 절망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택하는 예의 바른 방식이었다.
점심때 아무도 제대로 먹지 않은 샌드위치가 배달됐다. 리즈는 맛없는 사과를 씹었다. 소렐은 식은 커피를 마셨다. 브레송은 첫 세 장치 앞에서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타르디외가 리즈 곁으로 왔다.
“견딜 만해요?”
“왜 다들 제 대답이 쓸모라도 있는 것처럼 묻죠?”
“아직 더 나은 걸 찾지 못했으니까요.”
리즈는 줄지어 놓인 복제품들을 보았다.
“몇 개까지 만들 작정이에요?”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될 때까지요.”
“멋진 표현이네요.”
“실험실 표현이에요. 꼭 멋지지는 않죠.”
세귀르가 합류했다.
그는 오전 내내 복도에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통화를 했다. 어쩌면 권력이란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빈 회의실을 요청하는 사람처럼 말하면서 정부 부처들을 움직이는 것.
“다른 팀들에도 요청할 겁니다.”
그가 말했다.
리즈는 잠시 눈을 감았다.
“벌써요.”
“사건의 핵심까지 공유하지는 않습니다.”
“물론이겠죠.”
“기하학적 조각과 재료에 관한 질문, 맥락을 제거한 측정값만 보낼 겁니다. 여러 경로를 동시에 탐색해야 합니다.”
“어디로 가는 경로죠?”
그는 피하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당신 없이 재현하는 길입니다.”
리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말은 안 해줘서 고맙네요.”
“그렇게 되면 당신도 보호받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나에게서 자유로워지겠죠.”
“그렇습니다.”
상처받아야 할 대답이었다.
오히려 조금 홀가분했다.
아무리 차가워도 발가벗은 진실은 잘 차려입은 보호보다 기력을 덜 빼앗는다.
분리된 연구실들
저녁에는 외부의 첫 답변들이 익명 메시지의 형태로 도착했다.
연구실 이름도, 도시도, 로고도 없었다. 르세르프가 세귀르 앞에 놓은 종합 보고서에 몇 줄만 적혀 있었다. 한참 침묵한 뒤 세귀르는 리즈가 읽도록 내버려두었다. 선택해서 보여준 것임을 알아차리기에 충분한 침묵이었다.
“팀 A: 하중 이상 감지되지 않음.”
“팀 B: 재현 불가능한 계측 불안정.”
“팀 C: 조립 맥락 없이는 기하학적 재현 해석 불가.”
“팀 D: 추가 정보 요청.”
네 번째 문장에서 타르디외가 웃었다.
메마른 웃음이었다.
“적어도 한 팀은 정직하네요.”
리즈가 물었다.
“그들은 뭘 알고 있죠?”
세귀르가 답했다.
“용도가 명시되지 않은 비정상적 지지력 문제를 다룬다는 것.”
“용도가 아니라 사용처가 명시되지 않은 거죠.”
소렐이 바로잡았다.
세귀르는 정정을 받아들였다.
“사용처가 명시되지 않은 문제.”
“제가 여기 있다는 것도 모르고요.”
“모릅니다.”
“어쩌면 사람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것도.”
“모릅니다.”
“그럼 공식 속의 구멍을 복제하는 거네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모호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정확했다.
서로 분리된 팀들은 기하학의 조각과 재료, 주파수, 제약 조건을 받았다. 밤은 받지 않았다. 수치심도 받지 않았다. 물체가 단순한 형태이기를 멈추고 누군가 짊어지기로 받아들인 하중이 되는 순간도 받지 않았다.
아직 과학이 아니었다. 몸 없이 벌이는 해부였다.
초저녁, 브레송은 리즈가 직접 그들 앞에서 복제품 하나를 조립해달라고 요청했다.
소렐은 안 된다고 했다.
타르디외는 하자고 했다.
세귀르는 이유를 물었다.
리즈는 당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안은 뜻밖의 곳을 건드렸다.
처음부터 그들은 물건이 리즈 없이 살아날 수 있는지 확인하려 했다. 이제는 그녀의 손만으로 충분한지 알고 싶어 했다. 꿈도, 내면의 동의도 아닌 그저 손동작만.
그녀의 일부는 거절하고 싶었다.
다른 일부는 알고 싶었다.
“어떤 부품으로요?”
리즈가 물었다.
브레송은 회색 스펀지가 깔린 서랍을 열었다. 가공을 마치고 표시를 붙여 정렬한 부품들. 여전히 지나치게 아름다웠지만 C1만큼 오만하지는 않았다. 살아 있는 장치의 결함과 흔적, 불규칙성을 재현했고, 플랜지의 긁힌 자국 하나까지 베껴놓았다.
상처의 복제품.
리즈는 얼굴을 찌푸렸다.
“때까지 베꼈네요.”
브레송이 조용히 대답했다.
“보시다시피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침 이후로 무언가를 잃었다.
지성은 아니었다.
자신감이었다.
덕분에 견딜 만한 사람이 되었다.
리즈는 손을 씻었다.
요구받아서가 아니었다.
온종일 묻은 먼지를 그대로 둔 채 그 부품을 만지는 것은 외설처럼 느껴졌다.
촬영이 시작됐다.
물론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조립했다. 고리. 링. 격자. 빈 공간. 체결. 어긋남. 아무것도 찾아오지 않았다. 열기도, 혐오감도, 지저분한 정확성도. 머리가 검증을 끝내기도 전에 물건을 버티게 만들 줄 아는 손가락의 오래된 지성, 그 숙련만 있을 뿐이었다.
30분 뒤 L1 복제품이 완성됐다.
다른 것들보다 더 맞아 보였다.
그 사실만으로 모두가 희망을 품었다.
잔인한 일이었다.
시험.
무반응.
두 번째 시험.
무반응.
리즈가 방이 너무 희다고 말했기 때문에 격납고 시험대에서 진행한 세 번째 시험.
무반응.
떨림조차 없었다.
리즈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안도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
손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그들은 그녀에게서 다른 무언가를 필요로 할 것이다.
더는 방어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빠진 것
저녁 회의에는 화면이 없었다.
보클레르는 참석하지 않았다.
아무도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리즈에게는 그의 부재가 참석보다 더 불안했다. 자리에 없는 사람은 참석자들이 준비한 것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탁자 위에는 여덟 개의 장치가 놓여 있었다.
살아 있는 것.
죽은 것.
C1부터 C5.
L1.
평범한 눈에는 거의 똑같아 보이는 작은 물건 여덟 개. 그중 단 하나만이 반응하기로 받아들였다.
타르디외는 칠판에 세 개의 열을 그었다.
“물질”
“형태”
“맥락”
그러다 망설였다.
네 번째 열을 추가했다.
“바렌”
리즈는 칠판 위 자기 이름을 바라보았다.
이제 배지 위의 이름이 아니었다.
서류 위의 이름도 아니었다.
변수가 되어 있었다.
“안 돼요.”
소렐이 말했다.
타르디외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가요?”
“그렇게는 안 됩니다.”
“요인의 이름은 붙여야죠.”
“그러니까요. 물질과 맥락 사이, 칠판 위에 사람의 성만 덩그러니 적어놓으면 안 돼요.”
타르디외는 몇 초 동안 펜을 든 채 서 있었다.
그러고는 지웠다.
대신 이렇게 썼다.
“밤 / 짊어짐”
완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덜 폭력적이었다.
리즈는 조금 편히 숨을 쉬었다.
브레송이 결과를 발표했다.
새로운 정밀함과 거의 겸손에 가까운 태도로 말했다. 복제품들의 치수는 일치했다. 재료만으로 차이를 설명할 수 없었다. 표면 상태도, 조립 순서도 마찬가지였다. 리즈가 조립 현장에 있었던 사실로도 설명되지 않았다. 장소에 따라 살아 있는 장치의 반응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어떤 장소도 복제품을 깨우지는 못했다.
“그럼 매개변수 하나가 빠졌군요.”
르세르프가 말했다.
브레송이 답했다.
“어쩌면 빠진 건 원인일 겁니다.”
그 말에 작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타르디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세귀르가 물었다.
“현재 작업 가설은 무엇입니까?”
아무도 서둘러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내 소렐이 입을 열었다.
“장치는 물질적 구성만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최초로 반응 상태에 들어가기 전이나 그 과정에서 우리가 생성할 수도, 기록할 수도 없는 무언가를 받는 듯합니다. 바렌 씨가 그 일이 일어나는 장소에 임시로 붙인 이름이 꿈입니다. 설명은 아닙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자리한 곳이죠.”
마송은 거의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받아 적었다.
리즈는 그가 적지 않기를 바랐다.
세귀르가 물었다.
“시험할 수 있습니까?”
“네.”
소렐이 말했다.
“어떻게요?”
소렐은 리즈를 보았다.
“복제품 옆에서 주무시라고 바렌 씨에게 요청하는 겁니다.”
세계의 질감이 변했다.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었다. 탁자도, 장치도, 조명도, 의자도 모두 그대로였다. 하지만 리즈는 발밑에서 문 하나가 열리는 것을 느꼈다.
어제는 개입에 대한 동의를 요구했다.
지금은 그녀의 밤을 요구했다.
같은 일이 아니었다.
전혀 달랐다.
“싫어요.”
너무 빨리 대답했다.
소렐이 눈을 내리깔았다.
“알겠습니다.”
세귀르는 알겠다고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더 나빴다.
리즈는 그가 자신의 거절을 임시 구역으로 분류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국가는 오늘 강요할 수 없지만, 내일 더 나은 각도로 다시 제시해야 할 것을 그 구역에 보관한다.
리즈는 일어섰다.
“동생에게 전화할게요.”
아무도 막지 않았다.
복제되지 않는 것
마리안은 전화를 받자마자 말했다.
“듣고 있어.”
안녕도, *괜찮아?*도 아니었다. 듣고 있어.
리즈는 하마터면 모두 말할 뻔했다.
그 방.
복제품들.
죽은 장치들.
칠판 위의 자기 이름.
소렐의 요청.
통신선과 도청, 복도에 서 있는 들로네, 아침에 기술적 세부 사항은 말하지 말라고 되풀이한 르세르프의 목소리 때문에 참았다. 하지만 덜 고결한 이유도 있었다. 정말로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마리안은 자매의 언어로 그것들을 현실로 만들 것이다. 그러고도 버틸 수 있을지 리즈는 자신이 없었다.
“그들이 복제해보려 했어.”
침묵.
“뭘?”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
“그래서?”
“안 돼.”
마리안은 천천히 숨을 쉬었다.
“슬픈 것 같아.”
“기뻐해야 하는데.”
“그럼 슬픈 거네.”
리즈는 눈을 감았다.
“나 없이 안 되면, 그들은 나에게서 더 많은 걸 원할 거야.”
“어떻게 더 많은 걸?”
“밤을.”
마리안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리즈는 동생의 부엌을 들은 듯했다. 난방기. 의자. 정상이 아닌 말들 주위의 평범한 삶.
“넌 거절할 권리가 있어.”
마리안이 말했다.
“얼마 동안?”
“그건 질문이 아니야.”
“맞아.”
“아니. 질문은 이거야. 네 거절은 무엇을 지키는가?”
리즈는 눈을 떴다.
그런 말을 기대하지 않았다.
마리안에게서는.
아니, 어쩌면 마리안이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모르겠어.”
“그럼 너무 빨리 내주지 마. 하지만 그들이 다시 빼앗을까 두렵다는 이유만으로 내던지지도 마.”
“너도 그 사람들처럼 말하네.”
“아니. 그 사람들은 위에서 너한테 말해. 나는 내가 닿을 수 있는 곳에서 말하는 거야.”
리즈는 복도 벽에 이마를 댔다.
차가웠다.
“그들이 칠판에 내 이름을 적었어.”
고백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3미터 떨어진 곳의 들로네가 고개를 돌렸다.
마리안이 물었다.
“무엇처럼?”
“측정할 물건처럼.”
“그럼 다른 걸 쓰게 해.”
“뭘?”
“일단 네 이름부터. 성 말고.”
리즈는 웃을 뻔했다.
“그걸로는 부족해.”
“그래. 하지만 사람들이 칸을 만드는 걸 막을 수 없을 때도, 그 칸에 붙인 이름표를 보며 편히 자지 못하게 만들 수는 있어.”
리즈는 그 말을 간직했다.
아직 어디에 둘지는 몰랐다.
통화를 마치자 들로네가 전화기를 회수했다.
“동생분은 정부 부처에서 일해야겠군요.”
그가 말했다.
“중학교보다 월급이 좋아요?”
“아뇨.”
“그럼 지금이 더 쓸모 있겠네요.”
그는 미소 같은 움직임을 보였지만, 끝내 미소가 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리즈는 회의실로 돌아갔다.
모두가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여덟 개의 장치도.
살아 있는 것.
죽은 것.
복제품들.
빠진 것.
칠판으로 가서 펜을 집고 “밤 / 짊어짐”에 줄을 그었다.
타르디외가 한 걸음 나섰다.
리즈는 그 위에 썼다.
“리즈가 짊어지기로 받아들이는 것.”
펜을 내려놓았다.
“이게 가설이에요.”
소렐이 고개를 숙였다.
복종의 표시가 아니었다.
정확성을 인정하는 표시였다.
세귀르는 그 문장을 읽었다.
“다루기가 더 어려워졌군요.”
“네.”
“의도한 겁니까?”
“아뇨. 정확한 거예요.”
타르디외가 장치들을 바라보았다.
“그럼 당신이 무엇을 짊어지기로 받아들이는지 알아내야겠군요.”
리즈는 받침대 아래의 두 남자를 생각했다. 시험용 주괴. 아버지의 상자. 역기 원판과 라디에이터, 평형추. 하중으로 그녀의 삶에 들어왔다가 증거가 되어 나온 모든 물건을.
그녀가 답했다.
“복제품은 아니에요.”
“왜죠?”
“복제품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니까요. 주어지기를 기다릴 뿐이에요.”
브레송이 고개를 들었다.
그 말은 그에게도 닿았다.
아마 하루 종일 올바르게 기다리는 물건들을 만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소렐이 물었다.
“그럼 복제품을 짊어져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면요?”
리즈는 너무 늦게 자신이 이곳까지 이끌려왔다는 걸 깨달았다.
속임수 때문이 아니었다.
필요 때문이었다.
“그럼 뭘요?”
타르디외는 순도가 낮은 고리와 지친 표면을 가진, 노화 처리된 복제품 C3을 가리켰다.
“변형물요. 기존 물건의 복제가 아니라, 아직 자기 형태를 찾고 있는 물건.”
리즈는 C3을 바라보았다.
두 시간 전에는 죽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저녁의 불빛 아래에서는 그저 미완성으로 보였다.
같은 일이 아니었다.
그 차이를 느끼고 싶지 않았다.
“오늘 밤은 안 돼요.”
소렐이 곧장 답했다.
“오늘 밤은 하지 않겠습니다.”
세귀르는 반박하지 않았다.
하지만 물었다.
“내일은요?”
리즈가 그를 보았다.
“내일은 어쩌면 잠들 수 있겠죠.”
그가 얻어낸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하나의 틈이었다.
그날 저녁, 리즈는 방에서 공식 수첩에 적었다.
“복제품들은 죽어 있다.”
그리고 오랫동안 망설이다 검은 수첩에 적었다.
“어쩌면 물건은 제대로 다시 만들었다고 살아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누군가 자기에게 그 일이 일어나도록 받아들일 때 살아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수첩을 덮었다.
복도에서는 기지가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어딘가에서는 사람들이 복제품의 실패를 분류했다.
어딘가에서는 벌써 다른 사람들이 변형물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제야 리즈는 세상이 자신의 잠만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들은 리즈가 짊어지지 않으면 수치스럽게 느낄 물건들을 내미는 법을 배울 터였다.
제12장
조직된 잠
변형물들
다음 날, 그들은 복제품이라는 말을 쓰지 않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 말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다. 단지 서류에서 사라졌을 뿐이었다.
대신 변형물들이 등장했다.
변형물 V1: 노화 처리된 고리, 중앙의 빈 공간을 0.5밀리미터 넓힘.
변형물 V2: 더 열린 외부 고리, 순도가 낮은 재료.
변형물 V3: 길어진 격자, 검은 수첩의 오래된 페이지에서 가져온 비대칭.
변형물 V4: 재작업을 위해 의도적으로 미완성 상태로 둔 조립체.
용어는 개선되고 있었다.
리즈는 더 경계했다.
그녀가 배정받은 방은 더 작았다. 탁자와 램프, 수첩 두 권, 커피가 든 보온병, 비탈이 보이는 창문이 있었다. 기계도, 분동도, 덮개 아래의 물건도 없었다. 변형물들은 옆방에 있었다.
유리창을 통해 보였다.
회색 쟁반 위에 작은 장치 네 개가 놓여 있었고, 각각 표찰이 붙어 있었다.
환자들처럼.
증거들처럼.
미끼들처럼.
소렐이 종이 한 장을 그녀 앞에 놓았다.
“오늘 밤의 제안 조건입니다.”
리즈는 종이를 집지 않았다.
“벌써요?”
“네.”
“오늘 밤은 안 된다고 했잖아요.”
“약속은 지켰습니다.”
“24시간이나요. 영웅적이네요.”
소렐은 흘려보냈다.
“침습적인 건 없습니다. 약도, 수면 박탈도, 전극도, 방 안의 카메라도 없어요. 18호실에서 주무시면 됩니다. 변형물들은 20미터 떨어진 옆방에 두고, 직접 접촉은 없습니다. 꿈을 꾸면 기록하세요. 거절하려면 거절하시고요.”
“꿈을 꾸지 않으면요?”
“그것 역시 배울 게 있겠죠.”
“실패해도 아무것도 잃지 않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제가 잃는 건 당신보다 적으니까요.”
리즈는 종이를 집었다.
거의 지나치게 단순한 조건이라 오히려 정직하지 않아 보였다.
조건들은 짧게 적혀 있었다.
리즈는 허점과 슬쩍 끼워 넣은 단어, 열린 문을 찾았다. 물론 있었다. 항상 있었다. ‘가까이 둔 변형물’이라고 쓰고 가까이를 정의하지 않았다. ‘간접 관찰’이라고 쓰고 몇 명이 읽게 될지는 밝히지 않았다. ‘과학적 활용’은 거의 모든 것을 집어넣을 수 있는 상자였다.
펜을 집었다.
‘활용’을 ‘검토’로 고쳤다.
그리고 덧붙였다.
“생산 목적은 일절 없음.”
조금 떨어져 앉은 마송이 법적 의미를 지닌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생산이 아닙니다.”
타르디외가 말했다.
“그럼 그렇게 적어도 문제없겠네요.”
타르디외는 답하지 않았다.
마송이 문구를 수정했다.
세귀르는 없었다. 보클레르도. 리즈가 이유를 묻자 르세르프는 회의 때문이라고 답했다. 국가의 입에서 나올 때는 수많은 부재 방식을 담아낼 수 있는 단어였다.
들로네가 문을 지켰다.
브레송은 변형물들이 있는 방에 있었다. 그 역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자지는 못했지만 달라져 있었다. 동작은 덜 확신에 차 있었고 더 정확했다. 이제 자신이 만든 물건처럼 장치를 만지지 않았다. 자신을 굴욕에 빠뜨릴 수도 있는 질문처럼 다가갔다.
리즈는 V3을 바라보았다.
길어진 격자.
마음속 무언가가 닫혔다.
소렐은 그것을 보았다.
“저건가요?”
“모르겠어요.”
“정말요?”
리즈는 웃을 뻔했다.
“이번에는 정말로요.”
그녀는 일어나 복도를 지나 유리창 앞까지 갔다. 방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V3은 아름답지 않았다. 어떤 것도 아름답지 않았다. 하지만 V3은 실패하는 방식 자체가 무언가를 부탁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디서 나온 거죠?”
브레송이 인터폰으로 답했다.
“검은 수첩 17페이지입니다. 전부 가져오지는 않았고, 입구와 격자만 반영했습니다.”
“왜 전부 안 했죠?”
그가 타르디외를 보았다.
타르디외가 답했다.
“전체 형태가 구속 장치와 너무 닮아 있었습니다. 당신 없이 재현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 우리가 뜻밖에도 리즈의 마음에 닿았다.
그들을 믿을 만큼은 아니었지만, 원칙만으로 거절하지 못하게 할 만큼은 되었다.
유보 조건 세 개를 붙여 종이에 서명했다.
그런 다음 하단에 적었다.
“나는 잠을 잔다. 생산하지 않는다.”
마송이 읽었다.
“논의가 필요하겠군요.”
“누구와요?”
“모두와요.”
“그럼 저 없이 시작하세요.”
번호가 붙은 밤
18호실은 또다시 아주 조금 달라져 있었다.
첫날 밤의 인쇄 안내문은 치워져 있었다. 대신 책상 위에 빈 종이 세 장과 펜 두 자루, 아침에 쓴 메모를 담을 봉인 봉투, 녹색 숫자가 밤을 대기실처럼 보이게 하는 작은 디지털시계가 있었다.
리즈는 시계를 엎어 나무 표면에 붙였다.
그러다 다시 세웠다.
조직되는 것을 거부하고 싶은지, 자신이 몇 시에 무너지는지 알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밤 10시, 소렐이 들렀다.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거짓말에 소질이 없네요.”
“거짓말 아닙니다.”
“거절할 수 있다는 말이 거짓말이라는 게 아니에요. 내일도 제 거절이 같은 무게를 지닐 것처럼 행동하는 게 거짓말이죠.”
소렐은 문턱에 서 있었다.
“같은 무게를 지니지는 않을 겁니다.”
리즈는 차라리 조금쯤 거짓말해주기를 바랐다.
“고맙네요.”
“설득하려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는 모든 게 설득이 돼요.”
소렐은 방을 둘러보았다. 침대. 책상. 종이들.
“시계를 치우게 할 수 있어요.”
“아뇨.”
“왜죠?”
“마음에 안 드니까요.”
소렐은 이해한 듯했다.
나가려 할 때 리즈가 물었다.
“뭘 기대해요?”
“오늘 밤에요?”
“네.”
소렐은 오래 생각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말로요?”
“네.”
“과학적으로는요?”
“과학적으로는 제가 틀렸기를 바랍니다.”
리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직업도 피곤하겠네요.”
“최근에는 당신 직업만큼은 아닙니다.”
소렐이 떠난 뒤, 리즈는 자신에게서 20미터 떨어진 네 개의 변형물과 홀로 남았다. 두 개의 벽과 세 개의 문, 여러 겹의 서명 너머였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 V1은 막힌 창문 가까이. V2는 중앙. V3은 바로 세우지 말라는 그녀의 요구 때문에 조금 비스듬히. V4는 미완성.
다른 것을 생각하려 했다. 마리안, 잔, 아파트, 여전히 정기검사를 받아야 할 트윙고, 하산, 나데주, 14번 작업장.
하산의 이름은 다른 무게를 지녔다. 더 다정한 무게는 아니었다. 더 위험한 무게였다. 그것은 후속 결과를 내놓으라는 요구 없이 몸이 접촉되던 시간, 잠이 아직 전략적 가치를 지니지 않던 아침에 속했다. 리즈는 하산을 구원으로 삼고 싶지 않았고, 매달릴 이야기로는 더더욱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 누군가 은밀한 감정으로 그녀의 밤을 유도하려 한다면 거창한 비밀은 필요 없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베개 위의 웃음과 허리 아래쪽에 얹힌 손, 세제와 금속 냄새만으로도 충분할지 몰랐다.
서류가 압수된 뒤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산은 보았다. 코르넥은 알고 있었다. 브레송은 복제했다. 마레스코는 감사했다. 모두가 조금씩 이야기 속 자리를 얻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벌써 그 뒤로 사라지고 있었다.
밤 11시 10분, 그녀는 적었다.
“나는 물건들이 허락을 기다리는 장소가 되고 싶지 않다.”
허락에 줄을 그었다.
그러고는 다른 말을 찾지 못했다.
자정 7분 전, 잠이 들었다.
꿈은 형체로 시작하지 않았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느낌으로 시작했다.
터무니없고도 선명했다.
벽 없는 어둠 속에 네 개의 존재가 있었다. 네 개의 물건이 아니었다. 아직 무엇을 요구해야 할지 모르는 네 가지 방식이었다. V1은 메말랐고 거의 무심했다. V2는 너무 시끄러웠다. V4는 그저 중단이었다. V3은 옆으로 비켜나 있었다.
겸손하지도, 애원하지도 않았다. 그저 비켜나 있었다.
아직 자신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잘못 완성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처럼.
리즈는 멀어지려 했다.
꿈속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17페이지의 세 선이 돌아왔다. 이제 붉지 않았다. 희고 가늘었으며,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거의 고통스러웠다. V3의 격자가 0.5도 벌어졌다. 중앙의 빈 곳이 어떤 도면에도 존재하지 않는 구역으로 이동했다. 고리 하나가 자기 자리를 거부했다. 그 거부를 그대로 두어야 했다.
그러자 형체의 기능이 바뀌었다.
더는 물건이 아니었다.
언젠가 이루어질 시험이, 사람들이 자신에게 저지를 일보다 덜 잔인해지기를 부탁하러 온 것이었다.
리즈는 3시 22분에 깨어났다.
턱이 아팠다.
처음 적은 문장은 이것이었다.
“V3은 완성하면 안 된다.”
그리고 이어 썼다.
“살아 있는 결함을 남겨야 한다.”
종이 위에 펜을 든 채 기다렸다.
나머지는 나오지 않았다.
옆방에서는 경보가 울리지 않았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밤이 자기 결과에 압수당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녀는 적었다.
“조금 짊어졌다. 복종할 만큼은 아니었다. 어디에서 거부해야 하는지 알 만큼만.”
공식 수첩을 덮은 뒤 책상 위에 이마를 댄 채 다시 잠들었다.
첫 번째 묶음
6시 40분, V3이 반응했다.
조금. 또 하나의 기적을 낳기에는 턱없이 적고, 실패가 주는 안락함을 죽이기에는 충분했다.
리즈는 시험실에 없었다.
여전히 자고 있었다. 적어도 잠과 비슷한 상태에 있었다. 6시 30분까지 그대로 두었다. 소렐이 소리 없이 들어왔을 때, 리즈는 양팔 위에 머리를 얹고 있었고 뺨에는 수첩의 제본 자국이 남아 있었다.
“깨우지 마세요.”
소렐이 들로네에게 말했다.
“10분 뒤에 시험합니다.”
“그럼 신선한 상태로 의자에 앉혀두지 않고 시험하면 되겠군요.”
신선한이라는 말은 추하게 들릴 수도 있었다.
소렐의 입에서는 그저 인간적인 말이었다.
V1을 시험했다.
무반응.
V2.
무반응.
V4.
판독 가능한 반응 없음.
그다음 V3.
시험 절차는 소박했다. 20킬로그램 분동, B2-17실, 낮은 여기, 단 두 번의 측정. 브레송은 전날 이후 아무것도 바꾸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즈가 깨어난 뒤 기록한 아주 작은 수정 하나만 제외했다. 입구를 바로잡지 말 것. 결함을 그대로 둘 것.
첫 번째 측정.
20.1.
19.9.
무반응.
브레송은 두 번째 측정을 요청했다.
소렐은 유리벽 너머 리즈를 보았다.
이제 자리에 앉아 두 손으로 커피잔을 감싸 쥔 리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측정.
19.2.
17.8.
그리고 복귀.
분동이 뜬 것도, 그 아래로 눈에 보이는 공기가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선명하고 짧은 하락이었다. 나타나는 방식은 말끔했고, 의미하는 바는 지저분했다.
브레송은 양손을 탁자에 얹었다.
“미약합니다.”
아무도 그 말을 믿어줄 만큼 친절하지 않았다.
타르디외가 세 번째 측정을 요구했다.
소렐은 거부했다.
“두 번으로 정했습니다.”
“두 번째에 반응했잖아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멈추는 겁니다. 검토를 식욕으로 바꾸기 전에.”
타르디외는 입술을 다물었다.
리즈는 그녀가 얼마나 계속하고 싶어 하는지 보았다.
국가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보클레르를 위해서도.
알기 위해서였다.
아마 그 욕망이야말로 가장 위험할 터였다. 타락할 필요조차 없는 욕망이니까.
브레송이 곡선을 출력할 때 세귀르가 도착했다.
그는 곡선을 보고 물었다.
“결론을 내리기에 충분합니까?”
소렐이 답했다.
“어떤 결론요?”
“바렌 씨의 밤이 V3의 행동을 변화시켰다는 결론.”
“아뇨.”
브레송이 고개를 들었다.
“아리안.”
“과학적으로는 아니에요. 정치적으로는 그렇겠죠. 그게 바로 문제입니다.”
세귀르는 무거운 서류를 받아들듯 그 말을 받아들였다.
“우리가 얻은 것에 이름을 붙여야 합니다.”
리즈가 의자에서 말했다.
“좋은 소식처럼 생긴 나쁜 소식을 얻었죠.”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8시, 묶음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다.
리즈나 소렐이 한 말이 아니었다. 타르디외가 급히 쓴 메모에 적혀 있다가 줄이 그어졌다.
“다음 V 묶음: 조정된 변형물 네 개.”
리즈는 그 단어를 보았다.
줄을 그었어도 읽을 수 있었다.
묶음.
그랬다.
하룻밤 만에 하나의 물건에서 하나의 묶음으로 넘어갔다.
리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눈 뒤쪽에 새로운 피로가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무겁고 차분하며 거의 성숙한 피로였다. 말들이 자신보다 빨리 달릴 것이며, 그중 어떤 것을 뒤쫓을지 골라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한 피로였다.
부드러운 사슬
그 뒤 며칠은 가혹하지 않았다. 그래서 증오하기 어려웠다.
아무도 리즈를 묶거나 약을 먹이거나 잠을 빼앗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베개를 더 좋은 것으로 바꿨다. 조명을 조절했다. 식사 시간을 옮겼다. 오후 6시 이후의 회의를 줄였다. 소렐에게 휴식 시간대를 정하게 했다. 매일 마리안에게 전화하는 것을 허용했다. 가방 속 물건 몇 가지도 감독 아래 돌려주었다.
모두 인간적인 조치였다.
동시에 모두 밤을 생산하기 위한 조치였다.
생산이라는 단어는 어디에도 없었다.
리즈의 눈에는 어디에나 보였다.
변형물을 담은 쟁반 위에.
일정표 속에.
브레송이 아침마다 잠은 잤느냐고 묻기도 전에 기록한 것이 있느냐고 묻는 방식에.
사흘째 되던 날 그도 깨달았다.
얼굴이 붉어졌다.
“죄송합니다.”
리즈는 다른 사람들만큼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의 사과는 검토를 거친 문장이 아니었으니까.
사흘 만에 변형물들에게는 생애가 생겼다.
하나는 반응했다가 입을 다물었다. 다른 하나는 하중을 뚜렷이 떨어뜨린 뒤 다시 죽었다. 세 번째는 격납고에서만 작동했다. 흰 방에서는 쓸모없을 만큼 예의 바른 물건이 되는 듯했다. 네 번째는 경보를 울렸지만, 물건과 탁자와 집단적 욕망 가운데 무엇이 움직였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결과는 달라졌다. 장면은 되풀이됐다.
리즈는 수첩들을 들고 왔다. 소렐은 먼저 그녀의 얼굴을 보았고, 타르디외는 그다음 곡선을, 브레송은 물건들을, 마송은 단어들을 보았다. 르세르프는 문을 닫았다. 들로네는 사람들을 살폈다. 세귀르는 오는 횟수가 줄었다. 사건이 다른 곳으로 올라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보클레르는 아예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부재는 이미 작업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나흘째 저녁, 리즈는 르 비앙과 케르브라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권하지 않는다는 답을 들었다.
리즈는 그건 대답이 아니라고 했다.
소렐, 들로네, 군의관이 입회한 가운데 의무실에서 7분간의 만남이 마련됐다.
르 비앙은 한쪽 팔에 붕대를 두르고 얼굴에 멍이 든 채였다. 운이 좋았다는 말을 스무 번쯤 되풀이하고 나서, 이제 그 이야기가 누구의 것인지 모르게 된 사람 특유의 신경질적인 명랑함이 있었다.
케르브라는 일어날 수 없었다.
갈비뼈를 다쳤고 한쪽 다리는 고정되어 있었다. 보면 목소리를 낮추고 싶어지는 안색이었다.
리즈는 두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 채 들어갔다.
르 비앙이 말했다.
“당신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잘못 들으셨어요.”
그가 조금 웃었다.
“그렇게 대답하실 거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케르브라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는 약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두 마디.
또다시.
리즈는 거절하고 싶었다.
그럴 수 없었다.
“빠져나오셨잖아요.”
리즈가 말했다.
“네.”
“그럼 계속 빠져나와 계세요.”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완전히는.
소렐은 이해했다.
복도에서 그녀가 물었다.
“왜 만나려고 했어요?”
리즈가 답했다.
“제가 그들을 만들어낸 건 아닌지 확인하려고요.”
소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리즈는 V12의 꿈을 꾸었다.
형태가 아니라 이름의 꿈이었다.
V12.
문자 하나와 숫자 하나.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물건이 벌써 연속된 순서 속에 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리즈는 차가운 메스꺼움과 함께 깨어났다.
종이에 적었다.
“번호를 멈출 것.”
그리고 썼다.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고는 두 번째 문장에 줄을 그었다.
사슬을 더 부드럽게 만드는 일을 돕고 싶지 않았다.
유용한 밤
닷새째 되던 날 세귀르가 돌아왔다.
리즈를 호출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수행원도 없이 변형물실로 찾아왔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갈무리된 피로를 지닌 채였다. 장치와 곡선, 기록을 살펴본 뒤 리즈와 몇 분간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소렐이 거부했다.
리즈가 말했다.
“소렐은 남아요.”
세귀르는 받아들였다.
펜으로 적은 몇몇 조건이 아직 효력을 지닌다는 것을 인정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방에서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 다음 말했다.
“결과를 통해 알게 되기 전에 당신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리즈는 앉았다.
“시작부터 좋네요.”
“V3, V6, V8의 반응으로 이 사안의 성격이 달라졌습니다.”
“아뇨. 당신들의 조급함이 달라진 거죠.”
“둘 다입니다.”
소렐은 벽에 기대었다.
세귀르가 말을 이었다.
“현상이 최초의 물건 하나에 묶여 있는 동안에는 사고나 이상 현상, 단독 사례라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밤을 거친 뒤 일부 변형물이 미약하게나마 반응하기 시작한 지금은 다른 상황입니다.”
“사슬이죠.”
그는 그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틀렸기 때문은 아니었다.
“출현 중인 절차입니다.”
“아뇨. 사슬이에요.”
소렐은 정정하지 않았다.
세귀르는 그 단어를 두고 논쟁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 저녁 대통령에게 보고될 겁니다.”
리즈는 덮개 아래 놓인 V8을 바라보았다.
“벌써 알고 있던 거 아니에요?”
“이상 현상과 예외적 개입에 대해서는 보고받았습니다.”
“이제는요?”
“이제 프랑스가 무거운 물체의 겉보기 지지력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알려진 절차를 보유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 절차는 현상을 통제하면서 자유를 어떻게 지켜야 할지 아직 알 수 없는 프랑스 시민 한 명에게 의존한다는 사실을 보고받게 됩니다.”
“문장을 많이 다듬었네요.”
“네.”
“거의 정직해요.”
“그게 목표입니다.”
리즈는 기쁨 없이 짧게 웃었다.
세귀르는 그녀 맞은편에 앉았다.
“바렌 씨, 지금 사슬을 끊지 말아달라고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그가 직접 그 말을 했다.
일부러 떨어뜨린 말이었다.
리즈는 소렐이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됐네요.”
리즈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제 포장하지 않는 거예요?”
“덜 하려고 합니다.”
“왜죠?”
“위험에 이름이 붙었을 때 당신이 더 정확히 알아보는다고 생각하니까요.”
리즈는 마리안을 생각했다.
그 말을 생각했다. 그들의 긴급 상황이 되지 마.
유리창 너머의 물건들과 변형물들, 희미한 곡선, 무언가가 반응할 때 브레송이 보이던 안도, 아무리 나은 사람이라 해도 모두가 그녀의 밤에서 쓸 만한 결과를 기다리기 시작한 방식을 생각했다.
“얼마나요?”
그녀가 물었다.
세귀르는 못 알아들은 척하지 않았다.
“사흘 밤입니다.”
“안 돼요.”
“이틀.”
“흥정이 아니에요.”
“그럼 당신이 말해보세요.”
리즈는 소렐을 바라보았다.
소렐은 그녀 대신 대답하지 않았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이제는 알 수 없었다.
“하룻밤.”
리즈가 말했다.
“딱 한 번. 번호가 붙은 새 물건은 안 돼요. 묶음도 안 되고요. 변형물은 넷을 넘기지 마세요. 먼저 제가 봐야 해요. 거부할 건 거부합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부터 24시간 동안 시험을 멈춰요.”
“왜죠?”
“제가 정지 지점을 만들지 않으면 당신들은 이걸 방법이라고 부를 테니까요.”
세귀르는 그 말을 받아들였다.
그대로 서명할 수도 있을 듯했다.
“하룻밤만 한다는 조건에 동의합니다. 수량과 사전 거부권도요. 24시간 중단은 저 혼자 약속할 수 없습니다.”
“그럼 혼자 부탁하지 마세요.”
그는 전화기를 꺼냈다.
검은 전화기가 아니라 자신의 전화기였다.
방을 나갔다.
소렐이 리즈를 보았다.
“확실해요?”
“아뇨.”
“그럼 왜 승낙하죠?”
리즈는 투명 덮개들을 바라보았다.
“지금 거절하면, 그들은 제 거절이 불가능해지도록 만드는 법을 배울 테니까요.”
“승낙하면요?”
“더 잘 부탁하는 법을 배우겠죠.”
소렐은 부정하지 않았다.
“승리는 아니네요.”
“아뇨.”
복도에서 세귀르는 낮은 목소리로 통화하고 있었다.
리즈에게는 말이 들리지 않았다.
박자만 들렸다. 예외를 밤새 버틸 만큼 단단한 문구 안에 집어넣으려 할 때 국가가 연주하는 오래된 음악.
그날 저녁 리즈는 두 개의 벽 너머에 변형물 네 개를 두고 잠들기로 했다.
국가를 위해서도, 과학을 위해서도, 언젠가 구조할지 모를 사람들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자신이 짊어질 수 있는 것이 어디까지인지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의 일부 때문에 받아들였다. 그 부분이야말로 가장 비난하기 어려웠다.
잠자리에 들기 전 마리안에게 전화했다.
“하룻밤이야.”
리즈가 말했다.
“설명해줄래?”
“제대로는 못 해.”
“그럼 할 수 있는 만큼만 말해.”
리즈는 문과 수첩, 조건이 적힌 종이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내가 잠들어야 해.”
마리안이 무언가 중얼거렸지만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고는 물었다.
“너는?”
“나도 그런 것 같아.”
그 대답은 두 사람 모두를 두렵게 했다.
2시 50분, 리즈는 네 변형물의 꿈을 꾸었다.
6시, 그중 둘이 반응했다.
7시가 되자 서류에서 사슬이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이것이었다.
“유용한 밤들의 연속.”
리즈는 마송의 어깨 너머로 문구를 읽었다.
소리치지도, 울지도 않았다. 산업화는 생산 속도나 공장, 가득 찬 격납고에서 시작되지 않으리라는 사실만 깨달았다.
복수형으로 적힌 부드러운 표현 하나, 모두가 합리적이라고 여길 문서 속 표현 하나에서 시작될 터였다.
제13장
판의 중심에 선 프랑스
선들이 그어진 아침
여덟 시 반이 되자 이미 아무도 지난밤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밤이 무엇을 열어젖혔는지를 이야기했다.
그 미묘한 차이만으로도 리즈는 창문도, 수첩도, 벽 너머의 물체도, 깨어나면 기다리고 있을 합리적인 말들도 없는 방에서 열다섯 시간 내리 자고 싶다는 거센 충동을 느꼈다.
아무도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다.
간호사는 변형체실에 선 리즈의 팔에 혈압계를 감아 진찰했다. 소렐은 가운도 입지 않은 채 옆에서 기다렸다. 좀 더 단호할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얼마나 잤어요?”
“보아하니 대답을 두 개쯤 내놓을 만큼은요.”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에요.”
“세 시간. 토막토막 합치면 네 시간일지도 모르고요.”
소렐은 받아 적었다.
펜마저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다.
탁자 위에는 네 개의 변형체가 유리 덮개 아래 놓여 있었다. 두 개가 반응했다. 힘도 달랐고 곡선도 달랐다. 제대로 된 프로토콜을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전날 밤을 단순한 사고에서 가능한 방법으로 바꾸기에는 충분했다. 직책이나 접근 권한, 야망이나 두려움을 지닌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서 이미 그렇게 변해 있었다.
리즈는 표찰을 보았다.
V10.
V11.
반응한 두 개.
분명 번호를 붙이지 말라고 했는데.
누군가는 그 말을 문자 그대로 따랐다가, 더 뒤쪽 번호부터 다시 시작한 모양이었다.
“누가 이름 붙였죠?”
측정 기록을 서류철에 정리하던 브레송이 굳었다.
“접니다.”
그는 자신을 변호하려 들지 않았다.
그 때문에 오히려 상황이 더 나빠졌다.
“그만하라고 했잖아요.”
“네.”
“그런데요?”
그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곡선을 헷갈릴까 봐 두려웠습니다.”
완벽하고, 어리석고, 진실한 대답이었다.
리즈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럼 죽은 문자를 붙여요. 연속되지 않는 걸로.”
“죽은 문자요?”
“네. 다음 것을 약속하지 않는 걸로.”
브레송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슬퍼하기에는 충분히 이해했다.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르세르프가 들어왔고 마송과 들로네가 뒤따랐다. 그다음은 세귀르였다.
세귀르는 한숨도 자지 않았다.
지나치게 흐트러짐 없이 버티고 있는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피로는 어깨와 몸짓과 목소리로 내려앉았다. 반대로 그의 피로는 얼굴까지 올라가 눈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또렷하고 차갑게, 국가기밀처럼 다스려진 채.
“바렌 씨, 보여드려야 할 게 있습니다.”
“싫어요.”
말이 생각보다 먼저 튀어나왔다.
세귀르가 멈췄다.
“무엇이 싫다는 겁니까?”
“아니요, 그 전에요. 우선 스물네 시간 중단. 그게 조건이었어요.”
마송은 서류로 눈을 내렸다.
르세르프도 그랬다.
세귀르는 잊은 척하지 않았다.
“실험은 중단됐습니다.”
“언제부터요?”
“일곱 시 십이 분부터입니다.”
“사람들은요?”
“어떤 사람들 말입니까?”
“다음에는 내게 뭘 요구할 수 있을지 궁리하는 사람들요.”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러니까요.”
소렐이 리즈와 변형체 탁자 사이에 살짝 비껴섰다. 신체적으로 보호하려는 동작이 아니라, 문장에 찍는 구두점 같은 작은 몸짓이었다.
“리즈 말이 맞아요. 즉각적인 압박까지 멈추지 않으면 중단은 아무 소용이 없어요.”
보클레르였다면 틀림없이 즉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귀르는 요구의 끝까지 듣는 데 시간을 들였다.
“우리는 하룻밤을 요구하러 온 게 아닙니다. 실험도 아니고요.”
“그럼 뭘 요구하러 왔는데요?”
“지도를 봐달라고요.”
그가 열린 문을 가리켰다.
리즈는 그가 평범한 지리 지도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따라갔다.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세계가 어떤 모습으로 들어왔는지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데려간 방은 다른 방들보다 넓었고 천장은 낮았으며 창문은 없었다. 달아오른 장비와 너무 오래된 커피, 갓 인쇄된 종이 냄새가 났다. 맞은편 벽의 화면에는 정치적 색깔을 지운 세계지도가 떠 있었다. 선과 점, 회색 사각형뿐이었다.
프랑스는 화면의 중심이 아니라 선들의 중심에 있었다.
브뤼셀로 향하는 선 하나.
워싱턴으로 하나.
런던으로 하나.
베를린으로 하나.
로마로 하나.
이름 없는 지점으로 둘.
아무도 굳이 이름을 써놓지 않은 베이징으로 하나.
리즈는 입구에 선 채 물었다.
“밤새 이걸 만든 거예요?”
르세르프가 대답했다.
“대부분의 선은 이미 존재했습니다.”
“무엇 때문에요?”
“위기에 대비해서요.”
리즈는 지도를 보았다.
“그런데 이제 위기는 나고요.”
아무도 정정하지 않았다.
그 점은 차라리 편안했다.
세귀르가 화면 옆에 섰다.
“대통령께는 스물세 시 사십 분에 보고됐습니다. 여섯 시에 소규모 회의가 열렸고, 즉각적인 결정 세 가지가 내려졌습니다. 첫째, 범위는 프랑스 안에 둔다. 둘째, 대외 발표는 일절 하지 않는다. 셋째, 공식적인 정치 결정 없이는 어떤 외부 협력국에도 완전한 절차를 넘기지 않는다.”
“완전한 절차.”
리즈가 되풀이했다.
마송이 대답했다.
“변형체들, 야간 조건, 기록, 곡선, 가능한 의학적 관찰 자료, 그리고 당신과의 연관성을 입증할 수 있는 모든 요소가 포함됩니다.”
“그러니까 나.”
“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들 사이에서는 그것이 일종의 예의가 되어가고 있었다. 공포가 이미 탁자에 앉아 있다면 더는 감추지 않는 것.
세귀르가 덧붙였다.
“대통령께서는 오늘 중으로 당신의 개인적 지위도 명확히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내 개인적 지위.”
“그렇습니다.”
“직원, 시민, 목격자, 구금자, 현상, 도구, 비밀, 아니면 비상사태?”
미리 생각해둔 목록이 아니었다.
저절로 흘러나왔다.
르세르프는 뭔가를 적다가 멈췄다. 그 말을 기록하는 순간 더 끔찍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소렐이 말했다.
“사람.”
리즈가 그녀를 보았다.
“뭐라고요?”
“그게 첫 번째 지위예요. 사람. 나머지는 모두 그 사실을 지우지 않은 채 세워져야 해요.”
세귀르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 화면에 보클레르가 나타났다.
늘 보던 흰 사무실이 아니었다. 그의 뒤로는 목재 벽면 일부와 금빛 램프, 지나치게 높은 창문이 보였다. 리즈는 그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멋진 문장이군요, 소렐 씨. 하지만 그걸로 오늘 아침 걸려오는 전화들에 답할 수는 없습니다.”
소렐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무 대답이나 내놓는 건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보클레르는 웃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그런 사치를 누릴 여유가 없습니다.”
리즈는 세귀르의 몸이 일 밀리미터 굳는 것을 보았다.
국가의 일 밀리미터와 맞서는 또 다른 국가의 일 밀리미터.
어쩌면 이제 그녀에게 허락된 자유의 폭은 그 정도일지도 몰랐다.
브뤼셀
첫 번째 통화는 이미 끝난 뒤였다. 녹음은 들려주지 않았다. 대신 여백이 반듯하고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을 것 같은 단어들로 지나치게 말끔하게 정리한 두 장짜리 요약문을 건넸다.
맨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유럽 측 접촉—유럽연합 집행위원장 비서실—전용 채널.”
리즈는 탁자 위에 놓인 공구를 살피듯 표현들을 읽었다. 전략적 연대, 단계적 공동 운용, 유럽 공동 안전 체계, 유럽 내부 불균형 방지.
“그들이 얼마나 알고 있죠?”
르세르프가 대답했다.
“산업과 군사, 우주의 판도를 뒤엎을 일이 파리에서 독단적으로 결정됐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는 사태만은 피하고 싶다고 요구할 정도는요.”
“자기 몫을 원할 정도로는 안다는 거군요.”
세귀르는 정정하지 않았다.
화면 속 보클레르가 말했다.
“공동의 정당성을 어느 정도라도 만들지 않으면 각국의 수도는 당신에게 닿는 길을 찾을 겁니다. 아니면 당신에게 맞서는 길을 찾겠죠.”
“나에게 닿는 길.”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그도 그 말을 포장하지 않았다.
소렐은 요약문을 집어 연필로 한 줄을 그어버렸다.
마송은 항의하려다가, 그것이 어차피 사본일 뿐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뭘 하는 겁니까?” 보클레르가 물었다.
“더러운 표현을 지우는 겁니다.”
그녀가 읽었다.
“‘관련 인적 역량의 공동 운용.’ 안 돼요.”
그 표현의 의미가 뒤늦게 리즈에게 와닿았다. 난폭한 표현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끔찍했다. 방 안에 들여놓고 나면 언젠가부터 눈에도 띄지 않게 되는 행정용 가구처럼, 단단하고 매끈했다.
“누가 썼죠?”
르세르프가 문서를 확인했다.
“직접 인용은 아닙니다. 우리 쪽에서 요약한 표현이에요.”
“그러니까 여기 있는 누군가네요.”
침묵.
마송은 펜 뚜껑을 닫았다.
“수정하게 하겠습니다.”
“아니요. 그대로 둬요. 당신들이 번역할 때 내가 어떤 꼴이 되는지 알고 싶으니까.”
세귀르는 무거운 물체를 받아내듯 그 말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프랑스 측 답변은 세 가지 거부로 압축됐다. 기술 자료 제공 불가, 리즈라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 이전 불가, 그 대상을 훔쳐 가지 않는 이름이 정해지기 전까지 공유 약속 불가.
“용어만요?” 리즈가 물었다.
소렐이 대답했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전쟁터예요.”
지도에서 브뤼셀로 향하는 선은 짧았다.
목을 가장 잘 조르는 것은 흔히 짧은 선들이다.
워싱턴
두 번째 통화는 더 단순했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워싱턴은 공동 운용을 요구하지 않았다. 접근권을 요구했다. 문서 어디에나 그 단어가 되풀이됐다. 프로토콜, 데이터, 중량 실험, 위기 관리, 동맹국 접근권. 줄을 내려갈수록 그 말은 기술 용어의 외피를 벗고 정중하게 안으로 들어오는 방식이 되었다.
“그들이 틀렸나요?” 리즈가 물었다.
아무도 제때 대답하지 못했다.
마침내 세귀르가 말했다.
“전략적으로는 아닙니다. 상황을 빨리 파악한 것은 잘못이 아니죠. 빨리 이해했다는 이유로 권리가 생긴다고 여기는 게 잘못입니다.”
문서에는 영어 단어 하나가 괄호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Interoperability.
리즈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프랑스어로는요?”
“동맹 간 호환성.” 소렐이 말했다.
마송이 펜을 들었지만 보클레르가 제지했다.
“영어 표현도 남겨두십시오. 쓸모가 있습니다.”
“어디에 쓸모가 있는데요?”
“그들의 요구가 단지 기술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데요. 그 대상을 우리의 것이 아닌 지휘 언어 속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입니다.”
리즈는 그에게 동의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동의했다.
답변은 단호하게 작성됐다. 야간 데이터 제공 불가, 변형체 제공 불가, 완전한 절차 제공 불가, 국외 이동 불가. 동맹국끼리 확산 위험에 관한 정보만 공유할 것. 그 이상은 없다.
“버틸 수 있다는 듯이 말하네요.” 리즈가 말했다.
“그게 제 일입니다.”
“아니요. 당신 일은 버티는 척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어디가 휘는지 재게 하는 거죠.”
그 정확함에 세귀르는 거의 재미있다는 듯한 눈빛을 보였다.
“그것도 제 일입니다. 맞습니다.”
그때까지 벽 옆에서 말없이 서 있던 들로네의 전화기에 메시지가 왔다. 그는 읽고 밖으로 나갔다.
리즈는 눈으로 그를 좇았다.
“뭐죠?”
르세르프가 자기 기기를 덮었다.
“일곱 시 반 이후 경제부 기자 두 명이 당신의 전 직장에 연락했습니다. 한 명은 몽투아르에서 일어난 산업 이상 현상에 관해 물었고, 다른 한 명은 당신 이름을 댔습니다.”
방에서 깊이가 사라졌다.
리즈가 두려운 것은 유명해지는 일이 아니었다. 세계가 14번 홀을 통해, 너무 거대한 무언가의 목격자가 되겠다고 한 적 없는 사람들을 통해 되돌아오는 것이 두려웠다.
“하산은요?”
“우리가 아는 한 연락받지 않았습니다.”
“코르넥은요?”
“침묵 지시를 받았고, 회사 법무 지원과 상시 보안 연락망 아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감시받고 있군요.”
“그것도 포함됩니다.”
‘그것도’라는 말이 다른 모든 말보다 큰 상처를 남겼다. 코르넥은 처음으로 제대로 바라봐준 사람이었다. 그 대가로 관리되는 침묵을 받았다.
“나데주는요?”
아무도 몰랐다.
그것이 더 끔찍했다.
“청소 직원요. 둘째 날 아침에 뭔가 봤어요.”
그녀가 말할 때 들로네가 돌아왔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제대로요?”
그는 리즈가 나무라기 전에 이미 그 뜻을 알아들었다.
“그녀를 사람으로 대하며 말해줄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적어도 그 대답만큼은 장치가 아니었다.
세귀르가 리즈를 보았다.
“그래서 당분간은 프랑스가 중심을 지켜야 합니다. 자존심 때문이 아닙니다. 중심이 너무 빨리 옮겨가면 모든 선이 당신이 아는 누군가를 잡아당길 테니까요.”
그 정확함은 계산된 것일지도 몰랐다.
분명 진실이기도 했다.
죽은 복제품
베이징으로 향하는 것은 선이 아니었다. 이름도 범례도 없는 회색 얼룩이었다. 르세르프가 지도의 레이어를 바꾸자 외교 노선들이 사라지고 연구소와 위장 기업, 과학자 비자, 기계 구매 내역, 겉으로는 무관해 보이는 특허 출원들이 나타났다.
“이걸 뭐라고 부르죠?” 리즈가 물었다.
“기술 탈취 가능성입니다.” 르세르프가 대답했다.
“첩보 활동.” 소렐이 말했다.
르세르프는 반박하지 않았다.
브레송이 방으로 불려왔다. 회색빛 얼굴로 서류철을 들고 들어온 그는 인쇄된 사진 세 장을 탁자 위에 놓았다. 프랑스에서 찍힌 사진은 아니었다. 탁한 조명, 지나치게 높은 촬영 각도, 낮은 해상도. 브레송의 죽은 복제품들과 거의 비슷한 조립체 세 개였지만, 숙련된 눈이라면 이곳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아볼 만큼은 달랐다.
여전히 지나치게 말끔하고, 지나치게 자신만만하며, 시험하기도 전에 죽어 있었다.
“구조는 알아냈습니다.” 브레송이 말했다. “정확히는 아닙니다. 바깥 고리가 틀렸고, 중앙의 빈 공간은 지나치게 대칭적이며, 재료도 우리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큰 방향은 당신의 형상에서 왔습니다.”
“남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형상에서요?”
그가 망설였다.
“아닙니다.”
그 한마디를 중심으로 방이 닫혔다.
리즈는 검은 수첩과 열일곱 번째 쪽, 아버지의 아파트에 있던 불가능한 여덟 장의 종이, 자신이 숨겼다가 조각조각 내주었고 마침내 유리 덮개 아래 물체가 되는 것을 지켜본 모든 것을 생각했다.
“누가 접근했죠?”
들로네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고 대답했다.
“지금 당장 답을 드리는 게 무의미할 만큼 많은 사람이요. 여기 있던 사람들. 파리에 있던 사람들. 범위가 봉쇄되기 전에 단편을 받은 사람들. 기계. 출력물. 복도에서 지켜본 눈들. 비밀이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작게 남는 법이 없도록 만드는 모든 것들입니다.”
소렐이 물었다.
“이 조립체들은 시험했나요?”
브레송은 곡선 세 장을 꺼냈다.
두 장은 직선이었다.
세 번째에는 노이즈라고 해도 될 만큼 미세한 꺾임이 있었다.
타르디외가 사진들을 보았다.
“죽은 복제품.”
아무도 그 표현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허락이 필요 없을 만큼 정확해서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았다.
“묻지도 않고 베끼는군요.” 리즈가 말했다.
보클레르가 대답했다.
“모두가 그렇게 할 겁니다.”
“당신들도요.”
“우리도요.”
“그래도 당신들은 먼저 내게 묻잖아요.”
“우리가 잘못하도록 내버려두면 점점 덜 묻게 되겠죠.”
그 말은 협박이 아니었다. 아니, 협박이되 스스로 협박임을 드러낼 최소한의 염치는 갖추고 있었다.
세귀르가 첫 대응책을 발표했다. 확인된 경로를 차단하고, 일부 파견 인력을 소환하고, 여러 과학 교류를 중단하며, 기밀 유출 수사를 개시하고, 뜻은 분명히 전하되 표현은 충분히 모호한 외교적 대응을 준비한다.
“그러니까 위협하겠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가 인정한 것은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쉽게 인정한다는 사실은 두려웠다.
“그래도 충분하지 않으면요?”
보클레르가 대답했다.
“그때는 프랑스를 우회하기 더 어렵게 만들어야 합니다.”
“나를 말하는 거죠.”
“그렇습니다.”
“또.”
“이제부터는 언제나.”
그 말이 말끔한 침묵을 내려앉혔다.
리즈는 국가의 입에서 나온 말 가운데 그보다 외설적인 말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중심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마침내 마리안에게 전화할 수 있었다.
자기 방이 아니라 작고 무색한 방에서였다. 빈 탁자와 의자 두 개, 플라스틱 받침대에 놓인 보안 전화기, 유리 너머의 들로네.
그는 복도에 나가 있겠다고 했다.
리즈가 거절했다.
“엿들을 거라면, 적어도 당신이 엿듣는 모습은 보게 해줘요.”
그는 토를 달지 않았다.
두 번째 신호음에 마리안이 받았다.
“어디야?”
“브레스트.”
진실이 입안에서 이상한 소리를 냈다.
지나치게 단순한 소리였다.
“언제부터?”
“며칠 됐어.”
“며칠.”
마리안은 소리치지 않았다.
분노가 진짜라는 뜻이었다.
“엄마는 알아?”
“아니.”
“그럼 나는 네가 어느 도시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엄마한테 거짓말한 거네.”
“응.”
“너 죽여버릴 거야.”
리즈는 눈을 감았다.
“그랬으면 좋겠네.”
침묵.
고백이 너무 빨리 튀어나왔다.
수화기 너머에서 마리안은 접시가 깨지기 전에 내려놓는 사람처럼 숨을 쉬었다.
“리즈.”
“미안.”
“아니. 미안하다고 하지 마. 내 말 들어. 변호사와 이야기하게 해달라고 요구해. 그쪽 변호사도 아니고 목소리 부드러운 법률가도 아닌, 네 변호사. 네가 돌아가지 못하게 막는 모든 것에 관해 서면 증거를 요구해. 그리고 그들의 문제를 이해한다고 해서 네가 그들의 해결책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짓도 그만둬.”
리즈는 유리 너머의 들로네를 보았다.
그는 못 들은 척하지 않았다.
“그중 일부는 이미 요구했어.”
“일부로는 부족해.”
“네 말이 맞아.”
“아니, 넌 몰라. 넌 늘 아빠랑 똑같았어. 무거운 것은 무겁다는 이유만으로 어깨를 받쳐줄 가치가 있다고 믿잖아.”
그 말은 예상보다 정확한 곳을 찔렀다.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알아. 단순했다면 거짓말을 더 잘했겠지.”
리즈는 거의 웃을 뻔했다.
마리안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위험해?”
리즈는 문과 유리, 전화기와 자기 손을 보았다.
“그런 식으로는 아니야.”
“예, 아니요로 대답해.”
“응.”
“나올 수 있어?”
리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리안도 말하지 않았다.
질문이 스스로 답을 찾아냈다.
“알았어.” 언니가 말했다.
그 ‘알았어’에는 리즈가 여태 알지 못했던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두려움만이 아니었다. 작동하기 시작한 무언가.
“뭘 알았다는 거야?”
“이제 이 거짓말을 어느 범주에 넣어야 할지 알았다고.”
“마리안.”
“아니. 이름 하나를 줘. 내가 전화해도 바보 취급하지 않고 받아줄, 거기 있는 사람 이름.”
리즈는 유리 쪽을 올려다보았다.
들로네가 손가락 두 개를 들었다.
2분.
“소렐.” 리즈가 말했다.
“이름은?”
“아리안.”
“직책은?”
“물리학자. 가끔은 브레이크.”
“좋아.”
마리안이 받아 적었다. 리즈는 펜으로 쓰는 소리를 들었다.
평범한 부엌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에 하마터면 울 뻔했다.
“끊어야 해.”
“아니. 그들이 네가 끊기를 바라는 거지.”
“둘 다야.”
“그럼 빨리 들어. 너는 그들의 국가적 사안이 아니야. 아무리 그런 냄새가 나더라도. 넌 장관이나 군인, 이름조차 모를 부서들, 멀찍이서 서로를 감시하는 사람들을 위한 서류가 아니야. 넌 내 동생이야. 그들이 나머지를 설명할 때는 거기서부터 시작해.”
리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마리안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또다시.
리즈가 방을 나왔을 때 세귀르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보클레르도, 마송도 없었다. 세귀르 혼자라는 것은 그가 할 말이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척하기에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오늘 오후에 당신 언니가 아리안 소렐과 이야기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벌써 결정했어요?”
“그렇습니다.”
“왜요?”
“한 가지 점에서는 언니분이 옳으니까요. 가족에게 제대로 된 연락 창구 하나 주지 않으면 우리가 쓸데없는 공황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다른 점들은요?”
“아마 다른 점들에서도 옳겠죠. 형식으로 옮기기가 더 복잡할 뿐입니다.”
리즈는 벽에 등을 기댔다.
복도에는 새 페인트 냄새와 멀리서 데운 식사 냄새가 났다. 군사기지는 세계적 위기와 미지근한 셀러리를 한 호흡 안에 담을 수 있었다. 그 사실이 어처구니없을 만큼 그녀를 안심시켰다.
“나를 보내줄 건가요?”
세귀르가 대답했다.
“오늘은 아닙니다.”
돌려 말하지도, 달게 꾸미지도 않았다.
리즈는 생각했던 것보다 잘 견뎠다.
“그럼 난 구금된 거네요.”
“아닙니다.”
“맞다는 걸 당신도 잘 알잖아요.”
“그렇습니다.”
그는 바닥을 보았다가 리즈를 보았다.
“제안이 하나 있습니다.”
“그 단어는 경계하게 되네요.”
“그래야 합니다.”
그는 서류철을 건넸다.
두껍지 않았다.
세 장.
“과학·산업 주권을 위한 임시 체계.”
리즈는 제목을 읽었다.
“근사하네요. 장롱 같아요.”
세귀르는 웃지 않았다.
“프랑스법에 따른 특수목적법인. 국가는 과반 지분 보유. 기존 고용주의 참여는 제한하고 보상. 공공 과학 부문 참여. 제한된 운영 체계. 당신과 협의해 정할 특정 용도에 대한 거부권. 별도의 개인 신분. 외부 변호사. 당신이 선택한 의사. 가족 연락 보장. 그리고 무엇보다, 생명 구조를 위한 즉각적인 필요가 있고 당신이 명시적으로 동의한 경우를 제외하면 향후 사십팔 시간 동안 결과를 얻기 위한 야간 요청은 금지합니다.”
리즈는 다시 읽었다.
말들이 더 나아져 있었다.
그것이 불안했다.
“언제 쓴 거예요?”
“어젯밤입니다.”
“내가 자는 동안.”
“그렇습니다.”
“내 잠을 참 잘도 관리하네요.”
그는 꿈쩍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렇습니다.”
리즈는 차라리 그가 변명하기를 바랐다.
“내가 거부하면요?”
“그래도 이 체계는 만들어질 겁니다. 더 형편없이, 그 안에 당신은 덜 들어간 채로.”
“협박이네요.”
“그렇습니다.”
“발전했군요.”
“자랑스럽지는 않습니다.”
리즈는 그의 말을 믿었다.
그렇다고 나아진 것은 없었다.
큰 방에는 여전히 세계지도가 떠 있었다. 선들은 프랑스 해안의 작은 조각과 잠을 설친 한 여자를 향해 뻗고, 되돌아오고, 교차했다.
보클레르는 르세르프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타르디외와 브레송은 죽은 복제품 사진 위로 몸을 숙이고 있었다.
소렐은 유럽 측 요약문을 되찾아 여전히 단어들을 지우고 있었다.
마송은 똑같은 현실을 조금 덜 더럽게 다시 쓰고 있었다.
들로네는 주괴가 다시 떨어지는 것을 본 청소 직원 나데주에 관해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축소된 나라 전체가 그녀 주위에서 일하고 있었다. 오로지 그녀에게 맞서서도, 오로지 그녀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녀를 에워싸고.
어쩌면 그것이 더 위험했다.
세귀르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프랑스는 판의 중심에 있습니다.”
승리처럼 들려야 할 문장이었다.
그러나 진단처럼 들렸다.
리즈는 지도 위의 선들을 보았다.
“아니요.”
“아니라고요?”
“누군가를 중심에 놓는 게 아니에요. 에워싸는 거죠.”
세귀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깥, 어딘가 벽 너머에서 정박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듯 질량과 배와 크레인과 비밀을 붙들고 있었다.
화면에서는 모든 선이 프랑스로 돌아왔다.
방 안에서는 모든 말이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제14장
세계가 형태를 바꾸다
모형
사십팔 시간 동안 그들은 약속을 지켰다.
밤을 요구하지 않았고, 새로운 변형체를 방 가까이 가져오지도 않았으며, 추가 조건이나 각주, 예외로 위장한 긴급사안을 적은 종이를 문 밑으로 밀어 넣지도 않았다.
대신 더 나쁜 짓을 했다.
그들은 리즈에게 세계를 보여주었다.
거대한 세계가 아니라 축소 모형과 접힌 보고서, 지층 단면도와 부두 설계도, 교량 도면과 보험 표, 구조 지침과 군사지도로 이루어진 세계였다. 아직 거리로 나오지도 않았고 공식적인 이름도 없었다. 그런데도 진지한 사람들의 손가락 아래서, 닫힌 방의 탁자와 탁자 사이를 오가며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세계.
휴지기 첫날 아침, 세귀르는 리즈를 처음 보는 방으로 데려갔다.
길고 천장이 낮으며 중앙 화면이 없는 방이었다.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탁자 세 개를 길게 붙여놓았다. 그 위에 흰색 모형들이 놓여 있었다. 언뜻 보면 아이들 장난감 같았지만, 정밀함 때문에 그 흰색이 불길해 보였다.
부두, 고가교, 무너진 건물, 선체, 진흙 지대에 빠진 장갑차, 그리고 맨 끝에는 주민 없는 작은 도시가 있었다.
“이게 뭐죠?” 리즈가 물었다.
타르디외가 대답했다.
“효과 시나리오입니다.”
“단어부터 미끄러지네요.”
뒤따라 들어온 마송은 벌써 펜을 들고 있었다.
타르디외는 따지지 않았다.
“그럼 가능한 세계들이라고 하죠.”
“그건 더 나쁘고요.”
부두 모형 옆에 서 있던 브레송이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로 무언가를 부수기 전에, 무엇이 부서질지 알아보는 방법입니다.”
리즈는 그 표현을 받아들였다.
안심이 되어서가 아니라, 적어도 부끄러움을 알고 있는 말이어서였다.
소렐도 팔짱을 끼고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그녀는 이 방을 좋아하지 않았다. 모형들이 이미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한 듯 바라보는 태도에서 알 수 있었다.
“시작하기 전에 다시 말해두죠.” 소렐이 말했다. “우리에게는 산업용 모듈도, 신뢰할 만한 양산품도 없어요. 약한 변형체 몇 개와 최초 물체 하나를 제외하면 깨끗한 반복 실험조차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이야기는 통제된 가설이지, 약속이 아니에요.”
보클레르는 음성으로만 연결돼 있었다.
확성기에서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무도 약속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래서요.” 소렐이 말했다. “아무도 약속을 입에 올리지 않을 때, 다른 곳에서 약속이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니까요.”
리즈는 첫 번째 탁자를 보았다.
축소된 부두에는 흰 컨테이너와 크레인, 짧은 철로, 바지선, 그리고 중량 화물을 나타내는 커다란 블록 세 개가 있었다. 바닥의 노란 선까지 그려놓았다.
그 작디작은 것에 들인 정성을 보자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항만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세귀르가 말했다.
당연했다.
어떤 위기 상황 그래픽 담당자가 항만을 흰 사각형으로 줄여놓기 전에, 리즈의 아버지는 항만에서 짐을 나르던 사람이었다.
부두
모형을 설명한 사람은 군 출신이 아니었다.
리즈에게는 뜻밖이었다.
오십 대쯤으로 보이는 남자는 모직 재킷에 구겨진 셔츠 차림이었고 손이 두꺼웠다. 오랜 사무실 생활도 완전히 지워내지 못한 하구 지역 억양이 남아 있었다. 세귀르는 그를 특별 보안 규정을 적용받는 항만 전문가라고 소개했다.
리즈는 직함을 기억하지 않았다.
손을 기억했다.
“효과가 국소적이고 제어 가능하다는 전제에서, 최초의 충격은 운송이 아닙니다. 양중입니다.”
그는 작은 갠트리 크레인을 옮겼다.
“오늘날 중량 항만의 지리는 장비와 흘수, 크레인, 보강 부두, 철도 접근성, 소요 시간의 지리입니다. 겉보기 무게의 일부라도 일시적으로 조절할 수 있게 된다면, 지금까지 배제됐던 작업에 일부 중소 항만도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는 성냥갑만 한 흰 블록을 집었다.
“변압기, 교량 부재, 선박 부품, 탱크, 분해된 터널 굴착기.”
그리고 너무 작은 부두 위에 블록을 놓았다.
“세계가 가벼워지는 건 아닙니다. 예전의 병목에 덜 충실해지는 거죠.”
좋은 표현이라고 리즈는 생각했다.
이어서 모든 좋은 표현이 위험해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형 항만은요?” 르세르프가 물었다.
“힘은 그대로 유지합니다. 다만 불가능을 독점하던 지위의 일부를 잃겠죠.”
세귀르가 받아 적었다.
어딘가에서 보클레르도 적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리즈는 흰 부두를 보며 다른 것을 떠올렸다. 주황색 조끼를 입은 남자들, 바람 속에서 익힌 동작들, 잘못 걸린 화물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아는 몸들.
“사람들은요?” 리즈가 물었다.
항만 전문가가 눈을 들었다.
“어떤 사람들요?”
그 질문은 벌써 계산에서 몸을 지우고 있었다.
그도 거의 즉시 알아차렸다.
“부두 노동자들요.” 리즈가 말했다. “크레인 기사들. 바로 무겁기 때문에 그 일을 해낼 줄 아는 팀들.”
그는 작은 블록을 내려놓았다.
“어떤 직업은 달라지겠죠. 다른 직업은 더 중요해질 겁니다. 안전, 고박, 유도, 효과 제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려요?”
그는 제대로 반응했다. 입을 다물었다.
세귀르가 물었다.
“즉각적인 사회적 위험이 있다고 보십니까?”
남자는 대답하기 전에 리즈를 보았다.
“이해되기 전에 공개되면 그렇습니다. 중량 화물 작업자 일부는 자기 기술이 쓸모없어졌다고 생각하겠죠. 또 다른 일부는 터무니없는 기한을 맞추느라 사람 허리를 부숴대는 일이 드디어 끝난다고 생각할 겁니다. 양쪽 다 옳을 겁니다.”
아무도 곧바로 적지 않았다.
리즈는 그 점이 고마웠다.
“아버지가 부두 노동자였어요.”
왜 하필 거기서 그 말을 했는지는 자신도 몰랐다.
아마 축소된 부두 위에 죽은 사람 하나를 다시 세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전문가는 눈을 내렸다.
“그렇다면 아시겠군요.”
“질량을 덜어주는 세계가, 평생 그 무게를 존중하며 살아온 사람들을 모욕할 수도 있다는 건 알아요.”
소렐이 리즈를 보았다.
마송은 그 문장을 적었다.
리즈는 내버려두었다.
탁자 한편에는 가능한 효과를 정리한 문서가 놓여 있었다.
항만 재편.
물류망 이동.
토지 가치 재평가.
사회적 위험.
보험 재산정.
손으로 덧붙인 문장도 있었다.
“승자가 되는 항만 / 패자가 되는 항만.”
리즈는 마송의 펜을 빼앗아 빗금을 지웠다.
그 자리에 이렇게 썼다.
“이기는 사람들, 지는 사람들.”
아무도 펜을 돌려달라고 하지 않았다.
잔해 아래
세 번째 탁자는 무너진 건물을 재현하고 있었다.
그리 높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여섯 층.
콘크리트 판들이 아무렇게나 정리한 카드처럼 겹쳐 있었다. 빈 공간은 파란색으로, 시신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점은 붉은 점으로 표시돼 있었다.
리즈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보았다.
소방·구조대 소속 여성이 설명을 시작했다. 짧은 머리, 짙은 남색 제복, 과장된 표정 하나 없는 얼굴. 매혹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큰 위안이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효과는 완전히 들어 올리는 게 아닙니다. 콘크리트 판 아래에서 일 분을 버는 겁니다.”
소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요람 때처럼요.”
“그보다 작고, 더 지저분하고, 통제하기도 어렵겠죠. 지진. 학교 붕괴. 터널. 바위가 섞인 눈사태. 철도 사고. 적절한 순간에 지지 하중의 십 퍼센트, 십오 퍼센트, 이십 퍼센트만 덜어낼 수 있어도 생존 가능 시간이 달라집니다.”
리즈는 오래된 문장이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들어 올리는 게 아니다.
죽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여자는 파란 공간 하나에 손가락을 댔다.
“여기를 예로 들죠. 바닥 아래에 아이 둘이 있습니다. 지금이라면 버팀목을 대고, 절단하고, 콘크리트 판이 움직이지 않기를 빕니다. 당신의 장치가…”
“아니요.” 리즈가 말했다.
그 한마디가 흐름을 둘로 잘랐다.
여자가 그녀를 보았다.
“네?”
“‘당신의 장치’라고 하지 마세요.”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메마르게 들리는지 알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그 장치. 그 현상. 그 효과. 뭐든 좋아요. 하지만 그 아래에 아이들을 놓을 때는 내 것이라고 하지 말아요.”
여자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알겠습니다.”
고집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아팠다.
“그 조건에서도 효과가 존재한다면 전문팀을 구상할 수 있습니다. 건물을 들어 올리는 팀이 아니라, 무게로부터 몇 분을 훔쳐오는 팀이요.”
확성기 속 보클레르가 물었다.
“훈련이 필요합니까?”
“엄청나게요. 기술 훈련만이 아닙니다. 도우려다가 붕괴를 더 악화시킬 수 있는 도구를 구조대원들에게 준다면, 너무 간절히 바라지 않는 법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소렐이 중얼거렸다.
“바로 그거예요.”
리즈는 모형을 바라보았다.
붉은 점들은 너무 작았다.
아이들처럼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회의실에 들어올 수 있었다.
“덫이 뭔지 이해해요?” 리즈가 물었다.
구조대 여성은 모르는 척하지 않았다.
“네.”
“어떤 덫이죠?”
“시신을 보여주는 순간, 당신을 붙잡게 된다는 것.”
이어진 침묵은 행정적인 침묵이 아니었다.
인간적인 침묵이었기에 더 위험했다.
리즈는 르 비앙을 생각했다.
케르브라를 생각했다.
처음의 일탈을 거부할 수 없게 만든 두 이름.
“그래도 당신은 보여주겠죠.” 그녀가 말했다.
여자는 대답했다.
“네.”
잔혹해서도 전략 때문도 아니었다. 직업 인생 내내 너무 무거운 것 아래에서 사람을 찾아온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리즈는 한 걸음 물러섰다.
세귀르가 회의를 멈추려는 몸짓을 했다.
리즈는 손을 들었다.
“아니요. 계속해요. 덫이 아직 본모습을 지니고 있을 때 보고 싶으니까.”
소렐은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었다.
리즈가 아니라.
의자에.
그녀 곁의 물건을 만지는 것이 리즈를 만지지 않는 유일하게 올바른 방식이라도 되는 듯이.
진흙 지도
군사용 탁자는 세부 묘사가 가장 적었다.
그 간결함에는 겸손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의도적인 생략이었다.
갈색 지형, 몇 개의 경사면, 물을 나타내는 파란 선 세 줄, 도로를 나타내는 회색 판, 표식 없는 장갑차 두 대와 정체를 알 수 없는 형태로 단순화한 선체 하나. 어느 전장인지, 어떤 장비인지, 어느 나라인지 짐작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리즈는 그 노력만큼은 거의 마음에 들었다.
마레스코가 돌아와 있었다.
주역이 아니라 쓸모 있는 증인으로서. 붉은 요람의 밤 이후 왼팔에는 여전히 뻣뻣함이 남아 있었다. 아니면 그저 피로 탓인지도 몰랐다. 그의 옆에는 프랑스 병기총국 장교가 두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서 있었다. 너무 빨리 상상하는 순간을 드러내지 않도록 훈련받은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공격적 용도에서 출발하지는 않겠습니다.” 장교가 말했다.
소렐이 기쁨 없는 웃음을 한 번 흘렸다.
“어디서 출발하든 결국 거기에 닿을 텐데요.”
장교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떤 길로 가느냐는 중요합니다.”
그는 장갑차 하나를 갈색 지대로 옮겼다.
“악화된 지반에서의 기동. 차량 회수. 임시 도하. 중장비 시설 없는 해상 하역. 구조물 보호. 민감 장비 철수. 활주로 보수. 해상 장비 안정화. 효과가 부분적이라 해도 교리는 달라집니다.”
“증거보다 먼저요.” 리즈가 말했다.
“완전한 증거보다 늘 먼저입니다.”
“안심이 되네요.”
“아닙니다.”
그는 사실을 말하듯 대답했다.
마레스코가 입을 열었다.
“문제는 말입니다, 바렌 씨. 붉은 요람의 밤이 이미 현장 사람들에게 하나의 이미지를 주었다는 겁니다. 잘못된 이미지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미지가 생겼어요. 세계에서 사라진 팔 센티미터. 그들은 잊지 못할 겁니다.”
“당신도요.”
“그렇습니다.”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잊을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리즈는 그 말을 믿었다.
병기총국 장교는 작은 장갑차를 진흙 밖으로 옮겼다.
“특정한 순간에 무게 일부를 덜어낼 수 있는 군대는 지형과 맺는 관계가 달라집니다. 약한 교량, 무른 땅, 잔해, 장애물, 벙커. 모든 것이 새롭게 해석됩니다.”
“사람도요.”
그가 멈췄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구덩이에서 꺼내줄 수 있다는 걸 아는 병사는 더 큰 위험을 감수해요. 어쩌면 부하들을 구해낼 수 있다는 걸 아는 지휘관도 마찬가지고요. 실패하면 뭐라고 할 건데요? 그날 밤은 조건이 좋지 않았다고요?”
말이 너무 멀리 나갔다는 것을 즉시 느꼈다.
소렐은 눈을 감았다.
마레스코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기분이 상해서가 아니었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했고, 그 말이 리즈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가 대답했다.
“당신은 아니겠죠.”
“네. 저는 아닙니다.”
확성기를 통해 보클레르가 끼어들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운용 교리는 사용 상황을 제한해야 합니다.”
리즈는 장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 단어가 금방 돌아왔네요.”
“그렇습니다.”
“운용.”
“그렇습니다.”
“그 말이 무엇을 대신했는지 알잖아요.”
“구조.”
그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싫었다.
잊었다면 더 싫었을 것이다.
“그럼 당장은 그 단어가 이기지 못하게 해요.”
보클레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세귀르가 말했다.
“이 부문의 제목에 ‘구조’라는 단어를 넣겠습니다.”
병기총국 장교가 움찔했다.
세귀르는 그를 보았다.
“압니다. 범위가 좁아지겠죠. 그게 목적입니다.”
리즈는 조금 편하게 숨을 쉬었다.
진흙 지도에서 축소된 장갑차는 바퀴 자국 밖으로 나와 있었다.
하지만 리즈는 그것을 들어 올린 손을 보지 못했다.
대가
오후에는 모형들을 치웠다.
리즈는 방이 덜 폭력적인 곳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틀렸다.
그들은 숫자를 가져왔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다른 방식으로 방을 더럽히기에는 충분했다.
베르시의 여성 관료, 보험업계 대표, 공공 재보험 법률가가 탁자 맞은편에 앉았다. 지붕에서 연기가 나기도 전에 화재 규모를 재러 온 사람들 같았다. 리즈는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이 쓰는 동사를 기억했다. 재조정하다, 보장하다, 제한하다, 담보하다, 가치화하다.
모든 동사가 어두운 정장을 입고 있는 듯했다.
“당장 문제는 새로 생기는 부가 아닙니다.” 베르시의 여성이 말했다. “부가 생긴다는 소문이죠.”
“나라를 팔아먹으려 들지 말고 설명해봐요.”
여자는 리즈를 바라보다가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중량을 지탱하는 기술이 존재한다고 시장이 믿는다면, 공개된 증거가 없어도 기업들의 주가는 이유를 이해하기 전에 오르내릴 겁니다. 양중, 특수 운송, 토목, 방위산업, 보험. 어떤 사람들은 착오로 부자가 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예상만으로 생계 수단을 잃겠죠.”
“내가 할지도 모르는 일에 벌써 돈을 걸 테니까.”
아무도 정정하지 않았다.
보험업계 남자가 서류철을 열었다.
“그리고 그 효과가 한 사람에게 의존한다면, 그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지 않고 어떻게 계약서에 넣을 수 있겠습니까?”
“넣지 마세요.” 리즈가 말했다.
법률가가 대답했다.
“그럼 계약으로는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보장돼야 하는 건 아닐지도 모르죠.”
그들은 리즈가 다리의 난간을 떼자고 제안하기라도 한 듯 바라보았다.
베르시의 여성이 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보장의 공백은 결코 비어 있지 않습니다. 투기꾼과 군인, 급조된 보험업자, 위험의 대가를 남에게 떠넘기는 데 아주 능숙한 사람들이 몰려들죠.”
리즈는 이 여자가 거의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귀 기울여 들을 만큼은.
그 뒤로는 산업 부문을 열거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소용없었다. 무게를 중심으로 세워진 모든 것이 결국 자기 자리를 요구할 테니까. 항만, 교량, 구조대, 건설 현장, 보험, 충분히 큰 크레인도 없고 탁자 끝에 앉은 프랑스 여성에게 빠르게 접근할 수도 없는 나라들.
탁자는 그 위에 놓이는 것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짧아 보였다.
리즈는 휴식을 요청했다.
허락됐다.
소렐과 함께 복도로 나왔다.
밖으로는 아니었다. 바깥은 여전히 복잡한 특권이었다.
두 사람은 바람에 눌린 네모난 잔디밭이 보이는 고정창 앞에 멈췄다. 멀리 건물 두 채 사이로 정박지 한 조각이 보였다.
“요약하면요?” 소렐이 물었다.
리즈가 힘없이 웃었다.
“정말 그걸 내게 묻는 거예요?”
“네.”
리즈는 풀밭을 보았다.
“전에는 어떤 것이 무거우면 적어도 무엇이 문제인지는 모두가 동의했어요.”
소렐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언젠가 이게 작동하게 되면 무게는 결정이 되겠죠. 누가 가볍게 하는가. 언제. 누구를 위해. 어떤 대가로. 누구의 권한 아래. 어떤 위험을 감수하고. 그러면서 모두가 질량을 이야기하는 척할 거예요. 권력을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덜 외설적으로 들릴 테니까.”
물리학자는 그 말이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오래 침묵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써요.”
“어디에요?”
“모든 곳에.”
그날 저녁 리즈는 검은 수첩을 펼쳤다.
그날은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이렇게 썼다.
“가볍게 하는 것과 풀어주는 것을 혼동하지 말 것.”
그 아래에는 이렇게 적었다.
“사물의 무게가 줄어든다고 세계가 형태를 바꾸는 것은 아니다. 남겨둘 무게를 누군가 결정하기 때문에 바뀌는 것이다.”
리즈는 다시 읽었다.
그 문장은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컸다.
아니면 그저 하루가 그녀를 작게 만들어놓은 것인지도 몰랐다.
18호실 벽 너머에는 어떤 변형체도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며칠 밤 만에 처음으로, 쓸모 있게 자라는 요구를 받지 않았다.
리즈는 불을 껐다.
어둠이 찾아왔다.
비어 있지 않았다. 그 안에는 항만과 콘크리트 판, 계약서, 축소된 콘크리트 아래의 가상 아이들, 그리고 중력이 협상을 시작한 세계에서 크레인 한 대의 가치가 얼마가 될지 벌써 아는 사무실 사람들이 가득했다.
리즈는 아침까지 눈을 뜨고 있었다.
제15장
리즈의 몸
저울
이른 아침, 소렐은 옷을 다 입고 신발까지 신은 채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무릎 위에 검은 수첩을 펼쳐놓은 리즈를 발견했다.
잤느냐고 묻지 않았다.
리즈가 알아차릴 만큼 심각한 일이었다.
“얼굴이 엉망이에요.” 소렐이 말했다.
“당신도요.”
“나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잖아요.”
농담은 일 초쯤 버텼다. 그 이상은 아니었다.
18호실에는 아침 햇빛이 한 번도 온전히 들어오지 않았다. 열리지 않게 고정된 창 너머로 창백한 하늘과 정박지 한 조각, 둑의 윗부분이 보였다. 책상만 보지 않는다면 휴게실로 착각할 수도 있었다. 수첩 두 권, 펜 세 자루, 봉인된 봉투, 밤사이 교체된 물병, 손대지 않은 식판, 제목 없는 관찰 기록지 한 장이 뒤집혀 놓여 있었다.
소렐이 식판을 보았다.
“안 먹었네요.”
“잊었어요.”
“아니잖아요.”
리즈는 수첩을 덮었다.
“좋아요. 배가 고프지 않았어요.”
“언제부터요?”
“온 세상이 내 시험대 위에 올라오겠다고 한 뒤부터.”
소렐은 대답하지 않았다. 문을 열자 간호사가 의료 가방을 들고 들어와 거의 의식을 치르듯 천천히 책상 위에 놓았다.
“일어나요.”
“뭐라고요?”
“일어나요. 검사를 할 거예요.”
“당신은 내 의사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아니죠. 오늘 아침에도 브레이크는 증인으로 남습니다.”
리즈는 항의하려 했다.
몸이 막았다.
일어서자 방이 반 도쯤 기울었다. 리즈는 의자 등받이로 손을 뻗었다.
소렐은 그것을 보았다. 리즈가 목격자 없이 흘려보내고 싶었던 모든 것을 보듯이.
“어지러워요?”
“아니요.”
소렐은 진실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네. 조금.”
“메스꺼움은요?”
“없어요.”
소렐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있어요.”
간호사는 웃지 않았다. 혈압계와 체온계, 손가락에 끼우는 작은 산소포화도 측정기를 꺼내더니 얇은 체중계를 터무니없을 만큼 조심스레 바닥에 놓았다.
리즈는 다른 무엇보다 체중계가 두려웠다.
숫자가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지난 이 주 동안 중요한 모든 것의 무게는 달라져 버렸으니까.
“그건 싫어요.” 그녀가 말했다.
소렐이 멈췄다.
“왜요?”
“킬로그램으로 표시되고 싶지 않으니까.”
메마르고 거의 우스운 대답이었지만 소렐은 한 걸음 물러났다.
“알겠어요. 다른 방식으로 기록할 수도 있어요.”
“알아야 해요?”
“네.”
“왜요?”
“먹는 양이 줄었고,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일주일도 안 되는 동안 결과를 위한 밤을 세 번 보냈어요. 어제부터 두통도 있고, 몸은 아니라고 말하는데 입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기 시작했으니까요.”
리즈가 짧게 웃었다.
“체중계 하나에 과학이 너무 많이 붙네요.”
“대부분은 관심이에요.”
그 단어가 두 사람 사이의 불편한 자리에 놓였다.
리즈는 아무것도 기록하려 하지 않는 관심을 이미 알고 있었다. 편두통이 있던 어느 아침, 하산은 작업대 한구석으로 물 한 잔과 알약 두 개를 밀어주고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남들 앞에서 보살핌을 받는 걸 리즈가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돌봄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서류로 만들지 않았다. 창백한 이마를 보고 다음 날 밤을 위한 프로토콜을 도출하지도 않았다.
감시는 제복을 입고 있었다. 관심은 검은 스웨터를 입고 눈이 충혈된 채, 측정할 줄 아는 사람을 들여보낼 생각을 했다.
어느 쪽은 밀어내기가 더 어려웠다.
리즈는 체중계 위에 올라갔다.
간호사가 숫자를 보았다. 소렐도 보았다.
소렐은 곧바로 적지 않았다.
그 망설임이 기록 자체보다 더 정확히 리즈에게 상처를 냈다.
“얼마나 빠졌어요?”
“입소 기록보다 2.8킬로그램요.”
“입소 기록.”
“네.”
“이미 내 몸무게를 쟀다고요?”
“첫날 저녁 의무실에서요.”
“그랬다면 기억할 텐데요.”
“그날 저녁 일을 전부 기억하는 건 아니잖아요.”
누구를 탓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끔찍했다.
자기 몸이 이미 자신 없이 처리된 밤의 한 구역을 열어놓았으니까.
간호사가 체중계를 치웠다.
“외부 의사를 요청하겠습니다.”
“내게 의사가 있긴 해요?”
“아는 분이 있다면 본인이 고른 의사가 오게 할 겁니다.”
“내 주치의는 생나제르에 있어요. 철분제를 처방하고 물을 덜 마시는 사람들을 혼내죠.”
“좋은 출발일 수 있겠네요.”
“보안 인가가 없어요.”
소렐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현실에 보안 인가를 내주면 되죠.”
리즈가 그녀를 보았다.
“가끔 거의 위험한 말을 하네요.”
“주변 사람들을 잘못 만났어요.”
이번에는 미소가 조금 더 오래 버텼다.
그러다 왼쪽 눈 뒤의 통증이 다시 시작됐다.
작고 뜨거운 못.
리즈는 눈을 깜빡였다.
너무 늦었다.
소렐이 이미 보았다.
개선된 방
점심때가 되자 18호실은 다시 달라져 있었다.
눈에 보이는 명령 때문이 아니라 친절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 교활했다.
매트리스는 더 두꺼운 것으로 바뀌었다. 침대 곁에는 밝기를 조절할 수 있는 램프가 있었다. 커튼은 이중으로 달렸다. 책상 위 점심 식판에는 따뜻한 수프와 쌀밥, 흰살생선, 사과 퓌레, 작은 생수병, 그리고 아무도 보고서에서 허브차라고 부를 엄두는 내지 못할 차 한 잔이 놓여 있었다.
부드러운 스웨터와 새 양말, 아직 포장된 칫솔, 입술 연고도 가져다 놓았다.
리즈는 문턱에 선 채 그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싫어요.”
동행한 들로네는 무엇이 싫으냐고 묻지 않았다.
조금씩 배우고 있었다.
“치우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그럴 것 같았습니다.”
“당신은 몰라요.”
그는 들고 온 서류 봉투를 책상에 놓았다.
“맞습니다.”
이번에도 리즈는 차라리 그가 변명하기를 바랐다.
갑자기 방 안 어디에나 편안함이 가득했다. 호화로운 것이 아니라 맞춤형이었다. 그래서 더 나빴다.
어디서 몸이 무너지는지 알아낼 만큼 세밀히 관찰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편안함. 똑바로 누우면 잘 못 자기 때문에 높여놓은 베개. 메스꺼움이 되풀이되어 준비한 밥. 편두통이 빛의 모서리를 날카롭게 만들기에 가져온 램프. 아침의 정박지가 잠을 깨우기에 덧댄 커튼. 개선된 모든 것이 ‘우리는 당신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동시에 ‘우리는 당신이 오래 버텨야 한다’고 말했다.
리즈는 방으로 들어갔다.
손끝으로 스웨터를 만졌다.
“누가 이걸 요청했죠?”
“소렐이 당신 상태를 알렸습니다. 몸과 관련된 것은 의료진이, 나머지는 보급 부서가 맡았고요.”
“보급 부서가 내 입술까지 걱정해줘요?”
들로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니었다.
리즈는 연고를 집어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소렐에게 내가 유지보수해야 할 설비가 아니라고 전해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전해요.”
“알겠습니다.”
그가 나가려는 순간 리즈가 물었다.
“나데주는요?”
그가 멈췄다.
“찾았습니다.”
“실종됐던 사람처럼 말하네요.”
“실종된 건 아닙니다.”
“조사받았어요?”
“간단히요.”
“누구한테요?”
“회사 보안팀, 그다음은 우리에게요.”
“무엇을 알고 있대요?”
들로네는 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무거운 덩어리가 떨어지는 걸 봤고, 당신이 다쳤으며, 나머지는 자신이 알 바가 아니라는군요. 그게 그분의 진술입니다.”
리즈는 거의 숨을 내쉬었다.
“거짓말을 잘해요?”
“아주 잘합니다.”
“곤란해지진 않을까요?”
“모두가 현명하게 처신한다면요.”
“그럼 어쩌면 곤란해지겠네요.”
그가 고개를 돌려 리즈를 보았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은 행정적인 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개인적이었다.
리즈는 주어지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고마워요.”
들로네는 난처해 보였다.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라 오히려 인간적으로 보였다.
그가 나간 뒤 리즈는 식판 앞에 앉았다.
여전히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래도 먹었다.
그들을 기쁘게 하거나 그들의 체계를 떠받치려고 먹은 것은 아니었다. 따뜻한 수프는 그녀에게 입과 위장이 있고, 데이터가 아닌 피로가 있으며, 기반 시설조차 기반 시설이 되기 전에 무언가를 삼켜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네 번째 숟가락을 뜨자 울고 싶어졌다.
다섯 번째에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뒤집힌 관찰 기록지에 이렇게 썼다.
“편안함은 붙잡는 방식이 될 수 있다.”
망설인 뒤 한 줄을 덧붙였다.
“돌봄일 수도 있다.”
두 문장에 함께 동그라미를 쳤다.
어느 쪽이 자신을 구해줄지는 알 수 없었다.
켈라프 변호사
변호사는 장식 없는 작은 방의 컴퓨터 화면으로 나타났다. 회색 벽 두 개 사이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택된 것 같은 화분 하나가 있었다. 큰 회의실의 화면은 아니었다.
리즈는 소렐이 함께 있어달라고 요청했다.
변호사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세귀르는 받아들였다.
그 사실만으로도 리즈는 더 의심스러워질 뻔했다.
화면 속 노라 켈라프 변호사는 짧은 머리에 사각 안경을 썼고 목소리가 낮았다. 카메라를 보는 방식은 렌즈가 아니라 정말 그 사람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마리안이 찾아낸 이름이었다. 전직 공법 전문 변호사로 자유권 소송, 강제 의료, 국방기밀 사건을 맡아왔다. 세귀르가 알려준 이력이었다. 진지한 상대를 만난 안도감을 감추지 못하는 담담한 말투로.
리즈는 보안 인가를 내주는 데 얼마나 걸렸을지 궁금했다.
그러다 아직 모든 인가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선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었다.
“바렌 씨.” 변호사가 말했다. “먼저 몇 가지 전제를 확인하겠습니다. 언제든 말을 끊으셔도 됩니다. 원하시면 아리안 소렐 씨가 남아 있어도 되지만, 이분은 당신의 법률대리인이 아닙니다. 이 체계에 속한 사람이죠.”
“네.” 소렐이 말했다.
변명도 하지 않았고, 단서를 달지도 않았다. 리즈는 그 ‘네’가 소렐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했는지 알아차렸다.
“남아 있기를 원해요.” 리즈가 말했다.
“좋습니다.” 켈라프 변호사가 대답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이곳을 떠날 수 있습니까?”
리즈는 소렐을 보았다.
소렐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요.”
“그 사실을 명시한 서면 결정문을 받았습니까?”
“아니요.”
“정확한 법적 지위를 통보받았습니까?”
“종이 몇 장은 받았어요.”
“무엇이 적혀 있죠?”
“많은 것들요.”
“읽어봐야겠습니다.”
“네.”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전화기가 있습니까?”
“아니요.”
“통화를 감시합니까?”
“네.”
“의학 검사를 거부한 적은 있습니까?”
“아직은요.”
“그것부터 이미 경고 신호군요.”
리즈는 거의 웃을 뻔했다.
“우리 언니를 알아요?”
“이십삼 분 동안 통화했습니다. 당신은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기 직전에 유머를 쓴다고 하더군요.”
“배신이네요.”
“보호입니다.”
그 구분은 제자리를 찾았다.
변호사는 메모했다.
“아주 분명하게 말씀드리죠.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 중 일부는 비상사태와 기밀, 국가안보, 그리고 당신 자신의 보호를 이유로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일부는 모두가 예의 바르고 몇몇 사람에게 타당한 이유가 있더라도 순식간에 불법이 될 수 있어요. 제 일은 위험을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 위험이 당신을 해체하는 데 쓰이지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리즈는 그 말을 들었다.
해체하다.
몰수보다 정확한 말이었다. 소리는 덜 나지만 더 큰 피해를 남기니까.
“그들은 내가 구금된 게 아니라고 해요.”
“그렇다면 왜 나갈 수 없는지 서면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서면으로 설명한다면요?”
“그럼 어느 문을 공격해야 할지 알게 되겠죠.”
소렐이 눈을 내렸다.
리즈는 그것을 보았다.
“동의해요?”
물리학자는 오래 생각했다.
“동의하는지는 모르겠어요. 필요하다는 건 압니다.”
켈라프 변호사가 소렐을 보았다.
“소렐 씨께도 질문드릴 겁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특히 수면 기록과 거부 가능성, 돌봄·관찰·생산의 구분에 관해서요. 의학적 검사 결과는 의사에게 요구하겠습니다.”
마지막 단어가 냉기를 되돌려놓았다.
생산.
아무도 리즈를 두고 그 말을 쓰지 않아도 언제나 길을 찾아 돌아왔다.
리즈는 탁자 아래에서 두 손을 움켜쥐었다.
변호사는 그것을 보았다.
논평하지 않았다.
좋은 점이었다.
“바렌 씨.” 그녀가 말을 이었다. “결과를 얻기 위해 잠을 자달라는 요구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네.”
“동의했습니까?”
“네.”
“자유롭게요?”
리즈가 웃었다.
“모르겠어요.”
“바로 그겁니다. 그게 유일하게 정직한 대답이에요.”
소렐은 눈을 감았다.
그들을 둘러싼 방이 달라졌다. 어떤 법도 아직 아무것도 구해내지 못했지만, 마침내 누군가가 불확실성을 올바른 자리에 적어놓았다.
면담이 끝날 무렵 켈라프 변호사가 물었다.
“증상이 있습니까?”
리즈가 대답했다.
“아니요.”
소렐이 고개를 돌렸다.
리즈는 삼 초를 버텼다.
“편두통. 메스꺼움. 어지럼증. 2.8킬로그램 감소. 잠도 제대로 못 자요. 나머지는 거짓말하고 있어요. 내가 피곤하다는 이유로 그들이 내 몫의 결정을 내릴까 봐 무서워서요.”
이어진 침묵은 그날 처음으로 정말 쓸모 있는 침묵이었다.
변호사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협력이나 신뢰를 내세우지 않는 단순한 감사였다. 자기 용기 뒤로 사라지지 않아줘서 고맙다고 말하듯이.
리즈는 자고 싶어졌다.
전날 이후 처음이었다.
센서
그들은 초저녁에 센서를 제안했다.
전극은 아니었다. 적어도 리즈가 무엇을 거부했는지 첫 번째 층위까지는 배운 셈이었다.
소렐은 군의관과 간호사, 쟁반 위에 놓인 회색 상자를 들고 왔다. 군의관의 이름은 모로였다. 오십 대에 부드러운 인상, 명령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너무 강해서 결국 부드럽게 명령하는 목소리.
리즈는 삼십 초 동안 그가 싫었다.
그러다 그가 말했다.
“저는 현상을 이해하러 온 게 아닙니다. 당신이 망가지고 있는지 알아보러 왔습니다.”
조금 덜 싫어졌다.
상자 안에는 측정용 손목 밴드, 손가락 산소포화도 센서, 체온 패치, 밤새 심박수를 기록하는 작은 기기가 들어 있었다.
“싫어요.” 리즈가 말했다.
아무도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게 거의 모욕처럼 느껴졌다.
모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게 다예요?”
“거부하신 거니까요.”
“받아들인다고요?”
“네.”
“그다음은요?”
“그 거부 때문에 의학적 평가가 어려워진다고 기록하고, 당신이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근사한 덫이네요.”
“안타깝게도 흔한 덫입니다.”
소렐은 서류를 탁자 위에 놓았다.
“리즈, 최소한의 측정도 없으면 내일 그들은 당신의 거부 때문에 당신이 동의할 능력이 있는지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할 거예요.”
‘우리’라고 하지 않았다.
‘그들’이라고 했다.
리즈는 알아차렸다.
“센서를 달면요?”
“측정값이 있으니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하겠죠.”
“그럼 어느 쪽이든 내가 지는군요.”
“네.”
모로가 소렐을 보았다.
나무라는 눈빛은 아니었다. 자기 앞에서 그 말을 하기로 정말 작정했는지 확인하는 눈빛이었다.
소렐은 작정했다.
리즈는 앉았다.
피로가 갑자기 허벅지를 꿰뚫었다. 이미 다른 누군가가 해버린 동작들로 자신이 이루어진 듯했다.
“카메라는 안 돼요.”
“카메라는 없습니다.” 모로가 말했다.
“음성 녹음도요.”
“하지 않습니다.”
“내 변호사를 거치지 않고 이 팀 밖으로 자료를 보내는 것도 안 돼요.”
모로가 소렐을 보았다.
소렐이 대답했다.
“문서로 씁시다.”
“한밤중에 깨우지 마세요.”
“의학적 응급상황은 제외해야 합니다.” 모로가 말했다.
“응급상황을 정의해요.”
그는 정의했다.
완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추가로 불려온 마송이 당장 그물처럼 보이지 않는 문장을 작성할 만큼은 정직했다.
리즈는 읽었다.
단어 두 개를 고쳤다.
그러고는 팔을 내밀었다.
간호사가 왼쪽 손목에 밴드를 채웠다.
플라스틱이 피부에 닿는 순간 거의 어린아이 같은 거부감이 솟구쳤다.
그 손목은 다른 방식으로 붙들린 적이 있었다. 길을 너무 빨리 건너려 할 때 아버지가 잡았고, 한번은 손가락을 심하게 베어 바보 같은 저혈압으로 쓰러진 뒤 하산이 아무런 연정 없이 맥을 짚으려고 잡았다. 무엇보다도 어둠 속에서 자기 형상들 뒤로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을 때 리즈 자신이 붙잡던 손목이었다. 밴드는 그저 깨끗한 물건일 뿐이었다. 바로 그 청결함이 접촉을 외설적으로 만들었다.
물건 자체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것이 예고하는 것 때문에 팔을 빼고 싶었다.
첫날 밤에는 그들이 리즈의 꿈을 기다렸다.
그다음에는 밤을 관리했다.
이제는 민감 시설처럼 잠에 장비를 설치했다.
“생산을 위한 게 아니에요.” 소렐이 말했다.
리즈는 밴드를 보았다.
“여기선 모든 것이 생산을 위한 것으로 변해요. 애초에 그러려고 만든 게 아니어도.”
소렐은 대답하지 않았다.
모로도 대답하지 않았다.
적어도 침묵은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날 밤 리즈는 두 시간 사십 분을 잤다.
밴드는 알고 있었다.
리즈도 알았다.
다음 날 아침 그래프 한 장이 출력됐다.
리즈는 집어 들지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수면 단계.
각성.
심박수 상승.
저점.
그녀의 몸은 또 하나의 곡선이 되었다.
리즈가 물었다.
“내가 꿈을 꿨나요?”
모로가 대답했다.
“센서로는 그것까지 알 수 없습니다.”
“아직은요.”
아무도 그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리즈도 그랬다.
미끼
다음 날 아침 식사보다 먼저 물건 하나가 도착했다.
기술 장비가 아니었다. 빵과 요구르트, 사과 퓌레, 모로가 결국 그녀를 설득해 먹이게 된 캡슐 두 알과 함께 식판 위에 놓인 누런 봉투였다. 봉투의 흰 표찰에는 인쇄된 세 단어가 적혀 있었다.
“심리 안정 지원물.”
리즈는 오래 바라보았다.
빵에도 손대지 않았다.
봉투에도 손대지 않았다.
지난 며칠 동안 18호실은 이처럼 작고 위험한 친절을 만들어내는 법을 익혔다. 더 나은 위치에 놓인 의자. 덜 하얀 조명. 덜 높은 베개. 병원 식사처럼 보이지 않는 식판. 자신을 돌보는 듯한 모든 것이 다음 밤을 위해 몸을 배치하는 수단으로 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에서는 돌봄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이 분 뒤 소렐이 서류를 옆구리에 끼고 들어왔다. 봉투를 본 순간 그대로 멈췄다.
첫 번째로 쓸모 있는 반응.
“당신이 한 게 아니군요.” 리즈가 말했다.
“아니에요.”
“모로는요?”
“아니에요.”
소렐은 내 생각엔이라고 덧붙이지 않았다.
두 번째로 쓸모 있는 반응.
그녀는 봉투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들로네에게 전화했다. 들로네는 장갑을 끼고 왔다. 덕분에 사과 퓌레까지 범죄 현장의 물건처럼 보였다.
“누가 들어왔죠?” 리즈가 물었다.
“여섯 시 교대 이후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들로네가 대답했다.
“그럼 식판을 통해 들어왔겠네요.”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그가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복사본 한 장이 들어 있었다.
회색빛이 돌고 약간 비뚤어진 조악한 복사본이었다. 아버지의 필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말년의 느리고 떨리던 글씨가 아니라 공사 현장 수첩에 쓰던 옛날 글씨. 여백의 숫자, 작은 침목 스케치, 붉은 펜으로 그은 화살표 두 개, 그리고 도면이 지나치게 말끔해 보일 때마다 아버지가 자주 쓰던 문장.
“진짜로 버티게 하는 것은 도면에 보이지 않는다.”
리즈는 위장이 닫히는 것을 느꼈다.
복사본 아래에는 물건이 빠져나간 아파트 사진이 있었다. 방 전체가 아니었다. 탁자 한구석. 닫힌 검은 수첩. 아버지가 쓰던 이 빠진 찻잔. 의료보험 서류 봉투 가장자리. 누군가는 모든 물건이 무해해 보이도록 각도를 골랐다. 바로 그래서 사진은 외설적이었다.
“어디서 이걸 구했죠?”
들로네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소렐을 보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압수물이나 압수물의 복사본에서요.”
리즈는 소리 없이 한 번 웃었다.
“압수물의 복사본. 물론이겠죠.”
소렐이 물었다.
“이 페이지를 전에 본 적 있어요?”
“네.”
“최근에요?”
“아니요.”
“당신의 형상들과 관련이 있나요?”
리즈는 하마터면 아니라고 할 뻔했다.
‘아니요’는 준비돼 있었다. 우아하기까지 했다. 아버지와 아파트, 추억이 증거물로 변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조그만 수치심을 보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리즈의 입에서 나온 ‘아니요’는 다른 누군가를 위한 새 도구가 될 터였다.
“모르겠어요.”
이번에는 모로를 불렀다.
그는 가운을 입지 않고 왔다. 좋은 판단이었다. 봉투와 리즈, 리즈 손목의 밴드를 차례로 보았다.
“제 팀에서는 아무도 이걸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안심이 되나요?”
“아니요.”
그는 의자를 집어 들었지만 앉지는 않았다.
“아마 그들은 이걸 정서적 지원물이라고 부를 겁니다. 익숙한 이미지, 연속성을 느끼게 해주는 물건, 잠드는 데 도움이 되는 무언가.”
“그들이라니요?”
“잠을 자물쇠로, 내밀한 기억을 열쇠로 생각하는 사람들요.”
리즈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너무 빨리 말했다.
환자를 안심시키려고 비유를 떠올린 의사의 말이 아니었다.
어떤 수법을 알아본 사람의 말이었다.
“전에 본 적 있어요?”
모로의 턱이 굳었다.
“여기서는 아닙니다.”
“어디서요?”
“억지로 강요하는 티를 내지 않으면서 진술이나 기억, 동조나 붕괴를 끌어내려는 상황에서요.”
소렐이 말했다.
“조건화.”
“유도 자극입니다.” 모로가 바로잡았다. “때로는 아주 부드럽고, 때로는 불법이죠. 둘 다인 경우도 많습니다.”
들로네가 사진을 보호 봉투에 넣었다.
리즈는 탁자 가장자리에 손을 얹었다. 떨리지 않았다.
그 사실이 걱정스러웠다.
처음에는 그들이 리즈의 꿈을 기다렸다. 그다음에는 밤을 관리했다. 이제 누군가가 베개 위에 추억을 올려놓고 세계가 무엇으로 응답하는지 보려 했다.
리즈가 말했다.
“이건 지원물이 아니에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미끼예요.”
그 단어가 방을 차지했다.
소렐이 받아 적었다.
그럴듯해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사고, 전달 과정의 오류, 단독 행동, 절차상 결함. 기관이 더 깔끔하게 같은 짓을 계속하기 위해 잘못을 묻는 그런 물렁한 관들 속으로 그 단어가 사라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모로는 마침내 의자를 내려놓았지만 앉지 않았다.
“지금부터 드릴 말씀은 아주 조심해서 다뤄야 합니다.”
“드디어 왔군요.” 리즈가 말했다.
“이걸 다른 차원이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곧장 공상과학과 예언자와 예산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저에게는 그럴 증거가 전혀 없어요. 하지만 당신의 수면이 단지 휴식이나 이미지의 원천만은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 기억, 감정, 형태에 대한 지각, 깨어 있는 정신이라면 거부할 모순을 견디는 능력. 그런 필터들이 느슨해지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소렐이 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경계.”
“어쩌면요.”
“무엇과 무엇 사이의 경계죠?”
모로는 리즈를 보았다.
“모릅니다. 기억과 몸짓 사이. 두려움과 형태 사이. 당신의 몸이 아는 것과 당신의 생각이 보기를 받아들이는 것 사이. 그 이상은 나아가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특정한 정서적 재료로 그 경계의 방향을 유도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당신을 그저 재우려고만 하지는 않을 겁니다.”
리즈가 그의 문장을 끝맺었다.
“특정한 방향으로 꿈꾸게 만들겠죠.”
그 문장은 봉투보다 끔찍했다.
쓸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리즈는 자신도 모르게 하산을 떠올렸고, 그 사실에 화가 났다. 아버지의 사진 한 장만으로도 이미 방은 더럽혀졌다. 입술의 기억, 베개 냄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밤이 지나고 낮게 흘린 문장이라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욕망을 이용할 수 있다는 사실만이 외설적인 것은 아니었다. 욕망을 조정값과 유도 자극으로 번역해, 깨어 있는 여자가 거부할 권리가 있는 것을 잠든 몸에서 얻어내는 수단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외설적이었다.
들로네는 식판 전달 경로를 확인하러 나갔다. 소렐은 켈라프에게 전화했다. 모로는 리즈나 자신이 승인하고 서명하지 않은 모든 물건을 방에서 치우게 했다. 그들이 주위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동안 리즈는 텅 빈 탁자 앞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 문장을 생각했다.
진짜로 버티게 하는 것은 도면에 보이지 않는다.
아주 짧은 순간, 형상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올바른 형상이 아니었다.
낮고, 조여들고, 거의 권위적인 무엇. 아버지의 문장을 이용해 통행권을 얻으려는 부피. 리즈는 숨이 끊길 만큼 거센 내면의 힘으로 그것을 밀어냈다.
모로는 그녀가 창백해지는 것을 보았다.
“리즈?”
“저걸 내보내요.”
“이미 치웠습니다.”
“봉투만 말하는 게 아니에요.”
리즈는 손목 밴드를 가리켰다.
“다음 밤에는 변형체도, 새 센서도, 심리 안정 지원물도 안 돼요. 아무것도. 잠들든 못 들든 내가 알아서 해요. 누구도 내 방에 추억을 놓고 무엇을 들어 올리는지 지켜보지 못하게 해요.”
모로보다 소렐이 먼저 대답했다.
“알겠어요.”
탁자 위 스피커폰으로 연결된 켈라프가 덧붙였다.
“그리고 동의하지 않은 정서적 영향 시도는 당신의 동의 조건 자체를 침해한 것으로 간주한다고 명시하겠습니다.”
“좀 더 짧게 쓸 수 있어요?”
“네. 다만 덜 아프게 되겠죠.”
이십 분 뒤 들로네가 돌아왔다.
“봉투는 위기 대응 체계에 소속된 심리 지원팀에서 왔습니다. 어젯밤 외부 자문위원이 요청했어요. 첫 번째 전달 문서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찾아내겠습니다.”
“누가 승인했죠?”
“그게 문제입니다. 현재로서는 아무도요.”
소렐은 눈을 감았다.
승인자가 없다는 사실은 명령이 있었다는 것보다 거의 더 심각했다. 시스템이 이미 혼자서 이 방 안까지 뻗어 들어올 만큼 긴 손을 만들어냈다는 뜻이니까.
리즈는 일어났다.
온몸이 아팠지만 피로의 성질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 단순히 지친 것이 아니었다. 사냥당하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그 사실이 그녀를 깨웠다.
첫 번째 보고서
결과를 위한 밤 없이 맞는 사흘째 저녁, 리즈는 마리안의 전화를 받았다.
자유로운 통화였다.
자유롭다기보다는 이곳에서 통화가 누릴 수 있는 만큼 자유로웠다.
방 안에 들로네가 없었다. 유리창도,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이는 손도 없었다. 전화기는 18호실 책상 위에 놓여 있었고, 충분히 자세히 설명해주었다는 사실이 거의 모욕처럼 느껴지는 장치에 연결돼 있었다.
리즈가 전화를 걸었다.
마리안은 받자마자 말했다.
“소렐이랑 이야기했어.”
“너도 안녕.”
“과학 선생 같은 목소리더라. 세계의 종말을 세 번쯤 견딘 과학 선생.”
“꽤 정확하네.”
“네가 밥을 안 먹는다고 했어.”
“배신자.”
“네가 허락했기 때문에 말해도 된다고 하던데.”
리즈는 기억을 더듬었다.
지난 며칠 동안 많은 것을 허락했다.
너무 많은 작은 것들을.
“아마도.”
“내가 ‘아마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잖아.”
“이미 말해줬어.”
마리안은 잠시 침묵했다.
“켈라프 변호사도 전화했어. 귀찮은 사람이더라. 그래서 마음에 들어.”
“그 사람들을 아프게 해줄까?”
“자기들이 하는 일을 글로 쓰게 만들 거래. 때로는 그게 더 아프지.”
리즈는 침대에 누웠다.
손목 밴드가 시트에 스쳤다.
작고 메마른 소리.
마리안이 들었다.
“그게 뭐야?”
리즈는 하마터면 거짓말할 뻔했다.
간단한 거짓말. 시계야, 뭔가야, 아무것도 아니야.
이제 지긋지긋했다.
“센서.”
마리안의 침묵에서 온도가 달라졌다.
“몸에 달았어?”
“응.”
“왜?”
“내가 망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또 뭐 하려고?”
“쓸모 있는 방식으로 망가지는 건 아닌지도 확인하려고.”
그렇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아침부터 기다리고 있던 문장처럼 놀라울 만큼 또렷하게 몸 밖으로 나왔다.
마리안이 욕설을 뱉었다.
그다지 크지는 않았지만, 가족 특유의 정밀함이 담긴 욕이라 리즈는 조금 나아졌다.
“벗을 수 있어?”
“응.”
“정말?”
“그런 것 같아.”
“해봐.”
리즈는 밴드를 보았다.
“지금?”
“응.”
“바보 같잖아.”
“아니. 아주 간단한 시험이야.”
리즈는 잠금쇠 밑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밴드는 아무 저항 없이 열렸다.
경보도 울리지 않았다.
아무도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복도는 조용했다.
리즈는 열린 밴드를 손에 쥐고 있었다.
왜 떨리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됐어?” 마리안이 물었다.
“열려.”
“좋아.”
“다시 찰 거야.”
“왜?”
“아예 못 자면 내일은 내가 더 이상 결정할 수 없다고 그들이 판단해도 맞는 말이 될 테니까.”
마리안이 한숨을 쉬었다.
“방금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
“응.”
“벌써 그 사람들처럼 말하고 있어.”
그 말은 예상보다 세게 부딪쳤다.
리즈는 밴드를 다시 찼다.
복종해서만은 아니었다. 아니, 복종만은 아니었다. 두려웠기 때문에 다시 찼다. 두려움도 얼마든지 선택의 옷을 입을 수 있으니까.
“리즈?”
“여기 있어.”
“넌 그들의 기반 시설이 아니야.”
그 단어가 방을 가로질렀다.
기반 시설.
켈라프 변호사나 소렐에게 들은 말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마리안이 설거지를 하며 혼자 찾아낸 말일 가능성이 더 컸다.
“듣고 있어.”
“아니.”
“아니.” 리즈가 인정했다. “모르겠어.”
마리안은 더 부드럽게 말했다.
“그럼 몸부터 시작해. 네 몸. 그들 서류도, 그들 사정도, 그들이 네 앞에 데려올 사람들도, 지도도, 방 하나에 담기에는 너무 큰 말들도 말고. 네 몸. 지금 아파?”
리즈는 눈을 감았다.
편두통은 아직 있었다.
덜 날카로웠다.
대신 더 넓었다.
이마 뒤에 얹힌 손처럼.
점심에 수프를 먹었는데도 위는 비어 있었다.
어깨가 욱신거렸다.
왼쪽 손목에는 밴드가 채워져 있었다.
발이 시렸다.
울고 싶고 웃고 싶고 자고 싶었다. 그 순서대로, 혹은 다른 순서로.
“응.” 리즈가 말했다.
“어디가?”
리즈는 대답했다.
전부 말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말했다.
머리.
목덜미.
배.
손.
사라진 잠.
마리안은 말을 끊지 않고 들었다.
리즈가 말을 마치자 방은 더 작아진 것 같았다. 더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더 정확해졌다.
“그거야.” 마리안이 말했다. “그게 네 첫 번째 보고서야.”
통화를 끝낸 뒤 리즈는 공식 기록 수첩을 펼쳤다.
습관적인 문장부터 쓰기 시작했다.
“물체 없는 밤.”
그러다 멈췄다.
장을 넘겼다.
맨 위에 이렇게 썼다.
“리즈 바렌의 몸.”
피실험자도, 매개체도, 역량도, 장치도 아니었다. 몸.
편두통과 메스꺼움, 어지럼증, 줄어든 체중, 손목 밴드, 수프, 두려워한다는 수치심, 센서가 열렸을 때 느낀 외설적인 안도감, 그리고 정말로 벗어버리는 일에 대한 두려움을 적었다.
오랫동안 썼다.
마지막에는 이렇게 덧붙였다.
“괜찮다고 말할 때 나는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또 썼다.
“혼자 힘으로 멈출 수 있다고 말할 때도 나는 거짓말을 한다.”
두 번째 문장을 쓰는 데 더 큰 대가가 들었다.
리즈는 펜을 내려놓았다.
손목 밴드가 한 번 깜빡였다. 침대 가장자리에 켜진 아주 작은 초록빛.
바깥의 정박지는 보이지 않았다.
리즈는 불을 끄지 않은 채 누웠다.
그날 밤에는 어떤 변형체도 꿈꾸지 않았다.
아버지가 낡은 노란 용수철저울로 빈 상자의 무게를 재는 꿈을 꾸었다.
바늘은 움직이지 않았다.
앙드레 바렌은 불가능한 숫자를 바라보다 딸을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꿈속에서 그 침묵은 이런 뜻이었다.
이제 무게가 사라졌는데, 너는 무엇을 짊어지고 있니?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밴드에는 세 시간 십 분의 수면이 기록돼 있었다.
수첩에는 다른 것이 남아 있었다.
제16장
불가능한 분리
적합한 장소
아침이 되자 팔찌는 더 이상 물건이 아니었다. 남들이 작성해 그녀에게 들씌운 하나의 진술이 되어 있었다.
모로는 탁자 위에 기록을 펼쳐놓았다. 그래프, 수치, 체온 곡선, 맥박, 토막 난 수면. 그는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거의 견딜 만해졌다.
소렐도 와 있었다. 창가에 서서 팔짱을 낀 채 둑 위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누군가 대신 풍경 한 조각을 증오하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세 시간 십 분 주무셨습니다.”
“숫자는 봤어요.”
“아닙니다. 눈을 감았다는 건 아시겠죠. 잠을 잔 것과는 다릅니다.”
리즈는 종이를 바라보았다.
치솟은 봉우리와 깊은 골, 지나치게 가느다란 초록색 선.
하늘에서 내려다본 폭격당한 도로 같은 잠이었다.
“내가 잠을 못 잔다고 말하러 온 거예요?”
“의학적으로 이 상태가 계속될 수 없다고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의학적으로라는 말이 깨끗한 구두 밑창을 달고 방을 가로질렀다.
왜 그런지 머리가 깨닫기도 전에 온몸이 먼저 경계했다.
“그게 무슨 뜻이죠?”
모로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만으로도 충분히 위험을 알 수 있었다.
소렐이 대신 말했다.
“문서 하나가 돌고 있어요.”
“여긴 나만 빼고 다 돌아다니네요.”
아무도 웃지 않았다.
모로가 가방에서 서류철을 꺼냈다.
왼쪽 위를 철한 몇 장짜리 문서였다. 얇아서 오히려 두꺼운 서류 뭉치보다 나빴다. 서두르는 사람들이 망설일 여지가 있는 것은 이미 모조리 덜어낸 두께였다.
그가 리즈 앞에 내려놓았다.
리즈는 손을 대지 않았다.
첫 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보호 대상 의학·신경생리학적 평가.’
그다음에는,
‘적합한 장소.’
그리고,
‘재평가 가능한 동의.’
세 번째 문구를 보는 순간 탁자를 뒤엎고 싶어졌다.
“누가 만든 거죠?”
소렐이 대답했다.
“여러 곳에서 동시에 나왔어요.”
“겁쟁이들이나 쓰는 표현이네요.”
“맞아요.”
그렇다는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소렐이 창가에서 몸을 뗐다.
“세귀르가 작성한 건 아니에요. 보클레르가 읽었고, 르세르프가 취합했어요. 모로는 두 가지 항목에 이의를 제기했고, 나는 세 가지에 반대했어요. 켈라프 변호사는 아직 전부 보지 못했고요.”
“안 보냈으니까요?”
“우선 의사가 이 안을 지지할 수 있는지 확인하려 했으니까요.”
리즈는 모로를 바라보았다.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현재 상태로는 지지하지 않습니다.”
“현재 상태로는.”
“네.”
“말이 얼마나 빨리 사람을 집어삼키는지 아세요?”
그는 변명 없이 받아들였다. 그건 점수를 줄 만했다.
하지만 점수 하나 준다고 방이 더 안전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리즈는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종이는 가까운 프린터에서 막 나온 듯 미지근했다.
전문 시설.
수면 기록.
동의할 경우 기능 영상 촬영.
현상에 대한 의도적 자극 금지.
평가 기간 중 통화 제한.
시설의 제약을 전제로, 인가받은 법률대리인의 입회 가능.
리즈는 페이지 맨 아래까지 읽었다.
그러고는 이미 자신을 해치기 시작한 문장으로 돌아갔다.
재평가 가능한 동의.
“풀어서 말해봐요.”
모로가 입을 열었다.
소렐이 앞질렀다.
“특정 검사를 거부하거나 상태가 악화되면, 누군가는 그 거부가 더 이상 같은 효력을 갖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게 해두려는 거예요.”
목소리를 높일 필요조차 없었다. 구속복은 이미 문장 구조 속에 들어 있었다.
리즈는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알겠어요.”
“아니요.”
소렐의 목소리는 단단했다.
“당신에 대한 위협은 보이겠죠. 그건 맞아요.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에요. 우리에 대한 위협이기도 해요.”
“우리요?”
“돌봄과 탈취 사이의 경계를 아직 지키려는 모든 사람.”
모로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그 역시 지쳐 보였다.
평범한 피로.
아직 자신이 열 수 있는 문이 지켜주는 피로.
“바렌 씨, 저는 당신 상태를 측정해야 합니다. 정말로요. 체중이 줄고 있고, 잠은 턱없이 부족하고, 어지럼증도 있는데 증상을 숨기고 있어요. 이걸 말하지 않으면 저는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말하세요.”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검사가 주권의 이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단어는 남에게 빌린 연장을 쓰듯 어색하게 그의 입에서 나왔다.
소렐이 그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거예요.”
“세귀르처럼 말하기 시작했네요.”
모로가 거의 웃을 뻔했다.
“저도 그게 걱정입니다.”
방 안의 긴장이 풀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풀리지 않았다.
서류철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장소라는 단어가 사방에 있었으니까.
적합하고, 보호되며, 중립적인 장소. 그곳으로 그녀의 몸을 옮긴 뒤, 그것을 거부할 만큼 그녀의 말이 여전히 온전한지 확인할 수 있는 장소.
리즈가 물었다.
“그 장소가 어디죠?”
소렐은 대답하지 않았다.
모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리즈는 알아차렸다.
브레스트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정확히 프랑스 밖도, 명백히 다른 나라도 아닐 것이다. 국가들이 어느 문을 두드려야 할지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게 만들고 싶을 때 빚어내는 그런 장소.
중립적인 제안
삼십 분 뒤 켈라프 변호사가 화면에 나타났다.
말없는 화분은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세워둔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코트는 여민 채였고, 전화기는 너무 낮은 곳에 놓여 있었으며, 지하 주차장의 빛이 얼굴을 가르고 있었다.
“지금 가는 중입니다.”
“어디로요?”
“내가 사무실에 가만히 있기를 바랐을 사람들한테요.”
세귀르는 탁자에 앉아 있었다.
보클레르는 벽면 화면에 떠 있었다.
르세르프는 문 가까이에.
마송은 메모장을 들고.
소렐은 벽에 기대어.
모로는 닫힌 의무기록을 무릎에 올리고 그녀 곁에 앉아 있었다.
들로네는 방에 없었다.
리즈는 몇몇 얼굴보다 먼저 그의 부재를 알아차렸다.
자리에 없는 남자는 문 하나를 지키고 있을 수도, 다른 문을 열고 있을 수도 있었다.
보클레르가 입을 열었다.
“바렌 씨, 누구도 당신을 법률대리인이나 보장 장치로부터 떼어놓자고 제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동차 스피커 너머로 켈라프가 짧게 웃었다.
“훌륭한 시작이군요. 계속하시죠.”
보클레르는 잠시 멈췄다. 자신의 직책에 위축되지 않는 사람에게 말을 끊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불쾌감이 그를 조금 더 인간답게 만들었지만, 덜 위험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유럽 의료·과학 조정팀을 가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상황을 프랑스 국내의 일대일 대치에서 벗어나게 하고 국제적 보장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무슨 보장이죠?” 켈라프가 물었다.
“동맹권 밖으로 이송하지 않는다는 것. 프랑스 측 입회. 인가받은 법률대리인. 담당 의사. 동의 없는 침습적 절차 금지.”
“장소는요?”
침묵은 짧았다.
정직하기에는 지나치게 짧았다.
세귀르가 대답했다.
“유럽 협력국이 제공하는 군 의료시설입니다.”
협력국이라는 단어가 피부를 잡아당기는 듯했다.
보클레르가 덧붙였다.
“미국 측 참관인도 참여합니다.”
켈라프가 말했다.
“아.”
짧은 한마디가 급브레이크처럼 걸렸다.
“그러니까 국제적 보장이라는 게, 제 의뢰인을 외국 군사시설로 옮겨 미국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면, 신경학적 상태, 그리고 요구받은 일을 거부할 능력을 평가하는 거군요.”
“지나치게 왜곡하고 있습니다.”
“아뇨. 향수 냄새 빼고 요약한 겁니다.”
소렐이 눈을 내리깔았다.
리즈는 그것을 보았다.
이 방에서는 시선을 한 번 내리는 것조차 조그만 선언이 되었다.
마송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현재 문안이 잘못된 건 맞습니다.”
“문안만요?”
“내용도 어쩌면.”
“어쩌면.”
그는 고개를 움직여 정정을 받아들였다.
“변호사님, 문제는 이곳에 계속 머물게 하는 일이 정치적으로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겁니다.”
리즈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자신의 몸에 방금 정치적 불안정이라는 새 이름이 붙었다. 웃음은 아직 가능한 유일한 대답처럼 찾아왔다.
켈라프가 물었다.
“바렌 씨는 이 이송을 거부할 수 있습니까?”
보클레르가 대답했다.
“현 단계에서는 그렇습니다.”
“‘현 단계에서는’을 빼죠.”
“현실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함정은 지울 수 있습니다.”
세귀르가 손을 들었다.
“거부할 수 있습니다.”
켈라프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거부하면요?”
다시 침묵.
이번에는 더 길었다.
더 쓸모 있었다.
세귀르가 말했다.
“그렇다면 모호함이 그녀를 보호하는 척할 게 아니라,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문서로 명시해야 합니다.”
켈라프는 화면 밖 어딘가에 무언가를 적었다.
“좋습니다. 명시하세요.”
보클레르가 고개를 기울였다.
“변호사님도 이 대답만으로는 밀려드는 요구를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잘 아실 텐데요.”
“요구가 스스로를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도 요구는 들어옵니다.”
“그럼 거부한다고도 쓰세요.”
보클레르는 세귀르를 바라보았다.
세귀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야 리즈는 두 사람 사이의 균열을 보았다. 원칙의 차이가 아니라 더 깊고, 그래서 더 은밀한 어떤 것.
보클레르는 힘의 균형으로 사고했다. 세귀르는 국가의 형식으로 사고했다. 둘 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녀를 잃을 수 있었다.
“그러면 의사 선생님은요.” 켈라프가 모로에게 물었다. “의료 목적의 이송을 지지합니까?”
모로는 대답하기 전에 리즈를 바라보았다.
“유용한 밤들을 정말로 중단하는 것은 지지합니다.”
“내 질문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아니요. 제안된 이송은 지지하지 않습니다.”
“이유는요?”
“탈진 상태에 강제성을 더할 테고, 의료 검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들 테니까요.”
“고맙습니다.”
소렐이 말했다.
“그리고 여러 국가가 지켜보는 잠은 더 이상 잠이 아니니까요. 서서히 벌어지는 채굴이죠.”
채굴.
그 단어가 탁자를 내리쳤다.
보클레르가 몸을 바로 세웠다.
“소렐 박사, 정확한 표현을 써야 합니다.”
“정확하게 말한 겁니다.”
“무엇이든 채굴하자는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들이 제안하는 건 그녀가 잠든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이 즉시 공유되고, 이의를 제기받고, 해석되고, 소유권을 주장당할 수 있는 장소예요. 조정이라고 부르셔도 좋습니다. 나는 그녀의 꿈이 경계를 잃는 곳이라고 부르겠어요.”
리즈는 탁자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그녀의 몸이 자신보다 먼저 알고 있던 것에 소렐이 문장을 부여했다.
자유롭게 떠날 수 없는 사람을 데려다 놓는 순간, 중립적인 장소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았다.
쓸모 있는 거부
그들은 그녀에게 거부 의사를 문장으로 작성하라고 했다.
싫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 ‘싫다’가 활용 가능하고, 날짜가 적히고, 법적 효력을 갖는 문안 안에 들어가야 했다. 그 미묘한 차이가 명령보다 더 확실하게 그녀를 지치게 했다.
마송이 빈 종이를 앞에 놓았다.
여전히 화면 속에 있던 켈라프가 말했다.
“거창하고 영웅적인 말은 쓰지 마세요. 단정적인 표현도요. 치료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특정한 이송을 거부하는 겁니다.”
“내가 흥분할까 봐 걱정돼요?”
“그들이 당신의 분노를 증상으로 이용할까 봐 걱정됩니다.”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사실이었다.
리즈는 펜을 들었다.
손이 조금 떨렸다.
팔찌가 손목에 지나치게 말끔한 옅은 자국을 남겨놓았다.
그녀는 썼다.
‘나는 브레스트 시설을 떠나, 전적으로 프랑스법과 내가 선택한 법률대리인의 권한 아래 있지 않은 의료시설 또는 군사시설로 이송되는 것을 거부한다.’
멈췄다.
켈라프가 말했다.
“계속하세요.”
리즈는 다시 썼다.
‘나는 치료를 거부하지 않는다. 치료가 나의 거부할 권리를 약화시키는 데 이용되는 것을 거부한다.’
소렐이 눈을 감았다.
모로가 중얼거렸다.
“그래요.”
리즈는 덧붙였다.
‘나는 유용한 밤도, 변형안도, 추가 센서도 없는 진정한 비생산적 휴식을 요구한다. 또한 내가 선택한 법률대리인에게 자유롭게 접근하고 매일 언니와 통화할 것을 요구한다.’
그녀는 종이를 마송 쪽으로 밀었다.
마송이 읽었다.
그다음 세귀르에게.
카메라를 통해 보클레르에게.
보클레르는 웃지 않았다.
“바렌 씨, 이 거부가 협조에 어려움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은 이해하시겠죠.”
켈라프가 리즈보다 먼저 대답했다.
“누구에게요?”
“상황이 이미 국가적 틀을 넘어섰다고 보는 이들에게.”
“이름을 대세요.”
“그럴 수 없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그럼 제 의뢰인에게 유령들의 요구에 답하라고 하지 마세요.”
보클레르는 침묵했다.
세귀르가 종이를 집어 들었다.
안주머니에서 펜을 꺼냈다.
마송의 펜이 아니라 자기 펜이었다.
그는 문장 아래에 썼다.
‘접수함. 오늘부로 본 거부는 국가 체계에 대하여 대항력을 지닌다. 단, 명시적으로 정의되고 상호 검증된 생명 위급 상황은 예외로 한다.’
마송이 움찔했다.
“피에르알랭…”
“고정점이 필요합니다.”
“승인받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이 우리 대신 승인하게 내버려두면 더더욱 승인받지 못할 겁니다.”
보클레르가 말했다.
“많은 것을 거시는군요.”
세귀르는 화면을 올려다보았다.
“그렇습니다.”
기세도 위엄도 없는 담백한 긍정. 위엄이란 대개 나쁜 밤들과 간신히 피한 잘못 뒤에야 찾아온다는 것을 아는 남자의 대답이었다.
리즈는 그를 믿고 싶었다.
심지어 잠시 믿기 시작했다.
그때 보클레르가 말했다.
“좋습니다. 프랑스는 이를 공식적으로 확인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죠. 프랑스가 서둘러 지속 가능한 형식을 제안하지 않으면 다른 나라들이 자기들 방식을 제시할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막거나, 따라가거나, 잃는 것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무엇을 잃죠?” 리즈가 물었다.
보클레르는 화면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행정 용어를 고르지 않았다.
“당신을요.”
방 안의 모든 것이 멎었다.
벌거벗은 단어였다.
인간적인 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 당신은 지친 여자 한 사람을 뜻하는 동시에 비밀, 힘, 우위, 지도 위의 선, 프랑스의 선점, 막을 수 있는 재앙, 일어날 수 있는 전쟁을 뜻했다.
그 모든 것이 한 단어 안에 들어 있었다.
그제야 리즈는 세귀르의 제안만으로 부족한 이유를 깨달았다.
거짓이어서 힘이 모자란 것이 아니었다. 세계가 모자랐다. 그것은 프랑스의 제안이었고, 현상은 이미 그녀에게 아직 문 하나를 붙들어주려 애쓰는 나라를 넘어섰다.
피난처 없는 지도
리즈는 걷게 해달라고 했다.
그들은 너무 빨리 허락했다.
그러니 진짜 산책은 아니었다.
들로네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있었어요?
하마터면 그렇게 물을 뻔했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그는 듣기 좋기에는 지나치게 정확한 말로 답했을 것이다.
그들은 복도 두 개와 유리로 된 보안 구역을 지나 건물 옆을 따라 내부 출구로 이어지는 낮은 회랑으로 들어갔다. 바깥 공기에서는 젖은 풀과 차가운 군항 냄새가 났다. 하늘이 너무 낮게 내려앉아 지붕 위에 얹힌 것 같았다.
들로네는 두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소렐도 함께 가겠다고 고집했다.
모로는 오지 않았다.
이미 다른 무언가가 되라는 요구를 받는 방에서, 의사로 남을 줄 아는 현명함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들은 군항이 보이는 열리지 않는 창문 앞에 멈춰 섰다.
부두와 예인선들, 회색 형체들, 낮은 케이슨들, 그리고 매어놓은 바지선 한 척이 보였다. 평평한 표면은 말 없는 약속 같았다.
리즈가 물었다.
“내가 떠난다면요?”
들로네는 대답하지 않았다.
소렐이 말했다.
“어디로요?”
“모르겠어요. 마리안 집. 스페인. 수도원. 화물선. 현실적인 선택지를 원하면 트윙고 트렁크라도.”
들로네가 콧김을 내뿜었다.
거의 웃음이었다.
그날 처음 들은 정상적인 소리였다.
“언니 댁에는 디저트가 나오기도 전에 기자들이 모일 겁니다. 스페인에선 사법 공조 요청이 들어올 테고, 수도원에는 드론이 뜨겠죠. 화물선이라면 보험, 선적국, 항구, 선원, 협약이 따라붙습니다. 트윙고는 첫 검문소까지 육 킬로미터 드리죠.”
“뭐든 답이 있네요.”
“아뇨. 바깥이 단순하다고 아직 믿는 사람들의 사건을 다뤄본 적이 있을 뿐입니다.”
리즈는 군항을 바라보았다.
예인선 하나가 거대한 물체를 천천히 끌고 있었다.
강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고집스러워 보였다.
“그러니까 난 갇힌 거군요.”
소렐이 대답했다.
“사적으로는 그래요.”
그 말이 회랑 안을 맴돌았다.
사적으로.
아침의 봉투가 온 뒤로 그 단어는 더 지저분한 무게를 얻었다. 갇혔다는 것은 이제 단순히 나갈 수 없고, 감시받고, 제복 입은 사람들과 절차에 붙잡혀 있다는 뜻만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문장 하나, 자기 집의 사진 한 장, 압수 봉인에서 뜯어낸 자신의 일부를 침실 안으로 들여놓은 뒤 그것을 돌봄이라 부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잠을 지켜주지 못하는 바깥은 바깥이 아니었다.
“그럼 다른 방식으로는요?”
소렐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들로네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몸을 살짝 옮겼다.
그러니 듣고 있다는 뜻이었다.
“다른 방식이라면, 남들이 도주나 발작, 병리, 채굴, 감금으로 축소할 수 없는 형식이 필요해요.”
“다른 방식이라는 게 뭔데요?”
“법.”
리즈가 웃었다.
피로에 찌든 웃음이었다.
“여기 온 뒤로 내가 본 건, 누군가 충분히 두려워지기만 하면 법이 잡아먹히는 모습뿐이에요.”
소렐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법 이상의 것이 필요해요.”
“뭐가요?”
“법이 세계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무대.”
들로네가 아주 조금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들었다는 것을 리즈가 알 수 있을 만큼만.
하나의 생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불완전하고 쓸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주위에 열어놓은 광대한 공간 때문에 위험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아직 모르겠어요.”
“너무 빈약하네요.”
“그래요.”
소렐은 멀리 바지선을 바라보았다.
“당신을 더 잘 숨겨서 구할 수는 없다는 것만 알아요. 그들은 그걸 보호라고 부르겠죠. 그다음엔 치료. 필요. 안전 확보. 단어가 하나씩 바뀔 때마다 당신의 자리는 줄어들 거예요.”
리즈는 팔찌를 생각했다.
저울.
의무기록.
중립적인 장소.
영토를 말하듯 당신을 말하던 보클레르.
“내가 전부 싫다고 하면요?”
들로네가 대답했다.
“안보 문제가 되겠죠.”
“이미 그렇잖아요.”
“아닙니다. 지금은 아직 불가능한 사건 안에서 조건을 제시하는 한 사람입니다.”
“무슨 차이죠?”
“사람은 서명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처리합니다.”
건조한 표현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이번만큼은 말의 충격을 줄이려 하지 않았다.
소렐이 말했다.
“그게 경계예요.”
“무슨 경계요?”
“그들이 당신을 한 사람으로 묘사하는 동안은 협상해야 해요. 불안정이나 위험원, 혹은 본인의 뜻에 반해서라도 보존해야 할 신체라고 묘사하기 시작하는 날에는 처리할 겁니다.”
리즈는 차가운 창틀에 손을 얹었다.
유리에는 희미한 모습만 비쳤다.
지나치게 창백한 여자.
빌려 입은 스웨터, 손목의 팔찌. 얼굴 뒤로 군항이 펼쳐졌다. 거대한 물체들, 부두, 케이슨.
뜨도록, 무언가를 지도록 만들어졌지만 정박한 곳에 완전히 속한 적은 없는 것들.
리즈가 물었다.
“내가 더 이상 그들 건물 안에 있지 않다면요?”
“그럼 어디에 있을 건데요?”
리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몰랐다. 답은 장소를 닮지 않았다. 그저 형태를 찾기 시작한 하나의 불가능일 뿐이었다.
페이지 가장자리의 단어
오후에 마리안에게 전화가 왔다.
리즈는 누가 전화기를 건네주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직접 요구했다.
켈라프가 서면으로 요구해두었다.
세귀르가 서명했다.
들로네는 그것이 돌봄에 속하는지 증거에 속하는지 아직 아무도 모르는 깨지기 쉬운 물건이라도 되는 양 전화기를 가져왔다.
리즈는 침대를 등지고 바닥에 앉았다.
의자와 책상은 회의에 지나치게 속해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서, 아무도 자신을 위해 마련하지 않은 자리에서 말하고 싶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마리안이 말했다.
“비행기 안이 아니라고 말해줘.”
“비행기 안 아니야.”
“그것만 해도 현대사에 남을 대승리네.”
리즈는 눈을 감았다.
터져 나온 웃음이 목덜미를 아프게 했다.
“나를 옮기려고 했어.”
마리안은 어디로냐고 묻지 않았다.
좋은 징조였다.
아니면 나쁜 징조.
너무 빨리 배우고 있었다.
“치료하려고?”
“쓸모 있는 방식으로 치료하려고.”
“싫다고 했어?”
“응.”
“그걸로 충분해?”
리즈는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갈수록 나쁜 질문만 하네.”
“빨리 배우잖아.”
마리안의 입에서 나오자 그 말은 다시 인간적으로 느껴질 만큼 우스웠고, 리즈는 그래서 언니를 사랑했다.
“아니.” 리즈가 말했다. “충분하지 않아.”
마리안이 숨을 쉬었다.
뒤에서 접시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 잔이 무언가를 묻는 먹먹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리안이 수화기를 멀리했다.
“안 돼, 엄마. 지금은.”
그러고는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너 밥은 먹냐고 물어.”
“먹는다고 해.”
“진짜야?”
“거의.”
“그럼 안 먹는다는 뜻으로 알아들을게.”
“그래도 돼.”
침묵.
마리안이 다시 말했다.
“리즈, 내 말 들어. 계속 반대만 해서는 이길 수 없어.”
“고맙습니다, 선생님.”
“나 진지해.”
“듣고 있어.”
“‘싫다’는 건 상대가 아직 네게 싫다고 말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할 때 먹혀. 그 권리 자체를 따지기 시작하면 다른 게 필요해.”
리즈는 책상 위의 종이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거부서.
세귀르가 덧붙인 문구.
종이는 벌써 낡아 보였다.
“뭐가?”
“모르겠어. 하지만 은신처는 아니야. 변호사 한 명만으로도 안 되고. 조항 하나 더 붙이는 것으로도 안 돼.”
“그럼 뭘 하라고? 왕국이라도 만들까?”
“덜 바보 같은 단어를 만들어낼 때까지 살아 있으라고 권하고 싶네.”
리즈는 미소 지었다.
그러다 표정이 굳었다.
덜 바보 같은 단어.
주권자라는 말을 떠올렸다.
이미 조금은 그것을 요구하고 있지 않으냐고 세귀르가 거의 비난하듯 말했을 때의 얼굴도.
그녀는 그 단어를 거부했었다.
어쩌면 다른 문으로 돌아온 것인지도 몰랐다.
“혼자서 분리할 수 있다고 생각해?”
마리안은 웃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
“그렇지.”
“하지만 사람들이 이미 너를 토막 내고 있다는 걸 보게 만들 수는 있을지도 몰라.”
아름다운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나았다. 쓸 수 있는 말이었다.
통화가 끝난 뒤에도 리즈는 바닥에 앉아 있었다.
18호실은 평소의 질서를 지키고 있었다.
다시 정돈된 침대.
치워진 식판.
새로 채운 물병.
두 겹으로 친 커튼.
공식 수첩 곁에 얌전한 작은 짐승처럼 놓인 팔찌.
잠들 수도 있었다.
잠들어야 했다.
그러나 검은 수첩을 펼쳤다.
도형이 그려진 페이지를 찾지 않았다. 빈 페이지를 펼쳤다.
그녀는 썼다.
‘나를 숨길 수는 없다.’
그리고,
‘나를 돌려보낼 수도 없다.’
그다음,
‘주인이 바뀔 수 있는 방 안에서는 나를 보호할 수 없다.’
멈췄다.
세 번째 문장은 틀리지는 않았지만 좋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였다.
줄을 그어 지웠다.
다시 썼다.
‘사람은 거부할 수 있다. 문제는 처리된다.’
들로네의 문장.
따옴표는 붙이지 않았다.
훔친 연장처럼 간직했다.
그 아래에 썼다.
‘계속 사람으로 남아야 한다.’
그리고,
‘한 사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펜촉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머릿속에 군항이 돌아왔다.
낮은 케이슨들.
바지선.
바닥에 닿지 않으면서도 밧줄에 붙들려 있는 것들.
아버지는 이런 생각을 싫어했을 것이다.
미친 생각이어서가 아니었다. 무게에서 벗어나는 척하면서 실은 다른 힘들에게 그 무게를 다른 방식으로 들어달라고 요구하는 생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썼다.
‘도망치지 말 것.’
이어서,
‘거부가 한 사람만의 피로가 되지 않는 장소를 만들 것.’
장소로는 부족했다.
줄을 그어 지웠다.
‘영토’라고 썼다.
그 단어가 두려웠다.
그래서 그대로 두었다.
그 아래에, 이유도 모른 채 여섯 글자를 적었다.
Aurenne.
한참 바라보았다.
아무 의미도 없는 이름이었다.
아직은.
다만 자신을 둘러싼 이들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이름이라는 장점은 있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서두르지 않는 두 번의 노크.
소렐이었다.
리즈는 너무 황급히 수첩을 덮었다.
“들어오세요.”
물리학자가 문을 열었다.
리즈가 무엇을 쓰고 있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리즈의 얼굴을 보았다.
닫힌 수첩을.
책상 위의 팔찌를.
“자야 해요.”
“잠이 안 와요.”
“그렇다면 더 이상 충고가 아니라 증상이네요.”
리즈는 눈을 비볐다.
“그게 정중한 표현이에요?”
소렐은 문턱에 서 있었다.
“세귀르가 당신의 거부를 공식 기록에 넣었어요.”
“보클레르는요?”
“보클레르는 형식을 찾고 있어요.”
“나를 붙잡아둘 형식?”
“당신을 잃지 않을 형식.”
“둘이 같은가요?”
소렐은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그에게는 아니에요.”
“나한테는요?”
“대개는 같죠.”
리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 아래의 여섯 글자를 생각했다.
Aurenne.
어리석은 생각일지도 몰랐다. 열 때문일 수도, 지친 여자의 방어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그녀의 피로로 축소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무언가의 시작일 수도 있었다.
“아리안?”
소렐이 눈을 들었다.
리즈가 빈정거림 없이 이름을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당신이 국가라면 나를 보내주겠어요?”
소렐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아니요.”
적어도 대답은 벌거벗을 줄 아는 품위를 지녔다.
“그럼 당신이 나라면?”
소렐은 열리지 않도록 막아놓은 창을 바라보았다.
그 너머의 군항.
군항 너머의 세계.
“끝내 오지 않을 허락을 더는 구하지 않겠어요.”
교훈을 덧붙이지 않고 나갔다.
리즈는 닫힌 수첩과 단둘이 남았다.
분리는 불가능했다.
물론이었다.
몸 하나가 분리할 수는 없다.
방 하나도.
지친 여자 한 명은 더더욱.
하지만 주철 추가 가벼워진 뒤부터 불가능은 더 이상 충분한 반증이 아니었다.
리즈는 다시 수첩을 열었다.
아직 아무 뜻도 갖지 않은 이름 아래에 한 줄을 덧붙였다.
‘세계가 나를 사람으로 대하며 말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을 찾을 것.’
제17장
땅 없는 영토
케이슨
다음 날 군항은 물이 빠져 낮고 잿빛이었지만, 더는 같은 장소처럼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예인선들, 기중기들, 군함들, 초록과 납빛 사이의 물. 움직인 것은 그녀의 시선뿐이었다.
유리 회랑에서 내다보자 이제 부두와 바지선만 보이지 않았다. 가능한 조각들이 보였다. 판, 부피, 빈방, 지리의 한 조각이 되기를 기다리는 콘크리트와 강철 케이슨.
아버지는 말보다 먼저 그것을 가르쳐주었다. 항구는 널브러져 있는 것들로 읽는 거야. 십 대의 리즈는 그 말을 싫어했다. 지금은 다시 한번 듣고 싶었다.
소렐이 종이컵에 담긴 커피 두 잔을 들고 왔다.
한 잔을 창문 안쪽 턱에 내려놓았다. 리즈에게 너무 가깝지 않은 곳이었다. 커피조차 안전거리를 지켜야 한다는 듯이.
“잤어요?”
“조금.”
“얼마나요?”
“당장 거짓말은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소렐은 피로를 닮은 얼굴로 그 대답을 받아들였다.
“모로는 숫자를 원할 텐데요.”
“숫자는 줄 거예요. 나중에.”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말하지 않았다. 회의실의 침묵과는 결이 달랐다. 창유리를 스치는 바람, 벽 너머 어딘가에서 울리는 엔진의 낮은 진동, 멀리 확성기에서 들리는 안내 방송, 교각에 부딪히는 불규칙한 바다 소리가 그 안에 담겨 있었다.
마침내 리즈가 말했다.
“배는 선적국에 속하죠.”
“원칙적으로는 그래요.”
“인공섬은 그걸 설치한 국가나 그 구역을 통제하는 국가에 속하고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아요.”
“여기선 아무것도 단순하지 않네요.”
소렐은 커피를 불었다.
“질문이 있는 거예요, 아니면 벌써 답이 있는 거예요?”
리즈는 안쪽 부두에 매인 바지선을 가리켰다.
“이를테면 저거요.”
“바지선이네요.”
“저걸 들어 올리면요?”
“위험한 바지선이 되겠죠.”
“정말로 떠 있는 게 아니게 된다면요?”
소렐이 리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죠?”
리즈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검은 수첩을 팔 아래 끼고 있었지만 너무 빨리 펼치고 싶지 않았다. 단어가 수첩 안에 있는 동안에는 인간적인 연약함을 간직했다. 세귀르와 보클레르, 마송과 다른 이들이 둘러앉은 탁자 위에 놓이는 순간 선택지가 되고, 따라서 위협이 되고, 따라서 하나의 사건 기록이 될 터였다.
“그들이 빼앗을 수 있는 모든 것에는 주소가 있다는 생각이요.”
“당신 방에도 주소가 있죠.”
“이제 내 몸에도 있고요.”
소렐은 부정하지 않았다.
“기업에는 본사가 있어요. 연구소에는 부지가 있고, 배에는 모항이 있고, 섬에는 땅이 있죠. 비밀 기지조차 결국 좌표와 관할권, 소속을 갖게 되고, 누군가는 ‘우리 땅이니 우리 문제다’라고 말할 수 있어요.”
“‘우리 땅’이 없는 곳을 찾는군요.”
“아니요.”
자기 거부가 이토록 선명한 데 리즈 자신이 놀랐다.
“‘우리 땅’이라는 것이 너무 선명해서 아무도 그것을 증상처럼 다룰 수 없는 곳을 찾는 거예요.”
소렐은 군항을 바라보았다.
“주권처럼 들리네요.”
“내가 왕좌라도 요구하는 것처럼 그 말을 꺼내지 마세요.”
“규모가 바뀌는 순간을 알아보는 물리학자로서 말한 거예요.”
리즈는 수첩을 옆구리에 단단히 붙였다. 검은 표지가 체온을 머금고 있었다. 물건 하나가 비밀에서 제안이 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때로는 하룻밤, 몇 마디 말, 아니면 더는 숨을 만한 곳이 없는 여자가 겨우 끌어모은 부족한 용기만으로도 충분했다.
“땅에 닿지 않아야 해요.”
소렐은 웃지 않았다.
커피를 내려놓았을 뿐이다.
“땅에요, 바다에요?”
“가능하다면 둘 다.”
“터무니없는 생각인 건 알죠?”
“그 기준부터 의심하게 됐어요.”
물리학자는 이마를 쓸었다. 머리는 엉성하게 묶여 있었고, 고무줄 밖으로 센 머리카락이 몇 가닥 빠져나와 있었다. 며칠 만에 처음으로 리즈는 이 일 속에서 소렐 역시 늙어가고 있음을 보았다. 사건 기록 속 인물이 아니라 잠과 인내와 눈가에 새로 생긴 주름을 대가로 치르는 사람으로서.
“기술적으로 말하면, 당신의 현상에 떠받쳐진 질량도 여전히 질량이에요. 움직이고, 표류하고, 바람을 받고, 계류 장치를 뜯어낼 수 있어요. 현상이 멎으면 추락할 수도 있죠. 의식을 잃을 수 있는 생각 하나로 나라를 만들 수는 없어요.”
“오늘 당장 나라를 만들겠다는 게 아니에요.”
“조금밖에 안심이 안 되네요.”
“켈라프가 지킬 수 있을 만큼 물질적이고, 국가들이 분류하기 전에 주저할 만큼 터무니없으며, 그들이 못 본 척할 수 없을 만큼 가까운 형식이 존재하는지 알고 싶어요.”
소렐은 커피를 다시 들었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무대.”
“어제 당신이 한 말이죠.”
“피곤할 때 한 말은 자주 후회해요.”
“나도 그래요.”
예인선 한 척이 바지선을 몇 미터 밀었다. 멀리서는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평평한 표면을 다른 각도에서 드러내기에는 충분했다. 소금 자국이 밴 검은 금속 사각형. 노동자가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지나칠 만큼 평범하면서도 집과 작업장, 광장, 페인트로 그어 넣는 순간부터 논쟁거리가 될 국경까지 담을 만큼 넓었다.
리즈는 수첩을 펼쳤다.
그 단어를 보여주었다.
Aurenne.
소렐은 아무 말 없이 읽었다.
그러고는 바지선을 보았다.
“타르디외가 필요하겠네요.”
“브레송도요.”
“골머리를 앓을 각오가 된 법률가도.”
“마송은 그러기에 적합해 보여요.”
“세귀르도 필요하고요.”
리즈는 수첩을 덮었다.
“보클레르는 아직 안 돼요.”
소렐이 아주 잠깐 미소 지었다.
“빨리 배우네요.”
무거운 것들의 탁자
타르디외는 정오 전에 도착했다. 브레스트 날씨에는 너무 얇은 코트를 입고, 바람에 머리가 눌린 채였다. 콘크리트의 약한 지점을 벌써 찾는 것처럼 복도를 살피는 특유의 눈빛은 그대로였다. 코르넥은 함께 오지 않았다. 그 부재가 리즈의 안쪽 어딘가를 조였다. 아쉬움인지, 신중함인지, 아니면 더는 지켜줄 수 없는 얼굴들에 지친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몇 분 뒤 브레송이 뒤따라 들어왔다. 도면 통과 네트워크에서 분리한 태블릿, 굵은 연필 세 자루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죽은 복제본들 이후 그는 무언가를 증명하려 들던 태도를 잃었다. 확신은 줄고 존재감은 늘었다. 수수께끼 앞에서 일하되 그 수수께끼에 앙갚음하지 않기로 받아들인 사람처럼 천천히 걸었다.
회의는 큰 회의실에서 열리지 않았다.
리즈가 거부했다.
세귀르는 사무실을 제안했다.
그것도 거부했다.
결국 그들은 선거에 면한 기술실을 얻었다. 길고 추웠으며, 오래된 기름때가 밴 탁자와 벽의 갈고리들, 젖은 금속 냄새, 물보다 하늘이 더 많이 보이는 높은 창 두 개가 있는 방이었다. 은밀하지도 편안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무거운 것들에 관해서라면 무언가 아는 방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마송은 세귀르와 함께 왔다.
켈라프는 화면으로 참석했다.
들로네는 언제나처럼 문 가까이에 있었지만 문 전체를 차지하지는 않았다. 전날 이후로 그는 아무도 이용할 권리가 없을 때조차 어떤 출구는 보여야 한다는 것을 이해한 듯했다.
보클레르는 없었다.
리즈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세귀르가 말했다.
“알려야 할 만한 것이 생기면 그에게도 알릴 겁니다.”
“그럼 우리가 존재할 만큼 위험한 무언가를 내놓기를 기다리는 거군요.”
“자기 다급함 때문에 스스로 파괴되지 않을 만큼 명확한 것을 내가 건네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화면 속 켈라프가 눈을 들었다.
“그 미묘한 차이는 제법 마음에 드는군요.”
타르디외가 코트를 벗었다.
“영토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들었어요.”
그 단어에 대문자를 붙이지 않은 말투였다. 리즈는 그것이 고마웠다.
“케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리즈가 대답했다.
브레송은 군항 도면을 탁자에 펼쳤다. 외교 지도도, 군 작전 지도도 아니었다. 수심, 기술 구역, 선거, 부두, 출입로, 점유 구역, 도크, 작업장, 유효 길이, 계류 제약이 표시된 작업 도면이었다. 종이가 펼쳐지며 거의 동물 같은 부드러운 소리를 냈다. 귀퉁이가 말려 올라갔다. 타르디외가 빈 컵 두 개와 선반에서 찾은 스패너 하나로 눌렀다.
리즈는 회랑에서 보았던 바지선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저거요.”
브레송이 살펴보았다.
“작업용 바지선입니다. 갑판은 평평하고 낡았지만 상태는 좋아요. 길이 오십이 미터, 폭 십팔 미터. 흘수가 얕고, 주요 구조부는 작년에 정비했습니다.”
“소유주는요?”
세귀르가 대답했다.
“해군입니다.”
“그러면 국가 소유네요.”
“그렇습니다.”
“그럼 우선 저기서 빼내야겠네요.”
마송은 무언가를 적었다가 지웠다. 켈라프는 미소 지었다.
타르디외가 물었다.
“들어 올리고 싶어요?”
“배도 아니고, 섬도 아니고, 기지도 아니면서, 나를 둘러싼 의료 장비로 끝나지도 않은 채 자기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싶어요.”
뒤따른 침묵에는 적의가 없었다. 모두가 바쁘게 머리를 굴릴 뿐이었다. 각자 들어맞는 칸을 찾았다가 그 칸이 갈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브레송은 연필을 들었다.
“바지선 하나로 영토가 되진 않습니다. 행정용 뗏목이 될 뿐이죠.”
“좋아요.”
그는 사각형 주위에 그림을 그렸다.
“중복 구조가 필요합니다. 독립 모듈, 가로보, 유연한 연결부. 한 구역에서 경감 효과가 사라져도 나머지 전체를 끌고 가서는 안 돼요. 조립식 부유 구조물처럼 케이슨망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단, 각 요소가 실제로 뜰 필요는 없도록요.”
“물에 닿지 않게요?”
“우선은 접촉을 줄이는 겁니다. 완전한 무접촉은 보도자료에나 나올 환상이에요. 겉보기 무게를 없애도 바람과 관성, 횡력, 걷는 사람들, 기계, 저장 탱크, 너울은 남습니다. 아무것에도 닿지 않는 구조물도 모든 것에 대응해야 해요.”
타르디외가 연필을 가져갔다.
“그리고 떨어질 때는 제대로 떨어져야 해요.”
리즈가 눈을 들었다.
“뭐라고요?”
“절대 추락하지 않는 물건을 설계하는 게 아니에요. 추락해도 모두를 죽이지 않는 물건을 설계하는 거죠.”
겉으로 잔혹하게 들릴 뿐 냉소는 전혀 없었다. 작업장과 건설 현장의 사고방식이었다. 기적이 사고까지 없애주지는 않는다는 걸 아는 사람들의 사고방식.
소렐이 말했다.
“비활성 구역이 필요하겠네요.”
“‘죽은 구역’이 아니라 ‘비활성 구역’이라고 해요.” 타르디외가 바로잡았다. “죽었다고 하면 다들 겁먹어요.”
“가끔은 겁먹는 게 유용해요.”
“배치도에서는 아니에요.”
리즈는 두 여자가 단어를 놓고 다투는 것을 묘한 안도감 속에서 들었다. 아직 국가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응력과 추락, 연결, 점진적 파손, 분리 회로, 시험 수조, 펌프, 바람, 사람의 무게와 화장실을 이야기했다. 영토는 국가를 부르기 전에 오수부터 어떻게 처리할지 알아내야 했다.
그 하찮도록 현실적인 문제가 그녀를 거의 구원했다.
켈라프가 물었다.
“바렌 씨, 법적 목적은 무엇입니까?”
리즈는 탁자를 바라보았다.
도면과 연필, 귀퉁이에 놓인 스패너, 나무에 밴 기름 자국.
“나의 거부가 방에 갇힌 사람의 변덕으로 취급되지 않게 하는 것.”
“더 정확해야 합니다.”
“나에 관한 모든 결정이, 내가 계속 사람으로 남는 데 이해관계를 가진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장소를 거치게 하는 것.”
마송이 고개를 들었다.
“다른 사람들요?”
“네.”
누군가가 그녀의 잠 곁에 기억 하나를 내려놓으려 할 때 다른 사람이 나서서 막아주는 장소라고 덧붙일 수도 있었다. 말하지 않았다. 아직은. 하지만 그 생각은 그곳에 있었다. 주권보다 구체적이고, 언젠가 뒤집어씌워질 상상의 국기보다 다급했다.
세귀르는 벽에 기대었다.
“이제 자신을 보호하는 것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군요.”
“아니에요.”
“당신의 보호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를 인간으로 지키는 장치 안에서 더는 혼자가 되지 않겠다는 이야기예요.”
공동체라는 단어가 거슬렸다. 홍보 책자 냄새가 났다. 깨끗한 소규모 유토피아, 문을 닫는 데 더 좋은 단어를 찾았다는 이유로 스스로 정의롭다고 믿는 집단. 오렌이 언젠가 존재한다면, 자기 앞에서 말을 잘 꾸밀 줄 아는 사람들만 골라 받는 것으로 시작해서는 안 될 터였다.
방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생각이었다. 나중을 위해 남겨두었다.
브레송은 연필로 도면을 톡톡 두드렸다.
“기술적으로는 실물 시험 구조물을 만들 수 있어요.”
소렐이 그를 돌아보았다.
“어느 정도죠?”
“탁자 위 모형은 아닙니다. 실제 구획 하나요. 짧은 케이슨 두 개, 가로보 하나, 작업용 강판 하나. 삼십 톤쯤. 응력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하지만 나머지 문제까지 해결한 척할 만큼 크지는 않게.”
타르디외가 덧붙였다.
“이미 알려진 활성 모듈을 써야 해요. 새로운 변형안 말고요.”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다가왔다가, 노골적으로 무게를 싣기 직전에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도 배운 모양이었다.
짓누르지 않고 요청하는 법. 가벼운 요청도 요청이기는 하지만.
“유용한 밤이 필요해요?”
소렐이 다른 사람보다 먼저 대답했다.
“아니요.”
브레송이 연필을 내렸다.
“새로 활성화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들어 올릴 수 없습니다.”
“그럼 아무것도 들지 않으면 돼요.”
소렐의 차분함이 기술적 열의를 잘라냈다. 리즈는 한순간 그녀가 미웠다가, 바로 그 순간 때문에 사랑했다.
타르디외가 리즈를 바라보았다.
“활성화하지 않고도 준비할 수 있어요. 가설을 나누고, 추락 계획을 만들고, 하지 않을 것을 정하죠.”
“그건 우리가 잘합니다.” 켈라프가 말했다.
세귀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가 탁자로 다가왔다.
“눈에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세요.”
브레송은 더 넓은 사각형을 그린 뒤 중앙을 비웠다.
“낮은 플랫폼입니다. 여기는 기술 광장. 저쪽은 임시 거주 모듈. 여기는 에너지와 물. 저기는 의무실. 케이슨은 질량과 부피를 제공하는 동시에 외곽을 이룹니다. 경계를 명확히 만들 수 있어요.”
“국경.” 마송이 말했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바깥에서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방 안을 가로질렀다. 무언가를 내려놓고, 고정하고, 다시 손보는 소리. 항구의 삶은 거의 너그럽게 느껴질 만큼 무심히 이어졌다.
세귀르는 브레송이 그린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따라갔다.
“프랑스령이면 우리가 당신을 보유합니다. 프랑스령이 아니면 당신을 잃습니다. 사유지에 불과하면 비상사태를 명분으로 되찾을 겁니다. 국제 구역이라면 다른 나라들이 절차 속에서 당신을 녹여 없애겠죠.”
켈라프가 물었다.
“프랑스가 임시적 주체로 인정한다면요?”
마송이 눈을 감았다.
“변호사님.”
“이미 탁자를 태우고 있는 질문을 꺼냈을 뿐입니다.”
세귀르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자신이 첫 번째 보증인으로 남기를 바라는 법적 변칙을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더는 소유주는 아니게 되고요.”
“그게 어려운 점입니다.”
리즈가 바로잡았다.
“그게 장점이에요.”
세귀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것을 인정하면 국가의 도움으로 조직된 분리로 받아들여질 거라는 건 이해합니까?”
“네.”
“프랑스의 나약함으로?”
“어쩌면요.”
“국제적인 도발로?”
“틀림없이.”
“그런데도요?”
리즈는 도면 위에 손을 올렸다. 멋진 문장을 찾지 않았다. 종이 아래의 나무에는 울퉁불퉁한 자국과 흠집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매끄러워지기를 거부하는 탁자가 주는 안도감이 있었다.
“어제 당신은 내 거부가 국가 체계에 대해 효력이 있다고 썼어요. 프랑스가 제공한 보호였고, 도움이 됐어요. 하지만 충분하지 않아요. 국경을 넘지 못하는 조항 안에서는 오래 살 수 없어요.”
세귀르는 눈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떠다니는 문서를 원한다는 겁니까?”
“문서가 버틸 수밖에 없는 장소를 원해요.”
최초의 경계
그들은 활성화하지 않았다.
그 결정 때문에 하루는 더 길고, 거의 합리적으로 흘렀다. 리즈의 일부는 그 반대를 원했다. 자신을 몰아붙이고, 자신은 거부하고, 모두가 강제와 저항이라는 익숙한 극 속 제자리로 돌아가기를.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은 채 일했다.
브레송은 가용한 케이슨 도면을 요청했다. 타르디외는 이미 인가받은 기술자 두 명에게 전화했다. 마송은 연구의 틀을 작성했다. 모로는 의무적인 의료 휴식 시간을 기록에 넣었다. 켈라프는 작업 문서 어디에도 오렌이라는 이름을 쓰지 못하게 했다.
“왜요?” 리즈가 물었다.
“이름을 붙이면 이해하기도 전에 빼앗거나 인정하고 싶어지니까요.”
“그럼 뭘 원해요?”
“지금은요? 정확히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
리즈가 미소 지었다.
“세귀르보다 더 위험하네요.”
“국가에 청구하는 비용은 더 쌉니다.”
저녁은 들어오는 모습을 아무도 보지 못한 채 찾아왔다. 기술실의 빛이 노랗게 변했다. 샌드위치와 종이컵에 든 수프, 사과,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커피가 들어왔다. 리즈는 소렐의 만족스러운 시선과 들로네의 일부러 무심한 시선 아래 샌드위치 반쪽을 먹었다.
정치적인 것의 탄생은 때때로 기름때 낀 탁자 위에서 시작됐다. 말려 올라가는 도면과 먹은 횟수를 세는 의사 사이에서.
저녁 무렵 마레스코가 들어왔다.
리즈는 붉은 프레임 사건 이후 그를 본 적이 없었다. 걸음은 나아졌지만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다. 옆구리나 등에 아직 걸음을 붙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몸을 빳빳이 세우지 않고 군복을 입고 있었다. 자신이 살아남은 사건을 남들이 나중에 말끔히 정리해 적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 특유의 은근한 피로가 배어 있었다.
“무엇인지 알 권한이 없는 물체의 군사적 제약에 관해 의견을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타르디외가 대답했다.
“그러니 완벽한 적임자네요.”
그는 도면을 보았다.
그러고는 리즈를.
“바렌 씨.”
“대위님.”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리즈는 그것이 고마웠다.
생존자의 감사는 탁자를 기울게 했을 것이다. 이제 그 무게까지 짊어질 힘은 없었다.
마레스코는 브레송과 세귀르, 켈라프의 설명을 차례로 들었다. 질문은 적었지만 하나하나 실질적인 결과를 불러왔다. 누가 외곽을 경비하는가? 누가 승선하는가? 누가 선창을 검사하는가? 외국이 미확인 항공기를 접근시키면 어떻게 하는가? 무력 충돌에는 어느 법을 적용하는가? 프랑스가 더는 완전히 소유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구조물에 주둔한 프랑스 무장 병력은 누구의 지휘를 받는가?
그가 말할수록 그림은 이미지이기를 그만두었다. 골칫거리들의 연속이 되었다. 대개 무언가가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최초의 징후였다.
마침내 세귀르가 말했다.
“경계가 필요하겠군요.”
“기술적 경계요?” 브레송이 물었다.
“정치적 경계.”
마송이 덧붙였다.
“형사법적, 관세법적, 보건법적, 군사적 경계도요. 정말로 저녁 먹기 전에 재무부를 발작하게 하고 싶다면 세법상 경계도 필요하고요.”
켈라프가 말했다.
“경계가 반드시 폐쇄를 뜻하지는 않아요.”
“법에서는 대개 폐쇄와 가장 비슷한 것이죠.”
“그렇다면 반대라고 써야겠네요.”
세귀르가 리즈를 보았다.
“위험이 보입니까?”
“어떤 위험요?”
“당신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다시금 거부할 권력을 가진 무언가를 만들어야 합니다.”
전부 보지는 못했지만 다리에서 피로가 빠져나갈 만큼은 보았다. 그 이름이 버틴다면 오렌은 단지 국가들을 피해 숨는 피난처가 아닐 것이다. 예와 아니요를 말하는 기계, 따라서 사람을 다치게 하는 기계가 될 것이다. 들어갈 수 있는 곳과 없는 곳, 보호받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생길 것이다. 미덕은 곧 웃으며 사람을 걸러내는 법을 익힐 수 있었다.
수첩에 쓴 문장을 생각했다. 거부가 한 사람만의 피로가 되지 않는 장소를 만들 것.
누구도 지치지 않는 장소를 만들겠다고 쓰지는 않았다.
“보여요.”
“그래도 계속하겠습니까?”
리즈는 조금 떨어져 서 있는 마레스코를 바라보았다. 붉은 프레임 아래 갇혔던 두 남자를 생각했다. 긴급상황이면 거의 무엇이든 정당화된다고 방 안의 모두가 끝내 받아들였던 순간을. 그러고는 보고서 안에서 그 긴급상황의 이름이 얼마나 빨리 바뀌었는지를.
“내가 계속하지 않아도 그 권력은 존재할 거예요. 단지 주위에 빛이 덜할 뿐이죠.”
세귀르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클레르가 이해할 만한 문장이군요.”
“그 사람을 위해 쓴 말이 아니에요.”
“그래서 문장이 쓸모 있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화면 저편에서 켈라프가 펜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아무 뜻도 드러내지 않을 임시 명칭을 제안하죠. 자율 실험 구역.”
마송이 거의 사레들릴 뻔했다.
“자율이라고요?”
“뭐가 더 좋습니까? 장식용 실험 구역?”
타르디외가 중얼거렸다.
“SEA.”
소렐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재미있네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리즈가 웃었다.
목덜미가 당겨 들로네마저 고개를 돌릴 만큼 짧고 진짜인 웃음이었다.
몇 초 동안 방이 숨을 쉬었다.
그러다 탁자 위 세귀르의 보안 전화기가 진동했다.
그가 화면을 보았다.
이름은 발음되지 않았지만 리즈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에서 읽었다.
보클레르.
세귀르는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
문은 소리 없이 닫혔다.
피로가 한꺼번에 더 무거워져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용당하는 데 유용한 밤까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이름과 잠, 케이슨 도면이 탁자 위에서 기다리는 동안 남자들이 문 너머에서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기만 해도 충분했다.
소렐이 다가왔다.
“오늘은 그만해요.”
“우린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러니까요.”
“의사나 할 법한 말이네요.”
“그보다 나빠요. 준비와 내구력을 혼동해서 무너진 시스템을 충분히 본 물리학자의 말이에요.”
리즈는 따랐다. 하지만 곧바로는 아니었다.
브레송의 연필을 집어 들고 도면 가장자리에서 바지선과 제안된 케이슨 두 개 주위에 작은 선을 그었다.
하나의 경계. 아직 아무것도 가르지 않았다. 다만 말했다. 여기서는 다르게 답해야 한다.
뜨지 않는 것
사흘 뒤 그들은 실험 구역을 만들었다.
만들었다는 말은 과장이었다. 그들은 주로 옮기고, 조립하고, 잠그고, 점검하고, 기름을 닦고, 볼트로 조이고, 측정하고, 측정값에 이의를 제기하고, 두 곳을 다시 조이고, 응력 센서 하나를 교체했다. 그러고는 바람이 충분히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결과를 대신 써주었다는 혐의를 바람에게 씌우지 않아도 될 만큼.
리즈는 유용한 밤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 조건은 지켜졌다.
모로는 용도가 지정된 물건 없이 이틀 밤을 자게 하기까지 했다. 어둠 속으로 몸이 토막토막 떨어졌다가 너무 빨리 솟구쳐 오르는 단속적인 횡단을 잠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녀는 땀에 젖은 채 깨어났고, 도형으로 옮겨질 권리를 얻지 못한 형상의 파편들이 머리에 남아 있었다.
시험용으로 선택한 모듈은 오래된 것이었다. 붉은 프레임에 쓰였던 모듈. 틀 안에 갇히고 제한되고 감시되며, 주위에 덧댄 안전장치들 때문에 거의 모욕당한 듯 보였다. 리즈는 이미 존재하는 물건이고, 생산이 아니라 구조에 쓰였으며, 타르디외가 이미 내놓은 것 이상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사용을 허락했다.
“기술적인 약속은 별 가치가 없어요.” 켈라프가 말했다.
“사람의 약속도 마찬가지죠.” 타르디외가 대답했다.
“그래서 글로 쓰는 겁니다.”
그들은 글로 썼다.
실험 구역은 너울을 피할 수 있는 내부 선거에 마련됐다. 짧은 케이슨 두 개, 강철 가로보 하나, 작업용 강판, 일부만 채운 밸러스트, 안전선, 비상용 부표. 중앙에는 투명 케이스에 갇힌 장치가 있었다. 국가처럼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건물처럼 보이는 것조차 없었다. 낮고 잿빛인 산업 구조물. 유토피아라기보다 조선소 공사의 한 토막에 가까웠다.
리즈는 그런 모습이 더 좋았다.
인가받은 사람들은 주위에 자리했지만 원을 만들지는 않았다. 이제 그들은 원을 피했다. 의식처럼 보였기 때문인지, 최초의 증명이 이루어진 격납고를 모두 기억했기 때문인지는 몰랐다. 타르디외는 브레송과 함께 기술 통로에 있었다. 소렐과 모로는 리즈 곁에. 마레스코는 말없는 장교와 함께 조금 더 멀리. 세귀르와 마송은 노란 선 뒤에 있었다. 켈라프는 들로네가 들고 있는 태블릿 화면에 떠 있었다. 무장한 남자가 떠받친 법의 얼굴은 터무니없으면서도 완벽하게 주권자다운 모습이었다.
보클레르는 직접 오지 않았다.
그의 부재에 속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어딘가에서 보고 있었다.
브레송이 점검 사항을 발표했다.
금속에 눌려 납작해진 목소리가 선거의 확성기를 타고 흘렀다.
“밸러스트 안정.”
“안전선 간섭 없음.”
“응력 센서 작동.”
“외곽 인원 철수 완료.”
타르디외가 덧붙였다.
“다시 말합니다. 완전히 들어 올리는 게 목표가 아닙니다. 하중 감소와 제한적이고 되돌릴 수 있는 부분 접촉 단절을 확인합니다.”
리즈는 눈을 감았다.
접촉 단절.
이륙보다 나은 말이었다. 더 겸손하고 정확했다.
장치는 곧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몇 초 동안 선거의 검은 물과 조명 빛의 반사, 어딘가에서 밧줄이 부딪치는 소리, 마이크로 흘러드는 브레송의 가쁜 숨소리만 있었다. 리즈는 자기 심장이 장비들의 박자에 맞추려는 것을 느꼈다. 차가운 난간에 손을 얹었다.
소렐은 그 동작을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첫 징후는 물에서 나타났다.
극적인 변화는 아니었다. 물의 무늬가 달라졌다.
케이슨 주위의 물결이 자기가 떠받치던 것의 일부를 잊은 듯 벌어졌다. 비상용 부표가 줄을 당기는 힘도 줄어들었다. 타르디외의 화면에서 곡선이 한 칸 내려간 뒤 안정됐다. 브레송이 너무 작은 목소리로 욕을 했지만 마이크는 그것까지 잡아냈다.
“겉보기 하중, 십이 퍼센트 감소.”
아무도 박수치지 않았다.
리즈는 수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구역은 더 잘 뜨는 것이 아니었다.
다르게 뜨고 있었다.
타르디외가 물었다.
“다음 단계로 갈까요?”
소렐의 시선이 즉시 리즈에게 향했다.
리즈는 함정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성공한 단계는 완벽한 예의로 다음 단계를 불러냈다.
“아니요.”
작고, 거의 실망스러운 말이 선거를 건넜다.
브레송이 고개를 들었다.
타르디외가 입을 다물었다.
마레스코는 다리, 선체, 장갑차, 대피소, 세계가 십이 퍼센트 가벼워지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벌써 보고 있는 사람처럼 구역을 바라보았다.
세귀르가 말했다.
“검증된 단계에서 중지합니다.”
타르디외가 지시를 되풀이했다.
장치가 꺼졌다.
물은 예전 방식으로 돌아갔다. 케이슨은 아주 조금,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가라앉았다. 하지만 무게가 돌아왔음을 모두가 보기에는 충분했다.
그 뒤에 난 소리는 충격음이라기보다 숨을 내쉬는 소리에 가까웠다.
그것은 완전히 떠난 적 없던 것에 다시 닿았다.
태블릿 속 켈라프가 물었다.
“충분합니까?”
마송이 대답했다.
“무엇에 대해서요?”
“이게 수첩 속 생각일 뿐인 척 더는 할 수 없게 되기에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리즈는 안쪽 부두로 이어지는 문을 열어달라고 했다.
해초와 경유, 젖은 돌 냄새를 머금은 공기가 선거 안으로 들어왔다. 너무 깊이 들이마신 탓에 현기증이 났다. 모로가 한 걸음 다가왔다. 리즈는 손을 들어 멈춰 세웠다.
“괜찮아요.”
그는 반박하지 않았지만 물러나지도 않았다.
부두에서는 시험 장면을 보지 못했을 법한 수병 하나가 어깨에 감아 올린 호스를 메고 지나가고 있었다. 무게 때문에 몸을 구부린 채 짜증이 나 있고 살아 있었으며, 그들보다 먼저 존재했고 그들 뒤에도 남을 일에 몰두해 있었다. 리즈는 그가 상자 더미 뒤로 사라질 때까지 눈으로 따라갔다.
그 순간 깨달았다. 영토는 그저 땅에 닿지 않는 것이어서는 안 되었다.
호스와 피로, 수프, 난간 위의 손과 평범한 거부가 여전히 자리를 차지할 만큼 사람들 가까이에 머물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오렌은 더 커진 18호실에 불과할 것이다.
지도 위의 이름
시험 뒤 세귀르는 소규모 회의를 요청했다.
리즈는 두 번째로 큰 회의실을 거부했다.
그들은 기술실로 돌아왔다. 연필로 그은 경계가 있는 도면도 그대로였다. 누군가 가장자리에 하중값을 적어놓았다. 또 누군가는 먹지 않은 사과 하나를 스패너 옆에 두었다. 방은 이미 고유한 무질서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리즈는 그 안에서 일종의 평화를 느꼈다.
보클레르가 벽면 화면에 나타났다.
배경이 달라져 있었다. 목재 장식도, 알아볼 수 있는 사무실도 없었다. 흰 벽과 장소를 알 수 없는 빛, 지나치게 깨끗한 음향. 그는 지워지는 쪽을 택했다. 논의가 평범한 방들을 넘어섰음을 알리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측정값은 봤습니다.”
리즈는 어떻게 보았는지 묻지 않았다.
“십이 퍼센트는 영토가 아닙니다.”
“그렇죠.” 타르디외가 대답했다. “경계의 증명입니다.”
“뭐라고요?”
브레송이 연필을 들었다.
“지금까지는 질량을 가볍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습니다. 오늘은 조립체가 즉각적인 결속을 잃지 않으면서 주변 환경과의 관계를 바꿀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어요.”
“정치 언어로 말하면요?”
세귀르가 대답했다.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이 하나의 단위처럼 행동하기 시작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보클레르는 리즈를 바라보았다.
“그게 당신의 의도입니까?”
“내 의도는 중립적인 장소에서 생을 마치지 않는 거예요.”
“충분한 대답이 아닙니다.”
“그래도 모든 것을 시작하게 한 대답이죠.”
켈라프 역시 화면으로 참석하고 있었다. 사무실에서였다. 뒤에는 말없는 화분이 충실하고 쓸모없이 돌아와 있었다.
“용어를 정리해야 합니다. 바렌 씨는 프랑스에 시민 하나를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그 시민을 혼자 자기 손안에 붙잡아두는 방식으로는 보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마송이 덧붙였다.
“정확히 무엇을 인정하라는 거죠? 협회? 시험 구역? 불가능한 공공기관? 월경지?”
“임시적 주체요.” 켈라프가 말했다.
“그런 표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방금 내가 발음했으니 존재합니다. 이제 너무 일찍 잠에서 깨운 국사원 앞에서 십 초 넘게 버틸 수 있는지 알아보면 되겠군요.”
보클레르는 웃지 않았다.
“여러분은 지금 분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귀르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분리는 떨어져 나오는 원래의 영토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영토입니다. 그리고 그녀 없이는 누구도 행사할 줄 모르는 힘이 그 영토를 일부 만들어냅니다.”
“말장난이군요.”
“모든 주권은 거기서 시작합니다.”
리즈는 말없이 세귀르를 관찰했다. 그의 얼굴은 수척했고 셔츠는 구겨져 있었으며, 이 주 전만 해도 용납하지 않았을 옅은 수염이 돋아 있었다. 더는 위기를 관리하는 남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국가에 대한 자신의 사랑 때문에 국가에 저항할 수 있는 형식을 상상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처럼 보였다.
보클레르가 물었다.
“그러면 프랑스는 무엇을 갖게 됩니까?”
방이 차갑게 식었다.
마침내.
진짜 입구였다.
도덕도, 법도, 보호조차도 아니었다. 프랑스가 무엇을 갖게 되는가.
리즈는 반발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그러려 했다. 그러다 도면과 사과, 기름 자국, 연필로 그은 연약한 경계를 바라보았다. 오렌이 태어난다면 이 오물 속에서도 태어날 터였다. 이해관계, 보장,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양보, 거래 냄새가 나는 말과 서약 냄새가 나는 말들 속에서.
“연결고리요.” 그녀가 말했다.
보클레르는 기다렸다.
“언어. 최초의 조약. 안전 보장. 프랑스 영토와 프랑스가 인정하는 영토에서 구조를 우선 받을 권리. 군사적 이용에 관한 제한적 감독권. 첫 팀에 프랑스 시민이 참여한다는 것. 나와 관련된 의료 사항에 대한 상호 검증. 그리고 당신들이 나를 쓸모 있는 죄수로 만들지 않을 선택을 했다는 기억.”
켈라프가 무언가를 적었다.
마송도.
세귀르는 움직이지 않았다.
보클레르가 말했다.
“방금 협상을 열었습니다.”
“아니요. 당신들이 자제하는 대가를 말했을 뿐이에요.”
엘리제궁 보좌관은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다시 들었을 때 그의 얼굴은 달라져 있었다. 아직 오렌을 믿지는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충분히 빨리 믿지 않을 때 생길 위험은 이미 믿고 있었다.
“실무 명칭이 필요하겠군요.”
마송이 제안했다.
“자율 실험 구역.”
“새 구두를 신은 행정 복도 같군요.” 보클레르가 대답했다. “다른 걸로 하죠.”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방은 벽 너머 선거 소리와 바깥을 걷는 수병의 발소리, 어딘가에 내려놓는 연장 소리, 아직 자신에게서 미래 한 조각을 떼어내려 한다는 걸 모르는 항구의 끊임없는 웅성거림을 들려주었다.
리즈는 검은 수첩을 펼쳤다.
앞쪽 페이지들은 보여주지 않았다.
그저 수첩을 돌려 그들에게 내밀었다.
거의 빈 페이지 한가운데 여섯 글자가 있었다.
Aurenne.
보클레르가 읽었다.
“무슨 뜻입니까?”
“아직은 아무 뜻도 없어요.”
켈라프가 물었다.
“보호 문서에 이 이름을 쓰는 데 동의합니까?”
리즈는 소렐을 바라보았다.
소렐은 찬성도 경고도 보내지 않았다. 붙잡으려 들지 않는 주의만 기울였다.
“네.”
마송이 이름을 적었다.
진지하지 않았다면 우스웠을 만큼 공들여 천천히 썼다. 오렌이라는 이름은 평범한 펜촉이 종이를 스치는 동안 검은 수첩에서 법률 메모장으로 건너갔다.
빛은 나지 않았다.
진동도 없었다. 군항의 색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업 지도 위, 바지선과 두 케이슨의 가장자리에 세귀르가 연필로 썼다.
‘오렌—가상 경계.’
리즈는 그 말을 다시 읽었다.
가상이 마음에 들었다.
숨 쉴 틈을 남기는 말이었다.
경계는 불안했다.
벌써 문을 사랑하는 단어였다.
리즈도 연필을 집었다.
세귀르의 문구 아래에 덧붙였다.
‘무엇을 위해 보호하는지 잊는 경계에는 아무 가치도 없다.’
모두의 지지를 받은 문장은 아니었다.
타르디외는 불명확하다고 했다.
마송은 위험하다고 했다.
켈라프는 공격받기 쉽다고 했다.
보클레르는 아마 쓸 수 없을 거라고 했다.
소렐만 두 번 읽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그래도 남겨둬요.”
밖에서는 밤이 브레스트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 실험 구역은 다시 무거워진 채 선거에 놓여 있었다. 밧줄에 붙들리고, 물을 바라볼 때 머릿속에 같은 나라를 떠올리지 않는 사람들의 감시를 받으며. 아직 아무것도 닮지 않았다.
하지만 이름이 생겼다.
세계가 머지않아 그 이름을 고치고 싶어 하게 만들기에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제18장
브레스트 조약
국기 없는 방
그들은 회의실에서 국기를 치웠다.
누가 요구했는지는 아무도 말하려 하지 않았다. 대단한 명령이라기보다 수치스러운 예방 조치였다. 사람들의 몸이 도착하기 전에 행정부가 처리해두는 그런 세부 사항. 프랑스 국기를 내리고, 평소 화면 곁에 서 있던 작은 유럽기를 치웠다. 벽에는 주위 페인트보다 밝은 직사각형 두 개만 남았다. 빈자리가 천보다 더 많은 것을 말했다.
리즈는 들어서자마자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첫 원이 모였던 큰 회의실도, 오렌이 처음 연필선을 얻었던 기술실도 아니었다. 군항을 향해 서 있는 행정 건물 이 층의 중간쯤 되는 방이었다. 긴 탁자, 의자 열두 개, 두꺼운 창 두 개, 찬장 위의 커피포트, 바닥의 콘센트, 눅눅한 카펫과 차가운 금속 냄새. 프랑스는 이런 곳을 만들 줄 알았다.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 척할 만큼 중립적이고, 그 안에서 오간 말이 한 나라의 형태를 바꿀 수 있을 만큼 보호된 장소.
세귀르는 이미 와 있었다.
마송도.
보클레르는 화면 속에 없었다. 직접 왔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물리적 존재만으로 방이 달라졌다. 평소의 침착함은 여전했지만 덜 말끔했다. 파리에서 오는 여정과 이른 시각, 지난 며칠의 긴장, 어쩌면 더 잘 붙잡아두려고 처음에는 옮겨놓았던 여자와 협상하러 브레스트까지 왔다는 생각이 그에게 은근한 피로를 남겨놓았다. 덜 위험해진 것은 아니었다. 덜 추상적이 되었을 뿐이다.
켈라프는 리즈 뒤로 들어왔다. 코트를 팔에 걸치고 서류철을 손에 든 채 굳은 얼굴이었다. 마침내 화면을 벗어난 그녀의 등장으로 법률대리인이라는 말에 새로운 무게가 생겼다. 한 방에 실제로 앉아 있는 변호사는 목소리만이 아니다. 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의자이며, 끊어버릴 수 없는 시선이며,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맛없는 커피를 마시고 디지털 압축 없이 침묵을 듣는 사람이다.
소렐은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모로가 앉았다. 얇은 의무기록을 들고, 의학과 무관한 단어들에 의학적 보증을 해달라는 요구를 이미 예상하는 의사의 표정이었다.
물질적 사안을 위해 타르디외와 브레송도 참석했다.
들로네는 문 가까이에.
마레스코는 더 멀리 있었다. 아무도 증인이라고 부르지 않은 채 초대받았다. 곧 증인이라는 뜻이었다.
탁자 중앙에는 실험 구역을 인쇄한 도면, 선거에서 찍은 사진 두 장, 하중 기록, 그리고 세귀르가 다음과 같이 썼던 작업 문서가 놓여 있었다.
‘오렌—가상 경계.’
연필 글씨는 말끔한 사본으로 바뀌어 있었다.
리즈는 연필 쪽이 더 좋았다.
“바렌 씨.” 보클레르가 말을 시작했다.
켈라프가 끊었다.
“시작하기 전에 말씀드리죠. 제 의뢰인은 더 우아한 형식의 감금을 협상하러 온 게 아닙니다.”
공격적인 어조는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그 편이 더 나빴다. 이미 법정에 선 사람의 어조였다.
보클레르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것을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문서는 때때로 작성자가 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을 원합니다.”
마송은 조심스러운 느린 동작으로 서류철을 열었다.
“그래서 바로 그 문서를 논의해야 합니다.”
리즈는 자리에 앉았다. 네 시간을 토막 내어 잤고, 부두와 방들로 이루어진 도시를 걷는 대상 없는 꿈을 꾸었다. 모로는 혈압 수치를 알려주었으나 즉시 잊었다. 마리안이 아침에 전화해, 덜 바보 같은 단어 하나를 발명했다고 아침을 거를 권리까지 얻은 건 아닐지 모른다고 다짜고짜 말했기 때문에 토스트 두 장을 먹었다.
농담은 십 초를 버텼다. 대단한 성과였다.
그러고는 마리안이 물었다.
“뭐라도 서명하래?”
“아마도.”
“그럼 먹고 해. 빈속에는 늘 서명을 더 엉망으로 하니까.”
리즈는 언니 말을 들었다.
이제 도면 앞에 앉자 뱃속의 토스트가 자신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우스우면서도 필요한 증거처럼 느껴졌다.
세귀르는 사본 위에 손을 올렸다.
“용어상 문제가 있습니다.”
켈라프가 말했다.
“정치적 문제가 있는 거죠.”
“용어를 통해 드러나는 문제입니다.”
“흔히 그렇죠.”
세귀르는 웃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는 국가와 조약을 맺을 수는 없습니다.”
“만드세요.”
마송이 눈을 감았다.
“변호사님.”
“시간을 아끼려고 단순화한 겁니다.”
보클레르는 리즈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프랑스가 오렌을 국가로 인정하면, 임시로라도 인정하면 즉각 동맹국들과 유럽연합, 자국 기관의 일부, 그리고 프랑스 시설에서 나온 기술이 왜 갑자기 프랑스의 손을 벗어나는지 이해하지 못할 모든 이와 위기를 겪게 됩니다.”
리즈가 물었다.
“인정하지 않으면요?”
보클레르는 잠시 생각했다.
“법적으로 계속 권한을 갖습니다.”
“나에 대해서.”
“이 사안에 대해서요.”
“나에 대해서.”
아무도 바로잡지 않았다.
적어도 침묵에는 그만한 정직함이 있었다.
세귀르가 말했다.
“중간의 길이 있습니다.”
“중간의 길은 흔히 복도죠.” 켈라프가 대답했다. “자유롭게 들어갔는데 반대편에서 누군가 문을 닫습니다.”
“이번에는 문이 두 개여야 합니다.”
“열쇠가 프랑스에만 있어서는 안 되고요.”
프랑스라는 단어가 세귀르에게 상처를 입혔다. 아주 희미하게 드러났다. 찰나의 호흡 정지, 서류 위에서 멎은 손, 곧이어 돌아온 통제력. 그는 국가를 충분히 사랑했기에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붙잡아둔다는 비난을 받으면 아파했다. 그래서 냉소적인 자들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을 리즈는 깨달았다. 그는 진실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해를 끼칠 수 있었다.
마송이 첫 문안을 나눠주었다.
제목은 이랬다.
‘오렌 자율 실험 구역에 관한 브레스트 협정.’
켈라프는 첫 줄을 읽고 펜으로 두 단어에 줄을 그었다.
“실험 구역은 안 됩니다.”
마송이 한숨을 쉬었다.
“다른 표현을 쓰면 즉시 헌법적·국제법적 검토가 시작됩니다.”
“그게 목적입니다.”
“첫 줄부터는 안 됩니다.”
“첫 줄부터 해야죠.”
리즈는 자기 사본을 들었다.
하얗고 빽빽하고 그 나름대로 우아한 종이였다. 여백이 넓고 번호가 깔끔하게 매겨져 있었다. 감옥처럼 보이지 않았으므로 경계하며 읽어야 했다.
조항들을 훑었다.
제1조: 목적.
제2조: 경계.
제3조: 보호.
제4조: 출입 조건.
제5조: 리즈 바렌 씨의 의료 체계.
문서 한가운데 놓인 자기 이름은 다른 단어들보다 선명한 냉기를 일으켰다.
“안 돼요.”
모두가 눈을 들었다.
리즈가 제5조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이런 식은 안 돼요.”
모로가 물었다.
“무엇이 거슬립니까?”
“조약이 물이나 전기를 다루는 조항처럼 내 몸을 다루는 조항을 가져서는 안 돼요.”
켈라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옳습니다.”
마송이 펜을 들었다.
“그래도 당신의 의료 상황은 다뤄야 합니다.”
“그럼 별도 부속서에 넣어요. 내가 선택한 변호사와 의사가 재검토할 수 있게. 정치적 목적 안에는 넣지 마세요.”
모로가 말했다.
“저도 지지합니다.”
보클레르가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의사지 헌법학자가 아닙니다.”
“그러니까요.”
너무 간단한 대답이라 아무도 즉시 공격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소렐이 문서를 집었다.
“제3조. ‘프랑스 공화국은 실험 구역과 관련 자원의 보호를 보장한다.’ 관련 자원이라고요?”
그녀가 눈을 들었다.
“그 단어를 또 넣었군요.”
마송은 진심으로 난처해 보였다.
“표준 문구입니다.”
“그게 변명이 되는 일은 드물죠.”
리즈는 거의 미소 지었다.
하지만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보클레르가 말했다.
“바꾸세요.”
마송은 줄을 그었다.
“뭐로 바꿉니까?”
켈라프가 제안했다.
“‘그곳에 거주하거나 근무하거나 치료받는 사람들.’”
세귀르가 덧붙였다.
“그리고 그곳의 물질적 존립을 가능하게 하는 시설들.”
“좋아요.” 소렐이 말했다. “시설은 시설로, 사람은 시설이라는 이름 아래 넣지 않는 것으로.”
아직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타르디외가 중얼거렸다.
“인간은 펌프가 아니라는 말을 하려고 줄을 꽤 많이 써야겠네요.”
“전부 쓰세요.” 리즈가 대답했다.
방의 호흡이 달라졌다.
승리는 아니었다. 그저 힘을 조금 되찾은 순간이었다.
물어뜯는 조항들
그들은 물어뜯는 지점들을 하나씩 붙들고 작업했다.
시간은 더 이상 시간 단위로 흐르지 않았다. 지운 단어와 옮긴 쉼표, 모로가 자른 사과를 올려둔 흰 접시 주위의 지나치게 긴 휴지로 흘렀다. 유리창 너머 군항은 잿빛에서 흰빛으로 갔다가 다시 잿빛으로 돌아왔다. 리즈는 왼쪽 눈 뒤가 아팠다. 통증이 요구하는 만큼 중요성을 내주지 않으려고 사과 한 조각을 먹었다.
먼저 경계였다.
마송은 좌표와 출입로, 기술적 지역권을 원했다. 켈라프는 오렌 임시 당국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고 덧붙였다.
“어떤 당국이죠?” 보클레르가 물었다.
“우리가 지금 존재하도록 강제하는 당국이요.”
“순환논법입니다.”
“탄생은 대개 그렇습니다.”
세귀르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늘 그런 식으로 변론합니까?”
“부조리가 친절하게 서명까지 해서 찾아올 때는요.”
그다음은 출입이었다.
프랑스는 누가 들어오는지 알고 싶어 했다. 켈라프는 아는 것이 혼자 선택한다는 뜻으로 변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지금껏 침묵하던 마레스코는 출입문이 모호한 문구에 달린 장소를 군인은 지킬 수 없다고 지적했다. 소렐은 안전 확보를 긴급 구조로 바꾸게 했다. 전자에는 아직 의료 이송의 냄새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모로가 동의했다. 구조라는 말에는 사람의 손이 둘러져 있었다.
진짜 싸움은 이송을 두고 벌어졌다.
보클레르는 공정과 활성 모듈, 외국 행위자와 중대한 국익에 관한 문장을 준비해두었다. 켈라프는 그것을 읽은 뒤 칼을 내려놓듯 펜을 놓았다.
“오렌은 숨 쉴 때마다 허락을 구하는 속령으로 태어나지 않을 겁니다.”
리즈는 다른 단어를 보고 있었다.
이송.
도면도, 모듈도, 팀도 이송할 수 있다. 피로와 밤, 기술적 명칭으로 바뀐 여자도 이송할 수 있었다.
“나를 이송할 수 없다고 쓰세요.”
보클레르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그 조항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래도 명시해야 해요.”
켈라프는 별도 조항을 받아 적게 했다. 오렌에 있는 어떤 사람도 자유롭고 현시점에 유효하며 조력을 받아 내린 동의 없이는 이동되거나, 반출되거나, 억류되거나, 검사를 받을 수 없다. 그 동의에 이의가 제기될 경우 독립적인 평가를 실시한다.
“모든 걸 더 느리게 만드는군요.” 보클레르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위기에서는 느림이 사람을 죽입니다.”
“때로는 그렇죠. 속도도 그렇고요.”
리즈는 사과 조각을 내려놓았다.
“내가 이해할 권리를 빼앗을 만큼 빨리 움직여야 한다면, 이미 나를 보호하고 있지 않은 거예요.”
보클레르는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대신 기록했다.
프랑스가 갖는 것
오후 중반, 보클레르는 중단을 요청했다.
그 단어에 타르디외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위험한 단어를 좋아하시네요.”
“휴식을 말한 겁니다.”
그들은 작은 무리로 나뉘어 방을 나갔다. 아무도 실제로 경계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켈라프는 복도에서 사무실에 전화했다. 마송은 마시지도 않을 커피를 가지러 갔다. 모로는 리즈에게 두 번째 사과 조각과 치즈 샌드위치 반쪽을 먹게 했다. 브레송은 창가에 남아 안쪽 선거를 바라보았다. 오렌 구역은 여전히 무겁고 불완전한 채 안전선에 둘러싸여 놓여 있었다.
세귀르가 리즈 곁으로 왔다.
서류철은 들지 않았다.
덜 무장한 사람처럼 보였다.
“버틸 수 있습니까?”
“의학적인 질문이에요, 정치적인 질문이에요?”
“불행히도 둘 다입니다.”
“그럼 어느 쪽 대답도 마음에 안 들겠네요.”
그는 군항을 바라보았다.
“대통령에게 전화해야 합니다.”
리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통령이라는 단어가 그들 주위의 공기를 바꾸었다. 지금까지 엘리제궁은 화면이고, 전달된 목소리이며, 보클레르의 입에서 나온 직책이었다. 이제 오렌을 처음 인정할지 말지 결정할 수 있는 남자가, 그 자리에 없으면서도 리즈가 여전히 배가 아프고 접시 위 사과가 갈색으로 변해가는 방에 들어오려 했다.
“전부 알고 있어요?”
“전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거짓말을 참 빨리 배우네요.”
세귀르는 변명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자기가 혼자 결정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릴 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만 해도 어디예요.”
“프랑스가 무엇을 갖게 되는지 물을 겁니다.”
“보클레르가 이미 물었어요.”
“다른 방식으로 물을 겁니다.”
“어떤 방식으로요?”
세귀르는 한참 뒤에 대답했다.
“전략가로서만이 아니라, 자국민에게 왜 엄청난 힘을 가져다줄 수 있었던 것의 일부가 자발적으로 손을 벗어나게 허용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리즈는 선거의 구역을 바라보았다. 창문을 통해서는 기둥 두 개 사이로 회색 모서리 하나만 보였다. 그 낮은 덩어리에서는 아직 엄청난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다른 이들이 기계만 보기 전에 서둘러 정치적 영혼을 부여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뭐라고 대답할 건데요?”
세귀르는 기쁨 없이 미소 지었다.
“프랑스가 당신을 죄수로 발명한 나라가 되지 않을 유일한 기회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고요.”
그 단어는 뜻밖의 무게를 지녔다.
발명.
리즈는 하마터면 거부할 뻔했다. 그러다 그 말에 진실이 있음을 깨달았다. 프랑스가 그녀를 창조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무엇이 될지, 그 공적인 형태를 발명하는 중이었다. 자원, 보호받는 시민, 의학적 변칙, 위협, 협력자, 창립자. 단어마다 다른 삶이 열렸다.
“별로 팔릴 만한 말은 아니네요.”
“그렇죠.”
“보클레르는 더 좋은 말을 갖고 있겠죠.”
“더 효과적인 말을 갖고 있겠죠.”
“당신은요?”
“나는 어쩌면 더 오래가는 말을 갖게 될 겁니다.”
휴식은 이십 분 동안 이어졌다.
보클레르가 마지막으로 돌아왔다.
아직 전화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더는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물건처럼 화면이 아래로 가게 탁자 위에 놓았다.
“대통령이 예비 구성 형식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계속했다.
“국가 승인은 아닙니다. 오늘은요. 프랑스 공화국, 지명된 창립자로서의 바렌 씨, 그리고 구성되는 즉시 오렌 임시 당국이 체결하는 주권 예비 구성 및 보호 협정입니다.”
마송이 중얼거렸다.
“깔끔하지 않군요.”
“아무것도 깔끔하지 않습니다.” 보클레르가 말했다.
켈라프가 자리로 돌아왔다.
“지명된 창립자는 안 됩니다.”
“왜죠?”
“모든 것의 개인적 원천으로 만들고, 따라서 모든 압력의 영구적인 표적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리즈는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그 점은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문장으로 만들지 못했을 뿐 이미 느끼고 있었다.
켈라프가 말을 이었다.
“이렇게 쓰세요. ‘오렌의 예비 구성을 발의한 프랑스 시민 리즈 바렌.’ 지명된 창립자도, 도덕적 소유주도, 우연히 왕이 된 사람도 아닙니다.”
“우연히 왕이 된 사람.” 타르디외가 되풀이했다. “그건 나중에 써먹게 기억해둘게요.”
웃음은 짧았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보클레르는 수정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진짜 조건을 내놓았다.
“프랑스의 보장에는 중대한 국익 조항이 포함돼야 합니다.”
켈라프가 눈을 감았다.
“드디어 나왔군요.”
“지금 말씀드리는 편이 낫습니다.”
“풀어서 말해봐요.” 리즈가 요구했다.
보클레르보다 먼저 세귀르가 대답했다.
“오렌이 프랑스의 중대한 국익에 반해 이용되거나 적대 세력의 통제하에 들어갈 경우, 프랑스는 개입할 권리를 유보하려는 겁니다.”
“무엇이 적대적인지는 누가 정하죠?”
“그게 문제입니다.”
방 뒤쪽에서 마레스코가 말했다.
“그런 조항이 전혀 없다면 프랑스 군인은 무엇을 지키는지도 모른 채 이 경계를 지킬 수 없습니다.”
“지나치게 광범위하면요?” 켈라프가 물었다.
“그럼 프랑스를 지킨다고 믿으며 재장악을 지킬 수도 있겠죠.”
대위는 꾸미지 않고 말했다.
리즈는 오랫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찬성하는 겁니까?”
“내게 내려오는 명령이 어디서 시작하는지 알고 싶다는 겁니다.”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안심이 돼서가 아니라 두려움을 올바른 곳에 놓았기 때문에.
그들은 거의 한 시간 동안 조항을 작성했다.
결국 프랑스의 보장은 무장 위협, 사람에게 가해지는 강제, 현상을 강제로 이전하려는 시도, 또는 인명에 대한 즉각적 위험이 없는 한 오렌 경계 내부의 어떠한 개입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중대한 국익을 발동할 때마다 오렌 임시 당국과 리즈의 법률대리인, 그리고 아직 구성을 발명해야 할 대립적 심의기구에 통지해야 했다.
“존재하지 않는 기구군요.” 마송이 말했다.
“또 하나 생겼네요.” 켈라프가 대답했다.
리즈는 조항을 다시 읽었다.
아름답지는 않았다. 절뚝거렸고 구멍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프랑스가 ‘두려워지면 되찾겠다’고 단순히 쓰지는 못하게 했다.
첫날의 승리로는 받아들일 만할지도 몰랐다.
문서와 피로
끝나기도 전에 밤이 내렸다.
멈췄어야 했다.
모두 알았기에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했다. 중대한 결정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굶주리고, 춥고, 피에 커피가 너무 많이 돌며, 피로를 엄숙함으로 착각할 만큼 두려워하는 방을 사랑한다.
끝내 모로가 공동의 비겁함을 깨뜨렸다.
“바렌 씨는 이 방에서 나가야 합니다.”
보클레르가 시간을 보았다.
“거의 다 됐습니다.”
“그러니까요.”
“의사 선생, 조항 세 개만 남았습니다.”
“몸은 하나 남았습니다.”
침묵이 선명하게 내려앉았다.
리즈는 모로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입을 다물라고도 하고 싶었다. 두 욕망은 서로 맞붙은 채 똑같이 진실하고 똑같이 나빴다. 지금 나가면 파리에서 온 멀쩡한 남자들과 회의실에서 살아남는 데 자신보다 익숙한 법률가들이 그녀 없이 계속할 것이다. 남아 있으면, 시야 가장자리가 벌써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는데도 나중에 그들은 그녀가 마지막 문안에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했다고 말할 것이다.
소렐이 리즈의 의자를 몇 센티미터 뒤로 밀었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충분했다.
“쉽시다.”
“내 결정은 내가 할 수 있어요.” 리즈가 중얼거렸다.
“그럼 저들이 당신을 망가뜨리도록 돕지 않는 결정을 내려요.”
켈라프는 서류철을 닫았다.
“회의를 중단합니다. 제 의뢰인이 없는 동안 이루어진 수정은 읽히지 않은 것으로 간주합니다.”
마송이 두 손을 들었다.
“몰래 수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훌륭하군요. 그럼 회의록에 그렇게 적는 것도 어렵지 않겠네요.”
들로네가 문을 열었다.
복도의 공기는 더 차갑고 덜 닳은 것 같았다. 리즈는 가까운 작은 방까지 걸어갔다. 안에는 안락의자와 담요, 물병, 지나치게 부드러운 조명이 놓여 있었다. 평소에는 비밀 면담이나 교육 도중 몸이 아픈 사람을 위해 쓰는 방인 듯했다. 심리사회적 위험을 알리는 포스터와 아무도 버릴 용기를 내지 못한 플라스틱 화분도 있었다.
소렐이 함께 들어왔다.
모로도.
켈라프는 문가에 남았다.
“바로 여기 있겠습니다.”
리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닫히자 피로는 협상을 그만두었다.
한 덩어리로 그녀를 덮쳤다.
손이 떨렸다. 목덜미가 아팠다. 의료용 팔찌의 버클 아래로 붉은 자국이 남았다. 목은 마르지만 물을 마시고 싶지 않았고, 배는 고프지만 먹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날 밤 브레스트 조약이 정말 탄생한다면, 잘라놓은 사과와 소렐이 뒤로 밀어준 의자, 피로를 동의의 하자로 바꿀 줄 아는 변호사에게 일부 빚지게 된다는 생각에 웃고 싶었다.
“조금 누우세요.” 모로가 말했다.
“누우면 잠들어요.”
“의학적으로 흥미로운 가능성이군요.”
소렐은 리즈의 무릎 위로 담요를 끌어당겼다.
리즈는 단 한순간만 눈을 감았다.
그 순간 회의실이 멀어졌다.
도면과 오렌이라는 이름, 회색 케이슨이 보였다. 이어 아버지의 부엌과 노란 용수철저울, 탁자 위의 주철 추가 나타났다. 누군가 나쁜 취향으로 그녀의 삶을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다면 지나치게 집요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무게와 짊어지는 것, 거부하거나 받아들이는 물건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진부하다고 불평할 사치는 없었다. 그 한가운데 있었으니까.
문 너머로 목소리가 지나갔다.
보클레르였다.
말은 들리지 않고 어조만 들렸다.
그다음 켈라프의 목소리. 더 낮고 날카로웠다.
소렐이 문을 보았다.
“다시 시작했네요.”
리즈가 눈을 떴다.
“당연하죠.”
모로가 말했다.
“십 분은 여기 계세요.”
“싫어요.”
“오 분.”
“삼 분.”
“칠 분.”
“마송보다 협상을 잘하네요.”
“국가보다 고집 센 환자들을 상대하거든요.”
리즈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칠 분 뒤 회의실로 돌아갔다.
아무도 문서에 손대지 않았다.
켈라프는 그 부작위가 눈에 보이게 해놓았다. 종이는 중앙에 쌓아두었고 펜은 따로 놓였으며 화면은 잠겨 있었다. 보클레르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귀르는 혼자 앉아 손을 맞잡고 있었다. 마송은 글을 쓰지 않는 것 역시 사람을 지치게 하는 활동임을 방금 깨달은 사람 같았다.
리즈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끝내죠.”
모로가 입을 열었다.
리즈는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나서 잘 거예요.”
“여기서요?”
“아니요. 내 방에서. 회의도, 전화도, 부속서도 없이.”
켈라프가 말했다.
“추가하겠습니다.”
다들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농담이 아니었다.
마지막 조항은 가장 단순한 것이 되었다.
‘본 협정의 서명 시점부터 최소 사십팔 시간 동안 리즈 바렌에게 어떠한 유용한 밤도 요청하거나, 계획하거나, 제안할 수 없다.’
소렐이 물었다.
“정말로 제안까지요?”
켈라프가 대답했다.
“흔히 가장 위험한 동사니까요.”
리즈는 조약보다 먼저 마음속으로 그 조항에 서명했다.
최초의 서명
그들은 처음부터 조약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최종 제목은 이랬다.
‘오렌의 예비 구성 및 자율 경계 보호에 관한 브레스트 협정.’
마송이 얻어낸 것은 이것이었다. 문서 맨 위에 조약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 것. 켈라프가 얻어낸 것은 더 많았다. 다른 모든 곳에서 프랑스는 자기 자신이 아닌 무언가에 의무를 지고 있었다.
문서는 군데군데 여전히 보기 흉했다. 외부 보장과 전략적 유보, 아직 말투를 찾지 못한 프랑스의 의무들이 있었다. 보클레르는 붙잡는 데 쓸 수 있는 단어 몇 개를 남겼다. 켈라프는 거부하는 데 쓸 단어들을 다른 곳에 박아 넣었다. 소렐은 리즈의 몸이 핵심 조항이 되는 것을 막았다. 모로는 휴식을 문서에 넣었다. 타르디외와 브레송은 법 한가운데 물질을 남겨두었다. 케이슨과 모듈, 연결부, 안전선, 전력 공급, 중단 기준, 새벽 세 시에 펌프를 수리할 수 있는 사람들.
마레스코는 짧고 거의 메마른 문장 하나를 지켜냈다.
‘보호 대상이 사람인지, 경계인지, 공화국의 이익인지 명시하지 않은 채 어떠한 보호 명령도 내릴 수 없다.’
리즈는 세 단어를 모두 남겨달라고 했다. 매번 무엇이 앞서는지 보고 싶었다.
서명은 국기 없는 방에서 이루어졌다.
사진사도, 발표문도, 역사적인 펜도 없었다. 뚜껑을 잃어버린 마송의 검은 펜을 빌렸을 뿐이다.
세귀르는 프랑스 공화국을 대표해 특별 위임을 받아 서명했다. 리즈는 그 세부 사항을 묻지 않았다. 보클레르는 엘리제궁 대표이자 대통령에게 전달할 정치적 보증인으로 연서했다. 켈라프는 당사자가 아니라 법률대리인으로 서명했다. 마송은 부속서에 약식 서명했다. 모로는 별도 의료 문서에 서명했다. 소렐은 과학 부속서에 서명했다.
그러고는 모두가 리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마련된 문구를 마지막으로 읽었다.
‘오렌의 예비 구성을 발의한 프랑스 시민 리즈 바렌.’
불완전한 문장이었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창립자도, 소유주도, 자원도, 여왕도 아니었다.
시민이라고 했다.
지금으로서는 페이지 위에서 가장 단단한 단어였다.
리즈는 서명했다.
이름이 조금 떨린 채 적혔다.
Lise Varenne.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브레스트 조약이라 불리지 않던 문서는 아홉 쪽과 부속서 세 건, 자필 유보 사항 두 건, 누구도 기록으로 남길 이유가 없는 모두의 피로 위에 서 있었다.
보클레르는 사본 하나를 챙겼다.
“파리에서 정식으로 승인해야 합니다.”
켈라프가 말했다.
“서명만으로도 이미 구속력이 있습니다.”
“반대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속으로는 했죠.”
“변호사님, 나는 말하지 않는 생각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제가 바쁜 겁니다.”
세귀르는 리즈의 사본을 들로네에게 주었다.
“18호실. 임시 금고. 켈라프 변호사에게 사본 전달.”
리즈가 말했다.
“안 돼요.”
들로네가 멈췄다.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내 사본은 내가 갖고 있을 거예요.”
마송이 말을 꺼냈다.
“보관상의 이유로…”
켈라프가 그를 바라보았다.
마송은 입을 다물었다.
들로네가 서류를 리즈 앞에 내려놓았다.
단순한 동작이었다.
그런데 기대 이상으로 마음이 놓였다.
리즈는 문서를 보물처럼이 아니라, 아직 뜨거워서 나쁜 손안에서 식게 두어서는 안 되는 금속판처럼 품에 안았다.
밖은 완전한 밤이었다.
방으로 돌아갈 차를 마련해주겠다고 했다.
리즈는 걷겠다고 했다.
모로가 반대했다.
소렐도 반대했지만 목소리는 더 작았다.
그들은 내부 회랑을 지나는 짧은 경로를 허락했다. 들로네가 앞에, 소렐이 리즈 옆에, 코트를 어깨에 걸친 켈라프가 뒤에, 세귀르가 조금 더 멀리 걸었다. 보클레르는 오지 않았다.
선거가 보이는 창문 앞을 지나다 리즈가 멈췄다.
오렌 최초의 케이슨들, 그날 조립된 실험 구역이 검은 물에 낮게 떠 있었다.
투광등이 케이슨 위에 흰 띠와 두꺼운 그림자를 그렸다. 안전선은 아직 다 긋지 못한 획처럼 물속으로 떨어졌다. 모두 보기 흉하고 임시적이며 논쟁의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더는 프랑스의 것만도, 완전히 다른 무언가도 아니었다.
둘 사이의 것. 가장자리에 선 것.
소렐이 물었다.
“후회해요?”
리즈는 협정문을 품에 단단히 안았다.
“아직은요.”
“신중하네요.”
“정직한 거예요.”
나중에 18호실로 돌아온 리즈는 검은 수첩 옆에 협정문을 내려놓았다.
수첩은 더 작아 보였다.
협정문은 더 연약해 보였다.
신발 끈도 풀지 않은 채 벗고 침대에 앉았다. 그러고는 마리안에게 전화했다.
언니는 두 번째 신호에 받았다.
“그래서?”
리즈는 책상 위의 두 물건을 바라보았다.
수첩.
협정문.
서로 다른 글씨로 두 번 적힌 오렌이라는 이름.
“뭔가에 서명했어.”
마리안이 숨을 들이쉬었다.
“심각한 거야?”
“응.”
“널 지켜주는 거야?”
리즈는 시간을 두었다.
건물 몇 채 너머 선거에서는 회색 케이슨들이 아직 세계에 속하지 않은 이름을 처음으로 짊어지고 있었다. 방 안에서는 자기 몸이 그 어떤 조약보다 강한 권위로 잠을 요구했다. 문서 안에서는 프랑스가 모든 것을 당장 되찾지는 않는 데 동의했다.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충분하지 않은 일이었다. 거짓말하지 않는 하루가 내줄 수 있는 최대치인지도 몰랐다.
“내가 살아서 확인해야 할 의무를 지우는 것.” 리즈가 말했다.
마리안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그럼 자.”
리즈는 미소 지었다.
“다들 참 독창적이 되어가네.”
“그래도 자.”
통화를 마친 뒤 리즈는 검은 수첩을 펼쳤다.
오렌이라는 단어 아래에 덧붙였다.
‘조약은 누구도 구하지 않는다. 다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장소를 만들 뿐이다.’
문장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그 아래에 썼다.
‘내일이면 누군가 들어오려 할 것이다.’
그다음 불을 껐다.
제19장
희소한 시민권
첫 번째 명단
다음 날 아침, 벌써 누군가 들어오고 싶어 했다.
아직 온 세상은 아니었다. 탁자 위에 놓인 이름은 스물일곱 개뿐이었다. 직무, 보안 인가, 요청한 접근 권한, 그리고 ‘사유’라는 제목의 칸이 딸려 있었다.
리즈는 그 칸이 몹시 싫었다.
물론 왜 필요한지는 알았다. 누가 오는지, 무엇 때문에 오는지, 어떤 도구와 능력을 갖추었는지, 무슨 권리로 오는지, 세계의 한 조각을 떼어 가지 않고 떠날 수 있는 사람인지를 알아야 했다.
하지만 사유라는 칸은 사람들을 오렌이 써먹을 용도로 축소했다.
리즈는 명단을 읽었다.
타르디외, 브레송, 소렐, 모로, 켈라프, 들로네, 마레스코, 마송. 그 뒤로는 아직 모르는 이름들이 이어졌다. 용접공들, 간호사, 밸러스트 전문가, 수도·에너지 기술자, 요리사, 선원들, 보안 요원들, 전기기사, 물류 담당자.
모두 합리적으로 보였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지난 몇 주 동안 합리성은 수많은 모습을 취할 줄 알게 되었다. 개선된 방, 팔찌, 의료 기록, 신중한 이송, 신중한 조약, 신중한 명단. 합리성은 언제나 깨끗이 씻은 손으로 다가왔다.
세귀르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오른쪽에는 켈라프가 있었다.
보클레르는 파리에서 화면으로 참석했다. 배경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하룻밤 사이 다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수도가 그를 말끔히 다려놓은 것 같았다.
소렐은 아무 즐거움 없이 커피를 마셨다.
타르디외는 서서, 종이가 자신에게 사과라도 해야 한다는 듯 명단을 거꾸로 읽었다.
“앞으로 마흔여덟 시간 동안 필요한 출입 명단입니다.” 마송이 말했다.
“출입.” 리즈가 되풀이했다.
“거주도, 소속도, 시민권도 아닙니다.”
“제가 묻기도 전에 대답하네요.”
“배우고 있으니까요.”
켈라프가 펜을 들었다.
“어제 체결된 협정은 자율적인 사전 구축 구역을 만듭니다. 아직 주민을 만드는 건 아닙니다.”
“주민 없는 구역은 시설일 뿐이죠.”
“정확해요.” 소렐이 말했다.
마송이 코로 숨을 내쉬었다.
“주민 문제를 너무 서두르면 각국 외교 당국과 부처들, 유럽의 법률가들, 그리고 이 나라의 모든 논평가에게 괴뢰 미니국가니, 민간 치외법권 구역이니, 개인적 분리 독립이니 하는 말을 꺼낼 빌미를 줍니다.”
“어차피 그렇게 말할 거예요.” 켈라프가 말했다.
“그렇죠. 그러니 적어도 기사 제목까지 대신 써주지는 맙시다.”
리즈는 다시 명단을 들여다보았다.
엄밀한 의미에서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은 첫 번째 사람은 요리사였다.
이름: 줄리앙 아우아드.
사유: 구역 근무팀 식사 제공.
리즈는 그 줄을 가리켰다.
“왜 이 사람이죠?”
세귀르가 대답했다.
“구역에 남는 팀은 기지의 일반 급식 체계 밖에서 식사를 해결해야 합니다. 고립된 시설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고요.”
“무슨 일인지 알고 있나요?”
“아니요.”
“그럼 자기가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들어오는 거군요.”
“첫날부터 모든 정보를 아는 상태로 들어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보클레르가 말했다.
탁자 끝에 있던 켈라프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 표현은 남겨두지 않는 편이 좋겠군요.”
보좌관은 한 손을 들었다.
“정보를 단계적으로 공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단계적으로 공개하는 것과 거짓말하는 것은 다릅니다.”
리즈가 물었다.
“거절할 수 있나요?”
“물론이죠.”
“무엇을 이해한 뒤에요?”
아무도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리즈는 자신도 무엇이 열릴지 알기 전에 받아들였던 수많은 것들을 떠올렸다. 출입증. 방. 팔찌. 하룻밤. 조항. 협정. 단계마다 사람들은 아직 제 크기를 드러내지 않은 일에 대해 합리적인 동의를 요구했다.
“그저 배치되었을 뿐인 사람들로는 나라를 세울 수 없어요.” 리즈가 말했다.
타르디외가 명단을 내려놓았다.
“밸러스트 패킹 하나 갈 줄 모르는 열성적인 자원봉사자들로 실험 플랫폼을 만들 수도 없죠.”
“그렇지 않다고 한 적 없어요.”
“그러면 업무 출입, 거주, 시민권을 구분해야 합니다.”
마송은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 제안이 바로 그겁니다.”
켈라프가 덧붙였다.
“그리고 그 구분은 법률가들만이 아니라 당사자들에게도 명확해야 합니다.”
소렐이 말했다.
“첫 번째 범주는 제한된 기술 또는 의료 업무입니다. 당사자는 와서 일하고 떠납니다. 오렌에 대한 정치적 의무는 없고, 보안과 기밀 유지 의무만 집니다.”
“두 번째는요?” 리즈가 물었다.
“사전 구축 거주.” 마송이 말했다. “며칠 이상 구역에 머물며 운영에 참여하고, 내부 제약을 받아들이지만, 오렌을 대표해 말하지는 않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는요?”
켈라프가 대답했다.
“시민권.”
그 단어가 남은 자리를 모조리 차지했다.
너무 일렀다.
그런데 벌써 와 있었다.
리즈는 전날 깃발을 떼어낸 자리에 남은 벽의 밝은 사각형들을 보았다. 다른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상징이나 지도, 혹은 잘못을. 한 장소가 저도 모르게 자기 상징을 만들어내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궁금했다.
“오늘 시민이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보클레르가 말했다.
“그래서도 안 됩니다.” 켈라프가 대답했다.
“그럼 의견이 같은 겁니까?”
“아마 정반대 이유에서겠죠.”
리즈가 물었다.
“저는요?”
준비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물건처럼 회의실 한가운데 떨어졌다.
“당신은 프랑스 시민입니다.” 세귀르가 대답했다.
“오렌에서는요?”
마송이 조심스럽게 협정문을 넘겼다.
“문서에는 당신이 사전 구축을 발의한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건 대답이 아니에요.”
켈라프가 펜 뚜껑을 닫았다.
“그래요. 당신은 아직 오렌의 시민이 아닙니다. 아주 잘된 일이죠.”
리즈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요?”
“당신이 최초의 시민이 되면 모든 것이 당신에게서 시작됩니다. 모든 것이 당신에게서 시작되면 모든 것이 다시 당신에게 돌아오죠. 정치적, 도덕적, 상징적, 정서적 압력이 전부요. 당신은 유일한 문이 되고, 이어서 자물쇠가 되고, 마침내 사람들이 복제하거나 부수려 드는 열쇠가 될 겁니다.”
“맞는 말이에요.” 소렐이 중얼거렸다.
“그럼 오렌은 시민 없이 시작하는 건가요?”
“오렌은 하나의 의무에서 시작합니다.” 켈라프가 말했다. “덜 매혹적이고, 더 건강하죠.”
리즈는 명단을 바라보았다.
스물일곱 명.
아직은 주민도 공동체도 아니었다. 잘해야 하나의 팀. 조직된 의존 관계였다.
“칸을 하나 더 넣으세요.” 리즈가 말했다.
마송이 눈을 들었다.
“어떤 칸이요?”
“‘정보를 제공받은 뒤 거절할 수 있음.’”
“번거로워집니다.”
“네.”
“모든 줄에요?”
“전부요.”
타르디외가 거의 미소를 지었다.
“요리사까지요?”
“요리사야말로요.”
이곳에서 자는 사람들
오후에 오렌 구역으로 첫 침대들이 들어왔다.
침대라는 말은 지나치게 후했다. 트럭으로 운반해 플랫폼의 안정된 부분에 내려놓은 흰색 모듈 두 동 안에 고정한 접이식 금속 야전침대였다. 매트리스는 새것이었고 창고 냄새가 나는 비닐에 싸여 있었다. 담요와 집게 조명, 수납 상자, 작은 의료용 가구, 임시 전열기 두 개, 물통, 소화기, 화학식 변기, 화이트보드가 설치되었다.
리즈는 화학식 변기 못지않게 화이트보드가 불안했다.
작은 공동체에서는 화이트보드가 금세 최초의 정부가 된다.
거기에는 누가 청소하고, 누가 자고, 누가 감시하고, 누가 먹고, 누가 잊었고, 누가 수리해야 하고, 누가 자리를 비워도 되는지가 적힌다. 거창한 헌장은 나중에 온다. 처음에는 끈으로 매달아놓은 검은 마커 하나가 권력을 쥔다.
리즈는 늦은 오후에 구역으로 올라갔다.
모로가 반대했다.
켈라프는 반대한다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소렐은 타협안을 내놓았다. 삼십 분, 실험 금지, 서서 하는 회의 금지, 한 번에 세 명 넘는 상대와 대화 금지.
리즈는 삼십 분을 받아들였고 세 명 제한은 곧바로 잊었다.
임시 연결교가 발밑에서 떨렸다. 노란 난간이 설치된 완만한 경사로가 부두와 플랫폼을 이었고, 양쪽 끝에는 선원이 두 명씩 서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 것은 없었다. 아직은 세계에 도전하는 것도 없었다. 구역은 물 위에 놓여 있었다. 전날 허가된 조정으로 무게를 일부 덜었을 뿐이었다. 일하기에는 충분히 안정적이었고, 모두에게 초안 위를 걷고 있음을 상기시키기에는 충분히 불안정했다.
들로네가 동행했다.
“당신이 떨어지면 모로가 저를 죽일 겁니다.”
“모로는 아무도 죽이지 않아요.”
“보기만 해도 충분한 눈빛이 있거든요.”
바람이 머리카락을 낚아챘다. 충분히 따뜻한 외투를 입지 않았다. 바다는 속이 빈 물건의 내부를 느끼게 하는 공허한 소리를 내며 부유 구조물을 가볍게 두드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서는 서로 다른 대답이 들렸다. 금속, 가로대, 판, 물, 완충장치, 결박 띠.
리즈는 생각했다. 나라는 언제나 우리가 무엇을 딛고 걷는지 들려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플랫폼에서는 타르디외가 배전반을 고정하는 기술자 두 명을 지휘하고 있었다. 브레송은 센서 라인 옆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한 선원은 식기 상자를 옮겼다. 요리사 줄리앙 아우아드는 너무 큰 방한복 안에 파란 앞치마를 두르고 있어 알아보기 쉬웠다. 아직 주방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전혀 없는 모듈 안에 식재료 통을 줄지어 놓고 있었다.
리즈는 그에게 다가갔다.
들로네는 대화 상대의 수를 세는 시늉을 하다가 포기했다.
“아우아드 씨?”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서른다섯쯤 되었을까. 짧은 수염, 빠른 손, 주제넘어 보이지 않으면서 상황을 파악하려는 눈.
“바렌 씨.”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적어도 어느 정도는.
“설명은 들었나요?”
“민감 구역의 격리 부서에 배치될 거라고 들었습니다. 거절할 수 있다고도요. 받아들이면 임시 서약서에 서명하게 되고, 처음부터 모든 정보를 받지는 않지만, 세미나 참석자들 샌드위치나 만들러 가는 건 아니라는 정도는 알게 될 거라고 했습니다.”
외워둔 지시를 애쓴 흔적이 역력할 만큼 정확하게 읊었다.
“그래서 받아들였어요?”
“네.”
“왜요?”
그는 식재료 통을 본 뒤 바다를 바라보았다.
“재난 현장 주방에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생마르탱섬의 사이클론 때도 있었고, 홍수 때 낭트의 임시 숙소에서도 일했죠. 방역 캠프에도 있었는데, 그건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들로네가 대답했다.
“방금 말했군요.”
“그러네요.”
줄리앙 아우아드는 다시 리즈에게 시선을 돌렸다.
“모두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곳일수록 사람들을 제대로 먹이는 일을 자주 잊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더 빨리 멍청해지죠.”
리즈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건 절차가 아니었으므로 곧바로 경계했다.
“여기서 자고 싶어요?”
“오늘 밤은요. 들은 바로는 사흘입니다. 그 뒤는 두고 봐야죠.”
“가족은요?”
“격주로 딸을 돌봅니다. 이번 주는 아이 엄마 집에 있어요.”
담담한 대답이었지만, 그 말은 부재중인 아이와 양육 일정표, 어딘가의 방 하나, 오렌에 아무것도 빚지지 않은 삶을 플랫폼 안으로 데려왔다. 리즈는 구역이 갑자기 넓어지는 것을 느꼈다. 사람을 한 명 불러올 때마다 그 뒤로는 아무것에도 서명하지 않으면서 무게의 일부를 짊어질 사람들이 따라왔다.
“원하면 떠날 수 있어요.” 리즈가 말했다.
그는 들로네를 바라보았다.
“들었습니다.”
“저도 말해두는 거예요.”
남자는 마음이 움직인 듯했다. 리즈의 권위가 다른 사람들보다 커서가 아니었다. 그를 필요로 하는 장소 자체가 건네는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의료 모듈 근처에서는 예전에 리즈에게 팔찌를 채웠던 간호사가 라벨을 붙인 서랍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름은 카미유 루도였다. 리즈는 전에는 그녀를 거의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불쾌한 물건을 들고 다가오는 손으로 보았을 뿐이었다. 이곳 플랫폼에서 카미유는 크기별로 붕대를 정리하고, 벽에 손 소독제 용기를 고정하고, 주머니에는 반쯤 으깨진 시리얼 바를 넣어둔 사람이 되었다.
“당신도 여기서 자나요?”
카미유가 어깨를 으쓱했다.
“여러분이 한꺼번에 아프지만 않으면, 아마 안 잘 겁니다.”
“남으라고 하면요?”
“누구와, 어떤 조건에서 자는지, 기지 의무실에 있는 제 동료를 누가 대신하는지 물어봐야죠.”
“서약서는 읽었어요?”
“세 번요.”
“어땠어요?”
“당신 변호사가 사방에 조항을 덧붙이고 나서는 나아졌습니다.”
리즈가 미소 지었다.
“그런 재주가 있죠.”
카미유가 목소리를 낮췄다.
“바렌 씨, 한마디 해도 될까요?”
“네.”
“사람들은 아주 나쁜 이유로 여기 오고 싶어 할 겁니다.”
리즈는 기다렸다.
“좋은 이유로 오는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면 그 좋은 이유도 나빠질 거고요.”
의료 서랍 속에 넣어두기에는 너무 정확한 말이었다.
“정치를 해볼 생각이에요?”
“절대로요.”
“어쩌면 그게 자격일지도 모르겠네요.”
카미유는 웃고 나서 다시 라벨을 붙였다.
화이트보드에는 누군가 이렇게 써두었다.
‘첫째 날 밤 - 최소 인원만 체류.’
그 아래에는,
‘A 모듈 청소: 추후 결정.’
리즈는 마커를 들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한 번도 청소하지 않는 곳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뒤를 지나던 타르디외가 그것을 읽었다.
“철학입니까, 지시입니까?”
“시간 절약이죠.”
“불평이 나오겠네요.”
“잘됐네요.”
들로네는 전화를 받고 몇 걸음 떨어졌다가 돌아왔다.
“부두에서 찾습니다.”
“누가요?”
그가 잠깐 망설였다.
“나데주 르 고프입니다.”
그 이름은 고요한 방에 공구가 떨어진 듯 리즈를 때렸다.
경계에 선 나데주
나데주는 연결교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빌린 구명조끼를 어깨에 걸치고, 방문증을 목에 매단 채, 손에는 천가방을 들었다. 몹시 화가 난 얼굴이었고, 그 덕에 지난 이 주일 동안 리즈 곁에 모여든 대다수 사람보다 훨씬 안심이 되었다.
리즈가 처음 떠올린 생각은 고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정확히 욕망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걷어 올린 소매 아래 드러난 나데주의 맨팔, 분노로 다물린 입, 거울도 보지 않고 묶은 머리를 보자 리즈 안의 무언가가 우스울 만큼 솔직하게 반응했다. 저기, 그녀의 잠을 위해 준비되지 않은 몸이 있다. 피로에 맞춰 개선되지도, 어떤 절차로부터 알맞은 거리에 배치되지도 않은 몸. 화내고, 머리가 흐트러지고, 두 발로 서 있을 자유가 있는 몸.
리즈는 반초쯤 부끄러워하다가, 살아 있는 몸이 다른 살아 있는 몸을 데이터가 아닌 방식으로 알아보았다는 이유로 사과해야 한다고 믿게 만든 자들이야말로 부끄러워해야 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데주 옆에서 보안 장교가 태블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해당 항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아는 사람 특유의 경직된 태도였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좀 알 수 있을까요?” 나데주가 물었다.
리즈는 너무 빨리 연결교를 내려갔다.
들로네가 말했다.
“천천히 가세요.”
리즈는 대답하지 않고 속도를 늦췄다.
“안녕하세요, 나데주.”
“아, 아직도 인사나 주고받을 단계인가 보죠?”
그녀는 플랫폼과 부유 구조물, 난간, 흰색 모듈을 차례로 본 뒤 리즈를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뭐예요?”
전날부터 층층이 쌓인 온갖 용어를 단숨에 뚫고 지나가는 질문이었다.
“복잡해요.”
“그건 알아요. 모르는 남자 둘이 직장까지 찾아와서, 거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야 한다고 하고, 아무도 건물 이름을 말하지 않는 시설로 데려가려 들면, 새 일정 관리 도구 교육을 시켜주려는 건 아니겠거니 하죠.”
리즈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런 식으로 데려오라고 한 적 없어요.”
들로네가 바로잡았다.
“르 고프 씨를 데려온 게 아닙니다. 연락한 겁니다.”
“내 직장과 집 주소와 딸 이름까지 아는 사람들이요.” 나데주가 말했다. “제가 사는 데서는 그걸 예의 바르게 끌고 왔다고 해요.”
리즈 뒤에 도착한 켈라프가 말했다.
“맞는 말입니다.”
태블릿을 든 장교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나데주가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누구세요?”
“정중한 말로 아무 짓이나 저지르는 걸 막으려는 사람입니다.”
“애쓰시네요.”
리즈가 물었다.
“왜 이 사람에게 연락했죠?”
들로네가 대답했다.
“산업 또는 국가 장치에 편입되지 않은 최초 목격자 중 한 명이기 때문입니다. 정식 지시 없이도 효과적으로 거짓말했기 때문이고, 본 것을 팔아넘기려 들지 않고 계속 일했기 때문입니다. 적대 측 보안 보고서 두 건에도 취약한 접근 지점일 가능성이 있는 인물로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나데주가 눈을 깜박였다.
“취약한 접근 지점?”
“당신 말입니다.” 켈라프가 쓸데없이 부드럽게 돌리지 않고 말했다.
“멋지네요.”
“그래서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들과 홀로 마주치게 두는 것보다, 우리가 상황의 일부를 설명하는 편이 낫습니다.”
나데주는 가방을 움켜쥐었다.
“난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았어요.”
“바로 그래서요.” 리즈가 말했다.
자기 입에서 나온 그 말을 듣는 순간, 리즈는 조금 혐오스러웠다. 바로 그래서.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일이 그 말로 정당화되었던가. 리즈가 다시 말했다.
“돌아가도 돼요.”
“지금요?”
“네.”
나데주는 장교를 보고, 들로네를 보고, 켈라프를 보았다.
“정말요?”
켈라프가 대답했다.
“정말입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떠나기 전에 정보 면담과 최소한의 보호 조치를 제안할 겁니다. 면담을 거부해도 됩니다. 보호도 거부할 수 있지만, 그건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군요.”
나데주는 플랫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남으면요?”
“장식용 목격자로 남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리즈가 말했다.
“난 산업 청소는 할 줄 알아도 당신들 그거 다스리는 법은 몰라요.”
“잘됐네요. 이걸 다스리는 법은 아무도 모르거든요.”
나데주가 메마르게 웃었다.
“그게 안심시키려는 말이에요?”
“아뇨.”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플랫폼에서 누군가 모듈 문을 닫았다. 소리가 물질적인 경고처럼 울렸다. 그들이 무슨 결정을 내리든 벌써 사람들이 나사를 조이고, 정리하고, 연결하고, 물을 데우고, 잘 곳을 고르고 있었다.
세귀르가 뒤이어 도착했다.
젖은 부두 위에서도 그의 걸음걸이는 늘 회의가 시작될 것을 예고하는 듯했다. 나데주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결정하는 사람이에요?”
“혼자는 아닙니다.”
“원래부터 그랬어요, 아니면 최근에 개선된 거예요?”
리즈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세귀르는 훌륭하게도 무슨 뜻인지 설명해달라고 하지 않았다.
“아마 둘 다겠죠.”
켈라프가 말했다.
“르 고프 씨를 정보 접근 대상, 외부 보호 대상, 임시 거주자, 혹은 다른 지위 가운데 어디에 둘 것인지가 문제입니다.”
나데주가 손을 들었다.
“르 고프 씨는 여기 있어요.”
“미안합니다.”
“그리고 르 고프 씨는 직장과 평온을 잃게 될지, 아니면 그냥 오전만 날리게 될지 알고 싶네요.”
들로네가 대답했다.
“직장은 보호받을 겁니다.”
“누구한테요?”
“국가가 보호합니다.”
“별로 안심이 안 되는데요.”
“안전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좋네요.”
리즈는 나데주를 바라보았다.
14번 작업동의 새벽이 다시 보였다. 청소 카트, 떨어졌다가 도로 내려앉은 시험용 추를 보고 내뱉은 욕설, 부은 손가락들, 아무 의식 없이 받아들인 거짓말. 명단이 ‘능력’이라 부르기 좋아하는 의미에서 나데주에게 희소한 능력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다른 것이 있었다. 기적이 아직 작업장의 이상 현상처럼 보이던 순간 그 자리에 있었고, 리즈를 하나의 사건으로 만들어버리지 않았다.
“들어올 수 있게 해주세요.” 리즈가 말했다.
세귀르가 물었다.
“어떤 자격으로요?”
필요한 질문이었다.
그래서 더 견디기 힘들었다.
“이미 이 비밀의 일부를 짊어지고도 이득을 취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자격으로요.”
서류철을 팔에 낀 채 막 도착한 마송이 마지막 말을 들었다.
“그런 범주는 없습니다.”
“그럼 하나 만들어야겠네요.”
“감정에 따라 만든 범주는 좋게 늙지 않습니다.”
나데주가 마송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문을 닫는 단어 하나당 돈을 받는 사람 같네요.”
연결교 위에 있던 타르디외가 말했다.
“이번에도 한 점 땄군요.”
마송은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켈라프가 메모했다.
“자동 거주권은 없는, 초청된 보호 목격자 지위를 만들 수 있습니다.”
“뭐에 초청됐는데요?” 나데주가 물었다.
리즈에게 준비된 대답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어디서 왔는지 내게 상기시키는 일에 초대받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영리한 사람들이 현실의 유일한 소유자라고 믿지 못하게 막는 일에 초대받았다고. 직함이 있다고 해서 자기가 더럽힌 곳을 청소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는 세계 최초의 나라에서 걸레질하는 일에 초대받았다고.
리즈는 더 단순하게 말했다.
“우리가 멍청해지지 않도록 도울 마음이 있는지 결정할 수 있을 만큼 보는 일에요.”
나데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홍보 정말 못하네요.”
“네.”
“그래도 여기 온 뒤 처음 듣는 솔직한 말이에요.”
그녀는 연결교를 바라보았다.
“봐도 돼요?”
보안 장교가 말을 꺼냈다.
“먼저…”
켈라프가 잘랐다.
“사전 고지, 적절한 서명, 방문 후 떠날 가능성. 그 순서입니다.”
나데주가 숨을 내쉬었다.
“당신들 이거, 참 대단한 나라네요.”
리즈가 대답했다.
“아직 존재하지 않아요.”
“시작부터 세군요.”
사람을 가르는 헌장
저녁이 되자 그들은 최초의 거주 헌장을 작성했다.
헌법은 아니었다. 모두가 그 말을 힘주어 되풀이했다. 그 기세는 오히려 ‘헌법’이라는 단어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 입증했다.
일행은 기술 회의실로 돌아왔다. 리즈는 나데주가 설명을 듣고 비밀 유지 서약을 한 뒤 회의 전반부에 참석하도록 했다. 나데주는 모든 쪽을 낮은 목소리로 읽고, 크고 공격적으로 보일 만큼 힘찬 글씨로 서명했다. 그리고 커피가 든 종이컵을 들고 탁자 끝에 앉았다. 권력자들이 자기 물건을 제대로 치우는지 확인하려는 사람 같았다.
헌장은 당연한 사실 세 가지로 시작했다. 그러나 흰 종이에 검은 글자로 적히자 더는 당연하지 않았다.
구속력이 있는 모든 문서는 그것에 구속되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실질적 직무, 확인된 기여, 또는 인정된 보호 사유 없이는 누구에게도 거주를 허용할 수 없다.
누구도 그 직무로만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
켈라프는 휴식권, 의료 접근권, 배정되지 않은 시간, 그리고 명시된 생명 위급 상황이 아닐 때 철회할 권리를 덧붙였다. 모로는 비상 상황을 사후에 재검토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마송이 한숨을 쉬었다.
“앉아서 글 쓰는 분치고 숨을 참 많이 쉬네요.” 나데주가 말했다.
그리고 그 단어가 찾아왔다.
시민권.
세귀르는 미루고 싶어 했다. 보클레르도 그랬다. 켈라프는 거부했다.
“지금 쓰지 않으면 최초의 모집 관행이 시민권을 정의하게 됩니다.”
리즈는 빈 종이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 단어는 신분증을 닮지 않았다. 회색 플랫폼 끝에 난 아주 작은 문을 닮았다. 자신이 왜 그 안에 들어가야 하는지 저마다 잘 아는 유능한 사람들이 그 문을 둘러싸고 있었다.
“쓸모가 있다는 이유로 오렌 시민이 되어서는 안 돼요.” 리즈가 말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시민이 되죠?” 타르디외가 물었다.
“아직 모르겠어요.”
그 무지가 회의실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 헌장이 스스로를 진리로 착각하지 못하게 했다.
켈라프는 시민권은 돈으로 살 수 없고, 학위를 근거로 부여할 수 없으며, 정치적 호의로 베풀거나, 일회적인 영웅 행위로 획득하거나, 리즈와 가깝다는 이유로 얻을 수 없다고 적었다.
“그럼 난 끝났네요.” 나데주가 말했다.
“시민권은요.” 리즈가 대답했다. “커피와 심술궂은 말은 전망이 좋아 보이네요.”
나데주는 미소를 지었다가 한 줄에서 마송을 멈춰 세웠다.
“눈에 띄지 않는 공동 업무. 이건 남겨두세요.”
“왜죠?”
“자기가 더럽힌 걸 절대 치우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곳은, 그 사람들이 남들은 자기 뒤치다꺼리나 하려고 태어났다고 믿는 곳이 되기 쉽거든요.”
아무도 그보다 나은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함정은 여전히 입을 벌리고 있었다. 헌장은 자신의 삶을 증명할 수단이 없는 사람들에게 증거를 요구하게 될 터였다. 정직한 추천인이라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는 나라를 떠난 사람들에게 추천서를 내놓으라고 하게 될 터였다.
“좋은 사람들을 거절하게 되겠죠.” 리즈가 말했다.
“그래요.” 켈라프가 대답했다.
“받아들인 사람들 중에는 우리를 실망시키는 이들도 있을 거고요.”
“당연하죠.”
나데주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면 희소하다는 그거, 무슨 소용이에요?”
리즈는 세귀르를 보았다. 그는 너무 잘 이해하고 있었다. 프랑스 공화국에도 시험과 학교와 전과 기록이 있었고, 탁월함을 들어올 권리와 우아하게 혼동하는 방식들이 있었다. 오렌은 그것을 더 순수한 형태로 되풀이할 위험이 있었다.
“칭찬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늦추는 데 쓸모가 있어요.” 리즈가 말했다.
마송은 그건 법적 기준이 아니라고 중얼거렸다.
“그래요.” 리즈가 대답했다. “기준을 세우는 이유죠.”
첫 번째 거절
헌장이 완성되기도 전에 첫 번째 거절이 찾아왔다.
파리에서 온 것이었다.
보클레르는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내용을 전달했다. 아르망 델쿠르. 교량·도로 분야의 고급 엔지니어이자 전략혁신기관의 전임 원장. 핵심 기반시설 전문가. 막대한 인맥의 소유자. 산업 협력 조정관으로 오렌 사전 구축에 즉시 합류하겠다고 제안했다.
“대단히 유능한 사람입니다.” 보클레르가 말했다.
그의 말투가 벌써 뒷이야기를 예고했다.
그때까지 문 근처에 서 있던 들로네가 발언을 요청했다.
거의 없는 일이었다.
“그 봉투를 맡았던 외부 컨설턴트가 델쿠르의 회사 소속이었습니다.”
침묵이 방을 잘라놓았다.
리즈는 먼저 아침 식사 쟁반을 떠올렸다. 과일 퓌레. 크라프트지. 미끼로 전락한 아버지의 글씨.
보클레르는 너무 빨리 대답했다.
“델쿠르는 여러 조직을 이끕니다. 그가 직접 그 시도를 지시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 시도가 유용하다고 여기지 않았다는 증거도 없죠.” 켈라프가 말했다.
타르디외는 그 이름을 알았다.
“빠르고 영리해요. 이미 내려진 결정에 기술적 필연성의 외양을 씌우는 데 매우 유용한 사람이죠.”
리즈가 물었다.
“그 사람은 자기 효율성 말고도 믿는 게 있나요?”
타르디외는 시간을 두고 답했다.
“모르겠어요.”
“그럼 출입은 안 돼요.”
말이 너무 빨리 튀어나왔다. 리즈도 느꼈고, 모두가 느꼈다.
보클레르가 팔짱을 꼈다.
“오렌이 현실 세계와 연줄이 있는 사람을 모조리 거절한다면 무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아는 사람을 모조리 받아들이면 태어나지도 못해요.”
리즈는 들로네를 보았다.
“이미 제 꿈으로 들어오려 한 사람을 받아들인다면, 이름을 가질 자격조차 없고요.”
세귀르는 그나마 덜 나쁜 출구를 찾아냈다. 물리적 출입은 허용하지 않은 외부 청문, 사전 이해관계 신고를 조건으로 하는 방안이었다. 켈라프는 보고서를 임시 기관에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보클레르는 받아들였다.
출입 불허. 리즈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남자에게 문을 닫았다. 그를 단죄한 것도, 인간으로서 심판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안 된다고 했을 뿐이다. 분명 실재하는 차이였다. 그러나 무게는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탁자 끝에 있던 나데주가 물었다.
“왜 거절당했는지 그 사람도 알게 되나요?”
마송이 대답했다.
“해당 구역은 그런 유형의 직무에 개방되어 있지 않다고 알릴 겁니다.”
“그러니까 모르는 거네요.”
“뭐라고요?”
“왜인지 모르는 거잖아요. 선 하나가 자기를 밖에 남겼다는 것만 알겠죠.”
리즈는 나데주를 바라보았다.
나데주는 의기양양해 보이지 않았다. 깨끗한 문구로 닫힌 문들을 아는 여자의 얼굴이었다.
“전부 말하지 않고도 진실을 말할 수 있어요.” 소렐이 제안했다.
켈라프가 적었다.
‘출입·거주·참여의 모든 거부 결정에는 당사자가 이해할 수 있는 사유가 제시되어야 한다. 단, 구역 및 관계자의 보호를 위해 엄격히 필요한 기밀은 예외로 한다.’
“너무 길어요.” 나데주가 말했다.
“그래요.” 켈라프가 대답했다. “하지만 쓸모는 있죠.”
밤이 깊어갔다. 이제 오렌에는 첫 번째 명단과 임시 헌장, 요리사, 간호사, 벌써부터 그들과 같은 말투를 거부하는 보호 목격자, 그리고 연결교에 발을 올리기도 전에 바깥에 남겨진 영리한 남자가 있었다.
희소한 시민권은 아직 종이 한 장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벌써 누군가를 아프게 했다.
리즈는 혼자 잠시 플랫폼으로 올라갔다. 모로는 마지못해 허락했고, 등 뒤에는 들로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바람이 더 거세졌다. A 모듈에서는 줄리앙 아우아드가 양파와 쌀과 후추 냄새가 나는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카미유 루도는 의료용 침대 위에 조명을 고정했다. 타르디외는 너무 짧은 케이블에 대고 욕을 했다. 브레송은 상자에 앉아 사과를 먹으며, 센서들이 곧 말을 걸기라도 할 듯 바라보았다.
나데주는 화이트보드 곁에 서 있었다.
리즈가 쓴 문장 아래에 한 줄을 덧붙여두었다.
‘청소 당번표 만들 것. 예외 없음.’
리즈가 읽었다.
“남을 거예요?”
“오늘 밤은 안 돼요. 딸도 있고, 아침에는 알람도 울리고, 당신네 떠다니는 공사장에서 자고 싶지도 않아요.”
“내일은요?”
“내일은 다시 올지도 모르죠.”
“왜요?”
나데주는 마커 뚜껑을 닫았다.
“이 보드를 중요한 사람들한테 맡겨두면, 사흘 뒤에는 쓰레기봉투가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를 테니까요.”
리즈는 웃었다.
웃음은 기분을 낫게 해주었지만 이내 허물어졌다.
리즈는 연결교와 부두, 아직 드나들 수 있는 세계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경계가 작업선에 불과했다. 곧 사람들은 서류와, 베푼 도움과, 진실한 고통과, 눈부신 이유들을 들고 건너편에서 기다릴 것이다. 한 사람을 더는 문제로 취급하지 않게 하려고 태어나는 오렌은 그들에게 예나 아니요로 대답해야 할 터였다.
그날 밤 리즈는 희소하다는 말이 귀중하다는 뜻일 수도 있고, 단지 이런 뜻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문을 닫는 더 고상한 방법을 찾아냈다.
리즈는 마커를 들어 나데주의 메모 아래에 썼다.
‘모든 국경은 자신이 누구에게 봉사하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나데주가 어깨너머로 읽었다.
“예쁘네요.”
“마음에 안 들어요?”
“전 쓰레기봉투가 더 좋아요.”
그래도 리즈는 그 문장을 지우지 않았다.
그리고 더 작은 글씨로 덧붙였다.
‘그리고 누구를 지치게 하는지도.’
제20장
최고의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
요청의 상자
세계는 군중으로 몰려오지 않았다.
서류철로 도착했다.
처음에는 리즈가 굳이 알고 싶어 하지 않은 프랑스 외무부의 경로를 통해 세 건이 들어왔다. 그다음에는 유용한 인재의 정보만 전달한다고 주장하는 각 부처 장관실을 통해 아홉 건이 왔다. 이어서 스물일곱 건. 긴급성, 국적, 분야, 예상 보안 인가, 가족을 통한 압박 위험, 포섭 위험, 이미지 훼손 위험에 따라 분류되어 있었다.
위험들은 상상력이 대단했다.
부두에서 가장 가까운 건물 안에 전용실이 설치되었다. 아직 오렌 안은 아니었다. 커다란 탁자, 보안 화면 두 대, 금고, 그리고 바다를 색채로밖에 볼 수 없을 만큼 높이 달린 창이 있었다. 마송은 그곳을 적격성 심사실이라고 불렀다. 퇴근 후 하루 두 시간씩 올 수 있게 된 나데주는 사람 상자라고 불렀다.
리즈는 나데주의 이름이 더 좋았다.
탁자 위에 놓인 것이 무엇인지 더 잘 말해주었다. 지원서도 자원도 아니었다. 사람들이었다.
그날 아침 처음 펼친 서류는 중부 유럽의 한 프랑스 대사관에서 왔다. 마흔 살의 전력망 엔지니어. 폭격 이후 전력 복구 전문가. 프랑스어, 영어,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 구사. 통행금지령 아래 변전소들을 수리한 경험. 여덟 살 아들을 위한 보호를 요청하고 있었다. 편지는 짧았다. 위대함도, 운명도, 신세계도 말하지 않았다. 전기가 다시 들어오리라고 아무도 믿지 않는 동네에 불을 지켜낼 줄 안다고만 적었다.
“이런 사람이 진짜 일할 줄 아는 사람이죠.” 타르디외가 말했다.
두 번째 서류는 마르세유의 대형 병원에서 왔다. 재난 경험이 있는 정형외과 의사. 이동의료팀 소속. 평판은 탁월했다. 민간 기부자들이 정한 우선순위를 거부한 탓에 병원 경영진과 격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는 오렌에는 의식보다 먼저 현장 의료가 필요할 것이라고 썼다.
탁자 끝에 있던 모로가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틀린 말은 아니군요.”
세 번째는 탕헤르의 부두 노동자였다. 중요한 사람에게서는 아무도 추천받지 않았지만,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서는 모두 추천받았다. 현장반장 세 명, 도선사 두 명, 노동조합원 한 명, 선원의 미망인 한 명, 프랑스 퇴역 장교 한 명이 추천서를 썼다. 많은 부두 책임자보다 화물과 사람, 사고와 파업일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시민권을 요구하지 않았다. 엔지니어들이 항구를 그림이라고 착각하지 못하게 막을 줄 아는 사람이 오렌에 필요한지 보고 싶다고 했다.
나데주가 탁자에 팔꿈치를 괴었다.
“이 사람은 만나보고 싶어요.”
마송이 기침했다.
“르 고프 씨, 호감으로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받아들이자고 안 했어요. 보고 싶다고 했죠. 당신들이 이력서를 좋아할 때는 다들 그걸 전문성이라고 부르잖아요.”
켈라프는 서류에서 눈을 들지 않았다.
“또 한 점 땄군요.”
마송은 다른 서류를 집었다.
리즈는 이름들이 하나씩 내려앉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 언어학자는 법이 의무를 지우는 사람들에게 더는 그 언어가 이해되지 않는 순간 폭력이 된다고 썼다. 한 기후학자는 연구소가 수치를 묻어버리기 전에 밖으로 빼냈다. 인양 케이블을 전문으로 하는 장인은 실수로 직업증명서와 함께 자기 손 사진을 첨부했다. 한 직업계 고등학교 교사는 아직 희소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이들도 오렌이 가르칠 것인지 물었다.
잘못 분류된 서류철 속에서 리즈는 기반시설 투자기금이 보낸 메모를 발견했다. 석 줄짜리 문서였다. 지나치게 깔끔하게 스캔되어 있었고, 오렌의 항만 활용 가능성에 대한 비공개 평가를 요청했다. 지원도, 출입도, 거주도 아니었다. 벌써 문을 찾는 관심의 냄새만 났다. 마송은 그것을 범위 외 요청으로 분류했고, 서류철은 유용한 인재들의 서류 아래로 사라졌다.
세계는 최고의 사람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벌써 나쁜 요청들도 보내고 있었다.
그 말이 경보처럼 또렷하게 리즈를 찾아왔다. 리즈는 ‘최고’라는 말이 싫었다. 무엇에 가장 좋은가. 누구의 기준으로. 언제까지.
화면 속 보클레르가 마침 말했다.
“대단히 뛰어난 인재들의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나데주가 코로 숨을 뿜었다.
“인재.”
“르 고프 씨…”
“아니, 계속하세요. 수집 중이니까.”
보클레르는 그 말에 머물지 않기로 했다.
“역사적인 기회입니다. 오렌이 가장 견실한 기술적 양심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프랑스에 의존하는 실험 기지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떠날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 끌어들이면요?” 리즈가 물었다.
침묵의 모양이 달라졌다.
리즈는 전력망 엔지니어의 서류를 들었다.
“이 사람은 그곳에서 불을 복구하고 있어요. 여기 오면 누가 대신하죠?”
“그 논리라면 아무도 떠날 수 없습니다.” 마송이 말했다.
“아뇨. 우리가 너무 빨리 자축하지 못하게 할 뿐이에요.”
창가에 앉아 있던 소렐이 팔짱을 꼈다.
“취약한 체계에서는 아직 그 체계를 붙들 줄 아는 사람들이 먼저 빠져나가죠.”
“고맙습니다.” 나데주가 말했다.
“격언이 아니었어요.”
“잘됐네요. 격언은 결국 벽에 붙으니까.”
리즈는 화이트보드를 바라보았다. 국경에 관한 문장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데주가 청소 당번도 덧붙였다. 그 밑에는 누군가 이렇게 써놓았다.
‘외부 출입 서류 - A 시리즈.’
벌써 이곳은 사람을 분류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분류하지 못한 것은 탁자 밑으로 떨어졌다.
일할 줄 아는 사람들
첫 면접은 실제 입국 없이 시작되었다. 연결교도, 악수도, 플랫폼 위의 얼굴도 없었다.
목소리, 때로는 영상, 툭하면 나빠지는 통신, 몇 초의 지연, 말을 지나치게 매끈하게 다듬는 통역사, 켈라프 앞에 펼친 서류 한 부, 마송 앞의 한 부, 들로네 앞의 한 부. 리즈는 면접 대상이 외교관이나 군인, 법률가, 고위 공무원이 아닐 때 나데주도 참석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어떤 자격으로요?” 마송이 물었다.
“누군가가 탁자 앞에서 스스로 작아지는 순간을 알아듣는 사람이라는 자격으로요.”
나데주는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의자 하나를 가져왔다.
탕헤르의 부두 노동자는 사미르 엘 암라니라는 이름이었다. 넓은 얼굴, 희끗희끗한 수염, 지나치게 밝은 셔츠. 화면 속 이미지가 되기를 거부하듯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프랑스어로 인사했다가 스페인어로 고쳐 말한 뒤, 스스로가 우스워 웃었다.
“서 있을 때 말을 더 잘한다고 합니다.” 통역사가 옮겼다.
“그럼 일어나세요.” 나데주가 말했다.
마송이 입을 반쯤 벌렸다.
사미르는 일어섰다.
모두 그의 호흡이 한결 편해진 것을 보았다.
그는 오렌을 유토피아처럼 말하지 않았다. 저장 구역을 몇 군데 계획하고 있는지, 허용 중량은 누가 결정할지, 모듈이 다시 무거워지기 시작하면 어떻게 알릴지, 부두 인력은 누가 훈련할지, 엔지니어의 허락 없이 누가 작업 중지를 외칠 권리를 가질지 물었다.
타르디외가 메모했다.
면접이 끝나자 그녀가 말했다.
“여기 있는 몇몇보다 먼저 이해했네요.”
“무슨 뜻인지는 알겠습니다.” 마송이 말했다. “하지만 행정 서류가 부족합니다.”
“뭐가 빠졌죠?”
“고등교육 학위. 기관 추천서. 예상 보안 인가가 불확실합니다. 노동조합 활동 경력에도 갈등이 많고요.”
나데주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럼 이 사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네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들었어요.”
리즈가 물었다.
“위험한 지시를 거부할 줄 아나요?”
타르디외가 대답했다.
“네.”
“그럼 서류가 부족한 게 아니에요.”
아무도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사미르 엘 암라니는 단기 보류로 분류되었다.
그 표현은 리즈를 아프게 했다. 단기 보류. 한 사람의 인생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적당한 크기의 상자에 넣어둘 수 있다는 듯한 말이었다.
다음 면접은 훨씬 매끄러웠다. 또렷한 목소리와 완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캐나다의 헌법학자는 당장 오기를 거절했다.
“보호 장치를 작성할 줄 아는 사람들이 모두 보호받는 장소로 떠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술한 법문만 남을 겁니다.”
그녀는 외부 협업을 제안한 뒤, 켈라프가 즉시 기록하게 한 규칙 하나를 말했다. 어떤 전문성도 그 자체로 거주권을 부여하지 않는다.
세 번째 면접은 더 짧았다.
스위스 억만장자가 가족 체류권을 받는 대가로 주거 모듈 세 동, 연구실 하나, 의료 시설 하나, 연구재단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의 변호사가 대신 나왔다. 뒤로는 지나치게 높은 책장과, 오렌의 주방 모듈보다 비쌀 법한 꽃병이 보였다.
“저희가 요구하는 것은 특권이 아닙니다.” 변호사가 말했다.
나데주가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
“장기적인 협력 관계를 제안하는 것입니다.”
켈라프가 서류를 덮었다.
“안 됩니다.”
“변호사님, 아직 저희 제안의 세부 내용도 듣지 않으셨습니다.”
“들었습니다. 가족이라고 불렀죠.”
변호사는 직업적으로 계산된 침묵을 두었다.
“라이스 씨에게는 자녀가 둘 있고, 그중 한 명은 희귀 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희귀’라는 단어가 리즈의 몸을 비스듬히 관통했다.
켈라프는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
“그 아이에게는 의료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국가를 받을 권리가 아니라.”
통신은 깔끔하게 끊겼다.
리즈는 화면이 검게 변할 때까지 기다렸다.
“모듈만 받을 수도 있었어요.” 보클레르가 말했다.
“그러면 아버지도 함께 받게 되죠.” 켈라프가 대답했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언제나요.”
아침 내내 침묵하던 세귀르가 말했다.
“오렌은 자리를 사면서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부를 줄 아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파는 것으로 시작할 수 없습니다.”
나데주가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그 말도 적어두면 되겠네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오는 사람들
다음 함정에는 돈 같은 우아함조차 없었다.
가족의 모습으로 찾아왔다.
그리스의 한 생물학자는 육 개월 거주를 받아들였지만, 기억을 잃어가고 있어 더는 요양시설에서 지낼 수 없는 어머니 없이는 올 수 없다고 했다. 레바논의 한 물류 전문가는 세계 어느 항구에서든 구호망을 조직할 수 있었지만, 전부 자기 빚도 아닌 채무 때문에 위협받는 동생을 데려오게 해달라고 했다. 인도주의 기관 세 곳과 프랑스 시장 두 명의 추천을 받은 하수 처리 전문가는 동반자와 열여섯 살 소년을 함께 데려오고 싶어 했다. 서류상 아들은 아니지만 구 년째 키운 아이였다.
마송은 구역을 말했고, 켈라프는 권리를, 들로네는 위험을, 모로는 방을, 나데주는 침대를 말했다.
이기는 쪽은 대개 나데주였다. 침대 하나가 나머지 모든 것을 덜 추상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전 구축 거주라고 하셨죠.” 다섯 번째 가족 서류를 검토한 뒤 나데주가 쏘아붙였다. “좋아요. 사람들은 누구와 같이 사는데요? 자기 이력서와요?”
“모든 가족에게 문을 열 수는 없습니다.” 들로네가 말했다.
“전부라고 안 했어요. 누군가가 냄비와 약과 아이와 노파를 붙들거나, 아니면 그저 하루의 끝을 붙들어줘야 겨우 서 있을 수 있다면, 어디에 선을 그을 거냐고 묻는 거예요.”
리즈는 눈을 감았다.
해답으로서가 아니라 증거로서 마리안을 생각했다.
누구도 혼자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몸은 혼자여도 부엌과 전화, 죽은 사람, 약속, 지키기 위해 거짓말한 사람들, 침묵함으로써 배신한 사람들을 데려왔다.
“칸을 하나 더 넣으세요.” 리즈가 말했다.
마송은 지친 몸짓을 보였다.
“또요?”
“생명에 직결된 관계.”
“모호합니다.”
“네.”
“법적으로 취약하고요.”
“아마도요.”
“악용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것은 전부 악용될 수 있어요.”
켈라프가 펜을 들었다.
“다르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강제적인 분리로 인해 동의, 건강, 안전, 또는 실질적인 거주 가능성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사람.”
나데주가 얼굴을 찌푸렸다.
“길어요.”
“그래요.”
“그래도 이해는 돼요.”
“그러면 평소보다는 덜 실패한 문장이네요.”
사람들이 조금 웃었다.
웃음은 거의 즉시 꺼졌다.
새 칸이 추가되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복잡해졌다.
서류는 더는 깔끔한 줄로 남지 않았다. 마르세유의 외과의사에게는 직업훈련을 받는 딸과 당뇨를 앓는 아버지가 있었다. 전력망 엔지니어에게는 송전탑 그림을 그리고 불을 켜두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는 아들이 있었다. 사미르 엘 암라니에게는 자매 둘과 테투안에 사는 어머니, 그리고 그가 사람들을 지휘하기보다 배를 수리하는 줄 아는 조카 셋이 있었다. 언어학자에게는 제네바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동반자가 있었다.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그는 의미에 접근할 권리를 지키겠다면서 사월에 학생들을 버리는 건 우스운 일이라고 했다.
이름마다 끈 하나가 딸려 나왔다. 끈 끝에는 삶이 있었다.
마침내 보클레르가 여럿이 생각하던 말을 꺼냈다.
“이런 식으로 범위를 넓히면 최초의 집단 규모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넓히지 않으면 관계를 끊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들만 주로 끌어들이게 돼요.” 리즈가 대답했다.
“그런 사람들이 때로는 가장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죠.”
“때로는 가장 위험하기도 하고요.”
소렐이 눈을 들었다.
“완전한 가용성을 요구하는 체계는 사람을 잘못 선별합니다. 헌신과 관계의 부재를 혼동하죠.”
나데주가 미소 지었다.
“보셨죠? 역시 물리학자예요.”
“물리학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당신한테는 뭐든 결국 버티거나 부서지잖아요. 그거면 됐죠.”
소렐은 대답하지 않았다.
종이 가장자리에 무언가를 적었다가 지웠다.
리즈는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저마다 너무 일찍 내놓지 않으려고 간직하는 말들을 알아보기 시작한 참이었다.
자석 같은 말
오후에 세귀르는 복도에서 전화를 받았다. 돌아왔을 때 그의 목소리는 더는 온전히 회의용 목소리가 아니었다.
“외국인 기후학자가 보호를 요청했습니다. 연구소에서 수치를 묻어버리고 있답니다. 자료를 가지고 오겠다고 합니다.”
“여기 살고 싶다는 건가요?” 마송이 물었다.
“자기가 아는 것이 어딘가에서 살아남기를 바라는 겁니다.”
이어 메시지가 계속 도착했다. 각주 속에서 죽고 싶지 않다는 행정법 판사, 공식 사진보다 먼저 피로를 계산해주는 곳을 원하는 재난 간호사, 교육을 거주민 자녀에게만 제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오렌의 첫 견습생들을 가르치겠다는 직업계 고등학교 교사.
나데주는 마지막 서류를 따로 빼두었다.
“어른들을 다 고르기도 전에 아이들을 생각하네요.”
켈라프가 동의했다.
“좋은 징조예요.”
“기준은 아닙니다.” 마송이 말했다.
“그래요.” 리즈가 대답했다. “상기시키는 말이죠.”
대통령실은 그래도 짧은 보고서를 요구했다. 보클레르는 ‘핵심 인재 유인 효과’라는 표현을 쓰자고 제안했다. 켈라프는 그 용어를 거부했다.
“핵심 인재라고 부르는 순간 사람이 긴급 물자로 바뀝니다.”
결국 문서 제목은 이렇게 정해졌다.
‘오렌 구역의 초기 유인 효과.’
전문성을 갖춘 사람들이 보호와 접근, 참여를 요청하고 있으며, 그 요청은 출신 기관에 대한 도덕적 소진에서도 비롯된다고 적었다. 무엇보다 프랑스가 인재 포섭, 체제 불안정 조장, 기술 귀족정이라는 비난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다.
리즈는 문장들이 제 일을 하게 두었다.
“바로 이게 위험이에요.”
세귀르는 문서를 내려놓았다.
“오렌이 버티도록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 역시 위험입니다.”
“그래서 걱정하는 거예요.”
짜증 없이 한 말이었다. 리즈는 줄리앙이 식사 수를 세고, 카미유가 붕대를 정리하고, 타르디외가 물질을 붙들고, 소렐이 증거를 붙들고, 켈라프가 법을 붙들고, 나데주가 몇몇 부속서보다 견고한 헌법 원칙처럼 쓰레기봉투를 붙드는 모습을 보았다. 장소는 의도로 태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같은 곳에서 그 일을 하기로 받아들일 때 태어난다.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최고의 사람들을 찾는 곳은 언제나 자기에게 편리한 방식으로 그들을 알아보는 법을 배우게 된다.
“나갈 때의 규칙도 필요해요.” 리즈가 말했다.
마송이 눈을 들었다.
“나갈 때요?”
“네. 오는 사람은 누구나 배신자로 취급받지 않고 떠날 수 있어야 해요. 그리고 필수 서비스를 떠나오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남겨두고 오는지 설명해야 하고요.”
“죄책감을 주는 것처럼 들립니다.”
“아뇨. 질문처럼 들리죠.”
나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질문은 그것만으로도 아플 수 있어요.”
보클레르가 반박했다.
“요청을 받아들이기에 앞서 자기 나라를 구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나라를 구하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에요. 그 사람이 떠난 값을 누가 치를지 묻고 싶은 거예요.”
켈라프가 적었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바깥에 남는 사람들
저녁이 되자 리즈는 서류실에 혼자 남았다.
몇 분뿐이었다.
모로는 ‘혼자’라는 말이 문을 열어두고, 들로네가 복도에 있고, 탁자 위에 물이 있으며, 십오 분을 넘기지 않는다는 뜻일 때만 허락했다. 켈라프는 십오 분은 법률적 시간이 아니라고 말했다. 모로는 의사의 시간이라고 대답했다. 켈라프는 자기 직업을 아는 단어를 좋아했기에 받아들였다.
리즈는 거절된 서류 하나를 펼쳤다.
억만장자의 것도, 첩자로 의심되는 사람의 것도, 위험한 남자의 것도 아니었다.
중소도시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서른두 살 여자였다. 마송이 쓰는 의미에서 희소한 능력은 없었다. 예상 보안 인가도, 정치적 노출도, 재난 경험도 없었다. 연구실도, 인맥도, 특허도, 항구도, 선박도, 전과도, 눈부신 추천서도 없었다. 존재해서는 안 되는 주소로 편지를 보냈다. 기술자 한 명을 아는 사람을 아는 누군가에게서 전해 들은 주소였다. 편지는 한 장이었다.
어디에서도 뛰어나지 않지만 거의 어디에서나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고 썼다.
천천히 설명할 줄 안다고 했다.
서로 미워하는 학생들이 함께 공부하게 만들 줄 안다고 했다.
밥을 못 먹은 아이를 알아보고, 글자가 움직여 문제를 읽지 못하는 아이를 알아보고, 글을 쓰지 않으려고 다른 아이들을 웃기는 아이를 알아볼 줄 안다고 했다.
시민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곳이 다른 사람들의 탁월함에 감탄을 끝내기 전에 평범한 사람도 필요로 하는지 묻고 있을 뿐이었다.
마송은 서류를 단순 거절로 분류했다.
사유:
‘현 단계에서 확인된 필요 없음.’
리즈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읽었다.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심지어 옳았다.
현 단계의 오렌에는 학교도, 거주하는 아이도, 교실도, 개학도, 운동장도, 두고 간 공책도, 너무 늦게 면담을 요청하는 학부모도 없었다. 현 단계의 오렌에는 용접공, 결박 기술, 법, 보안, 의료, 요리, 기상, 구조물, 그리고 프랑스 국가와 다른 국가들, 오렌 자체가 서로를 삼키지 못하게 막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현 단계에서는.
리즈는 펜을 들었다.
거절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대신 이렇게 덧붙였다.
‘오렌이 자기 자신의 긴급 상황 외에 다른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주장하는 순간 재검토할 것.’
그런 다음 서류를 덮었다.
복도에서 들로네가 움직였다.
“괜찮습니까?”
“아뇨.”
그는 기다렸다.
리즈는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의학적 대답이에요, 정치적 대답이에요?”
“솔직한 대답입니다.”
“그럼 그대로 두세요.”
그는 들어오지 않았다.
리즈는 그 점이 고마웠다.
화이트보드에는 나데주가 떠나기 전 마지막 문장을 남겨놓았다.
‘쓸모 있는 사람들이 자기가 세계인 줄 아는 일을 끝내면, 그다음에는 누구를 받지?’
리즈는 두 번 읽었다.
마커를 들었다.
손이 망설였다.
문법을 고칠 수도 있었다. 문장을 받아들일 만하게 다듬을 수도 있었다. 법률 문구로 만들 수도 있었다.
리즈는 그 아래에 한 줄만 덧붙였다.
‘바깥에 남는 사람들도 중요하다.’
단순한 말이었다. 어쩌면 너무 단순했다.
하지만 탁월함의 증거가 쌓인 지나치게 밝은 방에서, 그날 밤 리즈에게는 그 문장을 지키는 일이 다른 모든 것보다 어려워 보였다.
제21장
프랑스라는 거울
나라가 본 것
오렌은 한꺼번에 드러나지 않았다. 조각조각 밖으로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항만에서 지나치게 오래 감속한 페리 위에서 찍은 흐릿한 사진이었다. 부유 구조물과 연결교, 크레인, 새로 부은 콘크리트 띠가 보였다. 그 한가운데에는 단순한 조선소라기에는 지나치게 깔끔해진 조선소 같은 것이 있었다. 사진은 붉은 화살표와 동그라미, 인터넷에서 해도를 들여다봤다는 이유로 자신만만해진 사람들의 추측과 함께 퍼졌다.
그다음에는 문서 일부가 유출되었다. 석 줄. 이해하기에는 부족했지만 상처를 내기에는 충분했다.
‘오렌 사전 구축 구역. 이중 승인하에 출입. 업무상 거주는 시민권과 구별됨.’
나머지는 시민권이라는 단어가 해냈다.
새로운 이름, 군용 부두, 아직 얼굴이 공개되지 않은 여자 옆에 그 말이 나타났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온 나라가 자기 집에서 방 하나를 빼앗긴 듯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 보도한 뉴스 채널은 지도를 선택했다. 파랑, 하양, 회색으로 깔끔하게 만든 인포그래픽에서 오렌은 브레스트 앞바다의 아주 작은 얼룩이었다. 진행자가 말했다.
“프랑스의 실험적 독립체입니다.”
초대된 헌법학자가 정정했다.
“입수된 문서가 정확하다면 프랑스의 보장 아래 놓인 사전 구축체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남자는 정의보다 분노를 좋아하는 나라에서 정의를 내려달라는 초대를 받은 사람 특유의 지친 미소를 지었다.
“아직 누구도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제대로 모른다는 뜻입니다.”
다른 방송에서는 단어들이 자기 진영을 찾아다녔다. 민주주의 실험실, 호화로운 분리 독립, 특권 구역. 그러다 누군가는 프랑스가 자기 소유를 떠나보낼 권리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자기 소유.
리즈는 세귀르가 화면을 설치해둔 작은 회의실에서 그 말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요약해주기 전에 무슨 말이 오가는지 직접 보라는 것이었다. 켈라프는 찬성했다. 모로는 반대하다가 음량과 시청 시간, 미지근한 물, 등받이 의자를 두고 협상했다.
방에는 여섯 명이 있었다. 리즈, 켈라프, 세귀르, 보클레르, 들로네, 그리고 아직 물기가 남은 점퍼 차림으로 와서 깨끗한 옷이 든 가방을 탁자 아래 내려놓은 나데주. 나데주는 자신이 왜 이곳에 들어올 권리가 있는지 묻지 않았다. 얼마 전부터 사람은 매우 말끔한 이유로 배제될 수도 있고, 더 모호한 이유로 다시 불려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쓸모가 있을 때는 그 기회를 이용하기로 했다.
화면에서 붉은 정장 차림의 여자가 물었다.
“누가 오렌 시민이 될 수 있을까요?”
자막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렌: 심사를 통과한 이들의 프랑스인가?’
나데주가 숨을 내쉬었다.
“빨리도 찾았네요.”
“무엇을요?” 세귀르가 물었다.
“아픈 곳이요.”
켈라프가 무언가를 갈겨썼다. 세귀르가 그것을 보았다.
“법률 의견서에 뉴스 채널을 인용할 생각입니까?”
“아뇨. 저 채널이 이용하는 상처를 인용할 겁니다.”
보클레르는 멀리서라도 대화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듯 화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문제는 유출된 정보가 사실과 불완전한 정보, 조작을 뒤섞고 있다는 겁니다.”
“모든 거울이 그렇죠.” 켈라프가 말했다.
리즈는 지도 위의 작은 얼룩을 바라보았다. 거기서 오렌은 실제보다 단순해 보였다. 밝은 모양, 경계선, 이름, 주위를 두른 물. 반면 프랑스 전체는 습관처럼 화면을 가득 채웠다. 병실들, 도청 사무실, 공장 작업동, 지방 항구, 직업계 고등학교, 역 근처의 지나치게 비싼 집들, 품위 있는 말과 낮은 임금으로 사람들이 겨우 떠받치는 공공 서비스는 보이지 않았다.
익숙한 덩어리 하나와 새로운 약속 하나만 보였다. 그 약속은 더 작다는 이유로 더 정직해 보였다.
“꺼주세요.” 리즈가 말했다.
모로는 승인해줄 자리에 없었지만 들로네가 따랐다.
침묵이 방을 원래 크기로 돌려놓았다.
“오렌이 프랑스를 경멸하는 방식이 되게 하고 싶지 않아요.” 리즈가 말했다.
세귀르는 시간을 두고 대답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렇게 될 겁니다. 일부 사람들에게는요.”
“그럼 그렇게 하기가 더 어렵게 만들어야죠.”
보클레르가 리즈를 바라보았다.
“어떻게요?”
리즈는 꺼진 화면에 희미한 반사로 아직 읽을 수 있는 자막을 바라보았다.
“작은 것은 작다는 이유만으로 깨끗하다는 믿음을 더는 방치하지 않는 거예요.”
축약된 프랑스
다음 날, 총리실은 우스울 만큼 거창한 제목으로 파리의 관계자들을 불러 모았다.
‘오렌 모델에 대한 국내 인식.’
리즈는 브레스트에서 보안 통신으로 참석했다. 입을 다물거나 원격으로 참석하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켈라프는 세 번째 선택지를 추가했다. 사람들이 리즈를 보지 않은 채 너무 가까이서 그녀에 대해 말할 때 대답하는 것이었다.
파리의 탁자에는 행정기관 책임자들, 도지사 두 명, 사회정책 보좌관, 재무부 관계자 한 명, 교육부 대표 한 명, 총리실 보좌관과 보클레르가 앉아 있었다. 세귀르는 리즈 곁에 있었다. 마송은 말이 사실보다 더 위험해질 것을 이미 아는 사람처럼 조금 뒤에 물러서 있었다.
총리실 보좌관은 당연한 말로 시작했다.
“오렌은 국가가 큰 규모로 유지하기 힘들어하는 것을 작은 규모로 해결하는 듯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을 매혹합니다.”
창가에 앉은 여성 도지사가 메마르게 웃었다.
“퇴직자도, 상업 지구도, 지방도로도, 공사 중인 중학교도, 이의신청도, 인허가에 반대하는 이웃도, 삼 대에 걸친 깨진 약속을 안고 찾아오는 가족도 아직 없어서 사람들을 매혹하는 거죠.”
“바로 그 점을 설명해야 합니다.” 보클레르가 말했다.
“아닙니다.” 도지사가 대답했다. “질투하기 전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이죠.”
리즈는 알지도 못하는 그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 프랑스를 너무 느린 낡은 소프트웨어로 취급할 위험이 있는 방 안에 현실을 들여놓았기 때문이다.
교육부 대표가 서류를 살폈다.
“거절된 수학 교사의 서류가 왜곡된 형태로 퍼지고 있습니다.”
리즈가 몸을 바로 세웠다.
“어떻게 퍼지고 있죠?”
“평범한 교사 한 명이 들어가고 싶다고 했더니 오렌에서 ‘확인된 필요 없음’이라고 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문서가 진짜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리즈는 손끝에 남아 있는 거절의 감각과 펜과 여백을 느꼈다. 그 부끄러움을 서류철 안에 가둬두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벌써 밖으로 꺼낸 것이다.
“진짜예요.”
파리의 방 안에서 온도가 달라졌다.
“그렇다면,” 교육부 대표가 말을 이었다. “교사들은 그것을 기술적 탁월함이 교육보다 우선한다는 증거로 보고 있습니다. 행정직원들은 새로운 장소가 천천히 고치는 직업들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노동조합들은 국가가 영리한 사람들을 골라내고 참을성 있는 사람들은 공화국에 남겨둔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리즈 뒤에 있던 나데주가 중얼거렸다.
“참을성은 교사에게도 필요하죠.”
켈라프가 그 말을 적었다.
총리실 보좌관은 못 들은 척했다.
“논쟁이 도덕적 문제로 번지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도지사가 나직이 웃었다.
“이미 늦었습니다.”
세귀르는 두 손을 모았다.
“일부 행정 책임자들은 오렌의 임시 규칙을 왜 프랑스 전체에 적용할 수 없는지 묻기 시작했습니다. 신속한 결정, 불투명한 자금 지원 금지, 쉬운 언어로 된 기록 열람권, 사유를 명시한 답변 의무, 업무 철회권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면 왜 안 되죠?” 브레스트에서 나데주가 물었다.
아무도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피하기에는 너무 단순한 질문이었다.
여성 도지사가 대답했다.
“나라는 손님이 오기 전에 정돈하는 방이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방을 계속 더럽혀두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리즈는 그 여자를 더 유심히 바라보았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델핀 루입니다.”
“오렌에 오겠다고 지원했나요?”
파리 쪽으로 다소 충격받은 침묵이 흘렀다.
루 도지사가 미소 지었다.
“아니요. 저는 이미 복잡한 나라에 있으니까요.”
리즈는 안도와 비슷한 것을 감추려고 눈을 내리깔았다.
모욕당한 직업들
분노는 직업을 따라 찾아왔다.
억양과 제복, 이메일 문체, 오타, 이미 모든 것을 앗아간 하루 뒤에 쓴 지나치게 긴 메시지를 달고 왔다. 수백 건이 들어왔고, 그보다 더 많아졌다. 마송은 분류하려 했다. 켈라프는 읽으려 했다. 세귀르는 요약하려 했다. 나데주는 목소리를 범주로 바꾸기 전에 적어도 한 번은 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낭독 시간을 마련했다.
의식 같은 것은 아니었다. 서류실에서 한 시간. 인쇄물 한 무더기, 켜진 컴퓨터 한 대, 필요 이상으로 많은 의자 세 개, 잠을 충분히 못 자는 행정기관의 맛이 나는 커피. 모로는 리즈가 언제든 나갈 수 있다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리즈는 언제든 남을 수도 있다고 대답했다. 모로는 그 차이는 의학적이라고 했다. 켈라프는 정치적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데 합의했다.
나데주가 도청 직원의 메시지부터 읽었다.
‘당신들은 더 잘 거절할 수 있어서 더 빠른 거예요. 우리도 양심에 거리낌 없는 서류만 고를 수 있다면 빨리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눈을 들었다.
“따끔하네요.”
“계속 읽어요.” 리즈가 말했다.
북부의 한 병원에서 야간 근무 간호사가 쓴 글이 이어졌다.
‘희소한 시민권 이야기를 봤습니다. 우리 병원에서 시민권은 희소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아파서, 늙어서, 주치의가 더는 없어서, 너무 오래 기다려서 들어옵니다. 선택해야 한다는 건 압니다. 다만 그것을 너무 빨리 정의라고 부르지 말아달라는 겁니다.’
켈라프가 펜을 내려놓았다.
방 안은 몇 초를 그대로 흘려보냈다.
그다음 들로네가 생나제르 부두 노동자들이 보낸 편지를 읽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탕헤르의 부두 노동자가 엔지니어들이 상상 속 항구를 그리지 못하게 막는다는 이유로 들어올 수 있다면, 프랑스가 부두도, 트럭도, 지친 몸도 없는 나라로 스스로를 그리지 못하도록 오랫동안 막아온 이들도 초대해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맞는 말이에요.” 타르디외가 말했다.
기술 점검을 하러 왔다가 허락도 구하지 않고 자리에 앉은 참이었다. 그녀가 있으면 방의 공기가 달라졌다. 국가 소속 엔지니어들은 물질세계가 대표자를 보낸 듯 말투를 바꾸었다.
“무엇이 맞는다는 겁니까?” 마송이 물었다.
“평범한 능력은 고장 나기 전까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요.”
나데주가 미소 지었다.
“당신, 이러다 정말 좋아하게 되겠네요.”
타르디외는 웃지 않고 대답했다.
“서두르지 마세요.”
네 번째 편지는 직업계 고등학교에서 왔다. 학급 전체가 함께 썼다. 문장의 수준은 제각각이었다. 일부는 교사가 손본 흔적이 뚜렷했고, 일부는 그렇지 않았다. 아래에는 서명이 가득했다. 둥근 이름들, 모난 이름들, 크레인 그림 두 개, 트럭 한 대, 알파벳 i의 점에 그려 넣은 하트 하나.
‘오렌 부인께.’ 한 학생이 그렇게 썼다.
리즈는 눈을 감았다.
나데주는 곧바로 다음 문장을 읽지 않았다.
“건너뛸까요?”
“아뇨.”
그래서 읽었다.
‘아주 잘하는 사람들을 뽑는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는 충분히 잘하는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것도 쓸모가 있나요, 아니면 특별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도울 수 있나요?’
거의 맞는 맞춤법과 견딜 수 없이 부드러운 말투를 지닌 질문이 그 자리에 남았다.
세귀르는 리즈를 바라보았다. 공무원처럼 보지 않았다. 그 글이 문을 연 것인지, 상처를 연 것인지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았다.
“답장하세요.” 리즈가 말했다.
“뭐라고요?”
“그것도 쓸모 있다고요.”
“오렌의 이름으로요?”
리즈는 망설였다.
오렌의 이름으로 말하면 답변은 약속이 되었다. 리즈의 이름으로 하면 사적인 감정이 되었다. 프랑스 국가의 이름으로 하면 홍보 책자가 될 위험이 있었다. 켈라프는 그 망설임을 알아보고 말이 알맞은 자리에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사전 구축체의 이름으로요.” 리즈가 말했다. “그리고 제 이름으로 서명하세요.”
마송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전화로 듣고 있던 보클레르는 정확한 문구를 다시 읽어달라고 했다. 세귀르가 읽었다. 수화기에서 가벼운 숨소리가 들렸다. 웃음일 수도, 피로일 수도 있었다.
“기대를 만들게 될 겁니다.”
“네.” 리즈가 말했다. “사람들에게 말을 걸 때는 원래 그래요.”
답장은 그날 저녁 발송되었다.
많은 말은 하지 않았다. 도움은 심사위원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했다. 배우고, 고치고, 반복하고, 전하고, 눈에 띄지 않는 장소들을 버티게 하는 직업들은 언젠가 오렌이 그 이름을 가질 자격을 얻는다면 그 안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했다. 사전 구축체에는 아직 학교가 없지만, 학교가 왜 존재하는지는 벌써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발송 전 나데주가 글을 다시 읽었다.
“좋네요.”
“불충분해요.”
“좋은 일은 대개 불충분한 데서 시작하죠.”
리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낙관적이었어요?”
“예의를 포기하고 나서부터요.”
삼십 분 뒤, 플랫폼에서 낮은 경보음이 울렸다.
주권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경보였다.
오수 경보.
위생 모듈의 배수가 막혔다. 바닥에 지나치게 가까이 나사로 고정한 판 뒤에서 회색 펌프가 기침했다. 뜨거운 플라스틱과 표백제, 식은 수프 냄새가 났다. 도면에서는 신속하고 깔끔하게 설치되었지만 현실에서는 덜 깔끔했다. 누군가 임시 싱크대에서 쌀을 너무 많이 씻었고, 거름망이 막혔다. 그러자 오렌이 시민권을 논할 수 있게 해주던 모든 것이 갑자기, 장소란 넘치지 않게 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타르디외는 벌써 무릎을 꿇고 있었다. 비뚤어진 헤드램프를 쓰고 한 손에는 스패너를 들었다. 줄리앙 아우아드는 양동이를 받치고 있었다. 카미유 루도는 장갑과 거즈, 야간 근무 특유의 기분을 가져왔다. 나데주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걸레를 찾아내고는 거의 다정한 엄격함으로 광경을 바라보았다.
“자, 여기 있네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들의 첫 번째 기관.”
리즈는 문 근처에 서 있었다.
“저도 도울까요?”
타르디외가 눈을 들지 않은 채 손을 내밀었다.
“조명이나 드세요. 이론은 만들지 말고.”
리즈는 조명을 들었다.
손이 떨려 빛도 조금 떨렸다. 판 아래에서 배관은 병든 목처럼 컥컥 소리를 내며 간헐적으로 진동했다. 줄리앙이 양동이를 고정했다. 물방울 하나가 소매에 튀자 카미유가 욕을 했다. 나데주는 세계의 천재들이 오렌을 국제 정화조로 바꾸기 전에 싱크대에 버려서는 안 되는 것들의 목록을 만들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러다 줄리앙이 웃었고, 다른 사람들도 따라 웃었다.
막힌 것이 물컹한 소리를 내며 한꺼번에 뚫렸다. 오수는 그날 작성된 어떤 문서보다 솔직하게 양동이 안으로 쏟아졌다. 타르디외가 너무 빨리 물러서다 리즈의 무릎에 부딪혔고, 카미유는 양동이를 붙잡았고, 나데주는 반드시 필요한 수정안을 제출하듯 걸레를 내려놓았다.
몇 분 동안 오렌은 모델도, 필터도, 자기 느림에 굴욕당한 프랑스의 약속도 아니었다. 펌프를 둘러싼 네 사람, 쌀 때문에 미안하다고 말하는 요리사, 마른 장갑의 가치를 아는 간호사, 소매에 잿빛 물이 묻은 기술 책임자, 조명을 서툴게 비추면서도 그 자리에 남은 리즈였다.
그것만으로 안심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조금은 나아졌다.
모범생들
엘리트의 분노보다 그들의 찬사가 더 불안했다.
분노는 무언가를 되찾으려 했다. 찬사는 말끔하게 들어오려 했다.
전략 메모, 파견 제안, 가명으로 쓴 기고문, 시민재단, 새로운 장소에서 국가를 다시 설계하고 싶어 갑자기 안달이 난 전직 고위 공무원들의 모습으로 찾아왔다. 켈라프는 가차 없이 요약했다.
“낡은 규칙으로 충분히 이득을 본 사람들이 흔히 새 규칙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가장 먼저 말하죠.”
발표 전에 이미 정부 부처들 사이를 돌던 기고문 하나가 있었다. 젊은 국가 공무원들의 모임이 서명한 글이었다. 제목은 이랬다.
‘오렌, 다시 엄격해진 공화국.’
눈부신 글이었으므로 위험했다. 콩도르세, 레지스탕스, 고위 공무원단, 발명의 경계로서의 바다, 의무로서의 능력. 모든 것이 거짓이 되기에 충분할 만큼 옳았다. 필자들은 가장 뛰어난 공무원들이 오렌에서 몇 년간 일한 뒤 돌아와 프랑스 행정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덕행 연수를 하고 싶은 거네요.” 나데주가 말했다.
보클레르가 대답했다.
“숨을 좀 쉬고 싶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둘은 얼마든지 같이 갈 수 있죠. 바로 그게 짜증 나요.”
글은 발표되기도 전에 효과를 냈다. 장관 보좌관들은 내색하지 않으면서 끼고 싶어 했다. 행정학교들은 강연을 요청했다. 민간 자문회사들은 제도 전환 지원을 제안했다. 켈라프는 그 표현에 세 번 동그라미를 치고 여백에 적었다. ‘조기 기생충.’
세귀르는 옛 동료들에게서 두 통의 전화를 받았다. 스피커폰으로 받지는 않았지만, 리즈는 그의 대답을 듣고 상대가 자리가 있을지 묻고 있음을 알았다. 특정 직책이 아니었다. 역사 속 자리였다. 나중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위치. 나는 시작부터 그곳에 있었다.
두 번째 통화를 마친 세귀르는 휴대전화 화면이 탁자를 향하도록 엎어놓았다.
“그들이 전부 비열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 리즈가 대답했다.
“생각하는 소리가 충분히 컸습니다.”
리즈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랬을지도 모르죠.”
세귀르는 변명하지 않고 한 방을 받아들였다.
“일이 돌아가는 방식에 지쳐버린 사람들을 압니다. 진심으로 공공에 봉사한다는 것을 믿었던 사람들이요. 오렌은 그들에게 오래 긁어온 벽에 문 하나가 열린 것처럼 보입니다.”
“당신은요?”
그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저는 그 벽을 세우는 일에 너무 많이 참여했습니다. 그러니 문이 열렸다고 첫 번째로 들어갈 수는 없죠.”
리즈는 그 정직함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탁자 위에서 기고문은 여전히 힘을 발휘했다. 모범생들에게 너희가 모범생이었던 것은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주었다. 지성과 노력, 청렴함과 명료함이 마침내 관성에 지지 않을 수 있는 방이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그게 함정이었다. 오렌은 냉소적인 사람들에게만 탈출구가 아니었다. 진심인 사람들에게도 유혹이 되고 있었다.
기고문을 대충 훑어본 타르디외가 손가락으로 밀어냈다.
“프랑스를 때가 낀 기계로, 오렌을 귀중한 부품을 고치는 깨끗한 작업장으로 말하네요.”
“그래서요?”
“기계에 때가 끼었다고 귀중한 부품만 떼어내지는 않아요. 그러면 나머지가 더 빨리 고장 나죠.”
그 비유는 명확해서 모두의 마음에 들었다가, 진실해서 곧 마음에 들지 않게 되었다.
보클레르는 기고문 필자들에게 보낼 비공식 답변을 준비해달라고 했다. 세귀르는 신중한 문안을 제안했다. 오렌의 목적은 국가에서 가장 유능한 공무원들을 뽑아오는 것이 아니라, 훗날 공동체 전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형태를 실험하는 데 있다는 내용이었다. 켈라프는 ‘뽑아오다’를 지우라고 했다. 세귀르는 바로 받아들였다. 부인하려던 내용을 너무 정확히 드러내는 단어였다.
마침내 이렇게 썼다.
‘오렌에서의 어떤 봉사도 명예로운 탈주가 될 수 없다.’
나데주는 기고문보다 덜 우아하다고 평했다.
“그래서 좋은 겁니다.” 켈라프가 말했다.
남는 나라
리즈가 학생들에게 보낼 답장을 다시 읽던 중 마리안에게서 전화가 왔다.
방해했느냐고 묻지 않았다. 모든 것이 늘 누군가를 방해하게 된 뒤로는 그 질문을 그만두었다.
“텔레비전에서 네 섬을 봤어.”
“섬 아니야.”
“그래, 뭐. 물에 둘러싸여 있고 사람들이 섬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네 거기.”
리즈는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회의실을 나왔다. 들로네는 일부러 다른 곳을 보는 시늉을 했다. 삼 미터 떨어져 따라오겠다는 뜻이었다. 리즈는 항만이 내려다보이는 돌출창까지 걸었다. 빛은 낮고 잿빛이었으며 지극히 브레스트다웠다. 이 각도에서는 바깥의 오렌이 보이지 않았다. 움직이는 크레인들과 경계선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화났어?” 리즈가 물었다.
“그것만은 아니야.”
“그럼 화났다는 뜻이네.”
“어떤 분노가 맞는지 고르려고 한다는 뜻이야.”
리즈는 기다렸다.
마리안은 침묵을 채우려고 말하는 일이 드물었다. 말을 멈추면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하지 않는 표현을 찾는 중이었다.
“내 주변 사람들은 두 가지 말을 해. 널 좋게 보는 사람들은 드디어 뛰어난 사람들이 못난 사람들에게 방해받지 않을 곳이 생겼다고 하지. 널 덜 좋아하는 사람들은 봐라, 뛰어난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나라를 만들고 못난 사람들은 우리한테 남겨두는구나, 하고. 난 둘 다 역겨워.”
“나도.”
“잘됐네. 둘 중 어느 쪽이든 결국 출발이 좋지 않았고, 알맞은 말을 모르고, 알맞은 몸도 없고, 알맞은 방식으로 지치지도 못한 누군가를 못난 사람이라고 부르게 되니까.”
리즈는 눈을 감았다.
수학 교사와 간호사의 편지, 도지사들, 부두 노동자들, 충분히 잘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학생들을 떠올렸다. 평범한 사람이라는 말을 우월한 척 듣는다면 몹시 싫어했겠지만, 영리한 사람들이 쳐다보지도 않는 것들을 평생 붙들어온 아버지를 생각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길 바라는 거야?”
“거창한 말은 필요 없어. 하지만 오렌 덕분에 프랑스를 상대로 자기가 옳았다고 말할 수 있어서 오렌을 칭찬하는 사람들은 경계해야 해. 프랑스는 경멸하기 편하거든. 절대로 충분히 빨리 대답하지 않으니까.”
리즈는 경계선을 바라보았다.
“가끔은 아주 형편없이 대답하기도 해.”
“그래. 때로는 야간 근무 간호사로 대답하고, 지친 교사로 대답하고, 도청의 어느 여자로 대답하고, 중학교 보일러를 고치는 남자로 대답하고, 아이를 봐주는 이웃으로 대답하지. 다리 하나 다시 놓는 데 삼 년이 걸리지만 결국은 다시 놓는 지방자치단체로 대답하기도 하고. 깨끗하지 않아. 지도 위에서 아름답지도 않고. 그래도 거기 있어.”
“켈라프처럼 말하네.”
“그럼 켈라프가 옳은 거네. 아마 그 사실이 몹시 마음에 안 들겠지만.”
리즈는 웃었다. 웃음은 동시에 기분을 낫게 하고 아프게 했다.
“너는?” 마리안이 물었다.
“나는 뭐?”
“넌 프랑스인이야, 오렌인이야?”
너무 크고, 너무 이르고, 지나치게 언론다운 질문처럼 들렸어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매의 질문이었다. 마리안은 입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남들이 직함 붙이기를 멈추면 리즈가 어디에 서는지 묻고 있었다.
“나 피곤해.”
“대답으로 인정.”
“무섭기도 하고.”
“더 좋은 대답이네.”
멀리 있던 들로네는 자기 신발로 시선을 내렸다. 대화가 그의 직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사적이 될 때 보이는 행동이었다.
마리안이 다시 말했다.
“엄마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아니.”
“그렇게 대단한 오렌이면 토요일에 마트 계산대에 줄이나 서보고, 자기들이 사람을 어떻게 분류할 건지 설명해보라더라.”
리즈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엄마 괜찮아?”
“자기 딸이 부엌 정리보다 나라의 관심을 더 많이 받는다는 걸 알게 된 사람답게 지내. 그러니까 품위 있게 엉망이야.”
“전화할게.”
“기자가 엄마한테 네가 자랑스럽냐고 묻기 전에 해.”
부드럽고 잔인한 말이 리즈를 관통했다.
“벌써 연락했어?”
“아직. 하지만 할 거야.”
바깥 부두에서 짧은 사이렌이 울렸다. 긴급 상황이 아니라 작업 신호였다. 리즈는 그것을 경고처럼 받아들였다. 언제나 옮겨야 할 것, 고정해야 할 화물, 지켜야 할 문, 보호해야 할 이름이 있었다.
통화가 끝난 뒤 리즈는 곧바로 회의실로 돌아가지 않았다. 들로네는 몇 걸음만큼의 침묵을 허락한 뒤 물었다.
“걸으시겠습니까?”
“프랑스가 저를 해답처럼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리즈는 너무 자주 입에 오르는 낡은 동의로 대답할 뻔했다. 하지만 삼켰다.
들로네는 뒷말을 기다렸다.
“무슨 뜻인지는 알아요. 그래도 그걸 운명처럼 받아들이지는 않겠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길어졌군요.”
“잘됐네요.”
두 사람은 회의실로 돌아왔다. 탁자 위에는 세귀르가 새 서류철 하나를 올려놓았다. 아직 열어보지 않은 것이었다. 표지에는 이렇게만 적혀 있었다.
‘국내 영향 - 남겨진 프랑스.’
리즈는 손끝으로 두꺼운 종이를 만졌다.
“누가 이렇게 썼어요?”
“접니다.” 세귀르가 말했다.
“남겨진 프랑스?”
“임시 제목입니다.”
“그대로 두세요.”
세귀르는 놀란 듯했다.
“잔인한 제목입니다.”
“네. 그래서 봐야 해요.”
리즈가 서류철을 열었다.
안에는 이미 세 개의 하위 서류철이 있었다. 공공 서비스, 평범한 직업, 지원하지 않은 지역. 켈라프는 연필로 한 줄을 덧붙였다. ‘요청이 없다는 것과 도덕적 권리가 없다는 것을 혼동하지 말 것.’
리즈는 그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안도감은 없었다. 전보다 선명하고, 거의 사용할 수 있는 피로가 느껴졌을 뿐이다. 거울이 뒤집혔다. 오렌은 프랑스가 되고 싶었던 모습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다. 빠르고, 명확하고, 청렴하고, 용감하며, 불필요한 타협에서 벗어난 모습만이 아니었다. 공동체가 자신을 바라볼 사람을 선택할 수 있을 때 무엇이 되는지도 보여주었다.
가벼워지고 더 깨끗해진, 모두가 없는 프랑스.
리즈는 켈라프의 펜을 들었다.
세 개의 하위 서류철 아래에 이렇게 덧붙였다.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는 사람들도 반드시 대표되어야 한다.’
그리고 서류철을 닫았다.
복도에서는 계속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공개 답변과 비공개 답변, 대통령에게 보낼 메모와 도지사들에게 보낼 메모, 메모를 피하기 위한 메모를 준비하고 있었다. 프랑스라는 기계가 오렌 주위에서 다시 느림과 신중함과 방어, 그리고 작은 진실의 가능성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며칠 만에 처음으로 리즈는 그 기계에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작동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오렌이 존재할 자격을 얻으려면, 자신을 만든 나라가 오렌보다 무겁고, 더 불공정하며, 더 끈기 있고, 더 살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꿈이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만들어야 할 어떤 형태도 주지 않았다.
세라믹 고리도, 어긋난 원환도, 부유 구조물도, 물로 열린 통로도 없었다.
바다 없는 허공 위로 아주 긴 연결교가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들고 그 위를 걸었다. 학위, 출입증, 구급가방, 가족관계수첩, 아이 사진, 약 상자, 추천서, 공구, 성적표, 근로계약서, 체류증, 빈손. 끝에는 탁자 하나가 기다렸다. 재판정의 탁자가 아니었다. 칼자국과 컵 자국이 남은 구내식당 탁자였다.
누군가 물었다.
“당신이 중요하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충분히 잘 대답하지 못했다.
리즈는 누가 떨어지는지 보기 전에 잠에서 깼다.
제22장
완벽한 부당함
어느 칸에도 들어맞지 않는 소년
첫 이의심사는 옛 세관 사무실에서 열렸다. 잿빛 카펫에는 경유와 젖은 양모, 데웠다 식은 커피 냄새가 배어 있었다.
오렌에 들어가고 싶지만 아직 오렌을 볼 허가조차 받지 못한 이들을 맞을 더 나은 장소를 찾지 못한 터였다. 건물은 항구 가장자리, 임시 철책 뒤에 서 있었다. 가랑비에 모든 유리창이 더러워 보였다. 복도에는 금속 의자들이 벽을 따라 놓여 있었다. 한쪽 안내문은 비상구를 가리켰고, 다른 안내문은 이 구역에서 어떤 녹음이나 촬영도 허용되지 않는다고 알렸다.
야니스 아주지는 의자 끝에 앉아 있었다.
열여섯 살이었다. 운동화는 흠뻑 젖었고, 배낭은 터질 듯했으며, 무릎에는 금이 간 태블릿을 올려놓고 있었다. 평범한 나이를 증명하는 깨지기 쉬운 증거라도 되는 듯이. 그는 신발 끈만 내려다보았다. 옆에서는 사미라 베쿠슈가 동반자인 엘리즈 페헤이라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오렌이 원하는 사람은 사미라였다. 하수 처리 전문가인 그녀는 캠프나 항구, 물에 잠긴 도시, 아직 제대로 된 하수도조차 갖추지 못한 신생 플랫폼을 위해 며칠 만에 임시 처리 회로를 설계할 수 있었다. 인도주의 기관 세 곳이 그녀를 추천했다. 프랑스 시장 두 명은 그녀가 곰팡이와 침수된 지하실, 주민들의 분노에서 자기 도시를 구해 냈다고 써 보냈다.
그녀는 엘리즈와 야니스를 함께 데려가고 싶다고 했다.
엘리즈는 항목에 들어맞았다. 신고된 동반자, 공동 거주지, 확실한 증빙. 의심할 만한 실용적 거짓말은 없었다.
야니스는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았다.
그는 사미라의 아들이 아니었다. 피후견인도 아니고, 법적 보호 아래 있지도 않았다. 엘리즈의 죽은 여동생이 낳은 아들이었고, 그 뒤로는 두 여자가 거둔 아이였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삶을 서류로 바꿀 시간도, 돈도, 행정적 용기도, 생부의 동의도 없었다. 지난 아홉 해 동안 두 사람은 그를 깨워 중학교에 보냈고, 아프면 돌봤고, 혼냈고, 치과에 데려갔고, 체육관 앞에서 기다렸고, 한 번은 경찰서로 데리러 갔으며, 수없이 달래 주었다. 오렌의 임시 규정은 배우자와 친생·입양·법원 결정으로 확인된 자녀, 부양이 필요한 직계존속을 인정했다.
행정을 상대로 이미 승리한 가족은 아주 잘 알아보았다.
그 나머지는 볼 줄 몰랐다.
마송이 첫 의견서에 서명했다.
“현 상태로는 연계 거주 신청을 수리할 수 없음. 대항력 있는 법적 관계 부재.”
켈라프는 즉각 이의심사를 요청했다.
리즈는 십 분 일찍 도착했고, 그대로 돌아가고 싶었다. 잠을 설쳤다. 연결 통로의 꿈이 여전히 손에 남아 있었다. 몇 주 전부터 그녀는 어떤 물건들을 실제로 만지기 전에 먼저 느끼는 버릇이 생겼다. 문손잡이, 펜, 서류철, 빈 의자. 야니스가 위원회 앞에서 앉아야 할 의자는 거의 육체적인 불쾌감을 안겼다.
“혼자 진술하게 하진 않겠어요.”
테이블 옆에 벌써 서 있던 마송이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
“직접 당사자입니다.”
“미성년자예요.”
“그러니까요.”
켈라프가 펜 뚜껑을 닫았다.
“열여섯 살짜리 소년에게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사람임을 증명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마송은 몸을 굳히지 않고 그 말을 받아냈다. 명단이 길어지기 시작한 뒤로 그의 얼굴은 더 잿빛이 되었고, 확신도 줄었다. 잔인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불안했다. 그는 많이 일하고 적게 잤으며, 무엇이든 더럽히는 문제 속에서 깨끗한 기준을 찾으려 했다. 리즈는 그의 말이 개인적인 냉혹함에서 나오는 게 아님을 알았다. 거짓말하지 않으면서 문을 지켜야 한다는 필요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신고된 애착 관계만으로 연계 거주를 허용하면 엄청난 허점이 생깁니다.”
창가에 앉은 나데주가 물었다.
“국가가 이름 붙일 줄 모르는 사람과 함께 살아 본 적 있어요?”
“논점에서 벗어났습니다.”
“논점이 될 수도 있죠.”
사미라 베쿠슈는 부르기도 전에 들어왔다. 문 너머로 들린 몇 마디만으로도 자기가 어떤 자리에 떨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막히고 느리고 수치스러운 것들을 평생 뚫어 온 사람처럼 서 있었다. 배관, 예산, 선출직 공무원, 관행 같은 것들.
“야니스는 우리와 함께 갑니다.”
그녀는 곧바로 인사하지 않았다. 서류로 불룩해진 두꺼운 초록색 파일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손은 추위에 붉어져 있었다. 짙은색 방수 재킷 손목에는 진흙인지 오래된 기름때인지 모를 얼룩이 묻어 있었다.
“베쿠슈 씨.”
마송이 말을 꺼냈다.
“글은 아주 잘 읽습니다.”
침묵의 모양이 달라졌다.
그녀는 첫 의견서를 가리켰다.
“대항력 있는 법적 관계 부재. 아주 깔끔하네요. 베고 자도 되겠어요.”
마송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편의상 꾸며 낸 진술로부터 이 준비 단계를 보호해야 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물을 얻으려고 토지대장을 위조하기도 하는 나라에서 정수 시설을 짓습니다. 편의라는 게 뭔지 강의하진 마세요.”
타르디외라면 이 여자를 좋아했을 것이다. 리즈는 터무니없을 만큼 또렷하게 그렇게 생각한 뒤, 그것만으로 이미 판단이 흐려진 것은 아닌지 자문했다. 오렌은 존재만으로도 “예”라고 말하고 싶게 만드는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바로 그것이 위험이었다.
켈라프가 물었다.
“무엇을 가져오셨습니까?”
사미라는 초록색 파일을 열었다.
재학 증명서, 주소 증빙, 교사들의 확인서, 처방전, 핸드볼 선수 등록증 사본, 엘리즈에게 보낸 학교 이메일, 사미라가 서명한 결석 사유서, 안경 영수증, 소득세 고지서 두 장, 평범한 종이에 인쇄한 사진들이 있었다. 너무 작은 자전거를 탄 야니스. 치아 교정기를 낀 야니스. 배 위에 고양이를 올리고 소파에서 잠든 야니스. 보기보다 너무 많은 초가 꽂힌 생일 케이크 앞의 야니스.
리즈는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꿈속 식당 테이블이 느닷없이 돌아왔다. 줄지어 놓인 증거들. 떨리는 손. 세계의 끝이 종이 한 무더기로 줄어든 모습.
“아버지는 있습니까?”
세귀르가 부드럽게 물었다.
사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에요. 뭔가를 막아야 할 때만 자기가 아버지라는 걸 기억해요. 해야 할 때는 절대 기억하지 않고요.”
세귀르는 더 묻지 않았다.
야니스가 문간에 나타났다.
“저도 말해도 돼요?”
사미라는 너무 급히 돌아섰다.
“안 돼.”
“할래.”
야니스가 말했다.
아직 사춘기에 갈라진 목소리였다. 아이와 남자 사이, 끝까지 말하기 전에는 울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들의 뻣뻣함이 배어 있었다. 복도에서 그의 뒤에 선 들로네는 막으려 하지 않았다. 스스로 잘못할 권리가 있는 사람을 배웅하듯 문 앞까지 데려왔을 뿐이었다.
리즈는 위원회 전체가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억지로 할 필요 없어.”
그녀가 말했다.
“제가 문제잖아요.”
“아니야.”
“서류에서는 맞아요.”
켈라프가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어른들이 규정을 잘못 써 놓았다고 해서 네가 대답할 의무는 없어.”
야니스는 사미라를 보고, 엘리즈를 보고, 리즈를 보았다. 아직 오렌을 기관처럼 두려워할 만큼 잘 알지는 못했다. 그가 두려워한 것은 더 단순했다. 맞는 주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부두에 남겨지는 가방이 되는 것.
“서류상으로 사미라는 제 엄마가 아니에요. 하지만 진짜 생활에서는 학교에서 전화하면 사미라가 와요. 싱크대 밑에서 물 잠그는 법도 사미라가 가르쳐 줬어요. 방에서 나쁜 냄새가 나면 향수를 뿌릴 게 아니라 어디서 나는지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사미라고요.”
나데주가 눈을 내리깔았다.
사미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덜 강한 여자라면 울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그저 더 무거워진 듯했다.
마송은 메모를 했다.
그 몸짓이면 충분했다.
“그만하세요.”
리즈가 말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기록을 남기는 겁니다.”
“그러니까요.”
몇 초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리즈는 자기가 방금 스스로 모순에 빠졌다는 걸 깨달았다. 기록이 없으면 흔적도 없다. 흔적이 없으면 권리도 없다. 기록이 생기면 소년은 증거 자료가 된다. 부당함은 더 이상 오류 속에 숨어 있지 않았다. 오류를 바로잡으려고 기울이는 바로 그 정성 속에 있었다.
켈라프는 리즈가 깨닫는 모습을 보았다.
“바로 그겁니다.”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사미라는 초록색 파일을 닫았다.
“야니스가 못 올라가면 저도 안 올라갑니다. 당신들 규정은 당신들이 가지세요. 하수도를 마련하는 걸 잊은 나라라면 이미 충분히 겪었으니까.”
그녀는 증명서가 아니라 사진들을 챙겼다.
그 사소한 차이가 리즈에게 아프게 박혔다.
사랑의 증거
그들은 식당 테이블 위에서 서류를 다시 펼쳤다.
진짜 회의실은 보안 보고서 하나와 파리에서 걸려 온 전화 세 통이 차지하고 있었다. 켈라프는 기다리기를 거부했다. 초록색 파일과 마송의 의견서, 임시 규정을 챙겨 건물 식당으로 가서 정수기와 식판 수레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리즈가 뒤따랐다. 나데주도 따라왔다. 세귀르는 망설이다가 커피와, 나쁜 회의실이 때로는 좋은 결정을 구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의 표정을 들고 왔다.
식당에는 축축한 빵과 산업용 세제, 남은 으깬 감자 냄새가 났다. 옆 테이블에서는 보안 요원 둘이 이쪽을 보지 않은 채 식사했다. 비밀 곁에서 일하면서도 그것을 소유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 특유의 조심스러운 예의였다. 창밖에서는 빗방울이 웅덩이에 점선을 찍었다.
켈라프는 종이에 세 칸을 그었다.
“현행법. 확립된 생활. 사기 위험.”
“벌써부터 이 종이가 싫어요.”
나데주가 말했다.
“저도 그래요. 그러니까 채워야죠.”
켈라프가 답했다.
마송은 바인더를 들고 합류했다. 장소를 바꾼 데 대해 항의하지 않았다. 사미라와 엘리즈, 야니스가 아직도 건물에서 기다리는지만 물었다. 들로네가 그렇다고 확인해 주었다. 밖에 나가 바람을 쐬라고 권했지만 세 사람은 거절했다. 야니스는 핫초코를 달라고 해 놓고 마시지 않았다.
“지속적 양육 관계라는 범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세귀르가 말했다.
“범주를 만든다고 정의가 생기는 건 아닙니다.”
켈라프가 답했다.
“그렇죠. 하지만 실제 삶을 서식 오류처럼 취급하지 않게는 해 줍니다.”
“그 삶더러 테이블 위에서 옷을 다 벗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면요.”
리즈는 세 칸을 바라보았다. 필요했다. 혐오스러웠다. 그녀는 자신의 검은 수첩과 봉인, 상충하는 해석들, 자신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증거를 요구했던 방식을 떠올렸다. 모든 보호는 어디에선가 한 번은 사람을 벌거벗기는 일로 시작했다. 문제는 얼마만큼의 내밀함을 남겨 둘 수 있는지 누가 결정하느냐였다.
마송이 바인더를 열었다.
“신고된 양육 애착을 근거로 야니스를 받아들이면 내일부터 형제, 조카, 이웃, 학생, 법적 지위 없이 보호받는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진실한 신청도 있겠죠. 접근권을 얻기 위해 꾸민 신청도 있을 겁니다.”
“그렇겠죠.”
켈라프가 말했다.
“그러면 위험을 받아들이겠다는 겁니까?”
“위험이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겁니다. 같은 말이 아니에요.”
나데주는 생일 케이크 앞에 선 야니스의 사진을 집어 들었다.
“그럼 이 아이를 거절해서 지키는 건 뭔데요?”
“규칙입니다.”
마송이 대답했다.
“규칙이 고맙다고 전해 달래요.”
리즈는 켈라프의 종이를 가져와 네 번째 칸을 덧붙였다.
“증명이 만들어 내는 수치.”
켈라프는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법적 기준은 아닙니다.”
“적어도 경보는 되어야 해요.”
그들은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하지는 않는 표현들을 찾았다. 안정된 양육 관계, 생활 공동체, 일상적 돌봄, 미성년자의 이익, 중대한 단절의 위험. 표현 하나하나가 문을 열면서 곧바로 빗장을 어디에 걸 것인지 물었다.
모로가 커피를 가지러 들렀다. 켈라프가 그를 붙잡았다.
“누군가를 보호하려고 그 사람에게 사생활을 말하게 한 적 있습니까?”
“매일요.”
“어떻게 합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으면 서툴게 하죠. 말하지 않을 것을 본인이 결정하게 둘 수 있으면 조금 낫게 하고요.”
리즈는 그 말을 여백에 적었다.
사미라와 엘리즈, 야니스가 돌아왔을 때 테이블의 모습은 달라져 있었다. 서류는 더 이상 고발장처럼 쌓여 있지 않았다. 나뉘어 펼쳐져 있었다. 사진은 치웠다. 켈라프가 별도의 봉투에 넣어 두었다.
“이 사진들은 쓰지 않겠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사미라는 놀란 듯했다.
“왜요?”
“인쇄된 생일 사진 수로 가족을 재지는 않을 테니까요.”
야니스의 숨이 조금 편해졌다.
임시 결정은 몇 줄로 정리되었다. 오렌은 입주 허가를 받은 거주자와 동행하는 미성년자의 경우, 지속적인 공동생활과 일상적 돌봄 행위, 아동의 직접적 이익으로 확립된 양육 관계를 인정한다. 또한 꼭 필요한 범위를 넘어 가족의 내밀한 삶을 제출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모든 사건은 입주 심사팀 외부의 법률가 한 명과, 요구된 증거가 불필요한 수치를 만들어 내는지 평가하는 담당자 한 명이 다시 검토한다.
“절차가 무겁군요.”
마송이 말했다.
“아이잖아요.”
사미라가 답했다.
그보다 나은 말을 찾은 사람은 없었다.
야니스는 임시 연계 거주권을 얻었다.
그 결정은 모두를 일 분 동안 안도하게 했다. 온전한 일 분. 거의 다정하기까지 한 시간이었다. 규칙은 부러지지 않은 채 휘어졌고, 오렌은 스스로를 바로잡으며 더 나아지는 듯했다. 리즈는 피로가 어깨를 통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때 나데주가 물었다.
“테이블을 두드려 줄 사미라가 없는 아이들은요?”
안도감이 물러났다.
그 밑에 더 차가운 진실이 드러났다. 그들이 방금 구한 아이에게는 오렌에 꼭 필요한 어른과 두꺼운 서류철, 분노한 변호사, 그 자리에 있던 창립자, 자신을 보이게 할 만큼 충분한 말이 있었다.
나머지 아이들은 여전히 다른 곳에 있었다.
너무나 당연한 지원자
마엘 드레젠은 이틀 뒤 두루마리 지도를 팔에 끼고, 바지 아랫단에는 마른 진흙을 묻힌 채 도착했다.
이름을 말하기도 전에 진흙부터 사과해서 타르디외가 웃었다. 실제로 물과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흔히 이런 터무니없는 예의가 있었다. 현실을 묻혀 온 것을 미안해했다.
마엘은 지방정부 소속 엔지니어였다. 제방과 배수 펌프장, 지도에서 잊힌 도랑, 백 년 빈도의 홍수가 한 세대의 기억 속에서 두 번은 오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는 선출직 공무원들을 알았다. 오렌이 자기 오수 위에 번쩍거리며 떠 있는 플랫폼으로 변하지 않으려면 그녀 같은 사람이 필요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지도를 펼쳤다. 오렌의 지도가 아니었다. 프랑스의 어느 해안선 지도였다. 파란 선과 빗금 친 구역, 낮은 도로, 수로에 너무 바짝 붙어 그려진 집들이 보였다. 그녀는 수문 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서 문이 무너지면 두 지자체로 들어가는 도로를 잃습니다.”
손가락을 옮겼다.
“여기서는 오래된 다리가 병목을 만들어요. 몇 년 전부터 알고 있습니다. 적당한 공사 시기를 한 번도 확보하지 못해서 찔끔찔끔 고치고 있죠.”
회색 사각형을 가리켰다.
“여기가 학교입니다.”
리즈는 가끔 검은 수첩의 그림을 볼 때처럼 지도를 바라보았다. 아주 단순한 형상 하나가 재앙 전체를 품을 수 있다는 느낌으로.
“왜 오렌에 지원했습니까?”
세귀르가 물었다.
마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들은 물이 말할 때 들으니까요.”
“듣기 좋은 말이군요.”
“칭찬이 아닙니다. 현재까지의 관찰이에요.”
타르디외가 활짝 웃었다.
마엘은 기적을 약속하지 않았다. 물이 계획을 존중한다고 오렌이 믿지 못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서류도 훌륭했고 사람도 훌륭했다. 그래서 숨 막힐 만큼 어려워졌다.
면담 중간에 델핀 루가 세귀르에게 전화했다. 지사는 아직 동맹이 아니었지만, 적절한 순간의 좋은 전화 한 통이 긴 보고서보다 더 큰 무게를 지닐 수 있음을 이해했다. 세귀르는 마엘에게 스피커폰으로 받아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사의 목소리가 선명한 피로와 함께 방을 채웠다.
“지금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은 지도가 거짓말할 때도 물이 어디로 흐르는지 아는, 이 도에 몇 남지 않은 사람 중 하나입니다.”
마엘이 눈을 감았다.
“델핀.”
“공격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을 설명하는 거예요.”
루가 말했다.
세귀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면 위험이 생긴다고 보십니까?”
“그렇게 보는 게 아닙니다. 확신해요. 하지만 거절하라고 요청하면 모두의 직무 유기를 혼자 대가 치르게 만드는 셈입니다. 받아들이라고 요청하면 그녀를 잃을 지자체들에게 거짓말하는 셈이고요. 세귀르 씨, 어느 비겁함을 택할지 결정하세요. 나는 아직 내 몫을 못 찾았으니까.”
스피커에서 잡음이 났다.
마엘은 지도 위에 손을 얹은 채였다.
“허공에 대고 경고하는 일에 지쳤어요. 바다가 허가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설명하는 것도 지쳤고요. 제대로 된 보고서가 물에 의해 직접 다시 읽히기도 전에 기록 보관소로 들어가는 걸 보는 데도 지쳤습니다.”
“오렌에 온다고 그게 치유되진 않을 겁니다.”
리즈가 말했다.
“그렇겠죠. 그래도 여기서는 문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면, 연기할 문구가 아니라 진짜 문을 찾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녀의 말은 단순했다. 그래서 몹시 아팠다.
켈라프가 물었다.
“당신이 떠나면 원래 부서는요?”
마엘이 웃었지만 기쁨은 없었다.
“아홉 명 몫을 세 사람이 해서 버티는 부서예요. 제가 남으면 형편없이 버틸 겁니다. 떠나면 더 못 버티겠죠. 차이는 눈에 보일 거예요. 하지만 정직한 차이는 아닙니다.”
“무슨 뜻입니까?”
“나를 데려가면 뭔가를 망가뜨린다고 생각하겠죠. 이미 망가져 있어요. 내가 떠나면 그게 더 잘 보일 뿐입니다.”
명확한 권한도 없이 배석하고 있던 나데주가 중얼거렸다.
“새로운 곳은 참 편리하네요. 오래된 벽을 붙들다 지친 사람들을 데려가니까.”
마엘이 들었다.
“부당하죠. 맞아요.”
“그래도 오는 거예요?”
“네.”
그 대답에는 냉소가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더 나빴다. 그녀는 자기가 아는 것에 걸맞은 수준으로 마침내 일하고 싶어서 오는 것이었다. 남는 것 또한 배신이 될 수 있었기에 오는 것이기도 했다.
위원회는 저녁까지 결정을 보류했다.
세귀르는 입주 유예안을 제안했다. 전환 기간 육 개월, 원래 부서에 두 자리의 인건비 지원, 후임자 교육, 해당 도에 오렌의 방법론 접근권 제공. 보클레르는 정치적으로 제시 가능한 해법이라고 했다. 마송은 방어 가능하다고 보았다. 켈라프는 그나마 덜 나쁘다고 평가했다. 마엘은 행정적 보완책으로 사람 하나가 생겨나지는 않는다는 걸 아는 얼굴로 받아들였다.
델핀 루는 한 줄만 보냈다.
“당신들은 방금 떠남의 도덕적 속죄 제도를 발명했습니다. 없는 것보다는 낫죠. 하지만 바로 그것이 문제이기도 합니다.”
리즈는 메시지를 세 번 읽었다.
저녁에 야니스는 사미라, 엘리즈와 함께 식사하고 있었다. 마엘은 밖에서 전화를 하고 있었다. 차양 아래, 지도관을 어깨에 기대어 비를 피하게 한 채였다. 두 건의 입주 허가. 각각 예방책과 보완책, 너무 크게 망가뜨리지 않으려는 진지한 노력이 따라붙었다.
모든 것이 진지했고, 거의 정의로웠다. 그런데도 오렌은 방금,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들의 관계를 구하는 데에는 능숙해도 아직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의 삶을 구하는 데에는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창구의 여자
미레유 코르디에는 역사와 약속이 없었다.
그녀가 약속한 곳은 민원 창구였다. 훨씬 더 정확한 장소였다.
이튿날 그녀는 검은 장바구니와 낡은 외투, 오른손 중지에 잉크 얼룩을 묻힌 채 나타났다. 쉰여덟 살. 삼십 년 넘게 도청 직원으로 근무하며 차량 등록, 협회, 이민자, 과다채무 조정위원회 업무를 거쳤다. 너무 많은 서류를 들고 오는 사람과 아무것도 없이 오는 사람, 빠진 서류 한 장 때문에 인생 전체가 매달리며 치솟는 분노를 상대해 왔다. 지원 서류는 얇았다. 논문도, 특허도, 국제 경험도 없었다. 초기 평가표가 말하는 의미에서 희귀한 직업도 아니었다.
그녀는 두 쪽짜리 편지를 썼다.
나데주는 전날 그 편지를 읽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편지에서 미레유 코르디에는 오렌에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새로 태어난 국가에, 서류를 쥔 모양만 보고도 누가 자신을 방어하는 법을 배웠고 누가 이미 포기했는지 알아보는 사람의 자리가 있는지 알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좋은 창구란 행정이 사람들에게 몸을 낮추는 곳이 아니라, 자기가 분류하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시선을 돌려받는 곳이라고 썼다.
첫 의견서는 신청을 거절했다.
“실질적인 시민행정 경험은 인정되나 현 단계에서 핵심 기능으로 식별되지 않음. 원소속 기관에 계속 근무하는 것이 바람직함.”
미레유 코르디에는 직접 와서 거절을 듣겠다고 요청했다.
“이런 걸 쓸 때 당신들이 어떤 얼굴을 하는지 보고 싶었어요.”
그녀는 리즈, 켈라프, 마송, 세귀르, 나데주 맞은편에 앉았다. 주눅 든 기색은 없었다. 오만해서가 아니었다. 누군가는 결국 상황이 유감스럽다고 말하는 사무실에 너무 오래 익숙해진 탓이었다.
“코르디에 씨, 이의신청을 매우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습니다.”
세귀르가 말을 꺼냈다.
“그게 저한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군요.”
“거절 사유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이미 이해했습니다.”
“그럼 무엇을 요구하십니까?”
그녀는 장바구니에서 고무줄로 묶은 두꺼운 종이 파일 세 개를 꺼냈다.
“제 편지를 읽고 익명 처리된 거절 사례 세 건을 검토해 달라고 보내셨죠. 읽었습니다.”
마송은 놀란 듯했다.
“정식 의뢰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이름을 부끄러워하는 의뢰도 알아봅니다.”
켈라프가 웃음을 감췄다.
미레유는 첫 번째 파일을 열었다.
“이 사람은 거절하는 게 맞아요. 거짓말하고 있습니다. 능력에 대해서가 아니라 동기에 대해서요. 봉사하고 싶다고 하지만, 서류 전체가 면책만 찾고 있어요. 당신들도 느꼈으면서 감히 쓰지 못했죠.”
두 번째 파일을 열었다.
“이 사람은 당신들이 틀렸습니다. 경력이 일관되지 않다고 했죠. 이 여자는 십오 년 동안 다른 사람들의 시간표를 따라 산 겁니다. 자녀, 부모, 단기 계약, 아픈 남편. 일관되지 않은 게 아니에요. 품위 있는 흔적을 거의 남기지 못한 삶이죠.”
세 번째 파일을 열었다.
“이 사람은 모르겠습니다. 당신들의 잘못은 바로 알아야 한다고 믿는 거예요.”
방 안의 집중력이 달라졌다.
미레유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다. 일하고 있었다. 자신이 할 줄 안다고 말한 바로 그 일을 했다. 종이가 드리운 그림자를 읽는 일. 십 분 만에 그녀는 초기 평가표에 들어가지 않는 능력을 보여 주었다. 번듯한 이름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기계나 법률, 제방, 의료 프로토콜, 주권의 구조를 만들어 내지 않았다. 부당함이 너무 빨리 질서로 변장하지 못하게 막을 뿐이었다.
리즈는 덫이 부드럽게 닫히는 것을 느꼈다.
“입주 심사위원회에서 일하셔야겠습니다.”
마송이 말했다.
미레유가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 방금 그 위원회에서 거절당했습니다.”
“그러니까요.”
“아니요. ‘그러니까’가 아닙니다. 제가 이 방에서 말을 잘해서 당신들에게 유용하다는 걸 이제야 발견한 거죠. 제가 들어오기 전부터 해 온 일을 직업으로 인정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나데주가 두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렸다.
“이분 말이 맞아요.”
마송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럴 뜻까지는 필요 없어요. 창구도 사람을 모욕하려고 하진 않습니다. 그래도 모욕하죠.”
세귀르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외부 직책을 검토할 수 있습니다. 원래 부서에 남으면서 오렌의 거절 건을 정기적으로 검토할 권한을 갖는 겁니다.”
미레유는 파일을 닫았다.
“시간제 양심이군요?”
“견제 장치입니다.”
“너무 방해되지 않을 때만 불러오는 견제 장치.”
켈라프가 물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미레유는 리즈를 보았다.
“초기 평가표가 이미 당신들 눈에 필요한 사람이 될 줄 아는 이들을 우대한다는 걸 인정하세요.”
리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미라 베쿠슈는 당신들이 건설하는 세계의 물을 정화할 수 있어서 들어갑니다. 그 아이는 사미라가 들어가니까 들어가고요. 마엘 드레젠은 당신들의 플랫폼이 물에 잠기지 않게 해 줄 테니 들어갑니다. 저한테는 바깥에 남아야 더 쓸모 있다고 하시죠. 그 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맞기 때문에 폭력적인 거예요.”
방은 그 말을 맞아 냈다.
미레유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계속했다.
“프랑스의 공공기관을 텅 비게 만들고 싶지 않은 것도 옳습니다. 기술적 긴급성부터 고려하는 것도 옳고요. 허위 서류를 두려워하는 것도 옳습니다. 거의 모든 점에서 옳아요. 그래서 당신들의 거절은 잘 만들어졌습니다.”
그 단어가 천천히 퍼졌다. 잘 만들어졌다.
리즈는 너무 잘 작동하는 물건들을 생각했다. 소리 없이 닫히는 빗장. 상처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법을 배워 아무도 다치게 하지 않는 듯 보이는 기계.
“제가 받아들일 수 있어요.”
리즈가 말했다.
켈라프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리즈.”
“창립자 특별허가를 요청할 수 있어요.”
“그렇죠.”
미레유가 말했다.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특권이 걱정되는 겁니다.”
리즈는 차분한 뺨 한 대처럼 그 대답을 받았다.
미레유는 파일 세 개를 장바구니에 다시 넣었다.
“제가 당신 마음을 움직였다는 이유로 받아들이면, 제가 비판한 문으로 들이는 겁니다. 거절하면 평생 창구 뒤에서 일한 여자에게, 당신은 그 뒤에 남아 있을 때 가장 중요하다고 쓰는 셈이죠. 둘 다 볼썽사납습니다. 저도 더 나은 답은 없어요.”
그녀는 일어났다.
예의상 세귀르도 일어났다.
“최종 결정은 아직 내리지 않았습니다.”
“저도요. 당신들이 자신이 하는 일을 알고 있는지만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켈라프와 악수하고, 이어 나데주와 악수했다. 리즈 앞에서는 잠시 망설였다.
“작업장에서 일했다면서요.”
“네.”
“그럼 깨끗한 사무실을 조심하세요. 손은 덜 더럽히지만 흔적은 더 잘 남기니까.”
그녀는 떠났다.
복도에서 들로네가 말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깨끗한 편지
코르디에 결정문은 가장 공들여 작성한 문서가 되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회의실 세 곳에서 문안을 다시 썼다. 잊힌 찻잔, 빌린 펜, 누구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여러 판본과 함께였다. 켈라프는 미레유의 실질적 유용성을 언급하되 그것을 위로로 바꾸지 않길 원했다. 세귀르는 오렌이 행정 민원 업무를 경시한다는 인상을 피하고 싶었다. 마송은 기준의 일관성을 지키려 했다. 나데주는 문을 지키는 이들에게 편리한 것을 그만 일관성이라 부르라고 했다.
리즈는 거짓말하지 않는 한 줄을 원했다.
찾지 못했다.
최종본은 이렇게 적었다.
“귀하의 경험은 제도의 일상적 정의에 필수적인 것으로 인정됩니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오렌 준비조직은, 배움을 얻고자 하는 바로 그 공공기관을 한층 더 약화시키면서까지 귀하에게 거주권을 부여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대신 거주 의무가 없고, 보수를 지급하며, 공개 경고권을 보장하는 독립적 거절 심사 직무를 제안합니다.”
켈라프가 리즈 앞에 종이를 놓았다.
“법적으로는 깨끗합니다.”
“그 말 정말 싫어요.”
“저도 그래요.”
나데주는 문안을 소리 내 읽었다. “제도의 일상적 정의”에서 말이 걸렸다.
“장례식 화환 냄새가 나요.”
“대안이 있습니까?”
“편지에 들어갈 만한 건 없어요.”
마송이 안경을 벗었다.
“받아들이면 범위가 엄청난 범주를 여는 겁니다.”
“네.”
리즈가 말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 앞에서 자신을 희귀하게 만들 줄 아는 평범한 사람만 기회를 얻는다는 걸 확인하는 셈이고요.”
“네.”
그는 더 늙어 보였다.
“그럼요?”
리즈는 종이를 바라보았다. 꿈속 연결 통로를 생각했다. 필요한 여자가 충분히 강하게 사랑했고 그 사랑을 관철할 줄 알았기에 입주한 야니스를 생각했다. 떠남을 단단한 종이에 싸기라도 하듯 보완책과 함께 받아들여진 마엘을 생각했다. 그들보다 먼저 구조를 이해한 미레유를 생각했다.
“서명해요.”
리즈가 말했다.
나데주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확실해요?”
“아뇨.”
“전혀 안심이 안 되네요.”
“저도 그래요.”
켈라프는 움직이지 않았다. 기다렸다.
“지금 그 장면에 흔들려 받아들이면, 특별대우를 받으려면 알맞은 방을 뒤흔들 줄 알아야 한다는 걸 확인하는 셈이에요. 내 수치심을 기준으로 삼고 싶지 않아요.”
세귀르는 잠시 눈을 감았다.
“방어할 수 있는 결정입니다.”
“방어 가능하다는 건 좋은 말이 아니에요.”
나데주가 말했다.
“대개 마지막까지 남는 말이죠.”
리즈는 서명했다.
펜이 아무 저항 없이 미끄러졌다. 그것이 가장 불안했다. 떨림도, 맞서는 힘도, 몸속 경보도 없었다. 폭력적인 결정은 평온한 손을 통과할 수 있었다. 잘못처럼 보이지 않았다. 잘 끝낸 일처럼 보였다.
미레유 코르디에는 결정문을 직접 받겠다고 요청했다.
그녀는 하루가 저물 무렵 다시 왔다. 장바구니는 없었고, 아직 젖은 검은 우산만 들고 있었다. 리즈는 그 자리에 있고 싶었다. 켈라프가 동의했다. 뜻밖에도 마송도 함께했다. 거절 하나쯤은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미레유는 천천히 읽었다.
보수나 경고권, 약속된 독립성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약화시키지 말아야 할 공공기관에 관한 구절을 다시 읽었다. 손가락이 그 문장 아래에서 멈췄다.
“제가 중요하니까 밖에 남으라는 말이군요.”
누구도 정정하지 않았다.
“잘 썼네요.”
그녀가 덧붙였다.
“변명이 되지는 않습니다.”
리즈가 말했다.
“그렇죠. 그래서 더 단단한 겁니다.”
그녀는 편지를 반으로 접고, 다시 반으로 접었다. 종이가 또렷한 소리를 냈다.
“심사 직무는 맡겠습니다.”
마송이 놀라 몸을 움직였다.
“받아들이십니까?”
“물론이죠. 당신들이 자신의 거절을 사랑하지 못하게 할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저도 새로 생긴 곳이 늙어 버리기 전에 배울 수 있는지 봐야 하고요.”
그녀는 편지를 외투 안주머니에 넣었다.
“하지만 용서하진 않겠습니다.”
리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다행이군요.”
미레유는 빗속으로 떠났다.
리즈는 복도 창문에서 그녀가 주차장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보았다. 바람 쪽으로 우산을 기울이고 빠르게 걸었다. 아직 타야 할 기차와 돌아갈 부서, 민원 창구,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이들의 효율적인 걸음이었다. 그 사람들은 오렌이라는 이름을 지나치게 거창한 이름으로밖에는 평생 듣지 못할지도 몰랐다.
나데주가 곁에 섰다.
“됐네요.”
“그러게요.”
“흠잡을 데 없는 거절을 만들어 냈어요.”
“네.”
“기분이 어때요?”
리즈는 주차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전부 처음부터 다시 하고 싶어요.”
“그럴 수 없잖아요.”
“그렇죠.”
“그럼 어떻게 할 건데요?”
리즈는 테이블에 남은 결정문 양식을 바라보았다. 여백은 켈라프의 글씨로 가득했고, 세귀르가 지운 자국과 마송의 의견, 나데주가 남긴 커피 얼룩이 있었다. 대충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누구도 자기 일을 쉽게 만들지 않았다. 오렌은 경멸이나 게으름, 천박한 이해관계로 행동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것이 최악이었다. 부당함은 깨끗한 셔츠를 입고, 사유를 재검토하고, 이의절차를 마련하고, 보상을 제안하고, 당사자를 존중하며, 유감을 품은 채 서명했다.
리즈는 새 종이를 한 장 집었다.
맨 위에 썼다.
“부재자와 거절당한 이들의 권리.”
그 아래에는 이렇게 적었다.
“모든 입주 허가는 다른 곳에 초래하는 피해를 검토해야 한다.
모든 거절은 입주 허가에 아무 이해관계도 없는 사람이 다시 심사해야 한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이들에게도, 우리가 그들이 무관하다고 결정하기 전에 변호자가 주어져야 한다.
우리 눈에 유용한 사람과 가깝다는 이유로, 우리 눈에 쓸모없는 사람의 존엄보다 더 많은 권리를 얻어서는 안 된다.”
그녀는 마지막 단어에서 멈췄다.
쓸모없는.
어깨너머로 읽은 켈라프가 말했다.
“그대로 두세요.”
“끔찍한 말이에요.”
“그러니까요.”
세귀르가 다가와 글을 읽었다.
“모든 입주 심사가 복잡해지겠군요.”
“네.”
“그래도 충분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죠.”
그는 위로할 문구를 찾지 않았다.
식당에서 누군가 지나치게 크게 웃었다. 접시 하나가 떨어졌다. 그 소리는 거의 즐거울 만큼 단순하게 복도를 가로질렀다. 오렌은 계속 건설되고 있었다. 펌프, 지도, 아이들, 편지, 조항, 식사, 잘못, 수리. 곤혹스러운 일이 생길 때마다 더 현실이 되었다. 때로는 더 품위 있어졌다. 더 위험해지기도 했다.
리즈는 도덕적 귀족주의가 타인을 경멸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다른 곳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써 주기만 하면 되었다.
제23장
프랑스의 시험
학교로 들어온 물
물은 중학교 화장실을 통해 들어왔다.
처음에는 일층 변기 안에서 갈색 물이 차오르고 형광등 아래 우스꽝스러운 찰랑임이 들렸을 뿐이었다. 그러다 뻘과 차가운 세제, 열린 지하실 냄새가 났다. 시설 관리 직원은 배관이 막힌 줄 알았다. 뚫어뻥을 들고 학생들을 욕하고, 삼 년째 미뤄진 공사를 욕하고, 검게 변한 실리콘 틈을 욕하고, 마을 끝 낮은 지대에 자리 잡은 낡은 건물을 욕했다.
그때 탈의실 샤워 배수구에서 물이 솟았다.
눈에 보이는 분노는 없었다. 물은 차오르며 이음매와 사이펀, 균열,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통로들을 찾았다. 늘 제 몫을 하면서도 훈장을 달라고 요구한 적 없는 곳들이었다.
생로르멜의 장제 중학교는 전날부터 저지대 세 지자체의 대피소로 쓰이고 있었다. 체육관에는 야전 침대가 놓였고, 식당에는 테이블이 마련되었으며, 벽을 따라 멀티탭이 깔렸다. 학생생활부 사무실 뒤에는 의약품을 두는 공간이 생겼다. 가족들은 운동 가방과, 출입은 금지됐지만 차 안에서는 묵인된 개들, 서류 상자, 충전기, 담요, 습관적으로 개어 온 빨래 바구니를 들고 왔다. 처음에 아이들은 그 상황을 거의 재미있어했다. 학교에서 자는 일, 선생님들이 종이컵을 들고 뛰어다니는 모습, 교장이 평소 행사 때와는 다른 목소리로 시청과 통화하는 모습을 신기해했다.
아침이 되자 운동장은 잿빛 물 아래로 사라졌다.
그랑프레 배수 펌프장이 밤사이 멈췄다. 모래주머니를 쌓았는데도 발전기는 밑으로 스며든 물에 잠겼다. 알 길 제방은 아직 버티고 있었지만 힘이라기보다 습관으로 버티는 듯했다. 지방도로 하나가 끊겼다. 마엘 드레젠이 지도에서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그 오래된 다리는 교각에 나뭇가지들을 붙잡아 두고, 하필 물이 느려져서는 안 되는 곳에서 흐름을 막았다.
중학교 교장은 시청에 전화했다. 시청은 도청에 연락했다. 도청은 인원을 확인하려고 다시 시청에 전화했다. 그동안 시설 관리 직원은 화장실 앞에 대걸레를 늘어놓았다. 팔을 늘어뜨리고 가만히 서 있는 것은 차마 못 할 짓이라 무언가라도 하는 사람들의 쓸모없는 끈기로.
도청에서 미레유 코르디에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근무는 두 시간 전에 끝났다. 하지만 긴급 전화 교환대에 통화가 쌓이는 것을 보고 외투를 다시 의자에 걸었다. 그녀는 공황과 명단의 차이를 알았다. 공황은 비명을 질렀다. 명단은 아직 누가 빠졌는지 보게 해 주었다.
그녀는 스프링 노트를 집었다.
“이름, 지자체, 전화번호, 돌봄이 필요한 사람, 치료 중인 질환, 차량, 층수, 끊긴 접근로.”
한 젊은 계약직 직원이 어느 프로그램을 열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아무것도 열지 마세요. 먼저 들어요.”
그는 얼굴을 붉히고는 귀를 기울였다.
델핀 루가 젖은 머리와 비뚤어진 목도리 차림으로 도착했다. 이미 소방대와 민방위, 내무부, 울고 있는 시장 한 명, 전국 방송 카메라가 오는지 알고 싶어 하는 선출직 한 명과 대화를 마친 지사의 얼굴이었다.
“생로르멜은요?”
미레유가 고개도 들지 않고 물었다.
“중학교가 위태로워지고 있어요.”
“몇 명이죠?”
“건물 안에 백사십이 명. 그중 아이가 스물일곱, 노인이 열한 명, 산소 치료 중인 사람이 네 명, 임신 팔 개월인 여성이 한 명.”
미레유는 받아 적었다.
“도로는요?”
“서쪽은 끊겼어요. 동쪽도 간신히 버팁니다. 소방대의 고상 차량은 지나가지만 구급차는 못 갑니다.”
“펌프장은요?”
“침수됐어요.”
“마엘이 뭐라고 썼죠?”
지사는 일 초 동안 눈을 감았다.
그 질문에는 비난이 없었다. 그래서 더 나빴다. 정확했다.
“그 펌프장이 멈추고 오래된 다리에 표착물이 쌓이면, 물이 지하 관로를 찾아 가장 낮은 공공건물로 역류할 거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중학교.”
“그러니까 중학교.”
뒤이은 침묵은 한순간뿐이었다. 방 안에서는 전화가 계속 울리고, 지도는 느리게 불러와졌으며, 누군가는 무전기용 배터리를 찾았다. 통신 상태가 나빠 소방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복잡한 나라 하나가 다시 무질서 속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델핀 루는 개인 휴대전화를 들었다.
“브레스트에 전화하세요.”
미레유가 말했다.
“하고 있어요.”
“최고의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요.”
지사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미레유가 눈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요.”
옳았던 지도
오렌에서 마엘 드레젠은 식당에서 전화를 받았다.
한 손에는 커피 잔을 들고 있었고, 말아 둔 지도는 의자에 기대 놓았다. 떠나기로 결심했지만 아직도 그곳에서 완전히 떠나지 못한 이들의 특별한 피로가 여전히 얼굴에 남아 있었다. 델핀 루에게 인사하지도 않았다. 그저 들었다. 얼굴이 조금씩 굳어 갔다.
리즈는 그녀가 잔을 내려놓는 것을 보았다.
종이컵 안에서 커피가 떨리다 잦아들었다. 리즈는 마엘의 첫마디보다 그 작은 광경에 더 눈이 갔다. 현상이 나타난 뒤부터 그녀는 모든 곳에서 제 높이를 찾는 것들을 보았다.
“생로르멜?”
마엘이 물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펌프장이 멈췄어요?”
또 물었다.
“다리는 아직 버텨요?”
그녀는 눈을 감았다.
“안 돼요, 델핀. 다리가 무너질 때까지 기다렸다 움직이면 문제는 두 개가 되고 도로도 사라져요.”
주변이 조용해졌다. 줄리앵 아우아드는 식판 정리를 멈췄다. 붕대 상자를 세던 카미유 루도는 같은 줄에 손가락을 댄 채 멈췄다. 테이블에서 수학 숙제를 하던 야니스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 채 사미라를 바라보다가, 사미라의 얼굴을 보고 추상적인 어른들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마엘은 식당 테이블 위에 지도를 펼쳤다.
건조하고 거의 난폭한 몸짓이었다. 빵 부스러기와 커피 얼룩, 누군가 두고 간 칼 사이로 해안선이 나타났다. 리즈는 마엘의 지도를 알아보았다. 수문. 낡은 다리. 학교. 파란 선. 저지대.
“여기예요.”
마엘이 말했다.
손가락이 종이를 내리쳤다.
“여기가 중학교.”
손가락을 옮겼다.
“여기가 펌프장. 여기가 다리. 여기가 고지대 도로. 다음 수위 상승 전에 다리에 걸린 무게를 덜고 임시 펌프를 설치하면 몇 시간을 벌 수 있어요. 못 하면 밤에 물길로 대피시켜야 합니다. 산소 치료를 받는 사람들과 이미 겁먹은 아이들을 데리고요.”
“뭐가 필요하죠?”
타르디외가 물었다.
마엘의 목소리를 기술적 경보처럼 듣고 들어온 참이었다.
“대형 펌프 장치 하나, 금속 암거 두 개, 하중 분산판, 도로가 더는 통과할 수 없는 곳을 지나갈 장비.”
“그러니까 크레인.”
“네.”
“구할 수 없겠군요.”
“네.”
타르디외는 지도를 보다가 리즈를 바라보았다.
“도로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무거운 하중도 충분히 가볍게 만들면 옮길 수 있어요. 방송 토론에서 떠드는 것처럼 날리자는 게 아닙니다. 옮기고, 내려놓고, 유도하는 거예요.”
소렐이 물었다.
“어느 모듈로요?”
타르디외는 지도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답했다.
“운용 가능한 활성 모듈 두 개, 노란 프레임, 소형 제어함. 양력은 문제가 아니에요. 환경이 문제죠. 물, 진흙, 충격, 주변 사람들, 나쁜 시야.”
문가에 선 모로가 말했다.
“리즈도 문제입니다.”
아무도 그를 부르지 않았다. 피로가 타인에게 쓸모 있어지는 순간이면 의사는 늘 나타났다.
“잠을 충분히 못 잤어요.”
“충분히 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마엘이 말했다.
모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온화함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의학적 근거가 아니라 분위기군요.”
리즈는 항의하지 않았다.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제 중학교는 회색 사각형일 뿐이었지만, 벌써 테이블과 가방, 아이들, 물이 차오를 때 거의 언제나 서류부터 챙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신분증이 구명조끼라도 되는 것처럼.
세귀르는 전화 통화를 하며 들어왔다.
“네, 지사님. 네. 전달하겠습니다. 아닙니다, 통상적인 지원이 아닙니다. 네, 침수된 지자체에서 ‘실험적’이라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몇 분 뒤 벽면 화면에 보클레르가 나타났다. 침착한 표정을 지을 틈도 없었던 듯했다.
“민방위와 총리실을 통해 요청이 올라왔습니다. 대통령에게도 보고될 겁니다.”
“중학교에도 보고가 되나요?”
나데주가 물었다.
언제부터인지 야니스 곁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보클레르가 잠시 멈칫했다.
“제 말은, 발이 물에 잠긴 사람들도 우리가 적합한 표현을 승인받느라 기다리는 중이라는 걸 알게 되느냐고요?”
“누구도 일부러 늦추고 있지 않습니다.”
“일부러 안 해도 늦어질 때는 대개 그런 식이죠.”
원격으로 연결된 켈라프는 조건을 서면으로 남기라고 요구했다. 말투는 딱딱했지만, 이제 리즈는 그녀를 충분히 알아서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엄격한 민간 구조 목적. 공개 시연 금지. 언론 활용 금지. 팀의 통제를 벗어난 모듈 이전 금지. 리즈의 동의를 다시 확인할 것. 모로가 상태가 버티지 못한다고 판단하면 즉시 중단할 것.”
“깨끗한 문서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 물이 먼저 조건을 다 읽겠군요.”
마엘이 말했다.
켈라프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구조를 방해하려는 게 아닙니다. 사람을 구하는 동안 구조가 다른 것으로 변하지 않게 막는 겁니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불필요한 말이라고 느낀 사람이 없었다. 정확함은 제방이었다. 또 하나의 제방. 약하고, 필요하며, 충분하지 않은.
리즈는 지도 위에 손을 올렸다.
“가겠습니다.”
모로가 코로 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민방위 차량이 아닙니다.”
“네.”
“피곤합니다.”
“네.”
“현장에 가지 않고 사용을 승인할 수도 있습니다.”
타르디외가 고개를 저었다.
“기술적으로는 틀린 말이에요. 모듈은 알려진 절차에는 반응하겠지만 현장에서 조정해야 할 일이 생기면 리즈가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어리석은 위험을 감수해야 해요.”
모로는 소렐을 보았다.
물리학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말이 사실이라서 정말 싫군요.”
리즈는 미레유 코르디에를 생각했다. 외투 속에 접어 넣은 말들. 다른 곳에 필요하다는 평가를 받은 사람들. 프랑스의 시험은 보고서로 오지 않았다. 중학교 화장실을 타고 역류해 왔다.
“누구를 위해 가는 거죠?”
리즈가 물었다.
세귀르는 의아한 듯했다.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서죠.”
“더 정확히 말하세요.”
그는 그녀가 아름다운 대답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빗장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알려졌든 알려지지 않았든, 유용하든 아니든, 지원자든 아니든. 그리고 이미 그들을 떠받치고 있는 현지 공공기관들을 위해서요.”
화면 속 켈라프가 기록하려고 눈을 내렸다.
“그거예요.”
리즈가 말했다.
“그대로 써요.”
고지대 도로
그들은 고지대 도로를 탔다.
군사지도에 표시된 길도, 깔끔한 호송대가 다니는 길도 아니었다. 물에 잠긴 들판과 가득 찬 도랑, 물이 문을 두드리는 동안 위층에 올라가 잠들고 싶은 사람이 없어 일층 불이 켜진 집들 사이로 난 지방도로였다. 선두 차량은 민방위 소속이었다. 뒤따르는 트럭에는 방수포 아래 노란 프레임이 단단히 묶여 있었다. 활성 모듈 두 개는 센서와 케이블, 정지 장치와 함께 회색 상자 안에 놓였다. 연약한 심장보다 더 많은 주의가 따라붙었다.
리즈는 소렐과 들로네 사이에 앉아 있었다.
모로는 본인의 뜻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뜻에 반해 뒷자리에 탔다. 무릎에는 의료 가방을 얹고 있었다. 가방 하나로 충분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따라온 사람의 품위를 지킨 채였다.
앞자리에는 마엘과 타르디외가 있었다. 두 사람은 말이 적었다. 같은 것을 사랑할 필요 없이 같은 긴급성을 알아보는 두 여자였다.
앞으로 갈수록 프랑스는 덜 추상적인 것이 되었다.
더 이상 부처의 지도도, 논설도, 방송 토론의 분노도, “남은 프랑스”라는 제목의 서류도 아니었다. 절반쯤 물에 잠긴 속도 제한 표지판, 쓰레기봉투로 가득한 버스 정류장, 담요를 실은 외바퀴 손수레를 미는 장화 신은 남자, 발목까지 물에 잠긴 집 앞에서 전화하며 떨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크게 웃는 여자였다. 주황색 조끼를 입은 지방 공무원들은 차단하고 경고하려는 것인지, 그저 공포에 형태를 부여하려는 것인지 아직 알 수 없는 바리케이드를 날랐다.
리즈는 판자로 막아 둔 약국을 보았다. 그래도 문을 연 빵집도 있었다. 매트리스를 가득 실은 트레일러를 끄는 트랙터. 사료 포대를 나르는 두 십 대 소년은 국가 임무라도 수행하듯 진지했다.
리즈는 생각했다. 서류가 없는 사람들이 바로 저기 있구나.
생로르멜에 닿기 전, 고지대 도로는 더 이상 고지대가 아니었다.
빠른 물결이 아스팔트 위를 덮쳐 흘렀다. 차량들은 속도를 줄였다. 노란 프레임을 실은 트럭이 신음하더니, 변압기 주변에 모래주머니를 쌓아 둔 회전교차로 근처에서 멈췄다. 소방대장이 마중을 나왔다. 얼굴은 패였고 어깨에는 무전기가 달려 있었다. 그는 꼭 필요한 시간보다 더 오래 리즈를 바라보지 않았다.
“오렌에서 오셨습니까?”
터무니없으면서도 정확한 질문이었다.
리즈가 답했다.
“저 혼자 오렌은 아니에요.”
그는 웃을 틈이 없었다.
“중학교는 버티고 있지만 관로를 타고 물이 차오르고 있습니다. 취약한 사람들부터 뒤쪽으로, 보트에 태워 대피시키는 중입니다. 도로가 불안정해서 구급차가 못 들어옵니다. 다리가 물길을 막고 있어요. 중장비를 쓰면 강둑까지 쓸려 갈 위험이 있습니다.”
마엘은 벌써 물속에 장화를 담그고 있었다.
“보여 주세요.”
“드레젠 씨?”
“네.”
그 이름이 묘한 효과를 냈다. 유명인을 알아본 것이 아니었다. 넘치기 전부터 도랑을 알던 사람이 도착했을 때 느끼는 훨씬 실용적인 안도였다.
“떠나신 거 아니었습니까?”
“보시다시피 충분히 멀리는 못 갔네요.”
소방대장은 그녀를 비닐 코팅 지도 한 장이 보닛 위에 펼쳐진 밴으로 안내했다. 델핀 루가 도청에서 화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중위가 들고 있는 화면 속 얼굴에는 화소가 거칠게 번졌다. 뒤로는 전화와 목소리, 누군가 이름의 철자를 하나씩 불러 주는 소리가 들렸다.
“마엘.”
지사가 말했다.
“델핀.”
두 이름 사이에는 무시된 보고서와 쓸모없던 회의, 예산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작은 승리들이 너무 오랜 세월 쌓여 있었다. 리즈가 끼어들 수 없는 시간이었다. 한 걸음 뒤에 머물렀다. 늘 그렇듯 들로네는 그 거리를 이해하고 그녀 대신 지켜 주었다.
타르디외가 지면을 살폈다.
“여기에는 프레임을 못 놓아요. 너무 물러요.”
“그럼 어디죠?”
마엘이 물었다.
“저기 낮은 담 옆. 기초가 버틴다면요.”
“버텨요. 지금까지는.”
“지금까지는 데이터가 아니에요.”
“지난 십오 년 동안 프랑스가 내게 준 데이터는 그게 전부예요.”
타르디외는 그 대답을 사용 가능한 재료로 받아들였다.
계획은 빗속에서 선 채로 만들어졌다.
대형 펌프 장치 하나와 암거 두 개의 무게를 덜어, 일부 침수된 도로를 지나 펌프장까지 옮겨야 했다. 그다음에는 인근 공사장에서 떠내려와 교각에 걸린 금속 들보를 가볍게 해 낡은 다리를 뚫어야 했다. 아직 버티는 구조물까지 뜯어내서는 안 됐다. 전부 구할 수는 없었다. 몇 시간은 벌 수 있었다. 어쩌면 반나절. 중학교를 제대로 대피시키고, 전방 의료소에 다시 전력을 공급하며, 밑으로 물이 역류하는 것을 막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볼거리는 아니군요.”
이어폰에서 보클레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즈는 그가 자신에게 말한 것인지 세귀르에게 말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잘됐네요.”
그녀가 답했다.
마엘이 고개를 들었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볼거리가 되어선 안 됩니다.”
중학교에서는 돌봄이 필요한 사람부터 대피를 시작한다고 알렸다. 교장은 침착하게 말하려 했다. ‘순서’라는 단어에서 목소리가 떨렸다. 어린 여자아이가 자기 시 노트도 가져가도 되느냐고 물었다. 아무도 대답을 찾지 못했다. 생활지도 교사가 황급히 “그래”라고 했다. 주머니에 들어가는 작은 세계 하나를 구하듯이.
리즈는 그 장면을 보지 못했다. 나중에 전해 들었다.
그 순간 그녀가 본 것은 방수포에서 나온 노란 프레임과 빗속에서 열리는 회색 상자뿐이었다.
모듈은 이 장소에 비해 지나치게 깨끗해 보였다.
리즈는 그것들을 더럽히고 싶었다.
너무 적게 붙들기
첫 번째 인양은 실패할 뻔했다.
북쪽 모듈이 하중을 받았다가 놓쳤고, 진동하며 다시 받았다. 모두가 뒷걸음질 쳤다. 펌프 장치는 트럭 적재함에서 몇 센티미터 떠오른 채 천천히 제자리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날아오른 것이 아니었다. 질량의 나쁜 망설임이었다. 벨트가 신음했다. 소방관 한 명이 욕설을 뱉었다. 타르디외는 회전을 막으라고 외쳤다. 소렐은 자신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온 사람들을 더 물러서게 하라고 했다.
리즈는 제어함 위에 손을 얹고 있었다.
세계도, 프랑스도, 오렌도 생각하지 않았다. 펌프 장치의 실제 무게와 트럭 밑의 진흙, 제대로 접히지 않은 방수포를 잡아끄는 바람, 비 오는 지방도로를 한 번도 상정한 적 없는 오래된 밤의 도형을 생각했다. 검은 수첩의 형상들은 빈 아파트와 브레스트의 방, 관리된 수조에서 태어났다. 여기서 그 형상들은 장화와 자갈, 곱은 손가락, 잡음이 이는 무전기, 중학교의 임신부, 물에 잠긴 펌프장, 모래주머니로 둘러친 변압기를 만났다.
현상은 어림짐작을 싫어했다. 삶도 그랬다.
“셋만큼 낮춰요.”
리즈가 말했다.
타르디외가 물었다.
“셋, 뭐를요?”
“몰라요. 당신들 언어로 셋.”
소렐이 먼저 이해했다.
“경감량을 줄여요. 지면에 무게를 남겨 두세요.”
타르디외가 전달했다.
펌프 장치가 조금 내려왔다. 운반대 바퀴가 다시 접지할 만큼, 도로가 삼켜 버리지 않을 정도로만. 하중은 회전을 멈췄다.
“그래요.”
마엘이 말했다.
“아직 세계를 누를 무게가 남아 있어야 해요.”
리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엘은 일부러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었다. 사건의 말 없는 부분에서는 자주 그런 일이 생겼다. 사람들은 자기가 아는 것보다 더 정확한 말을 찾아냈다.
호송대는 걸음 속도로 나아갔다.
소방관 둘이 낮은 손짓으로 바퀴를 유도했다. 타르디외는 프레임 옆을 걸으며 벨트를 주시했다. 소렐은 수치를 따라갔다. 모로는 리즈를 살폈다. 들로네는 인간적인 위협으로 변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불가능한 상황을 사랑하는 그의 방식이었다.
중간쯤 갔을 때 집에서 여자 한 명이 뛰어나왔다.
너무 얇은 모직 외투를 입고 약 상자가 든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무슨 말을 외쳤지만 알아듣지 못했다. 소방관 한 명이 그녀에게 갔다. 여자는 남편도 중학교 사람들 다음에 대피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남편이 보일러를 끄기 전에는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버틴다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분별 있는 사람이라고 자꾸 되풀이했다. 소방관은 가겠다고 대답했다. 여자가 언제냐고 물었다. 그는 시간을 말하지 않았다.
“갈 수 있는 대로 바로요.”
리즈는 들었다.
결정이 이루어지는 방에서 ‘갈 수 있는 대로’는 무력함이다. 여기서는 팔이 버티는 끝에서 건네는 약속이었다.
그들은 오후 중반에 펌프장에 도착했다.
낮은 건물은 문턱까지 잠겨 있었다. 물은 마치 펌프장이 수년간 맡아 온 것을 토해 내기로 한 것처럼 문으로 쏟아졌다. 두 번째 차량에 기술팀과 함께 도착한 사미라 베쿠슈는 펌프와 케이블, 배관 구멍을 살피고 재킷을 벗었다.
“전원 차단한 사람?”
지방 공무원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접니다.”
“잘했어요. 뒤쪽 맨홀을 아는 사람은요?”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사미라는 마엘을 보았다.
“너는 알지?”
“응.”
“그럴 줄 알았어.”
두 사람은 소방관 둘과 손전등 하나를 데리고 무릎까지 물에 들어갔다. 카미유의 감독 아래 차량 곁에 남은 야니스는 따라가려 했다. 사미라가 한번 노려보자 바리케이드보다 확실하게 그 자리에 멈췄다.
“거기 있어.”
“저도 도울 수 있어요.”
“내가 젊어서 죽을 이유 하나쯤은 더 만들지 않는 걸로 도와.”
야니스는 남았다.
리즈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십 대의 두려움에는 대의명분의 고귀함이 없었다. 생생하고, 화가 나 있고, 거의 부끄러워 보였다. 자신을 보이게 해 준 사람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오렌은 이틀 전 그를 받아들였다. 오늘 프랑스는 받아들여졌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물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다.
첫 번째 펌프 장치가 금속성 목구멍 같은 소리를 내며 작동했다.
몇 분 동안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수위 상승이 멎었다.
승리는 아니었다. 패배가 잠시 중단된 것이었다.
무전기의 말투가 곧바로 달라졌다. 중학교는 더 천천히 대피할 수 있었다. 구급차가 동쪽으로 지나갈 틈이 생길지도 몰랐다. 시청에서는 바슈맹 지역을 지금 대피시켜야 할지 기다려야 할지 물었다. 델핀 루는 지금이라고 답했다. 선출직 한 명이 항의했다. 그녀는 다시 지금이라고 말했다. 뒤에서 미레유는 노트에 이름과 치료 내용을 적고 있었다.
아직 낡은 다리가 남았다.
교각에 걸린 들보는 도로 공사장에서 떠내려왔다. 제대로 고정되지 않은 야적장을 빠져나와 도랑을 건너고 울타리를 쓰러뜨린 뒤, 행정적 과오가 무거운 물체로 변한 듯 그곳에 박혔다. 너무 세게 치우면 표착물이 한꺼번에 흘러가 하류 둑을 때릴 것이다. 그대로 두면 상류의 물이 계속 차오를 터였다.
타르디외가 말했다.
“들어 올리면 안 돼요. 무게만 덜어 회전시켜야 합니다.”
“빨간 요람 때처럼.”
리즈가 중얼거렸다.
소렐이 들었다.
“빨간 요람 때와 같지 않아요.”
“봤어요.”
말이 너무 빨리 튀어나왔다. 대화를 닫아 버리는 오래된 반사적 대답임을 리즈는 바로 느꼈다. 다시 말했다.
“그 뜻이 아니라, 차이를 안다는 말이에요.”
소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듈은 보조 슬링에 고정되었다. 지방정부 장비가 강둑에서 잡아당겼다. 소방관들은 구경꾼들을 물러나게 했다. 사실 그들은 구경꾼이 아니었다. 자기 거리를 위협하는 물건이 움직일지 보고 싶은 주민들이었다. 바리케이드 뒤에서 믿어 달라는 요구를 받는 이들을 가리킬 더 나은 말이 없어서 구경꾼이라 불렀다.
리즈는 타르디외가 원하는 것보다 경감량을 낮게 설정했다.
“너무 적어요.”
타르디외가 말했다.
“아직 저항해야 해요.”
“시간을 잃을 겁니다.”
“네.”
처음에는 들보가 버텼다.
물은 들보에 부딪혀 하얀 조각으로 부서졌다. 나뭇가지들이 떨렸다. 파란 비닐봉지 하나가 앵글에 매달린 채 터무니없고 외설스럽게 펄럭였다. 그러다 금속이 움직였다. 일 센티미터. 이 센티미터. 장비가 당겼다. 모듈이 무게를 덜었다. 들보는 천천히 회전했다. 둑을 뜯어내지 않고 물길을 열 만큼만.
누군가 환호했다.
리즈는 자신이 쓰러질 것 같았다.
정말 쓰러지기 전에 모로가 팔을 붙잡았다.
“쉬어요.”
“안 돼요.”
“돼요.”
“중학교가…”
“대피 중이에요.”
“다리는…”
“다리도 움직였어요.”
“끝내야 해요.”
모로는 때때로 불길한 곡선을 볼 때처럼 그녀를 바라보았다.
“뭘 끝내겠다는 겁니까? 지난 이십 년 동안 하지 않은 모든 일을 오후 한나절에 구해 내려고요?”
리즈는 대답하려 했으나 말을 찾지 못했다.
빗줄기가 더 거세졌다.
무전기 스피커에서 첫 번째 산소 치료 환자가 중학교를 빠져나왔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리즈는 눈을 감았다.
몇 초 동안 그녀가 떠받친 것은 그 소식 하나뿐이었다.
결코 요청하지 않았을 사람들
중학교는 해가 지기 전에 대피를 마쳤다.
우아하지도, 빠르지도 않았으며, 사후 평가서와 비슷한 구석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자 한 명이 약 가방을 잃어버렸다가 나중에 테이블 밑에서 찾았다. 아이 한 명은 보트 안에서 토했다. 노인 한 명은 아내의 사진 없이는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고, 자원봉사자 둘이 체육관을 뒤져 비닐 주머니에 든 사진을 찾아냈다. 교장은 체육 창고 뒤에서 울고 난 뒤, 잘 써지지 않는 펜으로 다시 명단을 확인했다.
마지막 무리가 나올 때 리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모로가 항의했지만 전보다 약했다. 그녀가 봐야 한다는 걸 이해한 것이다. 엿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빚이 있기 때문에.
일층 복도에는 오수와 소독약 냄새가 났다. 학생들이 만든 게시물이 벽에서 물결치듯 휘었다. 한 게시판에는 세계의 강에 관한 발표물이 붙어 있었다. 오려 붙인 사진과 사인펜으로 쓴 제목, 교사의 손이 고친 오탈자들이 보였다. 식당에서는 의자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한구석에 종이컵들이 떠다녔다. 빨간 필통 하나가 라디에이터 위에 남겨져 있었다.
리즈는 화장실 앞에서 멈췄다.
더 이상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 사실 때문에 바닥에 주저앉고 싶었다.
미레유 코르디에가 델핀 루와 함께 중앙 복도로 들어왔다. 외투를 입은 채였고, 구두는 망가졌으며, 여전히 스프링 노트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오셨네요?”
리즈가 물었다.
“바깥에 있어야 더 쓸모 있다고 들었거든요.”
잔인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미레유는 이미 열린 상처를 다시 때릴 필요가 없었다.
“오늘은 바깥이 여기였어요.”
리즈는 노트를 바라보았다.
“이름이 다 있나요?”
“찾은 사람들. 아직 찾는 사람들. 물이 들어오기 전에는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서 어떤 명단에도 없던 사람들까지요.”
델핀 루는 젖은 목도리를 벗었다.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잠정 피해는 양호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양호하죠?”
나데주가 물었다.
그녀도 와 있었다. 누구도 공식적인 역할을 주지 않았다. 오후 내내 담요를 나누고, 지나치게 긴 지시를 알아듣게 바꾸고, 우는 여자를 찍으려던 지역 기자를 막고, 몇몇 공무원마저 존중하게 된 솜씨로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지사는 질문을 받아들였다.
“중학교에서는 사망자가 없습니다. 두 명이 입원했고요. 바슈맹 지역에서 한 명이 실종됐지만, 전화 없이 언니 집으로 갔을 가능성이 큽니다. 누전 화재로 집 한 채를 잃었습니다. 펌프장은 부분적으로 다시 가동 중이고, 다리는 계속 감시하고 있습니다. 대피를 끝낼 만큼의 시간은 벌었습니다.”
“그러니까 양호하다.”
나데주가 말했다.
“그러니까 어젯밤 예상보다 덜 끔찍하다는 뜻입니다.”
미레유가 덧붙였다.
“그 차이는 중요해요.”
리즈는 세 여자를 바라보았다. 지사, 민원 창구 직원, 나데주. 오렌의 초기 평가표로는 누구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충분히 희귀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얽매여 있었다. 무거운 의미에서 너무 프랑스적이었다. 장소와 시간표, 지역의 분노, 잘못 작성된 서류, 무언가 넘쳐흐를 때만 보이는 사람들에게 묶여 있었다.
마엘도 들어왔다. 허리까지 젖고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어 있었다.
“몇 시간은 펌프가 버틸 겁니다.”
“그다음은요?”
세귀르가 물었다.
마엘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다음에는 수리해야죠.”
그 말은 담담하게 떨어졌다.
수리한다. 구한다도, 증명한다도, 세운다도 아닌 말. 수리한다.
리즈는 모든 일이 어쩌면 이 단어에서 시작되어야 했고 끝까지 놓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시청으로 안내되었다. 시의회 회의실은 지휘소로 쓰이고 있었다. 공식 인물 사진들은 습기를 피해 장 위로 옮겨져 있었다. 자원봉사자들이 테이블 위에 보온병을 놓았다. 선출직 한 명은 게시판에 머리를 기댄 채 앉아서 자고 있었다. 벽의 마을 지도에는 빨간 선과 접착 메모지가 가득했다.
보클레르가 전화했다.
세귀르는 스피커폰을 켰다.
“대통령께서 현장 요원들에게 감사를 전하셨습니다. 총리실은 짧은 보도문을 준비 중입니다. 오렌은 민방위 작전에 대한 기술 지원으로만 언급될 겁니다.”
“안 돼요.”
리즈가 말했다.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무 피곤해서 신중한 표현을 찾을 힘도 없었다.
“기술 지원이라고 하지 마세요.”
“무슨 뜻입니까?”
“프랑스의 공공기관과 지자체, 소방대원, 공무원, 주민들, 그리고 오렌 준비조직이 함께 일했다고 하세요. 그 순서든 다른 순서든 상관없지만, 오렌만 말하면 안 됩니다.”
보클레르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정치적으로는 체제가 작동한다는 걸 보여 줘야 합니다.”
미레유가 딱 소리가 나게 노트를 닫았다.
“이미 열쇠와 밸브가 어디 있는지, 어느 노인이 아픈지, 어느 도로가 거짓말하는지, 어느 다리가 엉성하게 수리됐는지, 어느 집에 차가 없는지 아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작동한 겁니다. 그것도 보도문에 넣을 수 있나요?”
스피커폰에는 엘리제궁의 침묵이 흘렀다.
델핀 루가 기쁨 없이 웃었다.
“그 문안이라면 서명하겠습니다.”
마엘도 말했다.
“저도요.”
나데주가 손을 들었다.
“서명은 안 해도 시끄럽게 찬성할 수 있습니다.”
리즈는 거의 웃을 뻔했다.
마침내 보클레르가 말했다.
“문안을 보내십시오.”
“미레유.”
리즈가 말했다.
미레유가 바라보았다.
“네?”
“써 주세요.”
“저는 당신의 연설문 작성자가 아닙니다.”
“네. 그래서 부탁하는 거예요.”
미레유는 앞에 놓인 컴퓨터가 아니라 시청 편지지를 집었다. 천천히 썼다. 델핀 루가 수정 두 군데를 제안했다. 세귀르는 세 번째를 냈다. 나데주는 행사 냄새가 나는 단어 하나를 뺐다. 마엘은 배수 펌프장의 이름을 덧붙였다. 큰일 날 뻔한 장소들은 자기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었다.
최종 문안은 짧았다.
생로르멜 작전은 구조대와 지방 공무원, 현지 기술팀, 도청이 수행했으며, 오렌 준비조직은 제한적으로 지원했다고 적었다. 목적은 힘을 보여 주는 데 있지 않았고, 대피하고 물을 퍼내고 수리할 시간을 버는 데 있었다고 했다. 얻은 교훈은 관련 지방자치단체들과 공유한다고 했다. 마지막에는 피해 주민들이 담당 공공기관의 지원을 받을 것이라고 적었다. 나데주는 그 문구를 빼고 싶어 했지만 미레유가 남겼다.
“왜요?”
나데주가 물었다.
“실제로 그 지원이 꼭 필요할 테니까요. 적어도 나중에 우리에게 들이밀 문구 하나는 있어야죠.”
리즈는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문구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훗날 요구해야 할 사람들이 붙잡을 손잡이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밤이 되자 오렌은 더 이상 새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노란 프레임은 진흙투성이였다. 모듈은 닦고 점검한 뒤, 거의 터무니없을 만큼 조심스럽게 상자에 다시 넣었다. 타르디외는 손을 베었다. 사미라는 의자에서 십오 분간 잠들었다. 벽에 머리를 젖힌 채였고 야니스는 수프 한 잔을 들고 곁을 지켰다. 마엘은 지도 앞에서 여전히 지방 공무원과 이야기했다. 모로는 마침내 리즈를 앉혔다.
옷은 축축했고 머리카락은 목덜미에 붙었으며 입은 말랐다. 손은 예상보다 덜 떨렸다.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몸이 예외를 평범한 하루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세귀르가 곁에 앉았다.
“이 일이 무엇을 불러올지 아십니까?”
“요청들?”
“아주 많이요.”
“분노도?”
“그것도요.”
“원칙과 이론들?”
“내일부터 바로.”
리즈는 방을 바라보았다. 잔과 지도, 외투와 무전기, 앉아서 자는 사람들, 다른 곳에서는 아직 물이 계속 차오르기에 말을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
“그럼 그들보다 먼저 써야죠.”
“무엇을요?”
그녀는 수첩을 찾았다. 없었다. 들로네가 아무 말 없이 가장자리가 젖은 시청 메모지를 내밀었다.
리즈는 썼다.
“오렌은 자신의 힘을 모범적이라고 제시할 줄 아는 상황과 사람, 지역에만 사용해서는 안 된다.
구조는 먼저 누가 자격이 있는지 묻지 않는다.
무엇이 무너지는지, 누가 그 밑에 있는지, 누가 이미 떠받치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녀는 멈췄다.
세귀르가 읽었다.
“위험한 원칙입니다.”
“네.”
“아주 먼 곳까지 우리를 끌고 갈 수 있어요.”
리즈는 첫 문장들을 바라보았다. 손이 떨려 글씨도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게 핵심인 것 같아요.”
밖에서 사이렌이 마을을 가로질렀다. 일반 경보는 아니었다. 차량 한 대가 다른 거리, 다른 지하실, 누군가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고집스럽게 집을 떠나지 않을 또 다른 사람을 향해 출발하는 소리였다.
리즈는 눈을 감았다.
처음으로 세계의 무게가 위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아래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제24장
세계를 붙드는 것
더러워진 상자들
그들은 동이 트기 전에 오렌으로 돌아왔다. 바퀴 밑에는 진흙이 묻었고 옷에는 젖은 체육관 냄새가 배어 있었다.
호송대는 의전용 진입로를 이용하지 않았다. 대형 화물과 기술 장비 상자, 분리수거 폐기물, 나사 부품 팔레트, 세탁물 자루가 드나드는 작업용 경사로를 탔다. 노란 프레임을 실은 트럭은 격납고 문 앞에서 지나치게 부드럽게 멈췄다. 몇 초 동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와이퍼는 햇빛 없는 아침의 잿빛 내부밖에는 보이지 않는 앞유리를 계속 쓸었다.
타르디외가 가장 먼저 내려 방수포를 열었다.
노란 프레임은 군데군데만 노란색이었다. 진흙이 기둥 위에서 판처럼 말라붙었다. 모서리에는 낙엽이 끼었다. 모래주머니나 임시 바리케이드에서 뜯겨 나왔을 파란 끈 하나가 손잡이에 아직 매달려 있었다. 모듈 하나에는 길고 얕지만 눈에 띄는 흠집이 났다. 손댈 수 없는 물건이라 믿었던 것에 생긴 손톱자국 같았다.
“사진 찍기 전에는 아무것도 닦지 마세요.”
타르디외가 말했다.
천을 든 기술자가 망설였다.
“뻘도요?”
“뻘은 특히요.”
그는 천을 내려놓았다.
리즈는 트럭 문턱에 그대로 서 있었다. 장화가 발판 위에서 무거운 소리를 냈다. 오는 길에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고 이십 분쯤 잤지만, 조금도 쉰 것 같지 않았다. 잠은 구멍처럼 그녀를 삼켰다가 눈 뒤쪽의 통증과, 몸이 여전히 소방대 무전기를 듣고 있다는 감각만 남기고 뱉어 냈다.
모로가 아래에서 기다렸다.
“의무실로 갑시다.”
“모듈부터 보고 싶어요.”
“도망가지 않습니다.”
“저도요.”
“그걸 확인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는 웃지 않았다. 명령보다 그 표정에 더 설득되어 리즈는 따라갔다.
생로르멜을 겪고 난 뒤 의무실로 가는 복도는 지나치게 깨끗했다. 회색 바닥, 안정된 조명, 번호가 붙은 문들, 중성 비누 냄새. 새 장소에는 그런 무의식적인 오만이 있었다. 사람들이 흔적을 이해하기도 전에 너무 빨리 지워 버렸다. 리즈는 장화가 바닥에 갈색 자국 두 개를 남기는 것을 보았다. 사과할 뻔했다. 그러다 그러고 싶지 않아졌다.
작은 진료실에서 모로는 재킷과 장화, 젖은 스웨터를 벗으라고 했다. 간호사는 체온과 혈압, 산소포화도, 체중을 쟀다. 리즈가 순순히 질문에 대답하자 모로는 수치만큼이나 걱정스러워했다.
“춥습니까?”
“아니요.”
“통증은요?”
“평소보다 심하진 않아요.”
“메스꺼움?”
“조금.”
“어지럽습니까?”
“빨리 일어나면요.”
“어제 점심 이후로 뭘 먹었죠?”
리즈는 기억을 더듬었다.
“수프.”
“그걸 묻는 게 아닙니다.”
“빵도 한 조각 먹었어요.”
모로가 기록했다. 펜을 놓고 측정용 밴드를 집었다. 화면에 곡선이 나타났다. 그는 곧바로 말하지 않았다. 그 침묵 때문에 리즈가 눈을 들었다.
“왜요?”
“맥박이 너무 깨끗해요.”
“심장이 예의 바른 것도 문제예요?”
“방금 한 일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리즈는 곡선을 보았다. 올라갔다 내려가고, 스스로 바로잡으며, 뚜렷한 혼란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느끼는 몸과는 전혀 달랐다. 몸속은 작은 부품들이 어긋난 듯했고, 다리는 무거웠고, 손은 텅 비었고, 이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해가 안 돼요.”
“어쩌면 몸이 예외 상태를 정상적인 운용 조건으로 흡수하기 시작한 겁니다. 너무 빨리 보상하고, 너무 빨리 입을 다물어요. 이건 평온이 아닙니다. 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는데 울리기를 멈춘 경보예요.”
간호사는 붕대 쟁반으로 눈을 돌렸다. 모로는 환자 앞에서 극적으로 말하는 것을 싫어했다.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자기 말의 무게로부터 리즈를 보호하려는 시도를 포기했다는 뜻이었다.
“입원시키려고요?”
“관찰할 겁니다.”
“그쪽이 더 우아하네요.”
“더 정확한 말입니다.”
그는 담요를 건넸다.
리즈는 받아 들었다. 손가락이 흰 천에 잿빛 자국을 남겼다.
“모듈이 더러워졌어요.”
그녀가 말했다.
“당신도요.”
“아뇨. 모듈은 그게 더 좋아요.”
모로는 기다렸다.
리즈는 담요를 몸에 바싹 당겼다.
“마침내 뭔가에 쓰인 것처럼 보이잖아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중에 타르디외가 첫 사진들을 들고 의무실로 왔을 때, 리즈는 침대에 앉아 있었다. 머리카락은 아직 축축했고 두 손에는 식은 차가 담긴 잔을 들고 있었다. 타르디외는 사진을 이불 위에 펼쳤다.
진흙, 상자, 프레임, 파란 끈, 흠집, 제어함에 남은 장갑 자국.
“시료를 채취했어요. 흙, 물, 탄화수소, 식물 조각. 오염 하나하나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게 될 겁니다.”
“기쁘군요.”
“네.”
타르디외는 굳이 부정하는 척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주로 실험실과 수조, 통제된 시험뿐이었어요. 모래 이 킬로그램과 선풍기 하나를 가져다 놓고 더러운 상황이라고 믿은 시나리오들이었죠. 이제 모듈 주위에 진짜 세계가 생겼습니다. 깨끗한 실험 열 번보다 훨씬 많은 걸 가르쳐 줄 거예요.”
“나한테도요?”
타르디외는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당신한테도요.”
복도에서 소리가 났다. 빠른 발걸음이 오다가 느려졌다. 세귀르가 열린 문을 두드렸다. 생로르멜에서 입었던 구겨진 재킷 그대로였다. 아침 수염 탓에 고위직 느낌이 줄어들고, 본의 아니게 거의 정직해 보였다.
“방해합니까?”
“네.”
뒤에서 모로가 말했다.
세귀르는 그래도 들어왔지만 딱 한 걸음만 들였다.
“총리실에서 한 시간 안에 상황 보고를 요구합니다. 엘리제궁도요. 관련 부처들이 초기 지침을 원합니다.”
모로는 팔짱을 꼈다.
“자는 중입니다.”
“깨어 있는데요.”
“그건 행정적인 차이죠.”
리즈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벌써 썼나요?”
세귀르는 찰나 동안 망설였다.
“몇 가지 판본이 돌고 있습니다.”
“보여 줘요.”
모로가 안 된다고 했다.
리즈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내가 자는 동안 그들이 쓸 거예요. 잠은 나중에 잘게요.”
“그 말을 너무 여러 밤째 하고 있습니다.”
모로가 답했다.
그의 입에서 나오니 이상한 표현이었다. 비유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의료기록과 이어지는 밤들, 표와 날짜, 예외들에서 나온 말이었다. 타르디외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리즈는 웃지 않았다.
“이십 분만요. 그다음에는 침대에 넣든 봉인하든 마음대로 해요.”
모로는 세귀르를 보았다.
“이십 분. 단 일 분도 넘기지 마세요.”
세귀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모든 약한 제방이 그렇듯, 문서를 여는 순간부터 이십 분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깨끗한 종이
첫 번째 문안에서는 난방된 사무실과 현실을 바깥에 세워 둔 냄새가 났다.
빨간 머리글과 세 부처의 이니셜, 너무 적은 진흙을 담은 문서가 보안 태블릿으로 도착했다. 세귀르는 의무실 이동식 테이블에 태블릿을 놓았다. 리즈는 받아 들기를 거부했다. 인쇄해 달라고 했다.
“왜죠?”
세귀르가 물었다.
“종이는 더러워질 수 있으니까요.”
행정 복도에서 프린터를 찾았다. 문서는 따뜻한 채 나왔고 스테이플러 철심은 비뚤게 박혀 있었다. 리즈는 더러운 손가락으로 종이를 받았다.
“민방위 작전을 지원한 오렌 준비조직의 통제된 기술 개입.”
그녀는 첫 줄을 두 번 읽었다.
“안 돼요.”
“초안일 뿐입니다.”
세귀르가 말했다.
“이미 잘 다려 놓은 거짓말이에요.”
타르디외가 종이 위로 몸을 숙였다.
“통제됐다고요?”
“총리실 표현입니다.”
세귀르가 말했다.
“그럼 총리실은 빗속에 없었군요.”
아래에는 “통제된 운용 원칙”, “국가적 승인 체계”, “운용 연속성의 입증”이라는 표현이 이어졌다. ‘구조’라는 단어는 한 번밖에 나오지 않았고, 제도의 안정성 뒤로 밀어 넣는 문장에 들어 있었다.
리즈는 모로의 펜으로 줄을 그었다.
‘운용 연속성의 입증’을 가로지른 선은 종이가 거의 찢어질 만큼 깊었다.
“살살 해요.”
모로가 말했다.
“살살 하고 있어요.”
“아닙니다.”
“그럼 깨어 있는 거겠죠.”
세귀르는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깨끗한 종이가 손가락 사이에서 조금 떨렸다.
“이 문안을 옹호하는 게 아닙니다. 파리는 여러 문을 한꺼번에 닫으려 하고 있고, 그래서 보도문이 출구 없는 복도처럼 돼 버린 겁니다.”
“무엇보다 생로르멜 사람들이 들어온 문을 닫고 있잖아요.”
켈라프가 창가 화면으로 대화에 합류했다. 얼굴은 지쳐 있었고, 뒤에는 서류철들이 쌓여 있었다. 대충 묶인 스카프는 단정해질 시간조차 없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본질적으로 리즈 말이 맞습니다. 이 문서는 구조 개입을 운용 실적으로 바꿉니다. 법적으로 위험해요.”
“전부 위험합니다.”
세귀르가 말했다.
“그렇죠. 그러니 올바른 위험을 택합시다.”
몇 분 뒤, 리즈가 모르는 방에서 보클레르가 화면에 나타났다. 뒤쪽 화면 귀퉁이에는 프랑스 국기가 자리했다. 공식 상징 특유의 불가능한 은근함이었다.
그는 인사말도 없이 시작했다.
“대통령은 두 가지 이야기를 피하고 싶어 합니다. 오렌이 국가를 대신해 프랑스를 구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국가가 자기 위신을 위해 오렌을 장악한다는 이야기. 그 둘 사이에 노선이 필요합니다.”
커피 종이컵을 들고 소리 없이 들어온 나데주가 물었다.
“사람들이 물을 퍼냈다는 이야기는요?”
보클레르는 일 초 동안 눈을 감았다.
“르고프 씨.”
“아직 심한 말은 하나도 안 했어요.”
“알고 있습니다.”
“아뇨. 그러길 바라는 거겠죠.”
모로가 시계를 보았다.
“십이 분 남았습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리즈는 종이를 집었다. 총리실 문안을 다시 읽고, 시청 메모지에 썼던 세 줄을 읽었다. 메모지는 옆에 놓여 있었다. 물결치듯 휘었고 한쪽 귀퉁이에 빗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둘을 나란히 놓으니 거의 우스웠다. 한쪽에는 깨끗한 종이, 다른 쪽에는 젖은 종이. 하나는 벌써 기록물처럼 보였다. 다른 하나는 아직 더러워질 수 있는 물건 같았다.
“오렌이 프랑스의 날아다니는 양심이 되는 건 싫어요.”
리즈가 말했다.
보클레르가 답했다.
“아무도 원하지 않습니다.”
“아뇨. 많은 사람이 원하게 될 거예요. 어떤 이들은 완벽한 신청서를 낼 줄 아는 사람에게만 오렌이 봉사하길 바라겠죠. 또 어떤 이들은 오렌이 멀리 위에 떠서 선택받은 이들만을 위해 남기를 원할 겁니다. 그 모든 견해는 자기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닮았어요.”
세귀르가 물었다.
“그럼 무엇을 제안합니까?”
리즈는 준비된 규칙으로 대답하고 싶었다. 그런 것은 없었다. 역류하는 화장실, 너무 급히 구해 낸 시 노트, 라디에이터 위의 빨간 필통, 사미라가 물속으로 들어갈 때 야니스가 지었던 표정, 노트 위에 얹힌 미레유의 손, 타르디외의 상처, 모로가 기계의 결함처럼 바라보던 지나치게 깨끗한 맥박만 있었다.
“우리가 무엇을 보여 줬는지부터 말하는 걸 그만두자고 제안합니다.”
“그럼 무엇을 말합니까?”
“무엇이 우리를 움직일 수밖에 없게 했는지요.”
보클레르가 카메라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갓 태어난 국가는 의무 때문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보지 않기로 한 것 때문에 죽기도 해요.”
켈라프가 여백에 무언가 휘갈겼다.
모로가 말했다.
“시간 끝났습니다.”
“일 분만 더요.”
“안 됩니다.”
그는 리즈의 손에서 종이를 가져갔다.
한순간 모두가 모로의 적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종이를 테이블 위에 놓았을 뿐, 덮거나 압수하지 않았다.
“리즈는 두 시간 잡니다. 그동안 당신들은 이 사람을 병들게 하지 않는 말을 찾아보세요. 두 시간은 귀합니다. 잘 쓰십시오.”
그는 단호한 동작으로 켈라프의 화면을 끄고, 보클레르에게는 의무실이 아니라 세귀르에게 다시 전화하라고 했다. 보클레르는 항의하지 않을 만큼 현명했다.
방에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리즈는 고맙다고 말하려 했다.
모로가 막았다.
“예의까지 낭비하지 마세요.”
“곡선이나 측정하는 사람치고는 말이 직설적이네요.”
“곡선은 사람보다 거짓말을 못하니까요.”
리즈는 누웠다.
잠은 곧바로 오지 않았다. 문 너머에서 여전히 발소리와 목소리, 다시 쓰는 종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았다. 한 장면이 떠올랐다. 더러워진 채 사진을 찍고 무게를 재며 시료를 채취한 상자 속 모듈들. 자신을 위해 준비되지 않은 무언가에 마침내 닿았기 때문에 더 잘 이해하게 된 물건들.
리즈는 그 생각을 품고 잠들었다.
물건은 세상에서 멀어진다고 더 순수해지는 것이 아니라, 덜 배우게 될 뿐이었다.
요청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요청함은 성격이 달라져 있었다.
몇 주 전부터 존재하던 것이었다. 오렌에는 제안서, 지원서, 메모, 존중으로 포장된 위협, 엔지니어들의 꿈, 불가능한 계약, 환자들의 편지, 항구 설계도, 거액의 제안, 자기 이름을 부정하는 기도들이 들어왔다. 하지만 생로르멜은 문을 옮겨 놓았다. 이제 사람들은 들어오기 위해서만 편지를 쓰지 않았다. 오렌이 나오게 하려고 썼다.
세귀르는 일부를 인쇄해 두었다.
리즈 앞에서는 그것을 표본이라 부르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 몇 건입니다.”
그가 말했다.
나데주가 답했다.
“대표적이라고 말할 때는 대개 비명의 크기에 따라 이미 분류했다는 뜻이죠.”
그는 그 공격을 받아들였다. 받아 마땅했다.
그들은 회의실이 아니라 모듈 작업장에 자리를 잡았다. 리즈가 요구했다. 더러운 상자들은 아직 열린 채 작업대 위에 놓여 있었다. 타르디외는 기술자 두 명과 노란 프레임 주위에서 일했다. 말라붙은 진흙이 장갑 낀 손가락 아래서 갈라졌다. 뻘 냄새가 금속과 커피 냄새에 섞여 희미하게 남았다.
“여기서 해요. 다른 곳 말고.”
리즈가 말했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첫 메시지는 지방의 한 병원에서 왔다. 대형 대학병원도, 부처가 고개를 드는 유명 병원도 아니었다. 낡은 건물이었다. 침수 피해로 신생아 병동을 옮긴 상태였고, 엘리베이터는 고장 나 있었다. 삽관한 아기 두 명에게는 이송 계획이 너무 위험하다는 평가가 나왔다. 병원 측은 현지 엔지니어들이 추가 하중을 거부한 슬래브 위로 임시 발전기를 옮길 때 일시적 하중 경감이 가능한지 물었다.
“이건 프랑스 사례입니다. 보건부를 거쳐 처리될 겁니다.”
마송이 말했다.
“벨기에였다면요?”
나데주가 물었다.
마송은 제때 대답하지 못했다.
두 번째 메시지는 이탈리아의 한 계곡에서 왔다. 산사태, 끊긴 도로, 멈춘 푸니쿨라. 작은 마을에는 스물일곱 명이 남아 있었고, 그중 여성 한 명은 투석 치료 중이었다. 시장이 이탈리아어로 편지를 썼고, 이웃 주민이 자동 번역한 프랑스어를 첨부했다. 번역문에는 “우리는 중요하지 않지만 아주 심하게 갇혀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세 번째 메시지는 난처한 경로를 통해 막 들어온 것이었다. 안데스산맥의 한 광산 업체가 갱도에 세 사람이 갇혔으며 구조가 불안정하다고 알리고, 비공개 기술 지원을 요청했다. 메시지는 런던의 법률사무소가 작성했다. 암석이 보도자료를 위협하기라도 한 듯 자산과 책임, 영업 비밀, 증시 일정을 언급했다.
하지만 흐릿하게 스캔된 첨부 문서에는 이름 세 개가 적혀 있었다. 마테오 알바레스, 로시오 메나, 루이스 이바라. 노동자 두 명과 현지 지질학자 한 명. 광산이 그들의 존재까지 삼키게 두지 않으려는 누군가가 이름을 덧붙인 듯했다.
페이지 맨 아래에는 스캔이 잘려 네 번째 줄이 보이지 않았다. 먹혀 버린 이름 일부와 이니셜 하나, 급히 번역된 두 단어만 알아볼 수 있었다. 옛 갱도. 런던의 법률사무소는 그 사람을 언급하지 않았다.
“거절해요.”
나데주가 말했다.
“잠깐만요.”
소렐이 말했다.
“광산을 돕겠다고요?”
“마테오와 로시오, 루이스가 살아 있는지 알고 싶어요.”
소렐이 답했다.
네 번째는 어느 지사가 보낸 것이었다. 델핀 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 생로르멜을 보았다고 했다. 자기 도의 다리를 다음 홍수 전에 보강해야 하니 타당성 조사를 요청하며, 장비가 귀하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고, “자신의 지역을 국가 우선순위에 올리고 싶다”고 썼다.
리즈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이 사람은 무너지기 전에 요청하네요.”
“좋은 일이죠.”
세귀르가 말했다.
“네. 하지만 이제 누구에게 말해야 하는지 아니까 요청하는 거예요. 영리한 지사가 없는 다른 다리들은 기다리겠죠.”
몇 주간 화면과 전화로만 참여하다 직접 방에 온 켈라프가 종이를 두 무더기로 나누었다.
“즉각적 위기. 예방.”
리즈의 요청으로 아침 셔틀을 타고 온 미레유 코르디에는 허락을 구하지 않고 세 번째 무더기를 만들었다.
“서투른 요청 뒤에 위기가 숨어 있을 가능성이 있는 사례.”
이탈리아 편지와 광산 서류를 그곳에 놓았다.
마송은 무더기를 보았다.
“광산 측 대리인은 기업 법률사무소입니다.”
“노동자들과 지질학자는 아니죠.”
미레유가 답했다.
“의심스러운 요청마다 쫓아갈 수는 없습니다.”
“쫓아가자는 말이 아니에요. 누가 밑에 있는지 확인하자는 거죠.”
그 말이 리즈를 멈춰 세웠다.
누가 밑에 있는지.
전날 피로 속에서 자명한 사실처럼 적었던 말이었다. 미레유는 그것을 사무적인 몸짓 안에 다시 넣었다. 원칙은 지저분한 서류에서도 살아남아야만 가치가 있었다.
소렐이 펜을 들었다.
“기술적으로는 모든 요청에 대응할 수 없습니다. 운용 가능한 활성 모듈 수가 적어요. 열악한 환경에서의 작동은 아직 부분적으로 불안정합니다. 훈련된 팀도 없습니다. 리즈가 세계의 콜센터가 될 수는 없어요.”
“고맙군요.”
모로가 말했다.
“아직 안 끝났어요. 지금 외부 규칙을 만들지 않으면 모든 거절이 도덕적·외교적·상업적 편파로 해석될 겁니다. 모든 수락도 통제되지 않은 선례가 될 거고요.”
“그러니까 선별해야죠.”
마송이 말했다.
나데주가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그 단어를 참 좋아하네요.”
“아뇨. 견디는 겁니다.”
“가끔은 비슷해 보여요.”
타르디외가 작은 접시에 마른 진흙 조각을 담아 테이블로 왔다.
“구조용 작업장이 필요해요.”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가 필요하다고요?”
“원칙 말고 진짜 작업장이요. 더 튼튼한 프레임. 물과 먼지, 충격을 견디게 보호한 모듈. 빨리 열리는 상자. 소방 장비와 항만 장비, 병원 장비에 맞는 고정 지점. 엔지니어 세 명과 리즈가 붙지 않아도 읽을 수 있는 설명서. 그런 것 없이 원칙만 쓰면 우리 양심을 달래는 약속을 만드는 겁니다.”
세귀르가 받아 적었다.
“비용은요?”
“엄청납니다.”
“시간은?”
“부족해요.”
“실현 가능합니까?”
“네.”
그녀는 무거운 부품 하나를 테이블에 올리듯 “네”라고 말했다.
모로는 그다음에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물학적 비용은요?”
그 표현은 공기를 차갑게 했다. 자신도 느꼈다.
“다시 말하죠. 리즈가 치를 대가요.”
“감사합니다.”
켈라프가 말했다.
“높을 겁니다. 구조용 활성 모듈 하나마다 수많은 밤과 시험, 조정이 필요해요. 생로르멜은 피곤한 상태에서도 리즈가 해낼 수 있음을 보여 줬습니다. 바로 그것이 위험합니다. 항의해야 할 때도 몸이 계속 버틴다는 걸 방금 발견했어요. 오렌이 외부에 대한 의무를 정한다면, 리즈는 꺼내 쓸 수 있는 연료가 아니라고 그 맞은편에 적어야 합니다.”
침묵이 흘렀다.
‘연료’라는 단어는 잔혹했지만 깨끗한 말들보다는 나았다.
화면 속 보클레르가 잠시 뒤 입을 열었다.
“그러니 문제를 아시겠군요. 만들려는 규칙은 갖고 있지 않은 자원과 존재하지 않는 팀, 불확실한 외교적 보호, 이미 몸에 우려스러운 적응 징후를 보이는 여성 한 명을 전제로 합니다. 책임 있는 국가는 이행할 수 없는 것을 의무의 토대로 삼지 않습니다.”
리즈가 답했다.
“국가는 확실히 통제할 수 있는 것에만 의무를 세우다가 죽을 수도 있어요.”
“좋은 표현이군요.”
“아뇨. 오늘 하루가 말하는 겁니다.”
보클레르는 그 말을 받아냈다.
미레유가 서툰 요청을 모은 세 번째 무더기를 리즈 쪽으로 밀었다.
“이 사람들은 절대 올바른 형식을 갖추지 못할 겁니다. 당연한 일이에요. 들보 밑에 있거나, 너무 낡은 병동에 있거나, 도로가 끊긴 계곡에 있거나, 대신 말하는 변호사 뒤에 있으면 좋은 요청서를 쓸 수 없어요. 당신들 원칙이 그걸 보지 못한다면 이미 글을 쓸 줄 아는 사람들만 칭찬하는 데 쓰일 겁니다.”
리즈는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회복되지 않았다. 모로도 보았고 켈라프도 보았다. 아무도 막지 않았다.
피로가 신중함이 뒤로 미룰 말을 때때로 먼저 꺼낸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일부를 떼어 놔야 해요.”
리즈가 말했다.
세귀르가 물었다.
“무엇의 일부를요?”
“전부요. 모듈, 팀, 시간, 돈, 내가 감수하는 밤, 훈련, 정치적 위험. 오렌 주민과 오렌 시민, 오렌에 유용한 사람, 가장 가까운 동맹, 가장 잘 쓴 서류를 위해서만 남겨 두지 않는 몫.”
“구조 예비분입니까?”
“아뇨. 예비분은 다른 사람들이 받을 자격이 있다고 판단할 때까지 쥐고 있는 거예요. 공동의 몫을 원해요.”
누구도 곧바로 되풀이하지 않았다.
공동의 몫.
아름다운 말은 아니었지만 쓸 수 있었다. 그편이 나았다.
켈라프가 적었다.
“정의해 보세요.”
리즈는 더러워진 상자들을 바라보았다.
“통상적 수단으로는 제때 줄일 수 없는 하중 때문에 생명이 위협받을 때, 오렌의 힘 가운데 의무적으로 일정 부분을 외부 구조에 쓰는 겁니다. 오렌에 유용해야 한다는 조건 없이. 모범적이어야 한다는 조건 없이. 미리 외교적 이익을 보장받는 일 없이.”
보클레르가 즉시 답했다.
“유지할 수 없습니다.”
“아니요. 비용이 많이 드는 거예요.”
“국가 규모에서는 거의 같은 말입니다.”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니에요.”
그는 시선을 돌렸다. 엘리제궁의 보좌관은 나약해서 눈을 피하지 않는다. 반론이 옳지만 아직 받아들일 수 없을 때 피한다.
세귀르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공동의 몫. 물질적 기준은 생명에 대한 위협 또는 되돌릴 수 없는 피해, 통상적 수단으로는 명백히 대응 불가능한 경우, 기대되는 효과가 구조나 즉각적인 복구에 한정될 것, 공적 발표에서는 공을 현지 기관에 돌릴 것, 개입을 군사적·상업적·언론 홍보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금지할 것.”
“공적 발표에서만이 아니에요.”
미레유가 말했다.
“무슨 뜻입니까?”
“보고서에서도 현지 기관의 공로를 밝혀야 해요. 카메라에서 사라진 뒤 서류에서도 사람들이 사라지게 두면 안 되니까.”
세귀르는 덧붙여 적었다.
나데주가 물었다.
“서투르게 작성된 요청은 누가 확인하죠?”
미레유가 손을 들었다.
“나 같은 사람들.”
“맡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진 않았어요.”
“이미 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경계하는 거예요.”
리즈는 거의 미소 지었다.
논의는 아직 끝날 기미가 없었다. 그래도 테이블 가운데에 놓인 것이 하나 생겼다.
공동의 몫.
정의는 아니었지만 붙잡을 손잡이는 되었다.
글로 쓴 몫
공동의 몫은 작업장에서 글이 되었다.
켈라프는 법무 회의실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첫 번째 문안이 나올 때까지 말들이 더러운 상자 곁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모로는 토론 사이사이에 리즈가 조립 작업대 위에 누워 있는 조건으로 동의했다. 타르디외는 그 작업대가 깨끗한 부품을 올리는 곳이라며 항의했다. 모로는 방금 더러워진 것의 과학적 가치가 입증되지 않았느냐고 답했다.
타르디외가 양보했다.
쿠션 하나와 담요, 연장선 세 개, 컴퓨터 두 대, 종이컵들, 생로르멜 사진들을 가져왔다. 작업대는 태어나려는 조약의 혼란이 되었다. 법률 문서, 젖은 지도, 시료 접시, 모듈 목록, 예산 항목, 병원 이름, 다리 번호, 보도문 초안, 대피자 명단이 뒤섞였다.
리즈는 이곳이 오렌 최초의 정직한 사무실이라고 생각했다.
켈라프가 첫 문안을 읽었다.
여섯 줄이었다. 벌써 지나치게 깨끗해 보였다.
즉각적 구조, 인명 보호, 통상적 수단의 불충분함을 언급했다. 모든 단어가 옳아 보였다. 모든 단어가 너무 늦게 도착하는 데 쓰일 수 있었다.
법률가들보다 나데주가 먼저 깨달았다.
“아직 알맞은 항목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요?”
생로르멜에서 연결된 마엘이 거의 곧바로 답했다.
“위협이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리면 물보다 늦게 도착해요.”
뒤이은 침묵은 한 쪽짜리 주석보다 더 값졌다.
보클레르는 오렌과 협정을 맺은 지역으로 조항을 제한하려 했다. 리즈가 거부했다.
“협정이 너무 많아지면 잘못된 정부 아래 산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둘 겁니다.”
세귀르는 자동 개입 의무 대신 검토 의무를 제안했다. 덜 멋진 대신 빼앗기기 어려운 방식이었다. 켈라프는 오렌에 거주하지 않거나, 오렌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자신을 모범적인 사람으로 제시할 줄 모른다는 이유로 누구도 제외할 수 없다고 썼다.
미레유가 다시 읽었다.
“제대로 도착하지 못한 요청을 읽을 사람이 필요해요.”
“어떻게 제대로 도착하지 못한다는 겁니까?”
마송이 물었다.
“엉망으로 쓰인 것. 잘못 번역된 것. 잘못 보낸 것. 변호를 제대로 받지 못한 것. 좋은 요청은 이미 좋은 문을 찾을 줄 압니다.”
이번에는 문장을 더 예쁘게 고치자고 한 사람이 없었다.
그 자명한 사실을 중심으로 소규모 임시 조직을 만들었다. 기술자 한 명, 의사 한 명, 외부 법률가 한 명, 서투르게 제출된 요청을 맡을 사람 한 명, 가능할 경우 현지 대표 한 명. 리즈는 의무적 결정권자로 자기 이름을 넣지 못하게 했다.
“모든 것에서 빠져나갈 수는 없습니다.”
세귀르가 말했다.
“빠져나가는 게 아니에요. 고통을 접수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도장이 되기를 거부하는 겁니다.”
타르디외가 더러운 손으로 모듈 쪽에서 돌아왔다.
“도로와 병원, 항구, 학교를 아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우리만 있어서는 안 돼요.”
“외부 의존망을 만드는 셈이군요.”
세귀르가 말했다.
“아뇨.”
타르디외가 답했다.
“이미 있었다는 걸 인정하는 겁니다.”
미레유가 덧붙였다.
“생로르멜에서는 누군가가 누군가를 기억했기 때문에 일이 됐어요.”
그 말이면 충분했다.
보클레르는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동의 몫은 세계적인 기대를 만들 겁니다. 모든 거절은 잘못이 되고, 모든 수락은 부족한 조치가 되겠죠.”
“네.”
“영토가 안정되기도 전에 정치적으로 죽을 수 있습니다.”
리즈는 작업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담요가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오렌이 찬양받을 수 있는 곳에서만 강한 나라가 되려 한다면 이미 죽은 거예요.”
켈라프는 눈을 들지 않았지만 펜을 멈췄다.
보클레르는 오래 지나서야 답했다.
“그 조항을 보내십시오.”
조항은 테이블 위에 남았다. 무겁고 불완전했으며 공격할 곳이 많았다. 그런데도 이미 아이 하나와 학교 하나, 계곡 하나, 병원 하나, 이름 세 개, 먼 타국의 산 아래에서 잘려 나간 한 줄을 떠받치고 있었다.
붙들고 있는 것
저녁에 마리안이 전화했다.
리즈는 다음 날까지 아래층으로 내려오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자기 방에 돌아와 있었다. 모로가 서면으로 작성하고 켈라프가 공동 서명했으며, 나데주가 마스킹테이프로 문에 붙여 놓은 명령이었다. 들로네는 매우 진지한 조치라고 여겼다. 출입 통제까지 추가하자고 했다가 리즈의 눈빛을 보고 멈췄다.
방에서는 정박지 한쪽과 기술용 다리 일부가 보였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격납고 유리 뒤로 사람들이 지나갔다. 아래에서 그들이 쓰는 말들을 떠받치기에는 너무 작은 실루엣들이었다. 더러운 상자들은 그 아래 어딘가에 있었다. 리즈의 시야에서는 사라졌지만 머릿속에서는 아니었다.
마리안은 괜찮으냐고 묻지 않았다.
배운 것이다.
“엄마가 영상을 봤어.”
“무슨 영상?”
“네가 나온 건 아니고. 장화랑 소방관들, 시청, 오렌이 도왔다고 설명하는 남자. 엄마는 네가 진흙탕에 있었냐고 물었어.”
“넌 뭐라고 했는데?”
“아마 있었을 거라고.”
리즈는 눈을 감았다.
“화나셨어?”
“자랑스러우면서 몹시 화가 났어. 엄마는 그러면 수프를 끓이잖아.”
“수프?”
“아침부터 만들고 있어. 불안을 먹여서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아.”
리즈는 짧고 거의 아픈 웃음을 터뜨렸다. 몸도 놀란 듯했다. 갈비뼈 위에 손을 얹었다.
“잘 지낸다고 전해 줘.”
“싫어.”
“마리안.”
“살아 있고, 감시받고 있고, 피곤하고, 전보다 거짓말을 조금 못하게 됐다고 전할게.”
“정말 고맙다.”
“내 공동의 몫이야.”
리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은 이미 작업장을 떠났다. 이제 스스로 살아갈 수 있었다.
마리안이 말을 이었다.
“너희가 뭘 하는지는 다 이해 못 하겠어.”
“나도 그래.”
“그래도 생로르멜에서 하나는 알았어. 텔레비전에서는 오렌이 깨끗한 도구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어. 그런데 마을 여자 한 명이 소방관이 자기 남편 약을 찾아 줬다고 하더라. 그 순간 방송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다 난처해 보였어. 진짜 이야기가 카메라에 담기에는 너무 작은 것처럼.”
“작지 않았어.”
“바로 그거야.”
전화 너머에서 냄비 소리가 났다. 잔이 멀리서 무언가를 물었다. 마리안은 아직 통화 중이라고 대답했다. 리즈는 부엌과 타일 바닥, 테이블, 그릇들, 어머니의 수프, 너무 낮게 켜 둔 라디오를 떠올렸다. 조항을 쓰지 않고도 걱정할 권리가 있는 세계에 계속 속한 물건들이었다.
“집에 돌아올 거야?”
마리안이 물었다.
그 질문은 리즈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세게 그녀를 가로질렀다.
“당장은 아니야.”
“내일 오느냐고 묻는 게 아니었어.”
“알아.”
마리안은 잠시 침묵했다.
“네가 돌아올 수 없는 나라를 만들지는 마.”
리즈는 눈을 떴다.
창밖에서는 기술자 한 명이 세척한 부품을 실은 수레를 밀고 있었다. 완전히 자기 것이 아닌 무언가를 운반하면서도 책임을 지는 사람들의 주의 깊은 걸음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어쩌면 그래서 그 조항이 필요한 건지도 몰라.”
“돌아오기 위해서?”
“그 나라가 혼자 떠오르지 못하게 하려고.”
마리안은 자기 이해보다 빨리 이해하는 척하지 않았다.
“그럼 짧게 써.”
“이미 실패했어.”
“그럼 진실하게 써.”
두 사람은 한동안 별말 없이 통화를 이어 갔다. 끝내 잔이 전화를 넘겨받아 따뜻한 것을 먹고, 잠을 자고, 사람들 겁주는 일을 국가 특기처럼 그만하라고 말했다. 리즈는 세 가지 중 두 가지를 약속했지만 어느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통화를 마치고 리즈는 검은 수첩을 펼쳤다.
곧바로 그리지는 않았다.
빈 페이지는 자신에게 빚진 것이 있음을 아는 종이의 심술궂은 인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수첩 옆 테이블에는 들로네가 전면적인 업무 금지에도 불구하고 가져다준 공동의 몫 사본이 있었다. 그는 행정 업무가 아니라 도덕적 문서라고 주장했다. 리즈가 일렀다면 모로가 그 권리를 빼앗았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 읽었다.
공동의 몫.
검토 의무.
자신을 모범적으로 내세울 줄 모르는 사람들.
리즈의 상태 보호.
마지막 문장에서 눈이 걸렸다. 켈라프가 고집했다. 모로도 마찬가지였다. 소렐이 지지했다. 타르디외는 구조용 모듈이 첫 번째 사슬보다 더 폭력적인 부드러운 사슬이 되지 않으려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들이 옳다는 것을 리즈도 알았다.
공동의 몫에 무게가 생기려면 자기도 무언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 또한 알았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그 한계는 새로운 것이었다. 전에는 주로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싸웠다. 이제는 열어 준다는 명목으로 자신을 내어 주지 않기 위해 싸워야 했다. 관대함은 거부하기 더 어려운 몰수가 될 수 있었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수첩에 썼다.
“공동의 몫이 치르는 대가가 되지 말 것.”
그 아래에 덧붙였다.
“그것을 닫아 둘 핑계로 삼지도 말 것.”
두 문장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화해하지 않았다. 어쩌면 좋은 징조였다.
페이지를 넘겼다.
꿈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어떤 형상이 길을 찾고 있었다. 더 강력한 모듈도, 거대한 인양 구조도 아니었다. 이미 존재하는 것에 부착될 수 있는 열리고 불완전한 부품에 가까웠다. 다리, 들보, 병원 침대, 운반대, 문, 너무 작은 크레인, 더는 오를 수 없는 계단. 주변의 손들을 대신하지 않고, 그 손들이 계속 붙들 수 있을 만큼만 무게를 덜어 주는 형상.
리즈는 첫 번째 곡선을 그었다.
그다음에는 더 낮은 곡선을 하나 더 그었다.
페이지는 닫히기를 거부하는 갈고리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리즈는 펜을 놓았다.
누군가 방금 일어난 일을 무엇이라 부를 것이냐고 물었어도, 그 답을 위해 수첩을 펼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짜 이름은 대개 너무 늦게 온다. 사물들이 이미 자기 무게를 선택한 뒤에야.
그녀는 정박지와 격납고의 불빛, 공동의 몫 사본, 담요 위에 엄지손가락이 남긴 잿빛 자국을 바라보았다.
세계를 붙드는 것은 세계가 떨어지지 못하게 막는 것이 아니었다.
떨어져 나가면 모든 것이 더 쉬워질 때에도 계속 연결되어 있기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녀는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미래의 모듈은 계속 자기 형상을 찾아갔다.
제25장
들어 올림의 대가
열린 갈고리
갈고리는 동이 트기 전에 형태를 갖추었다.
대대적인 생산의 밤에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센서로 둘러싸인 클린룸도 아니었고, 시험 결과를 기다리듯 기적을 기다리러 온 대표단의 시선 아래도 아니었다. 환기장치의 숨소리와 복도를 지나가는 카트 소리 사이, 짧고 허술한 잠 속에서 찾아왔다.
리즈가 본 것은 구조물이 아니라 손이었다.
들어 올리지 않는 손. 무게를 차지하려 들지 않고 그 아래로 파고들어, 이미 그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무게가 덜 잔혹하도록 해주는 손. 형태가 닫힐 때마다 그것은 아름답고 정밀해졌으며, 거의 쓸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모든 것을 떠맡았다. 남들을 대신해 동작을 끝마쳤다.
열린 채로 있으면 떨렸다.
받침과 끈, 유압잭, 잘못 놓여 바로잡아야 하는 팔에 의지했다. 덜 순수했다. 더 위태로웠다. 살아 있었다.
리즈는 다리에 침대보가 휘감긴 채 잠에서 깼다.
검은 수첩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공동 몫 규약 사본은 세 사람의 서로 다른 필체로 주석이 달리고 모서리가 접힌 채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수첩을 주우려고 몸을 숙이자 통증이 갈비뼈를 세차게 죄었다. 숨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문턱에서 들로네가 움직였다.
“모로를 부르시겠습니까, 제가 부를까요?”
“둘 다 싫어요.”
“의학적으로 미심쩍은 답변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림이에요.”
“요즘은 그림도 당신을 망가뜨리는 것들 가운데 하나더군요.”
리즈는 수첩을 펼쳤다.
첫 번째 선은 또렷하지 않았다. 전날 그렸던 호를 다시 긋고, 그 아래에 두 번째 호를 그린 다음, 일부러 선을 끊어 중심에 빈자리를 만들었다. 모듈에는 결핍이 필요했다. 지금까지 그녀가 만든 모든 것은 완전한 지탱을 추구했다. 받치고, 보정하고, 유지하며, 물체가 더는 자신을 짓누르는 것에 속하지 않을 만큼 무게를 덜어내는 것. 열린 갈고리는 그 반대였다.
동작을 끝내기를 거부했다. 들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짐을 나누었다.
리즈는 더 빠르게 그렸다. 펜이 한 번 미끄러져 여백에 지나치게 긴 검은 선을 남겼다. 들로네는 이해하지 못한 채 바라보았지만, 그 속도만큼은 알아보았다. 그가 문을 열었다.
“타르디외를 부르겠습니다.”
“모로는 말고요.”
“그가 오면 직접 협상하시죠.”
타르디외는 작업용 바지에 셔츠와 스웨터를 겹쳐 입고, 머리를 너무 급히 묶은 채 나타났다. 인사도 하지 않았다. 리즈의 손에서 수첩을 받아 조명 쪽으로 기울이더니, 두어 초 동안 정상적으로 숨 쉬는 법을 잊었다.
“이게 뭐죠?”
“생로르멜 전에 만들었어야 할 것.”
“쓸모 있는 사람처럼 대답해줄래요?”
“무게를 없애지 않는 모듈이에요. 무게를 나눌 수 있게 해주죠.”
타르디외는 그림과 끊긴 선들, 불가능한 각도로 꺾인 손잡이를 다시 살폈다.
“어떻게 나눈다는 거죠?”
리즈는 말을 찾았다. 말은 그림만큼 빨리 오지 않았다.
“기중기를 대신하지 않아요. 들것도, 구조대도 대신하지 않고요. 물건이 사람들의 손에 남아 있을 만큼 무게를 남기되, 그 손을 짓누를 만큼은 남기지 않는 거예요.”
“목발이군요.”
“아니에요.”
“살아 있는 호이스트.”
“꼭 그렇지는 않아요.”
“리즈.”
통증 속에서도 리즈는 미소 지었다. 기술자로서의 인내심이 바닥났을 때만 타르디외는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열린 갈고리.”
타르디외가 수첩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건 수첩에나 적을 이름이지, 작업장에서 쓸 이름이 아니에요.”
“그럼 당신이 하나 지어요.”
모로가 노크도 없이 들어왔다.
구겨진 셔츠를 입고, 모처럼 얻은 잠에서 억지로 끌려 나온 사람의 눈을 하고 있었다. 분노만은 이미 꼿꼿이 일어나 있었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도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뭘 거절하는지도 모르시잖아요.” 리즈가 말했다.
“발전한 겁니다. 전에는 알아보고 나서 거절했으니까.”
타르디외가 수첩을 그쪽으로 돌렸다.
모로는 그림을 보지 않았다. 리즈를 보았다.
“얼마나 잤습니까?”
“이걸 찾아낼 만큼요.”
“그건 단위가 아닙니다.”
“두 시간쯤.”
“그럼 충분하지 않군요.”
이번에는 소렐이 들어왔다. 어깨에는 외투를 걸치고, 안경은 비뚤어져 있었으며, 얼굴은 굳어 있었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수첩을 집었다. 그녀의 시선이 호와 단절, 비어 있는 부분을 따라갔다.
“대칭이 줄었군요.”
“네.”
“닫힌 부분도 줄었고요.”
“네.”
“당신도 줄었어요.”
리즈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물리학자가 눈을 들었다.
“모든 것이 당신 안에서 해결되게 하려 들지 않는 최초의 설계일지도 모르겠군요.”
모로가 기쁨 없는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훌륭합니다. 아이디어로 보관했다가 여섯 주 뒤에 꺼내죠.”
“우리한테 여섯 주는 없어요.” 타르디외가 말했다.
그녀는 벌써 별도의 종이를 꺼내 각도를 옮겨 그리고 있었다.
“밤사이 광산 건의 성격이 달라졌어요. 이제 변호사들의 요청만이 아니에요. 세 사람이 확인됐습니다. 광부 둘과 현지 지질학자 한 명. 구조대는 옆 갱도까지 도달했지만 가로 지지대 하나가 움직였어요. 안에 있는 사람들의 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곧 무너질 것 같은 지지보의 무게를 덜지 않고서는 구출할 수 없답니다.”
“어디죠?” 리즈가 물었다.
“코르디예라산맥. 국경 지대. 아주 멀어요.”
멀다라는 말에는 아무런 극적인 효과도 없었다. 그저 불가능한 거리를 병실 안에 내려놓았을 뿐이었다.
몇 분 뒤 세귀르가 도착했다. 들로네가 알렸거나, 닫힌 문도 끝내 통과하고 마는 비상사태 특유의 은밀한 전파망을 통해 들은 모양이었다. 그는 과장 없이 세부 사항을 전했다. 민간 광산. 미심쩍은 운영사. 여론을 걱정하는 현지 정부.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법률사무소들. 현장 구조대는 유능하지만 장비가 부족함. 세 명 생존. 남은 시간은 예측 불가. 다음 움직임에 붕괴할 위험.
“그래서 오렌을 요청한 겁니까?” 모로가 말했다.
“도움이 될 수 있는 건 전부 요청하고 있습니다.”
“같은 말은 아니죠.”
“그렇습니다.”
자신의 도청 소재지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전화로 연결된 미레유가, 아직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은 유일한 질문을 던졌다.
“그 세 사람의 이름은 누가 확인했죠?”
세귀르가 서류를 확인했다.
“현지 구조 책임자 한 명과 광산 노동조합입니다. 회사만의 확인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요청은 받아들일 만하군요. 하지만 명부에 없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물어보세요.”
그 말은 허공에 남았다.
모로가 침대로 다가왔다.
“전과 같은 밤을 한 번 더 보내는 건 허락할 수 없습니다.”
“저도 싫어요.”
그가 멈췄다.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리즈는 그림을 보았다. 호들은 닫히지 않았다. 빈자리는 다른 손들을 필요로 했다.
“짧은 밤. 통제된 밤. 들어 올리기 위한 게 아니라, 혼자서는 끝맺을 줄 모르는 형태를 남기기 위한 밤.”
벽면 화면 속 보클레르가 물었다.
“성공할 경우 오렌의 독점에 거대한 균열을 내게 된다는 걸 이해합니까?”
“아뇨.” 리즈가 말했다. “독점이 닫혀야 할 곳에서 닫는 거예요.”
밖에서는 햇빛이 정박지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오렌은 기중기와 연결 통로, 유리창과 세척 중인 모듈들을 거느리고 밤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아침이면 자신들의 죄가 씻긴다고 믿는, 갓 태어난 장소들 특유의 허약한 오만과 함께.
타르디외가 그림을 들고 나갔다.
오렌의 마지막 위대한 행위는 들어 올림으로 시작되지 않을 터였다.
작업대 위의 미완성 부품 하나로 시작될 터였다.
이름이 없던 여자
첫 번째 갈고리를 만드는 데 열한 시간이 걸렸다. 계속된 실패를 제작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랬다.
첫 번째 코어는 너무 빨리 달아올랐다. 두 번째는 정지를 거부했다. 세 번째는 시험 하중을 받아들였다가 마른 파열음을 내며 한꺼번에 놓아버렸고, 모두가 두어 초 동안 꼼짝하지 못했다. 타르디외는 이걸 땜질이라고 불렀다가, 다른 사람이 그 말을 쓰는 것은 금지했다. 기술자들은 세 작업대에 나뉘어 일했다. 창고에서 꺼낸 부품, 시험대에서 뜯어온 센서, 미세먼지를 막으려고 임시로 만든 덮개, 민방위대가 가져온 비상용 끈, 소렐이 수치스럽다고 평하고도 결국 쓰기로 한 판독 장치가 동원되었다.
그 갈고리에는 세상을 바꿀 발명품다운 아름다움이 없었다. 급히 만들고 세 번이나 손본 끝에, 쓰이기도 전에 때가 묻은 도구처럼 보였다.
타르디외는 그 점을 거의 자랑스러워했다.
“스스로 멈출 줄 모르는 물건은 비도덕적인 물건이에요.”
측정값을 보던 소렐이 고개를 들었다.
“결국 오렌의 철학을 작업 지침서에 쓰겠군요.”
“당신 노트에 쓰는 것보다는 낫겠죠.”
“아마도요.”
리즈는 옆방에 있었다. 안쪽 유리창 곁에 의료용 침대를 가져다 놓았다. 모로는 그녀가 작업대 앞에 앉아 있는 것을 금했다. 간호사 둘과 상시 감시, 중단시킬 권리도 요구했다. 켈라프는 그 권리를 문서로 만들었다. 리즈가 아무 이의 없이 서명하자 모두가 불안해졌다.
너무 순순한 동의는 때로 부재처럼 보였다.
“나 자신을 내주지는 않을 거예요.” 리즈가 켈라프에게 말했다.
변호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토록 꼭 필요한 말을 할 때는 당신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아요.”
“그게 틀린 거예요, 맞는 거예요?”
“둘 다죠. 그게 내 일이니까.”
공동 몫 위원회는 작업장 한쪽 구석에서 처음으로 실질적인 회의를 열었다. 세귀르는 누가 무엇에 서명할지 알고 싶어 했다. 켈라프는 누가 거부권을 가질지 알고 싶어 했다. 타르디외는 습도와 먼지, 가로 지지대의 각도를 알고 싶어 했다. 모로는 리즈의 침대만 바라보았다. 미레유는 원격으로 이름들을 요구했다. 스페인어 통역사는 외교관들보다 덜 아름답게, 그래서 더 정확하게 말을 옮겼다. 소렐은 회사가 제공한 도면만 읽을 수는 없다며 독립적인 광산 기술자를 불러왔다.
이브 가렉은 프랑스 광산에서 십오 년간 일했고, 그 뒤로는 채굴 현장보다 사고 현장에 더 오래 몸담았다. 말수가 적고 언제나 도면 이전의 도면을 요구했으며, 여백부터 살피지 않고서는 문서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는 회사가 제공한 측량 자료와 현지 구조대가 보낸 영상을 펼쳐놓았다. 카메라가 붉은 갱도 안에서 흔들렸다. 손전등 불빛이 지주와 휘어진 관, 글자가 거의 지워진 페인트 표지판 위를 훑었다.
가렉이 영상을 삼 초 전으로 돌려달라고 했다.
“저기.”
타르디외가 몸을 숙였다.
“뭐가요?”
“표지판.”
통역사가 읽을 수 있는 만큼 읽었다.
“7층. 펌프 갱도.”
가렉은 공식 도면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도면에 따르면 7층은 팔 년 전에 폐쇄됐습니다.”
그들 주위에서 작업장은 계속 움직였다. 전동드라이버 소리와 발걸음, 환기장치, 닫히는 상자, 조임 토크를 묻는 기술자의 목소리. 그 평범한 소음 때문에 침묵은 더욱 사나워졌다.
“도면 오류입니까?” 세귀르가 물었다.
“그럴 수도 있죠. 신고 없이 유지해온 갱도일 수도 있고, 폐쇄 뒤 다시 열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제출된 명부에 없는 사람들이 쓰던 우회 통로일 수도 있고요.”
기차 화면 속 미레유가 말했다.
“빠진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세요.”
런던의 법률사무소는 구 분 만에 답했다. 그 빠른 답이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빠진 사람은 없었다.
무서울 만큼 단정한 문장이었다.
켈라프가 소리 내 읽었다.
“‘현재 사고가 발생한 작업 구역 안에 추가 인력이 존재한다고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없다고 말한 게 아니에요.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했죠.”
나데주가 유리창 너머의 리즈를 바라보았다.
“값비싼 단어네요.”
노동조합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연결 상태가 좋지 않았다. 여러 목소리가 겹치는 사무실에서 한 여자가 말했다. 이름은 아나 리바스였다. 행정상 구조대원은 아니었지만, 가족들과 다른 갱도에서 빠져나온 광부들, 구조팀 사이에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은 그녀였다.
아나는 우선 세 사람의 이름을 확인했다.
마테오 알바레스, 시추공.
로시오 메나, 지질학자.
루이스 이바라, 전기기사.
그런 다음 어떤 통역도 이보다 명확히 옮길 수 없는 침묵 끝에 덧붙였다.
“마리나도 찾고 있어요.”
통역사가 잠시 멈췄다.
마리나 초케, 스물네 살. 현지 하청업체의 측량 보조원. 운영사 직원이 아니었다. 법률사무소에 제출된 명부에도 없었다. 오래된 펌프 갱도로 물이 유입되는지 확인하려고 로시오와 함께 내려갔다. 공식적으로는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됐다. 비공식적으로는 정규직들이 때때로 서명을 거부하는 일들을 회사가 그녀에게 맡긴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 아래에 있습니까?” 미레유가 물었다.
아나 리바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통역은 한 박자 너무 늦게 나왔다.
“그 아래에 없다면, 저들은 이미 다른 곳에서 그 애를 잃어버린 거예요.”
종이에 마리나의 이름을 더했다.
마테오, 쉰두 살, 장성한 두 아들.
로시오, 서른네 살, 현지 기관이 연락한 어머니 한 명.
루이스, 스물일곱 살, 임신한 동거인.
마리나, 스물네 살, 구조 지휘소에 있는 여동생, 인정된 계약은 없음.
“됐어요.” 미레유가 말했다. “이제야 아래에 누가 있는지, 전보다는 조금 덜 틀리게 알게 됐군요.”
침대에 누운 리즈도 들었다.
이름을 직접 보지 않아도 이름들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바로 그것이 위험했다. 이름 하나하나에는 붙잡을 곳이 있었다. 붙잡을 곳 하나하나는 사슬이 될 수 있었다.
모로는 그녀의 손이 침대보를 움켜쥐는 것을 보았다.
“아직 거절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요?”
“오늘 밤을.”
“네.”
“내 말에 동의한다는 뜻입니까, 오늘 밤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입니까?”
리즈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에요.”
그는 받아들였다. 미미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일은 아니었다.
작전은 더는 오렌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프랑스의 것도 아니었다. 바로 그 점이 정치적으로 추악했다. 외무부는 적절한 표현을 찾고 있었다. 해당 국가는 자국 구조대를 포기하고 싶지도, 반쯤 주권국가인 전신에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회사는 비밀유지 조항을 원했지만 켈라프는 서명을 거부했다. 가족들은 그저 사람들을 꺼내주기만 바랐다.
보클레르가 완벽하게 다듬은 문장을 낮은 목소리로 내세워 마지막 제한을 시도했다.
“오렌 인력은 현장에 파견하지 않습니다.”
타르디외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불가능해요. 부품을 점검할 기술자 한 명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영사 당국의 지휘 아래 프랑스 기술자 한 명을 보냅시다.”
“안 됩니다.” 켈라프가 말했다.
“변호사님.”
“갈고리를 위장된 프랑스 작전으로 만드는 데 동의한다면, 공동 몫은 첫 외부 활동과 동시에 죽습니다. 현지 구조대가 작전을 지휘하고, 신원이 명시된 오렌의 기술 지원과 해당 국가의 명시적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프랑스는 편의를 제공할 수는 있어도 흡수할 수는 없습니다.”
“회사는요?” 세귀르가 물었다.
켈라프는 런던 법률사무소의 메시지와 마리나가 존재하지 않는 문장을 다시 읽었다.
“그 회사는 우리의 도덕적 대화 상대가 아닙니다.”
그래서 평소보다 덜 매끈한 문서를 작성했다.
제한적 지원, 현지 구조대의 지휘, 소유권 이전 없음, 운영사의 사용 금지, 사람들이 구조되거나 실패가 확인되면 보고서 공개, 가족들에게 지체 없이 고지. 오렌의 지원이 광산 운영사의 관행을 승인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현장 인원에 관해 허위 또는 불완전한 정보가 드러나면 지원을 즉시 중단한다는 내용도 담았다.
나데주는 법률 문구가 아닌 문장 하나를 추가하자고 했다.
켈라프가 그녀를 보았다.
“어떤 문장이죠?”
“이름이 명부를 불편하게 한다는 이유로 구조 대상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다고요.”
마송이 반대했다.
“협정에 들어갈 만한 표현이 아닙니다.”
“잘됐네요.” 침대에서 리즈가 말했다. “이건 협정이기만 한 게 아니니까.”
그 문장은 남았다.
갈고리는 눈에 띄는 로고 하나 없는 회색 상자에 실려 오렌을 떠났다. 임시 번호가 마커로 적혀 있었다. PC-01.
공동 몫, 첫 번째 제품.
못생긴 이름이었다. 그래서 리즈는 안심했다.
제한된 밤
모로는 그 방을 거부를 위한 장소로 준비했다.
대규모 모듈 생산에 쓰던 방이 아니었다. 늘어선 콘솔도, 유리창 뒤의 대표단도, 구석에 앉은 법률가도, 침묵하는 군인도 없었다. 침대 하나, 의료용 화면 두 대, 수첩을 들고 앉은 소렐, 작업장과 연결된 타르디외, 문가의 켈라프, 복도의 들로네, 그리고 삼십 초마다 시간을 확인하지 않으려고 손목시계를 벗어둔 모로뿐이었다.
“첫 번째 규칙.” 그가 말했다.
“이제 규칙을 좋아하게 됐어요?”
“당신이 규칙을 덜 싫어하게 된 뒤부터요.”
“말해봐요.”
“내가 중단이라고 하면 중단합니다.”
“네.”
“두 번째. 아무리 미세해도 경계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면 바로 말합니다.”
“경계가 사라진다?”
“무슨 뜻인지 완벽히 이해했잖습니까.”
이해했다.
예전의 밤들에 그녀는 가끔 자신의 몸이 그저 입구가 되는 것을 느꼈다. 형태와 질량, 장과, 지탱과 물질 사이의 불가해한 관계들이 그녀를 관통했다. 언제나 돌아오기는 했지만, 내면의 살갗을 온전히 가지고 돌아오지는 못했다. 모로는 마침내 그것을 경계라고 부르게 되었다. 여전히 나는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것.
“말할게요.”
“세 번째 규칙. 마테오와 로시오, 루이스, 마리나의 목숨을 당신과 맞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리즈는 눈을 감았다.
네 번째 이름은 모든 것을 바꾸었다.
다른 이름보다 가치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전화 속 여자의 목소리를 타고, 스캔 문서 맨 아래 잘린 한 줄을 타고, 현실을 계속 수익성 있는 것으로 남겨두고 싶을 때 기업이 정확히 빚어내는 수치를 타고, 여백에서 들어온 이름이기 때문이다.
“알아요.” 리즈가 말했다.
“아뇨. 처음에는 알겠죠. 그러다 중간쯤 가면 잊을 겁니다. 그래서 미리 다시 말해두는 겁니다.”
소렐이 덧붙였다.
“갈고리가 당신을 대신해 구조해서는 안 돼요. 현지에서 구조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당신도 문장을 준비했어요?”
“몇 개요. 그중 덜 나쁜 걸 골랐죠.”
스피커에서 타르디외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자가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현지 구조대도 배치됐고요. 오렌 기술자는 영상 연결을 유지하며 구조 지휘소에 남습니다. 아나 리바스는 가족들과 구조대 곁에 있어요. 현지 구조대원들은 갈고리만으로는 지탱할 수 없다는 걸 이해했습니다.”
“이해한 거예요, 아니면 따라 말한 거예요?”
“둘 다죠. 이 업계 사람은 다 그래요.”
타르디외의 목소리 뒤로 더 낮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가렉이었다.
“도면에 문제가 있습니다.”
측면 화면에서 갱도 영상이 흔들렸다. 구조대원 한 명이 헬멧에 부착한 카메라로 촬영하고 있었다. 가로 지지대와 붉은 먼지, 현지의 유압잭들, 왼쪽으로 더 짙은 암석이 꺾이는 지점이 보였다. 가렉이 화면을 고정해달라고 했다. 카메라가 분필로 그은 흰 표식에 멈췄다.
선 두 개와 원 하나.
“도면에는 없습니다.” 가렉이 말했다.
통역사가 구조대원의 대답을 옮겼다.
“옛 광부들의 표식입니다. 폐쇄된 갱도라는 뜻이에요.”
“어떻게 폐쇄됐죠?”
질문의 답이 돌아오는 데 지나치게 오래 걸렸다.
“회사가 폐쇄했습니까, 산이 폐쇄했습니까?”
화면 밖에서 아나 리바스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어떤 날 말하느냐에 따라 달라요.”
마지막으로 연락한 런던 법률사무소는 작전 구역에 추가 인원이 있다고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보클레르는 작전을 보류해야 하는지 물었다. 세귀르는 정확히 무엇을 보류하자는 것이냐고 되물었다. 지원인지, 거짓말인지, 아니면 벽 너머 누군가의 소리를 들을 기회인지.
리즈는 숨을 쉬었다.
거대한 들어 올림을 찾지 않았다.
그것이 가장 위험한 유혹이었다. 곧장 가로 지지대 아래로 들어가 질량을 느끼고, 짓누르는 것을 걷어내며, 세상에 새로운 증거를 내놓는 것. 그녀는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몸은 지쳐 있는데도 그 폭력을 받아들일 채비를 할 줄 알았다. 정당한 힘에는 도취가 있었다. 생명을 구할 수 있기에 더욱 떨쳐내기 힘든 도취였다.
리즈는 다른 것을 찾았다.
결핍.
열린 부분.
구조대원들의 손과 현지의 유압잭, 그 암석을 아는 이들의 판독, 수직갱도 가장자리에서 기다리는 가족들의 공포, 땅속 어딘가에 갇힌 네 사람의 호흡 없이는 갈고리가 아무것도 아닌 지점. 아니면 세 사람, 어쩌면 아무도 없을 수도 있었다. 이제는 광산이 말하는 것 가운데 무엇이 진실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니까.
잠이 거칠게 그녀를 데려갔다.
처음에는 물이 있었다.
생로르멜로 돌아온 줄 알았다. 그러나 물은 물러나고 붉은 먼지와 헤드램프 불빛, 멀리서 금속을 두드리는 소리를 남겼다. 광산은 그녀가 아는 장소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 위험했고, 더 쉽게 단순화할 수도 없었다. 그녀의 정신은 그곳을 프랑스의 풍경으로 대체하지 못했다. 불완전한 정보를 받아들여야 했다. 번역된 도면, 흔들리는 카메라, 뜻을 알아들을 수 없는 구조대원의 말, 화면 밖 누군가가 다정한 조바심을 담아 부르는 로시오의 이름, 기하학 안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새 이름.
마리나.
가로 지지대는 피로의 선으로 나타났다.
쓰러뜨려야 할 물체가 아니라, 아직 지나치게 많이 버티거나 이제는 충분히 버티지 못하는 것이었다.
리즈는 오래된 해법이 자기 안에서 치솟는 것을 느꼈다. 지지대를 붙잡는다. 무게로부터 떼어낸다. 공포에서 뽑아낸다.
맥박이 치솟았다.
모로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주 먼 곳에서 들렸다.
“경계.” 그가 말했다.
리즈는 여기 있다고 대답하려 했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소렐이 침대 가까이에서 말했다.
“무게를 남겨요.”
그 지시가 기이할 만큼 또렷하게 꿈을 가로질렀다.
무게를 남겨라.
리즈는 물러났다.
가로 지지대를 들어 올리지 않았다. 하중이 어디에서 나누어지기를 받아들이는지 찾았다. 그것은 하나의 지점이 아니었다. 지지보와 지주, 갈라진 바닥, 유압잭, 구조대원들의 팔 사이의 관계였다. 살아 있다고 알리기 위해 계속 관을 두드리는 마테오의 공포, 로시오의 분노, 루이스의 젊음, 마리나의 부재, 회사의 더러운 계산, 산이 무엇을 간직하는지 충분히 오래 생각하지 않은 채 캐내려 했던 구리 사이의 관계였다.
갈고리가 받아냈다.
아주 조금.
시연에 집착하던 옛 세계라면 너무 적다고 했을 것이다.
어쩌면 손들이 계속 움직이기에는 충분했다.
오렌의 작업장에서 타르디외가 무언가를 외쳤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광산에서는 노란 표시등이 고정되었다. 현지 구조대원이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그가 망설였다. 화면 속 오렌 기술자가 급히 배운 스페인어로 말했다.
“더는 안 됩니다. 이제 당신들 유압잭을 쓰세요.”
가로 지지대는 존재감을 잃지 않은 채 잔혹함의 일부만 잃었다. 유압잭들이 뒤를 이어 받쳤다. 암석이 신음했다. 누군가 기다리자고 했다. 다른 누군가는 부드럽게, 기다리면 안 된다고, 지금이라고 답했다. 먼지가 짐승처럼 움직였다.
그러다 갈고리가 버텼다.
고장 난 기계처럼이 아니라, 잘못된 자세를 거부하는 몸처럼.
타르디외의 화면에서 곡선이 뒷발로 일어섰다. 노란 표시등이 세 번 깜박였다. 현장 기술자가 중단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타르디외가 그렇다고 대답하려는 순간 가렉이 말을 가로챘다.
“잠깐.”
“안 됩니다.” 모로가 말했다.
“하중을 거부하는 게 아닙니다. 축을 거부하는 겁니다.”
꿈속에서 갈고리는 자신의 부재를 어디에 둘지 찾지 못했다. 주어진 것은 모두 거의 옳았지만, 그럼에도 틀렸다. 가로 지지대와 유압잭, 주 갱도, 이름이 확인된 세 사람. 형태는 도면이 인정하기 싫어하는 장소를 향해 계속 열려 있었다.
분필로 그린 원.
아주 멀리서 관을 두드리는 소리가 리즈에게 들렸다.
세 번.
침묵.
두 번.
프랑스의 방에서는 아직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곳에서 아나 리바스가 너무 빨리 말해 통역사가 그녀를 멈춰 세워야 했다. 뒤이어 작고 끔찍한 문장이 도착했다.
“마테오가 아니에요. 옛 갱도 쪽에서 들려요.”
보클레르가 말했다.
“작전 범위를 바꾸는 데 필요한 동의를 받지 못했습니다.”
켈라프가 대답했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죽게 내버려둘 동의도 받지 않았습니다.”
타르디외가 기술자에게 물었다.
“갈고리를 표식 쪽으로 이십 센티미터 옮길 수 있어요?”
대답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가능하지만 가로 지지대가 움직일 거라는 답이 왔다.
뒤이어 아나 리바스가, 갈고리가 계속 버텨주기만 한다면 아래쪽에 유압잭 하나를 더 넣을 수 있다고 말했다.
모로는 의료 모니터의 곡선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
“이 분 뒤에 중단합니다.”
“아직 안 돼요.” 소렐이 말했다.
그는 억눌린 격분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지 마십시오.”
“이제 같은 통로가 아니에요.”
“리즈도 더는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리즈에게 그들은 더 이상 사람의 목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목소리의 가장자리만이, 자신을 둘러싼 형태로 들렸다. 모로는 한계였다. 소렐은 정밀함이었다. 타르디외는 붙잡을 곳이었다. 켈라프는 사라지기를 거부하는 문이었다. 들로네는 복도에 있는 존재였다. 아주 멀리 있는 마리안은, 어쩌면 아직도 수프가 식어가는 부엌이었다.
그곳을 통해 경계를 되찾았다.
수프.
우스운 일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리즈는 눈을 떴다.
“내가 아니에요.”
모로가 다가왔다.
“뭐가요?”
그녀는 숨을 찾았다.
“끝내는 건 내가 아니에요.”
소렐이 먼저 이해했다.
“통로가 열리기 전에 연결을 끊어달라는 뜻이에요.”
작업장에서 타르디외가 외쳤다.
“리즈!”
“저들이 옮겨요.” 리즈가 말했다. “그다음 중단해요.”
목소리는 메마르고 상해 있었지만, 분명 그곳에 있었다.
기술자가 지시를 전달했다. 갱도에서는 여러 손이 갈고리를 분필 표식 쪽으로 밀었다. 현지 유압잭들이 항의하듯 삐걱거렸다. 암석이 더 낮은 소리를 냈다. 균열음이라기보다 목구멍 깊은 곳의 신음 같았다. 아나 리바스가 자기 말을 모두 듣고 싶어 하지는 않는 남자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카메라를 단 구조대원이 마리나를 불렀다.
갈고리가 두 번째로 받아냈다.
더 적게, 그보다 더 적게. 하지만 다른 곳에서.
공식 도면이 자신이 부정해온 갱도에 패배한 순간이었다.
모로가 연결을 끊었다.
끔찍한 몇 초가 흘렀다. 화면 속에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광산은 그녀 없이 계속 움직였다. 바로 그녀가 원했던 일이었다. 동시에 그녀의 몸이 가장 견디지 못하는 일이기도 했다. 더는 알 수 없다는 것.
이윽고 통신 장치가 치직거렸다.
첫 번째 통로가 열렸다고 스페인어 목소리가 말했다.
다른 목소리는 마테오가 보인다고 했다.
세 번째 목소리는 벽 뒤에 정말 누군가 있다고 외쳤다.
타르디외가 작업대 위에 두 주먹을 올려놓았다.
모로는 리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여기 있어요.”
“다시 말해요.”
그를 놀려주고 싶었지만 그럴 힘이 없었다.
“여기 있어요.”
광산은 그녀 없이 계속 움직였다.
그것이 가장 힘들었다.
마테오가 먼저 나왔다. 어깨가 빠지고 얼굴은 먼지로 잿빛이었다. 로시오는 갱도의 상태를 자신이 더 잘 이해했고, 그 이해 때문에 자신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며 루이스보다 먼저 나가기를 거부했다. 루이스는 가족도 아닌 구조대원의 품에서 울었다.
마리나는 같은 구멍으로 나오지 못했다.
옛 통로를 넓히고 관 하나를 절단했으며, 공식 도면에는 벽으로 막았다고 적힌 정비용 문을 떼어내야 했다. 그런 다음 갈고리를 가로 지지대에 끼인 채 남겨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영광에는 아무 쓸모도 없지만 이십칠 분 동안 없어서는 안 될 물건으로. 먼지 속에서 손 하나가 보였을 때 아나 리바스가 첫 메시지를 보냈다. 그 손이 끈을 움켜쥐었을 때 두 번째 메시지를 보냈다. 마리나 초케가 밖에서 숨을 쉬었을 때 세 번째 메시지를 보냈다. 계약서도 없고, 자기 이름이 적힌 헬멧도 없고, 그 어떤 명부에도 분류할 수 없는 진흙으로 얼굴을 뒤덮은 채였다.
그들 중 누구도 오렌을 보지 못했다. 그들이 본 것은 헬멧과 먼지, 노란 손잡이와 현지 사람들의 손, 자신들을 대신해 일을 해주지 않은 낯선 도구였다.
갈고리는 갱도에 남았다.
오십이 분 뒤에는 응답을 멈췄다.
타르디외는 고장이라고 했다.
소렐은 어쩌면 태생적인 한계일지 모른다고 했다.
모로는 그대로가 아주 좋다고 했다.
리즈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와셔
눈을 떴을 때 무언가가 사라져 있었다.
곧바로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방은 지나치게 평평한 백색광으로 가득했다. 간호사 한 명이 수액 주머니를 갈고 있었다. 모로는 의자에 앉아 입을 벌리고 턱을 떨군 채 자고 있었다. 마침내 피로에 패배한 남자의 가슴 아픈 무방비함을 드러낸 채. 소렐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책을 펼쳐놓았지만 읽지는 않았다.
“나왔어요?” 리즈가 물었다.
소렐이 책을 덮었다.
“네.”
“전부?”
물리학자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네 사람 모두 살아서 나왔어요.”
리즈는 바로 기뻐하지 못했다. 물이 들어찬 집 안으로 사람을 들이듯, 몸이 그 소식을 천천히 받아들였다.
“갈고리는요?”
“죽었거나 침묵했어요. 타르디외는 두 표현 다 싫어하지만.”
“그럼 뭐라고 해요?”
“추후 이해 가능성을 지닌 사용 불가 상태.”
리즈가 미소 지었다.
미소와 함께 통증이 돌아왔다. 그녀는 갈비뼈에 손을 얹었다.
모로가 즉시 깨어났다.
“아픕니까?”
“자고 있었잖아요.”
“수평으로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앉아서요.”
“트집 잡지 마십시오.”
그는 생체 수치와 눈, 손, 간단한 질문에 대한 반응을 확인했다. 이름, 장소, 날짜. 날짜까지는 힘들이지 않고 대답했다. 거기서 망설였다.
“아직 같은 날이에요?”
모로는 그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소렐이 시선을 내렸다.
리즈는 자기 안에서 오래된 반사를 찾았다. 잠든 채 멀리 떨어진 질량을 붙잡을 수 있는 가능성, 원할 때는 절대 열리지 않지만 늘 어딘가에서 느껴졌던 어둡고 고약하며 언제든 열릴 듯 요구해오던 문.
찾을 수 없었다.
형태는 아직 남아 있었다. 잔해들. 이미 지탱해본 물체들의 선, 모듈의 기억, 흔적들. 그러나 거대한 붙잡음은 더는 전과 같은 명료함으로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면 여전히 있었지만 그녀의 몸이 거기까지 가기를 거부하는지도 몰랐다. 차이는 분명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잃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상실이 그녀를 지켜주었는지도 모른다.
“전처럼 느껴지지 않아요.” 리즈가 말했다.
모로는 차트를 탁자 위에 놓았다.
“설명해보세요.”
“전에는 거부하고 있을 때도 내 일부가 다시 사물들 아래로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지금은 더 멀어요.”
“어떻게 멀다는 겁니까?”
“문을 다른 곳으로 옮겨버린 방처럼.”
소렐이 일어섰다.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어요.”
그녀가 그렇게 말한 것은 리즈에게 돌아올 가능성을 빼앗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얼굴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과학적 관심, 두려움, 존중, 거의 감춰진 슬픔. 거대한 이상현상은 어쩌면 다른 나이에 접어든 것인지도 몰랐다.
기름 얼룩이 묻은 작업복을 입고 타르디외가 들어왔다.
리즈의 상태를 묻지 않았다. 광산에서 보내온 첫 사진들이 담긴 태블릿을 침대 위에 놓았다. 먼지 속 갈고리, 그 둘레에 모인 장갑 낀 손들, 유압잭이 받치고 있는 가로 지지대, 그리고 주 갱도로 나온 마테오와 로시오, 루이스. 가족들을 배려해 얼굴은 흐리게 처리되어 있었다.
덜 선명한 다른 사진에는 마리나 초케가 바닥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깨에는 담요를 두르고, 입에는 너무 큰 산소마스크를 쓴 채였다. 화면 밖의 누군가를 온전한 분노로 바라보고 있었다.
“표지판을 찍어달라고 했대요.” 타르디외가 말했다.
“무슨 표지판?”
타르디외가 화면을 밀었다.
7층. 펌프 갱도.
그 옆으로 분필 원도 보였다.
“사진이 없으면 갱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거라더군요.”
리즈는 자기도 모르게 손끝으로 화면을 만졌다.
“옳았네요.”
“네.”
“갈고리는요?”
타르디외가 마지막 사진을 보여주었다. 노란 손잡이가 먼지와 금속 더미 밖으로 간신히 튀어나와 있었다. PC-01은 더 이상 도구처럼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거짓말하도록 내버려두기를 거부한 무게에 붙잡힌 사물 같았다.
“충분히 오래 버텼어요.” 타르디외가 말했다.
“네.”
“고전적인 모듈처럼 복종하지 않았고요.”
“그렇죠.”
“다른 사람들이 제대로 일하게 만들었어요.”
“그게 의도였어요.”
타르디외가 이를 악물었다.
“당신은 어쩌면 이 세기 최고의 기술 독점을 비뚤어진 도구 하나로 박살 낸 건지도 몰라요.”
“기분 상했어요?”
“당연하죠.”
그녀는 태블릿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안도했고요.”
그다음에는 켈라프가 들어왔다. 종이 세 장을 들고 있었다.
“짧은 보고서예요. 다른 사람들이 우리 대신 쓰기 전에.”
전부 읽지는 않았다. 필요한 문장만 읽었다. 네 사람의 이름, 현지 구조대의 역할, 전달받은 도면에서 빠져 있던 갱도, 이번 지원을 운영사에 대한 승인으로 소개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 명부에 관해 나데주가 제안한 문장.
마리나 초케의 이름은 다른 세 사람과 같은 위치에 적혀 있었다.
광산 회사는 한 시간 안에 이의를 제기했다.
미신고 갱도의 존재를 부인했다가, 곧 오래된 정비 구역이라고 규정했고, 그다음에는 마리나 초케가 들어가서는 안 될 구역에 침입했다고 설명했다. 그 세 가지 주장은 같은 날 아침 연달아 발표된 세 개의 보도자료로 퍼졌다. 나데주는 그것들을 인쇄해 작업장 벽에 나란히 꽂아두었다.
“거의 시예요.” 그녀가 말했다. “땀 흘리는 자들의 시.”
아홉 시에 보클레르가 전화했다.
“외교적 위기를 일으켰습니다.”
켈라프가 대답했다.
“아뇨. 이미 땅속에 있던 위기를 보이게 만든 겁니다.”
이번에는 프랑스가 모든 것을 되가져가지 못했다.
부분적으로 시도하기는 했다. 내부 문건들이 오갔고, 구조 협력이라는 표현 아래 사건을 다시 끌어들이려는 논리가 만들어졌으며, 프랑스의 수단이 개입을 용이하게 했다는 점을 명시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켈라프는 ‘용이하게 했다’를 지웠다. 타르디외는 ‘수단’을 지웠다. 결국 세귀르가 직접, 아무도 우아하다고 여기지 않은 문장을 썼다.
“프랑스는 운송을 가능하게 했다. 오렌은 조건을 규정했다. 현지 구조대가 사람들을 구출했다.”
“무거운 문장이군요.” 마송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세귀르가 답했다. “그게 바로 핵심이니까요.”
삼 주 뒤, 오렌은 브레스트의 오래된 격납고에서 첫 공동 몫 교육을 열었다.
부유 영토도 아니고, 유리벽으로 된 회의실도 아니며, 카메라 앞도 아니었다.
소방대원과 항만 직원들, 수술실 간호사 두 명, 병원 기술자 한 명, 오렌 기술자 세 명이 갈고리 시제품 여섯 개를 둘러싸고 모였다.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안내문 맨 위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구조 보조용. 독자적 인양 불가.’
리즈는 봄인데도 무릎에 담요를 덮고 의자에 앉아 교육을 참관했다. 갈고리에는 손대지 않았다. 자신이 요구한 규칙이었고, 벌써부터 그 규칙이 싫었다.
한 소방대원이 시험용 콘크리트 슬래브를 들면서 바닥에 너무 적은 무게만 남겼다. 갈고리가 떨리더니 정지했다.
“지나치게 순수해요.” 타르디외가 말했다. “손안에서 무게가 사라지기를 바라잖아요. 나쁜 반사입니다. 계속 무거워야 해요.”
“얼마나요?”
“당신이 계속 책임을 져야 할 만큼.”
리즈는 거대한 붙잡음을 되찾지 못했다. 완전히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일했다. 설계도를 다시 읽고, 설명서를 고치고, 시험에 참관하며, 모듈이 쓸모없을 만큼 고결해지는 지점을 짚어냈다. 전보다 많이 잤다. 여전히 제대로 자지는 못했지만, 더 많이.
때로는 아무 쓸모도 없이 욕망이 돌아왔다. 약속도 아니고, 나머지를 수선해줄 새로운 이야기의 발단도 아니었다. 잠에서 깰 때 스치는 짧은 열기, 항구에서 마주친 연인들을 향한 터무니없는 질투, 어깨까지 차올랐다가 사라지는 하산의 기억. 그의 전화번호는 지우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연락처를 열었다가 전화하지 않고 닫았다. 그가 와서 자신을 구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저 그런 가능성이 가능성으로 남아 있기를 바랐다. 이 체계 바깥, 그래프와 서명된 협정 바깥 어딘가에.
코르디예라산맥에서 외교행낭을 통해 봉투 하나가 도착했다. 누구도 그보다 간단한 분류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봉투 안에는 네 가지가 들어 있었다. 7층 표지판 사진, 스페인어 문장이 적힌 모눈종이 한 장, 비닐에 싼 작은 분필 조각, 그리고 더러운 금속 와셔 하나. 타르디외는 리즈가 살펴보기도 전에 당장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 돼요.” 리즈가 말했다.
타르디외는 따랐다. 그 와셔가 벌써 상당한 권위를 얻었다는 증거였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마리나 초케였다.
통역사는 아주 간결한 프랑스어로 번역해두었다. 마리나는 구조대원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마테오와 로시오, 루이스, 아나 리바스의 이름을 언급한 뒤, 아첨 한마디 없이 맨 마지막에 오렌을 적었다. 회사는 사고가 있었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자신의 노동은 아직 인정하지 않았다고 썼다. 여동생이 신문 기사를 모아두었다고 했다. 무엇을 보내야 할지 몰라서 옛 갱도를 표시했던 분필과, 갈고리가 멈춘 뒤에도 버텨준 유압잭에서 떨어진 와셔를 집어 들었다고 했다.
마지막 문장이 가장 짧았다.
“그들 명부에 따르면 나는 아직도 내려간 적이 없습니다.”
리즈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작업장 안의 누구도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다 나데주가 말했다.
“바로 이거네요. 기적이 끝나는 곳.”
켈라프는 번역문을 받아 들고, 보고서의 부록으로 첨부해도 되는지 허락을 구했다. 그러고는 무엇보다 먼저 마리나에게 속한 일을 법률가처럼 물은 것에 대해 사과했다. 리즈는 그녀가 사과한 것이 좋았다. 그럼에도 질문 자체는 끝내 던진 것도 좋았다.
마리나의 편지는 작업장 안의 무언가를 옮겨놓았다. 몸은 구조되고도 공식 문장 안에서는 여전히 부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그날 저녁 리즈는 잔에게 전화했다. 시연도 전략도 요구하지 않을 사람이 필요했다.
잔은 이틀 뒤 브레스트로 왔다.
오렌에는 올라가지 않겠다고 했다.
“네 나라는 기다리라고 해. 나는 내 딸을 보러 가는 거니까.”
잔은 항구 근처의 평범한 방에 자리 잡았다. 마리안은 케이크를 가져왔다. 들로네는 가족의 문을 국경처럼 지키는 사람 특유의 신중함으로 밖에 서 있었다. 리즈는 시제품 하나가 콘크리트 팔레트 위에서 꼼짝도 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늦게 도착했다.
잔은 들어오는 리즈를 바라보았다.
한순간.
그것으로 충분했다.
“살 빠졌구나.”
“안녕, 엄마.”
“그래, 너도 안녕.”
둘은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잔에게서는 세탁 세제 냄새와 기차의 냉기가 났다. 리즈는 어머니의 외투와 손, 의자 위에 놓인 가방이 지닌 단단함에 새삼 놀랐다. 누구도 없앨 생각을 하지 않는 무게가 그 모든 것에 있었다. 좋은 무게. 한 사람이 찾아와 앉아 있고, 잠시 머문다는 것을 말해주는 무게.
마리안이 커피를 내왔다.
잔은 갈고리를 보여달라고 하지 않았다. 리즈가 아직도 물건을 떠오르게 할 수 있는지도 묻지 않았다. 잠은 자는지, 밥은 먹는지, 누군가 침대보를 제대로 세탁해주는지, 오렌의 수프도 병원 식판만큼 우울한지를 물었다. 리즈는 대답했다. 언제나 솔직하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냅킨으로 목을 조르지 않을 만큼은 솔직했다.
그러다 잔이 말했다.
“뉴스에서 광산의 그 젊은 여자를 봤어.”
“마리나.”
“그래. 몹시 화가 나 보이더라.”
“화날 만해.”
“구조된 사람처럼만 보이는 것보다는 낫지.”
리즈가 웃었다.
잔은 커피를 저었다.
“네 얘기는 많이 하지 않더구나.”
“잘됐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러고는 서운해졌지.”
“그래도 돼.”
“엄마라는 건 참 바보 같아. 자기 딸을 가만히 내버려두기를 바라면서도, 그 애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온 세상이 알았으면 하거든.”
“내가 한 게 아니야.”
“장관 같은 말투로 시작하지 마.”
마리안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고맙습니다.”
잔이 말을 이었다.
“내 말은, 너만 한 일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아. 그래도 ‘너만’이 아니라는 말속으로 너까지 사라지지는 마.”
그 말이 두 사람 사이에 남았다.
리즈는 반박하지 않고 입안에 문장을 머금었다. 잔은 수많은 문서보다 더 정확한 곳을 짚었다. 공동 몫의 대가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결백한 사람이 될 때까지 자신을 지워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무언가를 열었다. 그에 대한 책임은 져야 했다. 하지만 책임진다는 것은 자신을 내주는 일이 아니었다.
커피를 마신 뒤 두 사람은 부두를 걸었다.
정박지는 회색이고 넓었다. 배와 기중기, 낮게 내려앉은 구름과, 사람들이 손질하기 때문에 버티는 것들로 가득했다. 멀리서 오렌은 보이지 않았다. 건물의 각도 뒤에 숨어 있거나, 어쩌면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리즈는 그편이 좋았다.
주머니에는 마리나의 와셔를 넣어두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화물선 한 척이 천천히 항구 출구로 나아갔다.
잔이 물었다.
“저건 아직도 보통 배처럼 뜨는 거지?”
“응.”
“다행이다. 평범한 것들도 남겨둬야 해.”
두 사람은 서두르지 않고 걸었다. 조금 뒤에서는 마리안이 전화하고 있었다. 말투로 보아 상대는 나데주인 듯했다. 들로네는 더 멀리서 따라왔다. 한 남자가 작은 배 옆에서 그물을 수선했다. 여자는 상자들을 정리했다. 아이는 바람에 날아가는 모자를 쫓아 달렸다. 그 무엇도 존재하기 위해 오렌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 무엇도 오렌에 비해 보잘것없지 않았다.
리즈는 녹슨 계선주 옆에 멈췄다.
그 위에 손을 얹었다.
금속은 차가웠다. 무거웠다. 아무 신비도 없었다.
그 아래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유혹이 찾아왔다. 희미하고 거의 예의 바르게. 그러고는 지나갔다.
주머니 속 와셔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벅지를 건드렸다. 더럽고 작으며 쓸모없는 무게. 명부상으로는 여전히 내려간 적 없는 여자와 함께 돌아온 무게.
잔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니?”
리즈는 금속 위에 손을 둔 채 말했다.
“응.”
그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지지 않은 것은 처음이었다.
세계를 붙들고 있는 것은 오렌도, 프랑스도 아니었다. 한 여자도, 조항도, 모듈도, 꿈도, 물 위에 세워진 신생국가도 아니었다.
세계는 군데군데 버티고 있었다.
완전히 놓아버리기를 거부하는 손들로.
마지막 일 그램까지 없애지 않은 무게들로.
명부가 떨어뜨린 이름을 문장 안에 다시 넣는 일로.
돌아오는 법을 아는 사람들로.
와셔가 주머니 안쪽 솔기에 부딪혔다.
리즈는 마리나의 문장을 생각했다.
그들 명부에 따르면 나는 아직도 내려간 적이 없습니다.
다시 읽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문장은 와셔와 함께 주머니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갈고리와 함께 격납고 안으로, 잔의 부엌으로, 미레유가 훗날 잘못된 항목 아래 분류했다가도 결국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요청들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들어 올림은 결코 끝이 아니라고 말하는 문장이었다. 누군가는 바깥에서 숨을 쉬고도, 명부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땅속에 남을 수 있다고 말하는 문장이었다.
리즈는 다시 걸었다.
뒤에서 계선주는 제자리에 남았다.
주머니 속 와셔는 그녀와 함께 나아갔다.
그것은 올라가게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기록해달라고 요구했다.
원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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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b San이 만든 ‘roman-son’ RomanSon — 정의와 《Résonance》를 살펴보세요.
목차
- 제1장 — 주철 추
- 제2장 — 빈 아파트
- 제3장 — 대조 시험의 화요일
- 제4장 — 봉인
- 제5장 — 클레르 타르디외
- 제6장 — 파일
- 제7장 — 당분간, 브레스트
- 제8장 — 관객 없는 증명
- 제9장 — 도덕적 계약
- 제10장 — 첫 번째 위반
- 제11장 — 죽은 복제품들
- 제12장 — 조직된 잠
- 제13장 — 판의 중심에 선 프랑스
- 제14장 — 세계가 형태를 바꾸다
- 제15장 — 리즈의 몸
- 제16장 — 불가능한 분리
- 제17장 — 땅 없는 영토
- 제18장 — 브레스트 조약
- 제19장 — 희소한 시민권
- 제20장 — 최고의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
- 제21장 — 프랑스라는 거울
- 제22장 — 완벽한 부당함
- 제23장 — 프랑스의 시험
- 제24장 — 세계를 붙드는 것
- 제25장 — 들어 올림의 대가